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FgGYBPmrrn0
<요한계시록 4:2-3>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성령에 감동되었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걸까요? 술이나 마약에 취한 것처럼 몽롱하고 감각이 없어지고 뭔가 알 수 없는 쾌감이나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걸까요? 고린도후서 13:13절은 목회자들이 축도로 사용하는 구절이지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성령은 교통케 하시는, 즉 소통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말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성령에 감동되었다는 것은 황홀하거나 몽롱한 상태가 아니라 가장 소통이 잘 되는 순간인 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가 성령에 감동 되었다면 그 안에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거죠.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 가장 뚜렷한 현상은 방언이었습니다. 못알아듣는 이상한 소리의 방언이 아니라 서로 다른 나라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였는데도 사도들을 비롯해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이 전하는 복음을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듣게 되는 방언이었지요. 언어의 장벽으로 막혀진 것이 방언의 역사로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하게 된 겁니다.
사랑은 눈으로 말하는 거라는 노래 가사도 있습니다만 진실한 사랑도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서로 말없이도 소통하는 능력이 있게 하지요. 그와 같이 성령에 감동되는 것은 사람의 언어, 이해능력, 안목, 관점을 뛰어넘어 새로운 영적인 세계,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눈이 열리면서 그 세계와 내가 소통하게 되는 거죠. 사도요한은 성령에 감동이 되어서 하늘의 영적인 세계와 소통하고 있고, 또 성령에 감동이 되어서 하늘의 영적인 세계에서 있었던 것을 이렇게 요한계시록을 통해 지금 우리와 소통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기도 어렵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모든 삶에 성령의 감동은 필요하지만 특히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기도할 때, 그리고 믿음의 의지로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할 때에 항상 성령께서 감동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기를 먼저 기도하셔야 하는 거죠.
2절 후반부에 보면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라고 말씀합니다. 궁전에 임금이 앉는 자리를 옥좌 또는 용상이라고 하지요. 하늘에도 하나님께서 앉으신 보좌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하늘에 진짜로 보좌가 있고 하나님께서 그 보좌에 앉아계시는 모습을 하고 계시는 건 아니지요.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 당시 왕들이 존재하는 모습으로 비유한 것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천상의 세계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들은 모두 비유이고 상징이지요. 그런 비유와 상징으로 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온 우주만물을 통틀어서 가장 최고의, 가장 완전하신 유일한 왕이심을 표현하고 있는 거죠.
3절에서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를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이렇게 벽옥, 홍보석, 무지개가 둘려진 녹보석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오늘날에는 이런 보석들이 얼마나 귀한 가치를 지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아마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들이겠지요. 가장 아름답고, 가장 귀하고, 그래서 가장 최고의 사람들이 지닐 수 있고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이기에 이런 보석들을 통해 표현한 겁니다. 오늘날에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다면 다른 말로 표현했겠지요.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은 없지요. 사도요한도 아무리 천상 세계에 들어갔다 해도 여전히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존재보다도 그 천상 세계에서 경험과 느낌은 분명 더 확실하고 더 실제적이고 더 실감 있는 것이었겠지요. 여러 보석으로 표현된 본문의 내용 속에서 우리는 사도요한이 얼마나 하나님을 실감있게 경험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좀 더 실제적으로, 실감있게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많은 경우 하나님을 이렇게 실감있게 경험할 수 있다면 어떤 시련과 위험과 박해와 고통을 당하더라도 얼마든지 참고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경험이 부족하거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걸까? 계속 의심하게 되고 믿음의 뿌리가 흔들리기도 하지요. 특별한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며,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것이 참된 삶의 길임을 믿고 신뢰하면서 그 상황을 견디며 인내하고,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붙잡고 지켜가는 것을 경험해 가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더 깊어지고, 또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경험들이 더 실제적인 것이 되어가는 거죠.
이 새벽시간에도 함께 말씀을 묵상해 가면서 요한계시록에 표현된 하나님을 우리도 좀 더 구체적으로 경험해가고 깨달아져가게 되기를 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간다는 찬송가 가사와 같이 날마다 우리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그만큼 우리 주님에 대한 경험들이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