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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복음 : 마태오 12,46-50
누군가를 내 뜻 안에 머물게 하려면
오늘은 성모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신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께서 3살 때 요아킴과 안나로부터 성전에 봉헌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동정녀들을 성전에서 키우며 메시아의 어머니가 될 것을 준비하던 관습에서 비롯됩니다.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을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제물로 성전에 봉헌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에 봉헌된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봉헌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누구의 집에 살려면 그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집에 봉헌된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봉헌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께서 형제요, 누이라고 하시는 이유는 같은 집에 살기 때문입니다.
같은 부모님의 같은 뜻을 따르기 때문에 같은 집에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에 살려면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집에 나 자신을 봉헌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러면 이제 그분이 내 안에 사시게 됩니다.
하느님이 성모님의 집에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제르뚜르다 성녀에게 예수님은 “네가 내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내가 네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분 집에 살기로 결심하면 그분이 내 집에 사십니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삼위일체 신비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뜻은 성령님이 됩니다.
이 원리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누군가를 나의 뜻 안에 머물게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먼저 그 사람의 뜻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그 사람도 내 뜻 안으로 들어옵니다.
‘일반적으로’라고 말한 이유는, 가리옷 유다처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다는 말입니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50년째 돌 속에 사는 할아버지〉 사연이 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매일 싸우는 부모 밑에서 두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유일하게 그 할아버지를 아껴 주었던 분이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는 산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산 깊은 곳에서 무려 50년을 돌 틈에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바로 밑이 고향이었지만 할아버지는 동물 사료를 훔치러 내려가는 것 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프로그램 제작팀이 할아버지에게 다가갔을 때 할아버지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습니다.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상황이었지만
할아버지는 좀처럼 세상으로 내려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옛 친구분들을 불러서 설득해보려 했지만, 할아버지는 도망쳤습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걱정이었습니다.
이때 이 프로그램 제작진이 항상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사는 움막 옆에 텐트를 치고 무작정 같이 지내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먼저 내려오라는 말보다 당신과 함께 살아줄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 열흘 정도 있다가 보면 숨어 사시는 분들도 마음을 열게 됩니다.
열흘 동안 할아버지가 먹고 마시고 일하시는 것을 함께 하다 보니 할아버지도 제작진의 설득을 받아들여 검사를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할아버지가 드시는 것을 함께 먹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쓰레기를 뒤지며 산에 숨어 사시는 할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함께 머무르며 사는데, 그때는 할머니가 남이 버린 음식으로 만든 것을 함께 먹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그 할머니도 병원 치료받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모든 것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나의 뜻을 강요하기 이전에 먼저 상대의 뜻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상대의 거처에 함께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뜻을 들어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성모님께서 항상 주님의 뜻 안에 머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가족이나 이웃들을 주님께 데려와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뜻을 비치는 것보다 그들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린 후 나의 뜻을 따라줄 수 있도록 호감을 얻어야 합니다.
남이 나의 말을 안 들어준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나도 남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주님이나 이웃들에게 나의 뜻을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들의 집에, 혹은 그들의 뜻에 나 자신을 봉헌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것은 매우 어렵고, 많은 사람의 마음에 들려면 그 모든 사람들의 뜻에 따라주고 있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마태오 12,46-50
<흔들리지 않은 굳건한 신앙의 소유자, 성모님>
성모님의 생애를 묵상해보니 참으로 행복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의 원천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은혜롭게도 성모님은 구세주 하느님을 당신의 태중에 모셨습니다.
몸소 그를 낳으셨습니다.
오랜 세월 그를 당신 품에 안고 고이고이 길렀습니다.
무럭무럭 성장해나가는 소년 예수를 바라보며 참으로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전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구세주의 어머니가 됨으로 인한 남모를 고초와 아픔과 상처가 왜 없었겠습니까?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에 마태오 복음 사가는 우리에게 성모님의 고통과 상처를 살짝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공생활을 위해 예수님께서 출가(出家)하신 이후, 성모님은 어떻게 사셨을까요?
‘아! 이제 내가 할 일 다 했다. 고생할만큼 했으니, 이제 발 좀 쭉 뻣고 편히 쉬자.’하면서, 동네 아주머니들과 계모임도 하시고, 관광도 다니고 그러셨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출가 이후에도 성모님의 안테나는 항상 예수님이게로 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할까? 끼니나 챙기고 다니는지?
누가 힘들게 하는 사람은 없을까?’
늘 노심초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 성모님에게 누군가가 소식을 전해줍니다.
“자네 아들이 미쳤다는군.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지금 목숨이 경각에 다다랐다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성모님께서는 뜬 눈으로 밤을 꼬박 지새우신 후, 서둘러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달려오신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한 사람이 예수님께 ‘아무리 바쁘셔도, 어머니가 오셨다는데, 한번 나가뵈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여쭈었습니다.
