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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0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루카 19,11ㄴ-28
감사 한 미나를 열 미나로 늘리는 법
오늘 복음은 ‘미나이 비유’(루카19,11-28)입니다.
한 미나는 100데나리온, 약 1000만 원 정도의
가치입니다.
주인은 열 명의 종에게 한 미나씩 주며 벌이를 하라고 시키고 왕권을 받기 위해 멀리 있는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주인을 싫어하여 그가 왕이 되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당연히 주인의 돈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입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번 종이 있는가 하면 한 미나를 그대로 돌려주는 종이 있었습니다.
그 종은 임금이 되어 돌아온 주인에게 이렇게 핑계를 댑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이 사람은 주인이 왕이 되는 것을 방해한 이들과 함께 엄벌에 처해집니다.
이 사람의 한 미나는 열 미나를 번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졌다고 믿는 것마저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주님을 임금으로 모시기 위해 벌어야 하는 ‘미나’는 무엇일까요?
바로 ‘감사의 마음’입니다.
감사의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이 나의 임금이 되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을 창조하신 분께 감사의 마음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까지 바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오늘 한 미나 그대로 주인에게 내어준 종과 같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코로나 백신을 맞으면 그 백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픔도 따릅니다.
맞는 사람도 있고 맞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맞는 사람은 그것에 대한 ‘감사’가 있어서 그 백신을 나를 지배하게 만듭니다.
내가 감사하지 않는 것을 누구도 스스로 내 안에 넣어 나에게 영향을 주게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도 내 안으로 들어와서 나를 지배하려 하십니다.
내 안으로 들어오는 어떤 것이든 내가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내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습니다.
주님은 성체로 내 안에 오십니다.
내가 성체에 감사하지 못하면 나는 성체를 영해도
그분을 들여보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유일하게 가져야 하는 한 가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마치 백신을 맞아서 좋은 점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처럼 감사를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선 감사의 마음은 ‘한 미나’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 한 미나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마중물과 같은 감사 거리입니다.
마중물이 없으면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하여 죽고 맙니다.
장사 밑천을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감사의 시작은 한 미나인데, 이 한 미나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희생인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감사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일본에서 가장 하느님을 많이 알렸다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전신 마비 환자였던 미즈노 겐조(1937-1984)입니다.
그는 4학년 때 이질에 걸려 눈과 귀 이외에 온몸의 기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기를 원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죽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목사가 겐조의 집에 빵을 사러 왔다가 겐조의 사정을 알게 되어 그에게 성경을
한 권 주고 갑니다.
겐조는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경을 읽었고 자신이 살아야 하는 존재 이유를 깨닫습니다.
겐조는 12세 때 하느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입니다.
겐조는 18세가 되던 해 시를 쓰기로 합니다.
어머니가 자음과 모음으로 된 50글자로 된 일본 문자판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갈 때 눈을 깜빡이면 그 글자들을 이어 시를 탄생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네 편의 시집을 냈습니다.
그의 ‘그렇지 않았더라면’이란 시는 그가 괴로움을 묵상하며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내용이 나옵니다.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느님의 사랑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느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그가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 신앙인의 모습은 어떤지 살펴볼까요?
어머니를 잃은 나를 위해 울지 마세요
더 이상 울지 마세요
마음속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합니다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함께 하시기 때문이겠죠
나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내가 묵상할 거리입니다.
겐조는 어머니의 죽음도 하느님의 현존을 더 깊이 깨닫는 순간으로 인식했습니다.
이것이 묵상기도가 주는 열매입니다.
모든 것은 감사로 바뀝니다.
또 이분이 하느님의 음성을 얼마나 갈망했는지도 ‘말씀’이라는 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
오늘도 말씀해주세요
단 한 마디뿐이어도 좋습니다
내 마음은 작아서
많이 주셔도 넘쳐버려
아까우니까요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위해 시를 쓰기로 하게 된 이유를 ‘잊기 전에’란 시로 짐작해볼 수 있겠습니다.
잊기 전에
지금 들은 것
보인 것
마음에 느낀 것
잊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주의 아름다운 은혜를
찬양하는 시를 만들자
묵상하는 자는 감사가 솟고 그 감사를 통해 주님을 받아들입니다.
그 받아들인 주님 때문에 자기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은총으로 인식하고 감사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말씀을 이웃들에게 전하며 그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라도 표현하여 주님께 보답하려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한 미나만 받았다고 그것에만 감사를 묻어둘 수 있겠습니까?
그다음 방법은 다섯 미나를 열 미나로 늘리는 방법입니다.
‘무조건 감사하는 습관 기르기’입니다.
오프라 윈프리의 ‘감사일기 쓰기’와 같은 예입니다.
인간의 머리는 인간의 의지를 따릅니다. 의지적으로 감사하려고 한다면 머리는 왜 감사해야 하는지 묵상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묵상을 하지 않았기에 감사를 잃은 것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할 거리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못하고 십일조도 감사하게 하지 못한다면 선악과를 바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하느님도 잃고 하느님 나라도 잃고 카인과 같은 사람으로 변합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처음엔 사생아로 태어나 폭행과 마약 등으로 감옥을 드나드는 카인과 같은
인생을 살다가 매일 감사일기를 쓰며 인생을 바꿨습니다.
