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공왕릉으로 향하는 길,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웅대한 왕릉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아, 저토록 장엄한 모습이었던가요.
주차장에 내려 입구 담장을 마주하는 순간, 비로소 이곳이 지난봄 사천왕사지를 답사하며 느꼈던 아쉬움 속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신문왕릉임을 알아차렸습니다.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이라는 거대 왕국을 물려받은 '본투비 금수저'이자, 선대들이 이룩한 기업을 치밀한 시스템 경영으로 완성해낸 지적인 후계자였던 신문왕.
그는 선대들이 물려준 왕국을 어떻게 경영하고 시스템화하여 지속 가능한 영속 기업으로 만들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경영자였습니다.
이토록 웅대한 왕릉을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다니, 스스로의 기억력을 믿을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해 질 녘의 시간을 놓칠세라 효공왕릉을 서둘러 둘러보고 다시 돌아온 신문왕릉은, 마치 처음 마주하는 듯 황홀한 석양에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신문왕릉 앞에 섭니다. 단단하게 쌓아 올린 호석들은 1,300년의 세월을 견디며 여전히 왕의 위엄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신문왕에게 통일은 단순히 전쟁의 종결이 아니었습니다. 흩어진 민심과 서로 다른 체제를 하나의 법도 아래 묶어내는 시스템의 완성 이었습니다.
그는 즉위 초, 자신의 장인인 김흠돌을 숙청하며 강력한 중앙집권적 질서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거대한 시스템을 안착시키기 위해 가장 가까운 혈연마저 베어내야 했던 그 비정한 칼날 위에서, 신라는 비로소 흔들림 없는 9주의 체제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태종 무열왕이 즉위한 서기 654년부터 신문왕이 왕위에 오른 681년까지, 불과 27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신라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왕국의 뼈대를 세웠습니다.
그 치열한 격동의 시기를 거쳐 완성된 이 웅대한 왕릉은, 자신이 구축한 질서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신문왕의 마지막 상징이었을 것입니다.
중국 진시황은 자신의 제국이 만대까지 이어지길 바라며 11년이라는 짧은 집권기 동안 천하의 질서를 재편했지만, 그 꿈은 지나치게 거대하여 제국은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반면 신문왕은 681년부터 692년까지, 진시황과 같은 11년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신라라는 왕국을 지탱할 가장 현실적이고 단단한 뼈대를 세웠습니다.
진시황이 만대라는 허상을 쫓았다면, 신문왕은 11년이라는 치열한 시간 속에서 오늘의 안정을 완성하려는 실질적인 설계자였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국가가 단일하게 통일되었다 해도, 오랫동안 치러온 전쟁의 상흔에 국민들의 마음과 생활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었습니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계파 간의 갈등과 지역 간의 불화, 신구 세력과 보혁의 반감으로 신라는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혼미한 시기에, 태종 무열왕의 시대가 열릴 무렵부터 '새 밝음'이라는 이름으로 혜성처럼 나타나 세상의 모순을 꿰뚫어 본 분이 바로 원효성사였습니다.
원효성사는 왕족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민중을 골고루 끌어안았습니다. 한쪽으로 밀려난 유교를 배려하여 자신의 아들 설총을 그 길로 내어주었던 특단의 자비로운 배려는, 통치 철학을 넘어서는 보살의 지극한 마음이었습니다.
신문왕은 설총에게 정사를 돌보는 왕의 도리를 일깨워달라 청했고, 설총은 그에 화답하여 꽃의 왕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우화 화왕계花王戒를 지어 올렸습니다.
이는 유교적 통치 철학을 바탕으로 신문왕의 권력이 좁은 아집에 갇히지 말고 민중의 소리를 경청하라는 고도의 정치적 조언이었습니다.
설총에게 원효의 가르침은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워 백성을 평안케 하려는 치세治世의 자비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한편 십문화쟁론을 집필하며 세상의 모든 모순과 갈등을 화쟁의 불꽃으로 녹여내려 했던 원효성사는, 이제 그 치열했던 논리의 언어마저 내려놓고 민중의 삶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갑니다.
그는 오늘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고단한 이들을 향해, 저 귀족들이 독점했던 복잡한 교리가 아닌 누구나 부처의 자비에 이를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대평등 사상을 민초들의 고단한 삶 속으로 직접 불러내었습니다.
그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해골바가지를 두드리며 민중들에게 외쳤습니다.
