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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 여행을 하고 12월 6일 귀국한 뒤에도 게을러 미처 쓰지 못했던 부고 기사들을 정리해 본다. 12월 29일(현지시간) 땅콩 농장 주인에서 미국 대통령으로 일세를 풍미한 지미 카터가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제주항공 참사로 과거만큼 조명되지 못할 것 같다. 카터 전 대통령은 너무나 많은 매체가 다룰 것 같아 내가 따로 쓰지는 않을 것 같다.
영국 인기 팝 밴드 '원 디렉션' 멤버 리암 페인이 10월 16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호텔 3층 발코니에서 추락 사망했다. 서른한 살 안타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진 데다 약물 남용이 원인으로 지목돼 많은 영국인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열여섯 살이던 2010년 영국 오디션 프로그램 '엑스 팩터' 시즌7에 출연해 처음 이름을 알린 고인은 그 뒤 함께 출연한 해리 스타일스, 루이 톰린슨, 니얼 호란, 제인 말리크와 함께 원 디렉션을 결성해 이듬해 정식 데뷔했다. 원 디렉션은 다수의 히트곡을 발표하며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지만 2015년 활동을 중단했다. 리암 페인은 2019년 솔로로 데뷔해 활동을 이어왔다.
경찰은 페인이 묵은 방 안에서 안정제인 클로나제팜, 라이터, 위스키, 의약품 용기 등을 수거했다. 클로나제팜은 발작·공황장애 치료에 쓰이는 약물로 의존성과 오남용 위험 탓에 향정신성 의약품으로 취급된다.
아르헨티나 검찰은 11월 7일 보도자료를 내고 "부검 결과 페인은 사망 직전 또는 적어도 사망하기 72시간 안에 코카인 및 처방 받은 항우울제를 다량 복용한 것으로 파악됐다"며 "구체적인 사인은 과다 출혈에 따른 다발성 장기부전"이라고 밝혔다. 이어 "어떤 종류의 자해 또는 제삼자의 물리적 개입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법의학적 소견이 나왔다"며 "페인은 추락 당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반사적 자세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당시 의식을 완전히 잃었거나 거의 잃은 상태였음을 추론하게 한다"고 전했다.
페인의 시신은 유족의 요청에 따라 영국으로 옮겨져 11월 20일 영국 버킹엄셔주 아머샴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해리 스타일스, 니얼 호란, 제인 말릭, 루이 톰린슨이 모두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멤버들은 모두 검은색 옷을 입고 어두운 표정으로 장례식에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포착됐다. 여자친구였던 케이트 캐시디와 아들 베어의 어머니인 셰릴 콜도 참석했으며, '엑스 팩터' 심사위원 사이먼 코웰과 제임스 코든도 함께 했다.
'해방신학'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알려진 페루 출신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가 지난 22일 밤 96세로 선종했다고 바르톨로메 데라스 카사스 연구소(Instituto Bartolome de las Casas)가 엑스(X·옛 트위터) 계정을 통해 다음날 밝혔다. 이 연구소는 구티에레스 신부가 1974년에 설립한 비영리 시민단체다.
1928년 페루 수도 리마에서 태어난 구티에레스 신부는 서른한 살 때 사제 서품을 받았다.그는 가톨릭 신앙을 빈곤 퇴치와 연계한 신학적 접근 방식으로 중남미에서 영향력 있는 종교인으로 평가 받았다. 특히 1971년에 펴낸 저서 '해방신학'으로 구티에레스 신부는 '해방신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남미에서 태동해 크게 유행한 해방신학은 사회·경제적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에서 2011년 배포한 '미디어 종사자를 위한 천주교 용어·자료집'에 따르면 해방신학은 인간의 모든 억압과 수탈에서 인간을 해방할 것을 주장하는 신학이라고 설명돼 있다. 선진 자본주의에 종속돼 불이익을 강요당하는 후진국의 경제적 불평등 해소나 인종과 성별 사이에 있는 억압과 지배 상태 해소 등에 힘쓴다는 것이 주요 지향점이다.
