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 무인 집안에서 태어나 격변기 역사의 중심에 서다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원을 버리고 고려 왕실에 충성하기로 한 조부(祖父)의 결단은 이성계의 앞날을 예고했다. 기마와 궁술을 중시하는 가문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이성계는 공민왕대에 전장에 나가 많은 공을 세우며 무장으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고려와 여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진 이성계는 원명 교체기에 신흥세력으로 떠오르는데….
▎전라북도 전주시 교동 소재의 경기전(慶基殿)에 봉안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 경기전은 왕조의 발상지로 여기는 전주에 세운 전각을 말한다. / 사진제공·이창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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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이지만,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영과 비교할 때 더욱 그렇다. 최영은 최후의 싸움에서 진 패배자이지만, 그의 삶은 강렬한 개성이 넘쳐흐른다. 더욱이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그는 충절의 화신이 되었고, 사람들의 마음에 영원히 남았다. 이성계도 장군으로서 최영에 필적할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에게는 충절의 이미지가 없다. 왕으로서의 이성계도 좋은 왕이지만 평범하다. 태종이나 세종에 비해서도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의 만년도 비극이었다. 이성계는 크게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 외의 가치나 이미지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역사의 전당에서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업적이 아니라 가치나 이미지를 창조해야 한다.
이성계에 대한 기록은 예상외로 소략하다. 특히 고려시대 기록이 거의 없다. <고려사>에 80여 회만 나온다. 고려 말의 가장 뛰어난 장군이자 위화도회군 이후 5년간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거쳐 새 왕조를 창업한 인물치고는 기사가 작다. 더구나 <고려사>는 조선 왕조에서 편찬되었다. 그래서 태종도 “내가 고려사(정도전의 <高麗國史>) 말기(末紀)를 보니 태조의 일이 크게 부실하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한상경(韓尙敬)도 “태조도 일찍이 그런 말씀을 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정도전 등이 1392년 <고려사>를 편찬할 때 사관들이 모두 사초(史草)를 고쳐서 납부했기 때문이었다. 후환이 두려워 이성계 관련 기사를 모두 없앤 것이다. 1393년(태조 2) 일어난 이행(李行) 사건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1393년, 공양왕대 지신사(知申事)로서 사관 수찬(史官 修撰)을 겸한 이행이 “이성계가 우왕, 창왕, 변안열(邊安烈)을 죽였다고 거짓으로 꾸며서 썼다”는 이유로 탄핵당했다. 이행은 자기가 본대로 사초를 기록한 것이다. 그 결과 이행은 가산을 적몰당하고 곤장 100대를 맞은 뒤 울진으로 귀양갔다.
이렇게 살아남은 이성계의 역사 기록은 찬양 일변도다. 역사란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더구나 기본적으로 승자의 기록이다. 같은 건국 공신이지만 조준은 정도전의 <고려국사>에 대해 “공민왕 이후의 기사는 모두 잘못 썼다”고 비판했다. <고려국사>에 따르면 태종은 “고려 말에 임금에게 직언한 자는 오직 윤소종 한 사람뿐이었고, 고을을 잘 다스린 자는 오직 정운경(鄭云敬) 한 사람뿐이었으나, 개국할 때 기밀의 일을 내가 모조리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태종은 하윤에게 <고려사>의 재편수를 명했다. 세종 역시 <고려사>의 내용에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고려사>는 조선 건국 후 60여 년이 지난 1451년(문종 1)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돼다. 두 세대가 지난 뒤니 고려 왕조에서 살았던 인물들이 대부분 세상을 떴을 것이다. 따라서 이성계에 대한 사료는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감안하여 읽어야 한다.
