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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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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52년 8월 21일 조선 경상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
사망 | 1617년 4월 10일 조선 경상도 창녕군 길곡면 창암리 망우정 |
사인 | 병사 (아사) |
국적 | 조선 |
별칭 |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 별칭은 홍의장군, 천강홍의장군 |
학력 | 1585년 별시 정시 급제 |
직업 | 의병장, 무관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상산 김씨 |
자녀 | 아들 곽영, 아들 곽호, 딸 곽씨 |
부모 | 아버지 곽월, 어머니 진주강씨, 계모 허씨 |
친척 | 처외조부 조식, 동서 김우옹, 사위 성이도 |
곽재우 郭再祐 | |
생애 | 1552년 8월 21일 ~ 1617년 4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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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조선 경상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
사망지 | 조선 경상도 창녕군 길곡면 창암리 망우정 |
별명 |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 별칭은 홍의장군, 천강홍의장군 |
복무 | 조선 육군 |
복무 기간 | 1592년 ~ 1613년 |
최종 계급 | 병마절도사 |
주요 참전 | 임진왜란, 정유재란 |
곽재우(郭再祐, 1552년 9월 9일(음력 8월 21일) ~ 1617년 5월 14일(음력 4월 10일))는 조선 중기의 무신, 정치인, 군인으로 임진왜란에서 크게 활약한 의병장이다. 34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문장의 글귀가 왕의 귀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고, 40세가 넘도록 고향에서 학문과 낚시질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이 왜군에게 전멸당하자, 당시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스스로 의병을 조직, 붉은 비단으로 된 갑옷을 입고 활동하여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그의 용맹성에 놀란 왜병들은 곽재우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다 한다. 여러번 승리한 공로로 찰방, 조방장 등을 지낸뒤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김덕령 등의 의병장이 무고로 희생되는 것과 영창대군의 죽음을 보고, 벼슬을 여러번 사퇴하였다. 당색으로는 북인이었으나 광해군 집권기에도 여러 번 관직을 사퇴하거나 사양하였다. 인목대비 폐모론에 이어 1613년(광해군 5년) 영창대군에 대한 사형 여론이 나타나자 영창대군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고 낙향, 이후 창녕 망우정에 은거하였다. 본관은 현풍(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으로,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자 그의 외손녀사위이다. 대제학을 지낸 김우옹(金宇顒)과는 동문이자 동서간이 되었다. 전란 중 스스로 천강홍의장군을 자처하였으며, 전장에 나설 때 붉은 갑옷에 백마를 타고 다녔으므로 그의 이름을 모르던 장졸과 백성들로부터 홍의장군이라 불렸다.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宜寧) 출신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지내고 사후 증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된 곽지번(郭之藩)의 손자이고, 수(守)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과 진주강씨의 셋째 아들로 유곡면 세간리에서 태어났다. 친형제로 곽재희(郭再禧), 곽재록(郭再錄)과 누이 1명, 계모 허씨에게서는 이복동생 곽재지(郭再祉), 곽재기(郭再祺)와 이복 누이 1명이 더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출신 곽경(郭鏡, 1117 - 1179)으로 송나라 팔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동래한 귀화인이었다. 곽경은 1138년 고려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평장사를 역임하고 포산군(苞山君)에 봉군되었다. 5대조 곽안방(郭安邦)은 세조조에 해남현감(海南縣監), 익산군수(益山郡守)를 지내고 1467년(세조 12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데 가담하여 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세조대의 청백리였다. 고조부 곽승화(郭承華)는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었으나 진사였고, 할아버지 곽지번이 성균관사성에 올라 다시 가세를 일으켰다.
일찍이 생모 진주강씨를 여의고 아버지 곽월은 허씨와 재혼하였다. 일찍이 영남의 유학자인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으며, 후에 조식의 외손녀사위가 되었다.[1] 함께 동문수학한 김우옹 역시 스승 조식의 외손녀사위가 됨으로써 동서간이 되었다.
그 뒤 상경하여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그의 재주를 눈여겨보던 조식은 자신의 문도들과, 외조카 이준민(李俊民)이 한성부에 다녀오면 반드시 그의 소식을 묻곤 했다.