“제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한 꺼풀 벗기면 결국 이런 해골바가지일 뿐이다. 그러니 기죽지 마라.”
배고픔과 질병이라는 생로병사의 굴레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에게, 원효성사가 가르쳐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저 대단한 권세가 휘두르는 세상의 법칙보다 더 빠르고 평등하게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게 해줄 실질적인 탈출구였습니다.
원효성사는 그렇게 우리에게, 신분과 업의 굴레라 믿었던 세상의 편견을 넘어 각자의 자리에서 오롯이 극락으로 나아가라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신문왕이 692년 승하하고, 원효성사가 686년에 홀연히 이 세상에서 사라지셨다고 하니 두 분은 각자의 길을 걸으며 같은 시대를 호흡한 셈입니다.
신문왕은 웅대한 왕릉 속에 자신의 질서를 박제하여 남겼으나, 원효성사는 오도송도 열반송도, 그 흔한 무덤조차 남기지 않고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셨습니다.
왕과 대자유인이 이 땅에서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었을까요? 왕은 끊임없이 왕국의 틀을 쪼개고 맞춰 단단한 질서를 세워야 했고, 대자유인은 그 쪼개진 질서 사이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어루만지며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시스템의 정점에 선 자와 그 시스템을 넘어선 자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으나 결코 같은 세계에 머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설총이 신문왕 곁에서 전한 원효성사의 가르침은 왕의 권력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일깨우는 잔잔한 울림이었을 뿐, 왕의 통치와 대자유인의 길은 끝내 서로 섞이지 못한 듯 보입니다.
하지만 설총은 진리의 빛을 세상 안으로 들여와 글과 질서라는 등잔을 빚어냈습니다. 한 분은 근원적인 一心의 자유를 몸소 증명했고, 다른 분은 그 자유의 온기가 백성의 삶에 닿도록 현실의 그릇을 마련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왕릉 앞, 묵직하게 놓인 상석床石에 앉아 봅니다. 등 뒤로는 천 년의 침묵을 간직한 왕릉이 거대한 산처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고, 해질녘 따스하게 데워진 돌의 온기가 등허리로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이 상석에 앉아 고요히 눈을 감으면 왕릉의 평온함만이 오롯이 느껴지지만, 사실 낮은 담장 바로 곁에는 수많은 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소란스러운 도로가 지나고 있습니다.
천 년 전의 왕이 다스리려 했던 질서와, 지금 이 순간에도 쉼 없이 흐르는 현대의 일상이 나지막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존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이제 신문왕릉을 보며 권력의 화려함만을 읽지 않습니다. 왕이 질서라는 칼을 갈 때, 그 칼날에 베어진 이들의 상처를 묵묵히 닦아내던 대자유인의 따스한 발자국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두 발자국은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음을 또한 겸허히 인정합니다.
진정한 통일은 왕의 질서로 뼈대를 세우고, 그 뼈대 안에 민중의 마음이라는 피가 돌게 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통일의 끝은, 과연 왕의 시스템과 대자유인의 화쟁이 실제로 만날 수 있는 곳일까요?
권력을 위한 투쟁이나 질투와 탐욕은 잦아들고, 스스로를 이겨낸 자가 가장 존경받으며, 아주 작은 생명 하나까지도 온전한 사랑으로 보듬는 평화로운 사회.
그런 세상은 어쩌면 왕의 질서와 대자유인의 길이 만나는 곳이 아니라, 왕조차도 성자조차도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민초들의 가슴 속에서만 온전히 꽃피울 수 있는 꿈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왕릉을 물들이는 저 노을은, 그날의 왕이 끝내 닿지 못했으나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걸어가야만 할 그 길을 묵묵히 비추고 있습니다.
현실이라는 가혹한 시련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는 회의와 의문을 겪으며 비로소 빚어지고 굳어진 그 길을 말입니다.
첫댓글 덕분에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
사진과 글이 아름답게 구성된것같습니다.🙏
우와~^^*
감탄사가 저절로 나옵니다!!
나무아미타불 🙏
나무아미타불 🙏
나무아미타불 🙏
왕릉뒤로 노을 지는 하늘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오늘도 가슴에 지난역사와 함께하는 좋은 글과 멋진 사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가보지 못한 신라시대 왕릉들
원효성사와 한시대에 머물렀던 신문왕 멋진사진과 함께 소개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함께 답사한 느낌으로 글을 읽게 됩니다~
매 번~ 훌류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_()_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