그러나 이성계의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업적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태조실록> ‘총서’에 나오는 이성계 가문의 시조는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의 사공 이한이다. 신라인 것이다. 이한이 김춘추 10대 후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 딸에게 장가들어, 이성계 가문의 외가는 김춘추와 연결돼 있다. <선원계보>에는 전주 이씨의 선조가 모두 중국과 신라, 고려의 고위 관직을 가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15세(世) 이용부(李勇夫, 1124~?) 이전의 기록은 모두 신뢰하기 어렵다. 이들의 역사를 기록한 <완산실록>은 전설과 소설, 역사가 뒤섞여 있다.
▎이성계 가문의 엑소더스. 이성계의 4대조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이동 경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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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7세 이염순(李廉順)부터 생원 호장, 8세 이승삭, 9세 이윤경, 10세 이경영까지 모두 생원-호장이다. 11세 이충민은 長史, 12세 이화는 추밀, 13세 이진유는 생원-호장, 14세 이궁진은 한림(翰林, <씨족원류>에서는 호장)이다. 아마도 이한 이후 전주에 세거하면서 지방의 하급 관리나 가난한 일반 백성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11세 이충민(李忠敏) 역시 어려서 몹시 가난했으나 그릇을 잘 제조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듯하다. 그런데 그는 곤궁을 잘 참고 견딘 결과 청의동자(靑衣童子)로부터 활과 화살을 받았다고 한다.
“‘천명이 돌아올 때 이것이 변하여 활과 화살이 되어 교룡(蛟龍)을 쏘게 될 것이오’라 하고 가거늘, 이에 보니 토기 모양은 아니고 술잔 모양 같았다.”(<완산실록>)
원에 충성하던 토호 가문에서 태어나다
▎이안사의 모친이자 이양무의 아내 평창 이씨의 묘인 영경묘(永慶墓). 준경묘에서 4㎞가량 떨어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하사전리에 있다. / 사진제공·김영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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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집안에서 무예와 천명을 결합시킨 설화가 탄생한 것은 11세 이충민부터였다. 이성계 가문의 15세 이용부가 대장군에 올랐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大同宗約院)의 <선원계보>를 보면 이용부는 장군이자 태자좌청도솔부솔(太子左淸道率府率)이었다. 이 관청은 고려 동궁의 시위를 맡은 곳으로 도솔은 그 대장이다. 이를 보면 고려 중기 이용부에 이르러 전주 이씨 가문이 중앙 무대에 진출한 듯하다. 하지만 그는 <고려사>에 어떤 기록도 없다. 아들인 ‘이의방전’에도 그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이 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의방이야말로 전주 이씨 가문에서 무관의 정체성을 확립한 최초의 인물로 생각된다. 더구나 이의방은 4년에 불과했지만 전주 이씨 중 중앙에서 최고 권력을 장악한 최초의 인물이다. 이용부는 아들 이준의(李俊義), 이의방, 이인(李璘), 이거(李琚)를 두었다. 이인이 바로 이성계의 6대조다. 무신란의 주역은 정중부였으나, 실제로 무신 정권의 기초를 닦은 것은 이의방이었다. 그는 무신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은 승려조차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러나 집권 5년째인 1174년 정중부에게 암살당하면서, 형제인 이준의, 이인도 함께 죽었다. 이인의 부인은 명신 문극겸의 딸이었다. 문극겸은 전라도 나주 사람으로 명문 출신이다. 이인의 아들 이양무(李陽茂)는 무사히 세거지 전주로 도피한 듯하다. 이양무의 아들이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다.