그 뒤 진사시에 응시하였으나 진사시에는 합격하지 못했다.[2] 그러나 그는 북인 당원이었으나 비주류였던 탓에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성리학(性理學)을 알지 못하여서 진사시에 들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고 혹평해놓기도 했다. 1585년(선조 18년) 과거를 보아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선조의 비위를 거스른 까닭에 급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이 취소되어 낙방되고 만다.
그 뒤 정계에 진출할 뜻을 포기하고 40세가 넘도록 학문 연구와 농사를 지으며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조식의 문하생들이 대부분 김효원이 한때 조식의 문하에 있었던 인연으로 동인(東人)에 가담하면서 그도 동인의 당인이 되었다가 동인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분당될 때는 북인의 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동인과 북인 내부의 내분을 못마땅히 여기던 그는 이산해 등 다른 북인 당원들을 피하거나 일부러 멀리하였다.
그는 고향인 현풍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근검절약했는데,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재물을 늘려 재산이 몇 만 금이나 되었다. 그러자 시골 사람들이 그가 비루하고 인색하다고 의심하였으나, 곽재우는 태연스레 지내면서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2] 계모 김해허씨가 창녕군 화왕산성에서 병으로 사망하자 잠시 울진으로 가 있기도 했다.
평생 은거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으나, 1592년 5월 23일(선조 25년 음력 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연이은 관군의 패배와 선조의 의주(義州)로 피난 소식이 날아오자, 6월 1일(음력 4월 22일) 사재를 털어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붉은 옷으로 철릭을 해 입고, 이불에 "천강 홍의 장군"(天降 紅衣 將軍)이라 적어 깃발을 만들었다. 그는 2천 명에 이르는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 활동으로 의령·창녕(昌寧) 등지의 산악에 매복하고 있다가 신출귀몰하며 왜군을 물리치고 왜군의 호남 진격을 저지하였고, 왜 보급선을 기습하여 보급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김시민의 진주성 싸움에 원군을 보내 승리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때 붉은 비단으로 만든 군복을 입고 아군의 맨 앞에서 싸웠기 때문에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였다.
1592년 5월 함안군을 함락, 점령하고 정암진(鼎巖津, 솥바위나루) 도하 작전을 전개하는 왜군과 교전,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붉은 비단으로 된 옷을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고도 불렸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을 자처하였고, 기습과 매복이 성공을 거두어 관군도 이기지 못한 왜군을 격파하면서 유명인사가 된다.
왜군이 부산에서 진주를 거쳐 호남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왜군은 정암진 나루에 도착했다. 곽재우는 이때 정암진 언덕에 병사들을 매복시킨 뒤 날랜 병사 몇명을 선발, 남강을 건너는 왜군을 늪지대로 유인한 다음 화살공격으로 전멸시켰다. 왜군 정찰대는 정암진 일대가 늪지이기 때문에 부대의 통행이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통과할 수 있는 지점 근처에 나무 표시 등 표식을 만들었다. 곽재우는 왜군 정찰대의 행동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가 밤에 표지목을 늪지로 옮겨 꽂고, 표식들을 늪지로 향하게 바꾸어 놓았다. 다음날 왜군이 잘못 표시된 표지목과 표식들을 따라가다 늪지에 빠지자 곽재우는 언덕에 숨어있던 병사들에게 공격령을 내려, 기습 공격을 가해 왜군을 몰살시켰다. 여기에서 2만 명의 일본군이 정암진 늪에 빠져 사망하였다.
관군의 패배와 그의 연전연승은 자주 비교되었고, 관군들 중에는 그를 시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왜적을 피해 달아났던 경상도 관찰사 김수와의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에 누명을 쓰고 체포, 구금되었다가 초유사(招諭使)로 부임한 김성일(金誠一)이 사정을 알고는 김성일의 특별 건의로 석방된 후, 조선 정부에서는 이러한 그의 의병 활동의 공을 높이 사 같은 해 음력 7월에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에 임명되었다가 비변사의 추천으로 정5품 형조정랑이 되었다.