둘러서 있던 사람들은 다들 예수님께서는 ‘그래요? 어머니가 나때문에 걱정되셔서 그 먼길을 오셨군요. 나가보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말씀은 꽤나 의외였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오 복음 12장 48~50절)
뜻밖의 반응에 성모님께서는 속이 많이 상하셨겠지만, 기도하고 인내하시면서, 예수님 말씀에 담긴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십니다.
이렇게 성모님의 한 평생은 신비스럽고 심오한 존재, 예수님, 그리고 그분이 던지시는 영적 말씀을 이해하고 헤아리기 위해 끝도 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신 나날이었습니다.
성모신심과 관련해서 항상 경계해야 할 위험요소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겸손과 순종의 여인, 믿음과 봉사의 여인으로서의 성모님 모습은 뒷전에 둔 채 끝도 없는 한 개인의 욕구를 지속적으로 채워주는 기적의 여인으로서 성모님만을 추구해서는 곤란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어떻게 협조하셨는지를 유심히 바라봐야겠습니다.
성모님께서 갖은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유혹 앞에서 어떻게 기도했는지,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 성장시켜나갔는지를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성모님의 가장 큰 업적은 한 평생 하느님의 말씀을 잘 경청했고, 그 말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했고, 그 말씀을 매일의 삶 속에서 꾸준히 실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특별한 기적을 되풀이하는 능력의 여신(女神)이어서가
절대 아닙니다.
우리의 잡다한 소원들을 원 없이 채워주는 완벽한 해결사여서도 아닙니다.
우리를 황홀한 신비로 이끌어주시는 묘한 분이어서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성모님의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신앙을 칭송합니다.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했던 빛나는 믿음을 찬양합니다.
한결같은 자세로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했던 충실성을 공경합니다.
예수님을 잉태하셨을 뿐 아니라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신 분이기에 존경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 안에 성장할 수 있도록 늘 자신을 비워냈던 분이라서 사랑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강론>
(2024. 11. 21. 목)(마태 12,46-50)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6-50)”
1)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구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당신의 가족들과 친척들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하늘나라에서 ‘당신의 참 가족’이 되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인데, 그 나라에서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된다는 것은 곧 구원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라는 말씀은, ‘어떤 사람’이, 또는 ‘어떻게 사는 사람’이
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겠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내 가족이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2)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신앙인들’ 가운데에서 첫 자리에 계시는 분이고, 신앙인들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믿을 수 없는 일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한 말은 모두 인간의 머리로는, 또는 상식적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일들에 관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성모님께서는 그 말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으셨고,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으셨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라는 천사의 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과학을 초월하고,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성모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믿으셨습니다.
동정녀가 남자의 도움 없이 아기를 잉태하는 것,
그 아기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라는 것, 메시아의 나라가 영원하다는 것 등은 인간의 과학과 상식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사실 믿을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죄는 아닌데, 믿지 못하면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그 점에서 성모님은 위대한 신앙인이십니다.
3) 성모님께서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직 결혼을 하기 전이고 동정녀인 자신이 갑자기 아기를 잉태하게 된다는 것은, 성모님의 입장에서는 원했던 일도 아니고,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던 일이었는데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기꺼이 순종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는 응답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니 저도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각자 원하는 일들이 있고,
원했던 일들이 원하던 대로 이루어지면 은총을 받았다고 좋아하고 기뻐하다가, 원하는 일은 안 이루어지고, 원하지 않는 쪽으로만 가게 되면 하느님을 의심하거나 원망합니다.
<좋은 예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인사 발령인데, 만일에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만 가겠다고 고집 부린다면, 교회는 그대로 병들어 버릴 것이고, 하느님의 뜻이 그들을 통해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더라도 기꺼이 순종하는 것, 그것이 성모님을 본받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신자들이 본당에서 어떤 직책에 임명될 때 받아들이는 일, 또는 반대로 그 직책에서 물러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4) 성모님께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서 이집트로 피신해야만 했을 때에도 많이 고통스러우셨을 텐데, 그래도 하느님을 믿으셨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고통을 참고 견디셨습니다.
성모님의 생애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때에, 사도들은 모두 달아나거나 숨어버리고, 다른 여자들은 극심한 슬픔과 고통 속에서 울고 있었지만, 성모님께서는 전혀 흔들림이 없으셨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아마도 성모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예고한 일들이 십자가로 가로막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으셨을 것입니다.
5) 성모님께서는 “믿음과 순종이란 전적인 헌신”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 라는 응답의 말씀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이 말씀은, “종이 주인에게 복종하듯이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뜻이고, 전적인 헌신을, 즉 당신의 전 생애를 모두 바치겠다는 결심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성모님의 믿음과 순종에 그대로(첫 번째로) 적용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