전주 호족으로 행세한 이안사는 성격이 호협하여 기생을 둘러싸고 지방관리와 불화를 일으켰다. 이 일로 위협을 느낀 그는 27세 무렵인 1230년 삼척으로 갔고, 1235년에 다시 동북면 덕원부(德源府=宣州)까지 흘러갔다. 몽골의 고려 침략이 시작되던 때였다. 그리고 19년 뒤인 1254년(고종 41) 다시 두만강 유역 알동(斡東)으로 이주했다. 그와 함께 170여 가가 시종 따라간 것을 보면 그는 전주 이씨 일족의 리더였다. 이 무렵 이안사는 1000여 호를 거느리고 몽골에 항복, 고려를 배반함으로써 철령 이북의 함경도 지방이 원의 영토가 됐다. 그 공로는 1255년 그는 몽골에 의해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한 5천호소(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에 임명됐다. 자신의 수하인 1000호 외에 주변 일대의 5000호를 대표하는 지위에 오른 것이다. 이안사는 알동에 정착했다. 알동은 ‘와뚱’ 또는 ‘오동’으로 발음한다. 그 위치는 두만강 입구에서 60리 거슬러 올라간 곳이다. 여기에서 30리 더 올라가면 국방 요충지인 경흥(慶興)이다. 그의 관할 지역에는 세 개의 성이 존재할 정도로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다. 1264년 그는 알동 천호(千戶)로 승진했다.
1281년 이안사의 아들이자 이성계의 증조부인 이행리(李行里, 翼祖)는 여몽연합군의 제2차 일본 정벌에 참가하기 위한 도정에서 충렬왕을 인견했는데, 이때 자기 가문의 배반을 사과했다. “선신(先臣, 이안사)께서 북방으로 달아난 것은 실로 범과 이리의 아가리를 벗어나고자 한 것이고, 감히 군부를 배반한 것은 아니오니,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옵소서.”
▎1390년(고려 공양왕 2), 조선 개국 직전 호주 이성계의 명으로 고향인 함경도 화령에서 작성된 이성계 호적 원본. 여섯 장을 이어 만든 것으로 전체 길이가 386㎝에 이르는 긴 두루마리 형태의 문서다. 이성계의 이름과 관직, 식봉(食封)이 명기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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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연합군의 2차 동정은 전함 3500척, 14만의 군대가 동원된 작전이었지만 폭풍으로 인해 80~90%가 괴멸했다. 그는 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가문은 여진족의 지역인 이곳에 안착하지 못했다. 그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자 여진인들은 “이행리는 본디 우리 동족이 아니다. 지금 그 형세를 보건대 마침내 반드시 우리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다. 먼 곳에 사는 동족에 군사를 청하여 이를 제거하고 재산을 분배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성계 가문은 여진인들에게 쫓겨 최종적으로 함경도 영흥 지역에 안착했다. 1300년 이행리는 ‘쌍성등처 천호’에 임명됐다. 이씨 가문은 이 관직을 세습하면서 지방호족으로서의 기반을 쌓았다.
이성계의 조부 이춘(李椿, 度祖)은 처음으로 몽골식 이름 바얀티무르(孛顔帖木兒)를 가졌고, 알동 지방 백호(百戶) 박 씨가와 결혼했다. 그는 이성계의 백부 이자흥(李子興, 塔思不花-타시부카)과 아버지 이자춘(李子春, 吾魯思不花-울루스부카)을 낳았다. 몽골어 울루스(Ulus)는 부족 또는 국가를 뜻한다. 박씨가 일찍 죽자 쌍성총관 조씨 가문과 혼인했다. 1254년 이안사가 몽골에 항복할 때 이 지역을 몽골에 바쳤고 이때 항복한 것은 조휘(趙暉)와 탁청(卓靑)이었다. 몽골은 이 지역에 쌍성총관부를 두어 직접 통치했고, 조휘를 쌍성총관, 탁청을 쌍성천호에 임명했다. 이성계 가문은 혼인을 통해 이 지역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자리 잡았다.