당시 저희 어머니가 나병 환자들을 보며 감사를 묵상했다면 예수님께서 어머니 품으로 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사를 준비한 이에게 들어오셔서 당신 나라로 삼으십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순종하지도 않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열 미나를 번 종은 열 고을을 다스리게 되었고 다른 종의 한 미나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임금으로 내 안에 모시기 위해 내가 준비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 ‘감사의 마음’임을 잊지 말고 쉼 없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나에게 주어진 감사한 것들을 찾아내어 성령으로 이성을 길들여야 합니다.
하루에 50번 정도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짧은 기도를 바칩시다.
그러면 뇌가 묵상기도 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정돈됩니다.
그리고 하나의 감사가 열로 늘어난 것을 신기하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0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19,11-28
주님께서 그대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자주 지난 삶의 순간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때로 주님 앞에 송구스러운 부끄럽고 초라한 인생이라는 자괴감이 들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제 인생 여정 안에 스스로도 놀랄만한 반전과 성장도 있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가끔 신학교에서 동고동락했던 신부님들을 30년 40년 만에 만날 때가 있는데, 너무나 변해버린 제 모습에 화들짝 놀라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젊은 시절 저는 마치 꿔다 논 보리 자루 마냥 존재감이 단 일도없이 지냈습니다.
누가 말을 붙여도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할 정도로 지극히 소심하고 내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늘 여기저기 아프고 비실비실하다 보니 관계 안에서나 공동체 안에서도 영향력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완전 바뀌어버렸습니다.
약장수 저리 가라할정도로 말빨도 쎄졌습니다.
나이가 들었지만, 그 어떤 장애물도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과 적극성으로 똘똘 무장하고 있습니다.
제게 주어진 재능이라고는 쥐뿔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많았습니다.
비록 늦게 발견했지만, 죽기 살기로 계발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해보니, 부족하지만 참 좋은 결과물들을 얻었습니다.
사실 한 인간 존재가 환골탈태한다든지 개과천선한다는 것 벼락 맞는 일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원판을 완전히 바뀌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오는 은총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만히 되돌아보니 주님께서 큰 은총과 자비를 제게 베푸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다양한 유형의 고통과 시련, 셀 수도 없이 잦았던 바닥체험, 굽이굽이 지난했던
우여곡절을 겪게 하심으로 저를 부단히 거듭나게 하시고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눈물나게 감사한 고통의 신비입니다.
우리네 삶이라는 것, 한결같이 변함없는 것도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게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의미의 한결같음이 아니라면 진지하고 심각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와 흡사한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열매 맺는 삶, 성장하는 삶의 소중함을 강조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의 선물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데, 우리는 그것들을 얼마나 귀히 여기고, 더 성장시키고, 주님과 이웃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고 있는지
잘 한번 살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강론>
(2024. 11. 20. 수)(루카 19,11ㄴ-28)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루카 19,20-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19,26).”
1) 루카복음의 ‘미나의 비유’는 마태오복음의
‘탈렌트의 비유’와 같은 비유이고, 같은 가르침입니다.
‘미나’(탈렌트)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의 은총’이고, 미나를 활용해서 더 많은 미나를 벌어들이는 것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받는 것을 뜻합니다.
세 번째 종의 죄는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죄’,
또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 라는 말에서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가 연상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부자는 라자로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큰 죄’입니다.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말과 ‘개들까지 와서’ 라는 말은, 그 부자가 오며가며, 마치 개들에게 던져 주듯이 라자로에게 음식 부스러기를 던져 주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고,
라자로를 모욕한 일이기도 합니다.
부자 자신은 “나는 라자로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나는 최선을 다 했다.”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위선자들의 모습입니다.
누가 보아도 선행이 아닌데, 자기 혼자서만 선행을 실천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선이고, 어리석음이고, 교만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 자체가 죄입니다.
2) 루카복음 10장에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루카 10,31-32).
그것도 분명히 ‘큰 죄’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나는 강도짓에 가담하지 않았다.
나는 강도당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다.” 라고
변명할지도 모릅니다.
악한 짓에 가담하지 않는 것은 잘하는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악을 막거나 물리치고, 적극적으로 선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잘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실천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3) ‘주인님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세 번째 종의 변명은 글자 그대로 어설픈 변명일 뿐입니다.
그리고 “잘못한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다.” 라고
주인을 비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유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도 아니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도 아닙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고 싶어도 두려워서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귀찮고 힘들고 재미없는 일은 ‘하기 싫어서
안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서 못하는 것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두려워서 못하는 경우에는 정상참작의 가능성이 있지만,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4) ‘탈렌트의 비유’를 보면, 세 번째 종을 ‘쓸모없는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마태 25,30).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나
하느님을 위해서나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소금’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결과를 요구하시지 않고, 최선을 다 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결과보다 과정이, 즉 얼마나 노력했느냐가 중요한 생활입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구원’이라는 큰 은총을 받게 되고”이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처음에 받은 은총마저 모두 잃게 될 것이다.”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