1592년 음력 10월에는 당상관으로 승진, 절충장군(折衝將軍) 겸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하였고, 10월말에는 무관 품계에서 문관 품계인 통정대부(정3품)로 변경, 임명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음력 4월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고, 음력 12월에는 다시 성주목사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1593년말 조정의 명을 전달받고 삼가(三嘉), 의령(宜寧), 단성(丹城), 고령(高靈) 및 낙동강 일대를 방어하고 무너지거나 파괴된 성곽을 보수, 수리하였다. 성주목사로 재직 중 삼가의 악견산성 등 성지 수축에 열중하다가 그해 12월말 진주목사에 임명, 전근되었다. 곧 경상우도조방장을 겸임되었고, 1595년 초 진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일시 휴전으로 임진왜란이 종식되자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로 돌아와 다시 은둔 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소문이 확산되면서 모함을 받고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체포당하기도 했으나 죄가 없음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그러나 곽재우와 절친한 사이인 의병장 김덕령은 끝내 이몽학의 난과 관련된 누명을 벗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곽재우는 스스로 사퇴하였는데, 이 일로 곽재우는 사실상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되었다. 전황 중에도 그는 꾸준히 서신을 작성, 조정에 장계로 보내 전황을 보고하기도 했다.
1597년(선조 30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이 파행으로 결렬되고 일본과의 전쟁이 재발할 위험성이 커지자 조선 정부의 부름으로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에 임명되었다. 경상좌도방어사로 그는 현풍의 석문산성을 신축하였으나, 산성이 완공되기도 전에 왜군이 근처까지 침입하여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그해 음력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마을에서 일본군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 사촌형 곽재겸 등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쌓고 성곽을 수비하였고, 창녕에서부터 현풍, 달성 일대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1597년 전쟁 중 계모 김해허씨가 사망하였으므로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3년상을 입었다. 상중에 전란은 종결되었고, 전란이 끝난 뒤에는 그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특별 승진하였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경상좌병사로 부임 직후 왜군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그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군사들을 고향에 되돌려 보내고 생업과 농사일에 종사하게 해줄 것을 왕에게 제안하였다. 그러나, 왕이 거절하자 그는 벼슬을 내놓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어부 생활을 하였다.
한편 그는 전쟁을 하며 기묘한 전술로 승리했는데, 적군 군선의 예상 경로를 예측해 해로에 통나무를 띄워 적의 물자 보급을 막았다. 또한, 왜군이 늪지대를 건너기 위해 안전한 곳마다 깃발을 꽂아 군사들이 그 곳으로 지나게 하려는 계획을 알아채고 깃발을 늪지대에 꽂아 늪에 빠지게 한 뒤 활로 쏘아 죽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 다른 병사들에게도 붉은 옷을 입혀 교란 전술을 썼다. 또 보물이 들어있을 것 같은 황금 상자에 벌을 담은 후 길가에다 버려 놓았는데, 이를 보물 상자로 착각한 왜군이 열었다가 벌에 쏘여 죽기도 했다. 이 외에도 이정표를 바꿔 적을 혼란에 빠트리는 등의 기묘한 전술로 나라를 지켜냈다.
1599년(선조 30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계모의 상중이었으므로 사퇴하였다. 동년 9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계모의 상중이었으므로 1개월간 지체하여 10월에 부임하였다. 1600년(선조 33년) 2월 일본과 화친을 할 것을 건의했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추국당하였다.[3]
“ | 곤수는 이미 중임을 받아 병권을 전제(專制)하고 있으니 임의로 버리고 가서는 안 됩니다. 국법이 매우 엄할 뿐더러 신하의 의리로 헤아려 보더라도 결단코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경상 좌수사 곽재우는 적을 토벌해야 하는 의리는 생각하지도 않고 화친을 통하기를 주장하면서 심지어 정백(鄭伯)이 어깨를 드러내고 양을 몰았다는 일까지 인용, 이를 문서에 드러내어 천청(天聽)을 번거롭혔습니다. 그리고는 소장을 올리자마자 진(鎭)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으니 그의 교만하고 패려한 죄를 징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잡아다가 추국하여 율(律)에 의거 죄를 정하소서.[3] | ” |
동년 봄, 그는 병을 이유로 사직상소를 올리고 귀향하였다. 그러나 사헌부 등으로부터 함부로 사퇴하였다는 이유와 전해 부임을 지체한 점 등을 구실로 탄핵을 받아 전라남도 영암으로 유배되었다. 1602년 유배된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해 고향이 돌아와 현풍 비슬산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 남쪽 창녕 창암진 솥바위나루 낙동강변에 정자를 짓고 망우정이라는 현판을 걸고 시문 등으로 소일하였다. 그러나 선조로부터 다시 거듭 출사 요청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년(선조 37년) 초 찰리사가 되었다.