부친 이자춘과 공민왕의 비밀회동
▎두만강 유역의 영흥 일대를 그린 대동여지도. 목조 이안사는 덕원부(의주)에서 두만강 건너편 알동 지역으로 이주·정착하여 죽을 때까지 살았다. 두만강과 동해가 만나는 입구에 있는 작은 섬이 녹둔도. 이순신 장군이 1587년(선조 20) 둔전관으로 부임하여 군량을 생산하고 여진족과 전투를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 사진제공·김영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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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은 장차 그의 가문이 왕업을 세울 암시를 받았다. 그는 백룡과 흑룡이 싸우는 꿈을 꾸고 활로 흑룡을 쏘았다. 백룡은 그 보답으로 왕조개창을 예언했다. 고려 건국신화와 같이 조선 왕조 역시 용의 가호를 받았다. 또 하나의 설화에서 이춘은 백보 밖에서 까치 두 마리를 쏘아 떨어뜨렸다고 한다. 용은 이성계 가문의 미래 비전을, 활은 현실적 무력을 의미한다. 그런 뜻에서 이춘은 가문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한 인물이다. 그 화신이 이성계다.
1342년 이춘이 죽자 이자춘이 쌍성등처 천호를 세습했다. 이자춘은 이성계 가문의 진정한 창설자이다. 원명 교체의 격변기에 그는 원을 버리고 공민왕과 손을 잡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또한 군공을 통해 고려 지배계층에 정착하고 가문의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시켰다. 이성계는 그것을 물려받아 단지 두 세대 만에 왕조를 창업했다. 아버지 이춘과 마찬가지로 이자춘은 기마와 궁술에 능했고, 군사적인 통솔력이 있었다. 이성계의 탁월한 군사적 자질은 그 가문의 전통에 바탕하고 있다.
▎이성계의 4대조 목조 이안사가 나고 자란 이목대(梨木臺). 전주 이씨가 대대로 살던 곳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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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5년, 이자춘은 공민왕을 처음 알현하기 위해 개성에 왔다. 이 회동은 반원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공민왕의 사전 비밀계획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자춘에 이르러 이성계 가문은 비로소 개경으로 귀환했다. 이안사가 개성을 떠난 지 182년 만이었다. 당시 쌍성총관부 지역에는 고려인, 몽골인, 만주인들이 잡거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원은 중서성(中書省), 만주의 요양성(遼陽省), 고려의 정동행성(征東行省) 관리를 회합시켜 이주민의 호적을 작성하고, 각각 본토로 복귀시키려는 정책(三省照磨 戶計)을 추진했다. 고려 동남부 이주민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이자춘에게는 큰 위기였다. 그래서 공민왕 4년, 개성에 와 공민왕과 손을 잡고 동북면의 지배권을 약속받았다. 공민왕은 조씨, 탁씨를 배제하고 외지 세력인 이성계 가문과 동맹을 맺은 것이다. 이듬해 이자춘은 공민왕의 반원 정책에 호응하여 일찍이 그의 선조가 넘겨준 이 지역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로써 고려는 99년 만에 주권과 영토를 회복했으니, 이성계 가문은 역사의 부채를 충분히 갚았다. 이때 계책을 낸 사람이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 이인임이었다. 그와 이성계 가문의 인연은 깊다.
이는 이성계 가문의 운명을 가르는 가장 중대한 결정이 됐다. 당시 대륙에서 한족 농민 반란이 시작되었으나 원은 아직 건재했다. 따라서 원을 배반하기로 한 이자춘의 결정은 큰 모험이었다. 그 결과 이성계 가문은 고조부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 북방으로 엑소더스를 감행한 지 120여 년 만에 개경으로 귀환했다. 그것은 원나라의 흥기 및 쇠락의 사이클과 일치했다. 두 번의 격변기에 이씨 가문은 과감한 결단을 내리고 새로운 운명을 개척했다. 그리고 세 번째 결단을 통해 조선 왕조를 개창했다.
