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언젠가는 혼자가 된다.
박래여
단풍은 우리 집 주변을 온통 감싸더니 바람의 힘에 밀려 가랑잎을 떨어뜨린다. 푸른 것은 마당가의 대나무와 소나무, 차나무, 사철나무다. 노랗게 떨어져 누운 은행잎을 차나무 울타리 밑으로 쓸어 넣는다. 폭 삭아 거름되면 한해살이 알차지 않겠느냐고 중얼거렸다. 구린내 나는 은행은 주워서 함지에 담는다. 농부는 일을 삼고 은행을 주워 삭혀서 깨끗하게 갈무리해 말린다. 저녁마다 일곱 알정도 구워서 내민다. 심장병 앓는 아내를 위한 배려다.
내 친구 순이는 뇌수술 후 경과가 안 좋아 몇 달간 중환자실에 있다가 요양재활 병원으로 옮겼단다. 올 여름 만남과 대화가 마지막이 될 것 같아 마음이 아리다. 아직 젊은데. 손자손녀 재롱 보며 느긋하게 노후를 즐길 나인데. 뇌수술 후유증으로 말문을 닫았다. 안타깝기만 하다. 살아있어도 산 것 같지 않은 세월을 사는 사람이 어찌 순이 뿐일까 마는 내 오랜 벗이니 남의 일 같지 않다. 두 어른 돌아가시고 허전한 자리는 아직 여전하기에 죽음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언젠간 죽을 테지.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기에 아등바등 살려고 하는 것이리라.
그는 명상센터에 가기 위해 집안 단속을 한다. 나는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아내인지 딸에게 아내를 부탁한다. ‘지 인생 살도록 놔두라. 나 혼자 잘 먹고 잘 지낼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소.’ 그런다고 내 말을 들을 사람도 아니다. 그냥 하는 대로 두고 볼 수밖에. 집안의 가장으로서 집을 비우는 일이 쉽지 않은 결정인가 보다. 두 어른 계실 때는 두 어른이 발목을 잡아 집 떠나기 힘들었고, 두 어른이 소천하신 지금은 아내가 또 걸림돌이다. ‘사람은 제 복만큼 산다요. 그냥 편하게 댕겨 오소.’ 그런다고 달라질까.
길 떠나기 전에 다툼이 있었다. 문중일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지나간 일에 열 받아버렸다. 형제자매들 이야기가 나오자 내 말이 곱지 않다. ‘당신이 막말을 하는 바람에 산통 다 깨졌다.’는 그에게 따졌다. 당신 형제자매들 하는 행위가 옳았느냐고. 사십여 년을 시부모 모시며 고생한 나는 속이 곪아 터져도 참아야 했느냐고. 왜 내가 죄인취급 당해야 했느냐고. 당신은 그동안 뭘 했느냐고. 당신 형제들만 소중하지 같이 사는 나를 고마워한 적 있느냐고. 나도 맺힌 게 많다. 겨우 가라앉힌 물을 다시 헤집어 구정물로 만든 사람이 누구냐고 따졌다.
당신이 그렇게 억울하면 헤어지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그것이 막말이다. 내가 여태 고생하고 왜 손해 볼 짓을 하느냐고 대꾸했다. 꼴 보기 싫으면 당신이 나가라고 큰소리 쳤다. 부부가 사십여 년을 함께 희로애락을 겪어왔으니 이젠 다 내려놓고 부부가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살아갈 일만 남았다. 과거지사 들먹인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 현실이다. 형제자매가 내 인생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 도움 주는 것도 아니란 사실을 잘 알지 않느냐고. 부모 살았을 적에 형제자매지 부모 돌아가시면 남이라고 여태 하는 꼴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고 다그쳤다.
마침 언니가 점심 사주러 온단다. ‘당신하고 나하고 싸워봤자 소득도 없으니 탕 치고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그렇게 한우 촌에 들러 언니를 만나고 언니가 사 주는 밥을 먹었다. 언니에게 단감 한 박스 선물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언니에게 남편이랑 한바탕 했다고 말했다. ‘저래 강직한 사람은 오래 못 산다. 네가 속이 썩어도 참아라. 다음에 너도 혼자되면 우리 둘이 살자.’ 언니가 웃으면서 달래준다. ‘언니, 친정 식구들 명도 길지 않아. 우리가 팔십까지 살까? 저 사람은 오래 살 거야. 내가 먼저 죽지.’ 너스레 풀며 웃었다.
언니랑 수다를 더 떨고 싶었지만 그는 빨리 가잔다. 짐 챙겨 집 떠날 시간이 빠듯하다. 그의 꼬장꼬장한 성격도 명상 덕에 많이 너그러워졌지만 타고난 성품은 변하기 어렵다. 알아채기만 해도 마음공부 덕이다. 그는 자신이 덥던 이불과 베개까지 챙겨 간다.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못 자는 예민한 사람이다. 물도 음식도 바뀌면 금세 탈이 나는 사람이다. 물도 챙겼다. 빵빵하게 챙긴 트렁크와 이불을 트럭에 싣고 ‘잘 사소.’ 안 돌아올 것처럼 인사를 하고 떠난다. ‘잘 지내다 오소.’ 나는 선선히 배웅을 했다.
둘이 있으나 혼자 있으나 내게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수영장 갔다가 집에 와 군불 때고 밥 말아먹고 인터넷으로 영화보고 책 보다 잠자리에 든다. 옆자리가 허전해야 하는데 편하고 좋은 게 달라졌다. 나도 혼자 살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남편도 혼자 살 준비를 하기 위해 명상센터를 오가는 것인지 모른다. 사람은 언젠가는 혼자된다. 혼자되었을 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도록 단련하는 것도 본인이 해야 할 일이다. 투병중인 순이가 보고 싶다. 얼마나 힘들까. 어쩌면 다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을지 모른다. 재활이 성공해서 가족 품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