찰리사로 재직 중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 수축과 개보수를 건의하였다. 이어 그해 5월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찰리사직에서 사직하였다. 곧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04년 8월 행(行) 인동 현감(仁同縣監)으로 나갔다가 10월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에 제수되고, 11월 승자(陞者)하여 가선대부 행용양위 상호군에 제수되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한성부우윤을 지냈다. 1605년 2월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된 뒤 동년 3월 한성부 우윤이 되고, 5월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나갔다.
1607년(선조 40년) 3월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말 사헌부로부터 음식을 끊고 도술과 수련에 전념한다는 점을 이유로 여러번 탄핵을 당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부임했다가 다시 행 용양위 부호군으로 돌아왔으며, 1609년(광해군 1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해 광해군은 그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선조와 광해군, 북인 정권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던 그는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에도 왕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고 패랭이 장사를 하거나 솔잎을 먹으며 살았다고 한다. 또한 동문수학하였던 정인홍 등과도 생각이 달랐으므로 그들은 이를 꺼렸다. 광해군 즉위 초 경상우도조방장(慶尙右道助防將)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은 여러번 망우정으로 사람을 보내 관직에 출사할 것을 간청하여 결국 그해 한성으로 상경, 오위도총부의 부총관, 행호분위부호군, 호분위대호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을 지냈다. 이어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바로 함경도관찰사에 임명하여 부임하였다.
함경도관찰사 임기가 만료된 1612년(광해군 4년)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자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조정에서 인목대비 폐모론과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대한 사형 건의가 나타나자 그는 인륜이 무너졌다고 분개하였다. 1613년(광해군 5년) 4월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대북 계열에 의해 영창대군에 대한 탄핵이 있자, 1613년 6월 사직 상소와 함께 영창대군에게 죄가 없다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했다. 이후,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거나 사퇴하였다. 1616년(광해군 8년) 창암강사에서 은거 중 장례원판결사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그 후로도 동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한성부좌윤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나라의 형편이 어지러워지고, 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죄없는 김덕령이 죽은 일 등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을 한다. 당시,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수군통제사 등의 고위 무관직을 제의받았으나 대부분 사양하다 1617년 4월 10일 망우정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하자 갑자기 회오리가 그의 집을 덮쳤다는 설, 신선이 되었다는 설 등이 나돌았다.
글씨도 잘 썼는데 필체가 웅건하고 굵었으며, 시문에도 능했다. 4월 28일 광해군의 명으로 장례비와 장례물품이 조정에서 지급되었고 바로 예관을 파견하여 장사를 지냈으며, 예조좌랑 유약(柳瀹)을 파견하여 장례식을 주관하게 하였다. 사망 당시 향년 66세였다.
1617년(광해군 9년) 사람들은 지역 유림들의 공의로 그를 추모히기 위하여 의령 가태동에 충현사라는 사당을 세웠으며, 광해군 때 그의 사당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숙종은 그의 공적을 높이 사, 1709년(숙종 35년) 증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하고, 다시 충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으며, 그를 주인공으로 한 곽재우전이라는 군담 소설이 있으나 작자나 연대는 알 수가 없다. 그의 유품들은 보물 제671호로 지정되었다.
선조의 비위를 거슬려서 과거 시험에 합격했음에도 낙방되자 그는 관직 진출을 단념한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년) 4월 관군이 왜군에게 전멸당하고 백성들과 동료 양반들은 피난했음에도 스스로 의병을 조직한 점과 관군을 섬멸하고 올라온 왜군을 여러번 신출귀몰하여 물리친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1618년 곽재우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한 사당인 충현사(忠賢祠)가 건립되고 훗날 그 규모가 확장되었으며 광해군이 사액을 내려 예연서원(禮淵書院)이 되었으며, 시호는 한참 후대에 추증되었는데 1709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되고 충익(忠翼)이란 시호가 내려져 충익공(忠翼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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