▎유모 장씨의 축출로 우왕은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장씨는 우왕에게 공민왕의 노국공주와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상. / 사진제공·경기도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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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6년 공민왕은 이자춘을 종3품 상의 대중대부(大中大夫) 사복경(司僕卿)에 제수하여 개경에 거주케 했다. 사복경은 궁중의 말과 가마를 관장하는 사복시의 책임자다. 이 조치는 우대처럼 보이나 사실은 이자춘의 기대와 달리 동북면 세습 영지를 부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자춘은 무장으로서 이성계 가문의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했다. 그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승진하여 왜구 방어를 위해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로 임명됐다. 그 후 그는 고려 중앙군이자 왕의 친위대인 정3품 천우위 상장군(千牛衛上將軍)으로 승진하여 무신으로서 최고위에 올랐다. 제2차 홍건적의 난이 임박한 공민왕 10년(1361) 이자춘은 마침내 삭방도만호겸호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에 임명됐다. 비로소 영지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자 어사대는 “이자춘은 본래 동북면 사람이며 또 그 지경의 천호이니 병마사를 삼아 진수(鎭守)시킬 수 없다”고 반대했다. 이것이 공민왕 5년의 조치를 설명하는 진정한 이유, 즉 독자적인 세력 형성을 막으려는 것이다. 이성계 가문은 고려의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이런 의혹을 견뎌내야 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그를 신임하고 동북면에 파견했다. 그 뒤 그는 정3품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임명됐으며, 북방으로 돌아가 요동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을 귀환시켰다. 그는 46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러나 개경 귀족 사회의 이방인으로서 높은 지위를 성취했다.
이성계는 1335년(충숙왕 4) 화녕부(和寧府, 영흥)에서 태어났다. 공민왕보다 여섯 살 아래다. 그는 북방 민족의 습속에 따라 어릴 때부터 사냥을 했다. 사냥은 곧 군사적 기예의 훈련이다. 이자춘은 그를 데리고 다니며 사냥을 했으며, 자연스럽게 뛰어난 군사적 기예를 습득했다. 그의 뛰어난 기마술과 완력, 활솜씨는 소시부터 명성을 얻었으며, 여러 차례의 전쟁을 통해 북방세력을 제압함으로써 북변 일대 종족들의 영웅으로 높은 추앙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391년 여진 부족 오도리(斡朶里, 워더리)가 이성계에 조회하면서 서로 동북 “지경 안의 인민이 모두 이성계의 위엄과 신의를 사모하여 왔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강력한 친병(親兵)에는 다수의 여진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성계 휘하의 명장 이지란(李之蘭, 1331~1402, 古倫豆蘭帖木兒-쿠란투란티무르)은 여진족 출신이었다. 이런 잠재적 위험성 때문에 고려 정부는 이성계를 중앙에 묶어두고 싶어 했다. 그러나 파견된 관리들이 지역 장악에 거듭 실패하자, 이성계의 통솔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이 지역은 이성계 가문의 반독립 왕국으로 존재했으며, 그가 고려의 중앙정계에서 성장하기 위한 확고한 기반을 제공했다. 위화도회군 때도 동북면 인민과 여진족 1000여 명이 그를 후원하기 위해 달려왔다.
현란한 기마술로 좌중을 놀라게 하다
▎<고려사> ‘신돈전’ / 사진제공·김영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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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변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성계는 1356년(공민왕 5) 22세 때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 처음 왔다. 단오절이면 젊은 무관과 귀족 자제들이 왕이 참석한 가운데 개성 대로에서 격구대회를 벌였다. 격구는 폴로(Polo)이다.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어 티베트를 거쳐 당나라 때 처음 중국에 들어왔다. 한반도는 후삼국 시대의 기록이 있다. 이성계는 단오 격구대회에서 처음으로 그의 날쌔고 현란한 기마술을 과시해 “온 나라 사람들이 몹시 놀라면서 전고(前古)에 듣지 못한 일”이라고 찬탄했다. 1361년(공민왕 10) 이자춘이 죽자 27세의 이성계는 그 관직을 이어받아 통의대부(通議大夫) 금오위상장군·동북면상만호가 됐다. 이 해 9월, 이성계는 독로강(지금의 평북 강계군) 만호 박의(朴儀)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군사적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1361년(공민왕 10) 10월 제2차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됐다. 1362년 1월 17일 고려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취해 개경을 수복했다. 고려군은 새벽 동이 트기 전에 기습을 가했다. 이때 이성계도 친병 2000명을 거느리고 가장 먼저 성에 올라, 적장 사유(沙劉)와 관선생(關先生)을 베었다. 28세 때였다.