페루 일간 엘코메르시오는 "구티에레스 신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에 초점을 맞춰 신학의 개념을 넓히는 변혁적 운동을 일으켰다"며 "전 세계 대학과 기관에서 30개 이상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며, 관련 분야에 지울 수 없는 유산을 남겼다"고 전했다.
다만, 보수적인 분위기의 교계에서 해방신학은 비판의 대상이 됐다. 특히 훗날 교황 베네딕토 16세로 즉위한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해방신학을 마르크시즘이라고 성토한 일이 있다.
바티칸과 구티에레스 신부의 냉랭했던 관계는 동료 라틴 아메리카인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가 교황이 된 후 다소 풀렸다. 구티에레스 신부는 2018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에 대해 발언한 것을 찬양했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은 구티에레스 신부의 90회 생일을 맞아 "당신의 신학적 서비스를 통해 교회와 인류애에 기여한 것과 가난하며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사랑에 대해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1960년대 TV 드라마 '타잔'에 주인공으로 나온 미국 배우 론 엘리가 9월 29일 캘리포니아주 샌타바버라의 로스 앨러모스 자택에서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소식이 10월 22일에야 뒤늦게 알려졌다. 향년 86.
이 드라마가 방영된 것은 1966년부터 1968년까지 NBC 방송에서였는데 그는 동물들의 습격을 받는 장면을 촬영하다 많은 뼈를 부러뜨리는 부상을 당했다. 1980년대에는 크루즈 유람선에서 일어난 일들을 코믹하게 그린 '사랑의 유람선'(The Love Boat)과 린다 카터 주연의 '원더 우먼'에 얼굴을 내밀었다. 2001년 연기 활동을 은퇴한 뒤 작가로 변신, 미스터리 소설을 두 권 냈다.
엘리는 연기자로 복귀, 2014년 TV 영화 'Expecting Amish'에서 아미시 노인을 연기했다.
1938년 텍사스주에서 태어난 그는 고교 시절 첫사랑과 1959년 결혼했다가 2년 뒤 이혼했다. 그는 1980년대 초반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 사회자로도 얼굴을 알렸는데 당시 만난 발레리 룬딘과 두 번째 결혼을 해 세 자녀를 뒀다. 룬딘은 62세이던 2019년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들 카메론에게 흉기에 찔려 세상을 떠났으며, 카메론 역시 출동한 경관의 총에 사살됐다.
론 엘리는 공권력이 남용됐다고 소송을 제기했지만 재판부는 경관들의 정당방위를 인정했다.
베이스 연주자로 미국의 전설적인 사이키델릭 록 밴드 '그레이트풀 데드'(The Grateful Dead)의 공동 창립 멤버인 필 레시가 10월 26일 아침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향년 84.
1965년 캘리포니아에서 결성된 이 밴드는 30년을 활동하다 리더인 제리 가르시아가 세상을 등지자 해체했다. 레시는 창립 멤버 가운데 한 명이면서 생존 멤버들과 함께 2003년 재결합 미국 투어를 조직했고, 2015년 마지막 콘서트 시리즈를 소화했다.
록과 포크, 재즈를 넘나든 그레이트풀 데드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밴드로 손꼽히며 1960년대 카운터컬처 세대의 사운드트랙을 썼다는 평가를 들었다고 영국 BBC는 전했다.
고인은 1940년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태어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다 나중에 트럼펫으로 바꿨다가 다시 베이스 기타를 잡은 뒤 1965년 결성된 밴드에 합류했다. 그의 즉흥 연주 기법은 리드 기타리스트 제리 가르시아와 밥 웨이어, 빌 크로이츠먼, 론 픽펜 맥커넌 등의 멜로디를 떠받쳤다. 그가 만든 곡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Unbroken Chain'으로 관중과 밴드가 호흡을 맞추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울러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작곡한 'Box Of Rain'를 직접 부르기도 했다.