1364년(공민왕 13) 1월, 덕흥군(德興君, 塔思帖木兒-타스티무르)의 군대 1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군을 패퇴시켰다. 덕흥군은 충선왕의 서자로, 출가해 승려가됐다. 1351년 공민왕의 즉위 소식을 듣고 원나라로 도주했다. 1356년 기철 일족이 도륙되자 기황후는 원한을 품고, 덕흥군을 고려 국왕에 임명하고 군대를 주어 침공케 한 것이다. 2차에 걸친 홍건적의 난으로 기진맥진한데다 공민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고려 백성의 민심은 사실 덕흥군으로 쏠렸던 듯하다. 이 때문에 고려군의 사기는 낮았다. 그러나 총지휘관으로 임명된 최영은 엄한 군율로 군대를 수습했다. 이때 이성계도 동북면 친병 1000명을 거느리고 참전했다. 장군들이 승패의 향배를 보며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하자, 이성계는 장군들을 비난하며 선봉에 나섰다. 이 전쟁으로 공민왕 8년 이래 계속된 북방으로부터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이성계는 그 공으로 정3품 밀직부사에 임명되고, 공신으로 책봉됐다. 밀직부사는 왕의 비서실이니, 이성계는 비로소 왕의 측근이 된 것이다. 이 전쟁을 끝으로 고려는 원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원은 이제 황제의 명령조차 실행할 힘이 없었다.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목조 이안사의 집터인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 내의 비각 전주를 떠나 정착한 삼척은 이안사의 처가가 있던 곳이다. / 사진제공·김영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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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집권기에 최영을 비롯한 많은 무신이 죽거나 축출됐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 시기를 무사히 보냈다. 1370년(공민왕 19), 공민왕은 이성계와 지용수(池龍壽)에게 요동 공격을 명령했다. 명이 건국된 지 2년 만으로, 명은 아직 요동을 경략할 여력이 없었다. 1369년 명의 북정군은 북원의 상도를 점령했다. 1370년 1월에는 응창부를 공격, 황족을 포함한 5만의 포로를 잡으며 궤멸적 타격을 입혔다. 고려는 그 사이를 노려 요동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려 한 것이다. 1370년 1월, 이성계는 기병 5000명과 보병 1만 명을 통솔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아버지 기철의 원수를 갚고자 요동 지역에 웅거한 기사인티무르(奇賽因帖木兒) 등 친원파 잔류 세력을 소탕한다는 명분이었다. 이는 물론 요동을 선점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공격은 성공적이어서 여러 개의 성을 점령했다. 이로써 고려의 영토는 “동으로 황성(皇城=江界)에 이르고, 북으로 동녕부(遼陽)에 이르며, 서로는 바다(황해)에 이르고 남으로는 압록강에 이르렀다.” 요동의 일부를 석권한 것이다. 이것이 고려의 제1차 요동정벌이다. 이 작전에서 이성계는 처음으로 대규모 군대를 통솔하는 지휘관이 됐다. 그전에는 동북면의 친병을 지휘하는 지방군의 지휘관이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고려는 점령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고 철수했다. 2월에 이성계는 다수의 요동지역 두목들을 데리고 개선했다. 이들을 우호세력으로 삼아 요동을 지배하려는 전략이었다. 이는 조선 초기까지 계속됐지만, 명의 압박으로 결국 포기했다.
원이 초원지대로 축출된 이래 요동은 주인이 없었다. 이 지역은 여진인들의 오랜 본거지였다. 그들은 1115년 금(金)을 세워 고려를 신속시키고 북부 중국을 석권했으나, 1234년 몽골에 멸망당했다. 원이 중국에서 축출된 뒤, 그 잔류 세력의 일부가 이곳에 집결했다. 또한 원 지배기에 심양(瀋陽, 현재 봉천, 요양)에는 고려의 전쟁포로와 유이민이 다수 살았다. 기사인티무르의 기반도 그들이었다. 지역은 다르지만, 이성계의 가계도 유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성계가 요동을 공격했을 때, 동녕부동지(東寧府同知) 이올랄티무르(李五老帖木兒)는 “나의 선대는 본래 고려 사람인 바 신복(臣僕) 되기를 원한다”고 항복했다.(<고려사> 공민왕 19) 당시 이 일대 거주민 중 고려와 종족적 일체감을 가진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그를 돕기 위해 동북인과 여진인 1000여 명이 주야로 달려올 정도로 서로 일체감을 가졌다. 충선왕이 1308~1316년 심양왕(瀋陽王, 1310년부터 瀋王)을 겸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심양왕이 지배하는 심왕부(瀋王府)는 요동 반도, 요양, 흑룡강성, 단동, 두만강 일대를 포괄하고 있다. 심양왕은 1308~1376년 사이 70여 년간 충선왕, 충선왕의 조카 왕고(王暠), 충목왕, 충정왕, 왕고의 손자 토크토부카(篤朶不花) 등 고려인이 맡았다. 심양왕은 충선왕의 사후 실질적 지배권은 상실했고 상징적 지배권만 유지했다. 하지만 고려로서도 영유권을 주장할 근거는 있었던 셈이다.
▎이안사의 부친 이양무의 무덤인 준경묘(濬慶墓). 대대로 살던 전주를 떠나 삼척에 정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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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요동공벌은 공민왕이 웅대한 구상과 상당한 준비를 거쳐 실행된 것이다. 공민왕은 1369년(공민왕 18) 11월에 이성계를 동북면원수 겸지문하성사, 지용수를 서북면원수 겸평양윤에 임명했다. 또한 원의 사신을 죽였으며, 수문하시중 이인임을 서북면도통사에 임명하여 대독(大纛)을 주어 보냈다. 대독은 군중(軍中) 또는 천자의 어가 왼쪽에 세우는 깃발로, 천자의 친정군을 뜻한다. 요동을 공벌한 1370년 1월에는 원구(圓丘)에 제사를 지냈다. 이 제사는 하늘에 대한 제사이므로, ‘하늘의 아들(天子)’만이 가진 특권이었다. 공민왕은 또한 1369년 6월 관제의 호칭을 다시 격상시켰다. 고려는 한편으로 명에 대해 신속(臣屬)을 약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대등한 호칭을 사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관제의 호칭은 공민왕 21년에 다시 격하됐다.
고려의 요동 공격에 대한 명의 반응은 즉각적이었지만 매우 우회적이었다. 주원장은 공민왕을 고려 국왕에 임명했지만, 동시에 1370년 5월에 “짐의 군사가 아직 요심(遼瀋)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그 사이에 혹 광폭한 자가 나오면 중국의 근심이 아니고, 고려의 소요가 될까 두렵다”는 서신을 보냈다. 명은 고려의 군사행동을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요동지역이 중국의 영토임을 명백히 했던 것이다.
이해 6월부터 고려는 명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공개적인 복종을 표시했다. 그러나 1370년 8월, 제2차 요동공벌을 단행했다. 작전은 8월에 개시되어, 11월에 요동성을 함락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때 게시된 방문의 내용이다.