'Deadheads'로 통한 그레이드풀 데드의 팬들은 충성심 강하기로 유명해 미국 이곳 저곳을 따라 다니며 공연을 관람했고, 밴드는 이를 녹음해 레코드로 제작했으며, 팬들은 테이프에 담아 세계 곳곳에 배포했다.
이런 열광적인 인기에도 이 밴드는 미국 차트 톱 10 안에 단 한 곡, 'Touch of Grey'(1987)뿐이었다.
레시의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몇 년 동안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에 그는 고환암 치료를 미국에서 받고 있다고 밝혔다. 2006년에는 전립선 암 수술을 받아 회복됐다고 발표했다. 1998년 간 이식을 받은 뒤 장기 기증 캠페인을 열정적으로 펼쳤다. 고인은 아내 질과 두 아들을 유족으로 남겼다.
미국 팝 음악계의 거장 퀸시 존스가 11월 3일 밤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등졌다. 향년 91.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존스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다재다능한 음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 영화·TV 프로그램 제작자로 평가된다. 특히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명반으로 꼽히는 '오프 더 월'(Off The Wall) '스릴러'(Thriller) '배드'(Bad) 등을 프로듀싱했다. 아프리카 구호를 위한 노래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가 포함된 '유에스에이 포 아프리카'(USA for Africa) 앨범도 만들었다.
1933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의 이혼 뒤 아버지와 함께 워싱턴주로 이사한 뒤 10대부터 본격적인 음악가의 삶을 시작했다. 14세 때 시애틀의 클럽에서 전설적 음악가 레이 찰스와 밴드 활동을 하며 트럼펫을 연주했고 그 뒤 보스턴, 뉴욕으로 진출해 자신의 음악 세계를 펼쳤다.
1958년 프랭크 시나트라를 만나 1984년 그의 마지막 앨범인 'LA 이즈 마이 레이디'(LA Is My Lady)까지 함께 작업을 했고, 클리퍼드 브라운, 듀크 엘링턴 등 다른 유명 재즈 아티스트의 앨범을 작업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그는 뮤지컬, 영화음악, TV 프로그램 제작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특히 1985년 스티븐 스필버그와 영화 '컬러 퍼플'(The Color Purple)을 공동 제작해 성공을 거뒀다. 당시 그가 시카고의 토크쇼 진행자로 활동하던 오프라 윈프리를 배우로 직접 캐스팅한 일화도 유명하다.
그는 '컬러 퍼플'의 성공을 토대로 1990년 영화·TV 프로그램 제작사 '퀸시 존스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 이 제작사에서 만든 148부작 시트콤 '더 프레시 프린세스 오브 벨 에어'(The Fresh Prince of Bel-Air)는 그의 가장 큰 흥행작 중 하나다. 이 작품은 래퍼로 활동하던 윌 스미스의 배우 데뷔작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미디어 회사인 '퀘스트 방송'(Qwest Broadcasting)을 세웠고, 1993년 미국 잡지 타임과 협력해 흑인음악 잡지인 '바이브'(Vibe)를 창간했다.
존스는 비욘세·제이 지(각 88차례)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80차례에 걸쳐 그래미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그 중 28차례는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또 흑인 노예와 후예의 삶을 그린 '뿌리'(Roots)로 에미상을 수상했으며, 두 차례나 아카데미 명예상을 받았다.
그는 생전에 세 번 결혼해 자녀 7명을 뒀다. 배우 라시다 존스도 그의 딸 중 한 명이다.
2018년에는 한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맏딸 이방카와 데이트한 적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세계 최고령 생존 남성인 영국인 존 알프레드 티니스우드가 지난 11월 25일 사우스포트의 요양원에서 11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 성명에 따르면 그는 마지막 날 "음악과 사랑으로 둘러 싸인 채" 세상과 작별했다.