위화도회군 때 달려온 여진족들
▎2015년 방영된 MBC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중 위화도회군 장면. / 사진제공·M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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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은 요임금과 함께 입국하였다.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여 땅을 주었다. 서쪽으로는 요하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강역을 지키었고, 원조(元朝)가 통일하자 공주를 내리고 요심(遼瀋)을 탕목(湯木=封土)으로 삼아 성(省)을 나누어 두었다.(···) 무릇 요서 이동 경내의 백성과 대소 두목들은 속히 스스로 조정에 와서(來朝)하여 함께 작록을 받을 것이다. 만약 내조치 않으면 감계(鑑戒)가 동경(東京=遼陽)에 있다.(<池龍壽傳>)” 그 요지는 한마디로 요동이 본래 고려 영토라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 국가가 요임금과 같은 시대에 시작됐다는 새로운 역사 인식은 고려가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의미다.
고려는 요동 전역에서 손쉽게 승리를 거두었으나, 문제는 그것을 지키는 것이었다. 군량이 다하자 고려군은 철수했다. 그 뒤를 원의 잔류 세력으로서 요동 북부지역을 지배하던 나하추의 군대가 추격했다. 굶주린 군대는 소와 말을 잡아먹었다. 그러나 추위와 눈보라가 겹쳐서 많은 군사가 죽었다. 그러나 1371년 9월, 고려는 다시 한 번 북방지역에 대한 공세를 취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했다. 오로산성 또는 우라산성(于羅山城, 兀剌-올랄)은 강계의 압록강 건너편에 있으며,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홀본성(忽本城) 또는 졸본성(卒本城)이다. 요동 북부지역으로 공세를 확장하려고 한 것이다. 북진은 왕건 이래 고려의 비원이었다. 그리고 고려 500년에 걸쳐 이때가 가장 좋은 시기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왜구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당시 고려의 국력을 생각할 때 이는 힘겨운 과업이었다.
1371년(공민왕 20) 윤 3월, 요동 세력으로는 처음으로 요양행성평장정사(遼陽行省平章政事) 유익(劉益)이 명에 항복했다. 그는 원의 유신이었다. 그는 고려가 노려왔던 금주(金州), 복주(復州) 등을 바쳤다. 이에 명은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遼東都司)를 설치하고 이들을 지휘(指揮)로 임명했다. 요동 경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지역에 남아 있던 원의 잔류 세력은 1372년부터 일제히 고려에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저울추가 명 쪽으로 기울었다. 고려로서는 요동을 지배하는 일이 점점 더 힘겹게 됐다.
▎함경남도 영흥군 순녕면에 있는 이성계의 부친 환조(桓祖) 이자춘의 구저(舊邸). 이성계와 신의왕후 (神懿王后)의 위판을 봉안한 곳이다. / 사진제공·김영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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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일생에서 요동은 깊은 인연을 가진 곳이다. 그의 지역적 정체성은 요동에 있다. 사실상 이성계 가문의 창시자인 이안사가 처음으로 이곳에 왔다. 뒤에 그 일족은 좀 더 남하하여 함흥 지역에 정착했다. 하지만 원 지배기에 쌍성총관부 지역은 요동에 연결돼 있었다. 종족적으로는 여진족의 오랜 고향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들과 함께 자랐다. 이 일대 고려인과 여진족 사이의 통혼과 무역도 일상사였다. 1356년 아버지 이자춘의 결정으로 22세의 이성계는 이곳을 떠나 개경에 왔다. 그 뒤 그는 기본적으로 고려인으로 성장했지만, 정신적으로 그는 죽을 때까지 동북인이었다. ‘동북’이란 고려과 여진이 융합된 지역적, 종족적 정체성이다. 1388년 위화도회군 때 많은 여진인이 이성계를 돕기 위해 달려왔다. 조선 건국 뒤에는 이성계의 시위병으로 복무했다. 1398년 왕위에서 물러난 그가 다시 돌아간 곳도 함주였다. 1370년을 전후하여 이성계는 요동공벌의 한 축을 담당함으로써 비로소 주요한 무장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1388년 요동공벌에 나섰다가 회군함으로써 조선 건국의 막을 열었다. 요동은 운명적으로 그와 연결돼 있었다.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