타이타닉 호가 침몰한 해인 1912년 8월 26일 태어난 고인은 2020년 영국 최고령 남성이 됐다. 기네스 북 오브 레코즈는 후안 비센테 페레스 모라가 114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자 지난 4월 그를 세계 최고령 생존 남성으로 공인했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 생존한 남성 기록은 일본인 기무라 지로에몬이었는데 116년 54일을 살고 2013년 세상을 떠났다.
세계 최고령 생존 여성 겸 최고령 생존자 기록은 역시 일본 여성 이투카 도미코인데 현재 116세다.
1962년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을 목 매달아 처형했던 이스라엘 교도관 출신 샬롬 나가르가 세상을 떠났다고 영국 BBC가 11월 28일 보도했다. 당연히 그는 나치 최대 전범을 처형한 일로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털어놓았다.
1930년대 말 예멘에서 태어난 그는 1948년 고아 신분으로 이스라엘 땅을 밟았다. 정확한 나이를 알 수가 없다. 아이히만이 수감됐던 시설의 간수였던 그는 자원하지 않았는데 무작위로 선출됐다. 당시만 해도 이스라엘에서는 사법 집행 방법으로는 교수가 유일했다.
아이히만은 유럽 유대인들을 일소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최종 해결책(the Final Solution)을 기획한 인물로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첩보원들에 의해 납치돼 기념비적인 공개 재판 일년 뒤에 사형이 언도됐다.
나가르는 군 복무를 마친 뒤 교도관으로 변신, 람레 교도소에서 아이히만의 개인 간수로 선발됐다. 그의 임무 중에는 죄수에게 먹일 음식에 독을 넣었는지 미리 맛 보는 일까지 포함돼 있었다. 그랬다가 아이히만 처형이 이뤄진 1962년 5월 30일을 앞두고 무작위로 처형 당사자로 선발됐다. 그의 신원은 30년 동안 비밀에 부쳐졌으나 1992년 이스라엘 기자들에 의해 공개됐다.
그는 일련의 인터뷰를 통해 교수형 장면과 그 뒤 일어난 일들을 끔찍하게 설명했다. 그는 소임을 수행한 뒤 시신을 화장하기 위해 오븐에로 옮기란 지시를 들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손이 떨렸고, 부축을 받지 않고는 걸을 수조차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검은 눈가리개 착용을 거부하고 당당히 행형(行刑)에 응했다고 한다. 아이히만은 수감 중 1300 쪽에 이르는 자서전을 집필했으며 주요 내용은 2000년 2월 이스라엘 당국에 의해 공개됐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죽은 후 화장해 유골을 바다에 버려달라고 유언했다 한다. 이스라엘 측은 이를 받아들여 유골을 지중해에 버리기는 했으나 이스라엘의 영해가 아닌 공해상에 투척했다고 한다. 천인공로할 유대인의 원수인 아이히만의 유골을 이스라엘 영해에 버리는 것은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유대인에 대한 모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악몽을 경험한 그는 나중에 종교에 귀의하는 한편 요르단강 서안지구 키르얏 아르바 정착촌으로 옮겼다. 2010년 그를 다룬 다큐멘터리 'The Hangman'이 만들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어 로맨스 작가 경요(瓊瑤, 순수한 비취, Chiung Yao)가 12월 4일 대만 뉴 타이베이 시의 자택에서 극단을 선택했다. 향년 86.
쓰촨성 청두 시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가족은 1949년 공산당이 점령한 후 중화민국으로 이주했다. 열여덟 살 때부터 집필을 시작해 60편 넘는 소설을 출간했는데 많은 것들이 영화나 TV 시리즈로 제작돼 많은 사랑을 받았다. 소설 '창밖'(窗外, 1963)으로 명성을 얻었고, 이를 통해 황관문화(皇冠文化, Crown) 잡지의 소유자인 핑신타오와 친분을 쌓고 연애 관계를 맺었다. 두 사람 모두 원래 배우자와 이혼한 후 결혼, 여러 회사를 공동 설립해 경요의 작품을 영화와 TV 드라마로 각색했다. 이들의 연애는 대만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성공한 극작가 겸 프로듀서로도 명성을 날렸다.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황제의 딸'(1998)이 꼽힌다.
스페인의 하이스트리트 패션 체인 망고의 창업자 이삭 안딕이 12월 14일 바르셀로나 근처 동굴을 탐험하다 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동굴들을 탐사하다 협곡 아래로 떨어져 71세 삶을 접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현지 일간 엘 파이스 보도에 따르면, 그는 아들과 다른 가족 성원과 함께 있다가 비운을 맞았다. 깊은 동굴로 유명한 몬세라트 지역의 살니트레 데 콜바토(Salnitre de Collbató) 동굴을 하이킹하다 150m 아래 협곡으로 떨어져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튀르키예에서 태어난 고인은 동생 나흐만의 도움을 얻어 1984년 바르셀로나에서 망고 첫 지점을 열어 지금은 120개국에서 3000 지점으로 늘어났다. 포브스는 그의 재산을 45억 달러로 평가했다.
우리 언론이 상대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대목이 고인의 북동부 카탈루냐 지역에 대한 기여였다. 고인은 1960년대 카탈루냐 지역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세상을 떠났을 때는 비상근 회장으로 물러나 있었다.
망고는 지난해 매출 31억 달러를 기록했다. 그는 같은 스페인 출신 패션 억만장자인 아만시오 오르테가 자라 창업자와 라이벌 관계를 갖고 있었다.
"경기가 끝났을 때 유니폼이 더럽지 않다면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25년 동안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선수로 뛰며 루를 1406차례 훔쳤고 2295 득점을 기록한 '더 맨 오브 스틸(steal)' 별명을 누렸던 리키 헨더슨이 12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66이라 안타까움을 더한다.
월드 시리즈를 두 차례 제패했는데 1989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1993년 토론토 블루제이스 유니폼을 입고서였다. 10차례나 올스타에 뽑혔고 1990년 아메리칸 리그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 그는 2009년 야구 명예의전당에 입회했다.
고인의 타율 0.297, 297 홈런, 1115 타점, 81 리드 오프(lead-off) 홈런 모두 MLB 기록이다.그는 1979년부터 2003년까지 MLB 소속 아홉 팀에서 활약했으며 네 시즌을 뛴 오클랜드 A's 유니폼을 가장 오래 입었다.
만모한 싱 인도 전 총리가 12월 26일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노인성 질환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날 자택에서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고 뉴델리에 있는 병원 응급실로 이송됐으나 끝내 숨을 거뒀다.
2004∼2014년 인도 총리를 지낸 고인은 인도 북부 펀자브주의 시크교 도시인 암리차르 출신으로 인도가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최초의 비(非)힌두교 총리였다. 인도 내 시크교도는 총 인구의 2%에 지나지 않는다.
고인은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경제학자 출신으로, 재무장관 재직 시절인 1991년 사회주의 경제체제였던 인도의 경제개혁을 추진해 시장경제 체제로 변모시킨 주역으로 꼽힌다.
2004∼2010년에는 전 세계 금융위기 파고 속에서도 연평균 8%가 넘는 기록적인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외교적 성과로는 2006년 합의 뒤 2008년 공식 발효된 미국-인도 핵 협력 협정 체결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와 체결한 이 협정은 인도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허용하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핵기술과 연료를 제공받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당시 합의로 30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과 민간 핵기술에 대한 평화적 거래가 가능하게 된 것은 물론, 1998년 인도의 핵실험 등으로 냉랭했던 미국-인도 관계가 '동맹'으로 태동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그는 공직 근무 기간 내내 겸손하고 성실한 이미지로 여전히 많은 인도인의 존경을 받는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다만 임기 후반 소속 정당인 국민의회당 내부의 정치적 갈등 및 부패 스캔들 등으로 비판받았으며, 2014년 총선에서 나렌드라 모디 현 총리의 인도국민당(BJP)에 참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