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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시절: 광희동지점 1-3부
점포장: 행우/ 김남현님
정기 인사이동으로 인하여
나는 대리 3호봉 으로 광희동 지점으로 부임하여
점포장님의 계이동명으로 대리 2명과 외환차장 1명 그리고 직원 6명인 외환계로 도장을 찍어서 근무하게 되었다.
가장 적은 수로구성되어있는 국제영업부 외환계(차장1명, 대리3명, 주임들 십여명인) 보다는 숫자적으로 적어서 초라하기 짝이 없었고 자존심 상했던 인사부 사령장이였지만, 순명하지 않을수 없었고, 집이 강동구 풍납동 이여서 출퇴근하기에시간이 짧아서 그나마 새 부임지에 위안으로 삼았다.
외환계 근무첫날 이차장(국제영업부 수출계 전임대리)으로 부터 간단한 거래처 구성 현황과 현실정의 설명을 듣고 더욱 실망하기 시작했다.수출입 목표는합해서 2백만불에 업체들은 대행수입업체 S통상(북창동)과 수출업체는 당시 마스터 네고업체 부거래처였던 B무역과 대부분 영세한 십여개의 로칼 네고업체였다.
그중 다행스러웠던거래처는 외환수익의 삼분지 이 이상을 가져다준 "호텔 신라"의 환전실적이였다. 호텔신라만 아니였으면,광희동 외환계는적자외환점포로 당연히 진즉 문을 닫아야만 했었다.
수출실적을 맞추기위해서 이차장은 국제영업부에 자주 들려서 기존 국제영업부 업체들에게 통 사정해서 불충분한 서류(사후보완)로 실적을 맞추곤 했었다.올라온 결제서류들은 다수량이 사후보완이 였기에 나는 매우 힘들었고,더우기,영세한 업체들은 무역의 첫걸음을 걷는 초보업체들 였기에 은행에서 업무를 가르치면서 서류 작성 하는데 외환초보 학부출신 주임들도 애를먹었고 창구에서 한번 불평을 하면 다른 외환점포로 거래를 옮겨버려서 그래도 울자겨자 먹기로 친절을 베풀면서 우리 실무자 모두는 악조건에 근무를해야만 했다.
옆자석 원대리는행원때 외환경력 및 그간 달구어진 시급점포의 경력으로 인하여 결제하고,업체관리하는데는 초 베타랑급이였다. 우리 두 대리는 섭외등 외출시에는 점포에 남아있는 대리가너것 내것 없이 올라온 서류를 결제하곤 했다. 원대리는 금융쪽의 담당이였기에, 나는 금융쪽은 무뢰한 이였지만 조심스러이 주임에게 질의하면서 금융서류를 결제하면서 또,관련직무서,한은관련 공문서등을 수시로 참조하면서 그쪽의 부족한 금융분야에 실력을 쌓아 가야만 했다.
이러한 어려운외환 점포에서 내가 사고에 휘말리지 않고 살아 남기 위해선, 한달후에, 나는 몇가지 중대한 업무처리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었다.
첫째, 어차피, 시급점포는 원칙되로 결제가 않된다.고로, 변칙을 쓰되,기본은 원칙을 알고 존중하면서 변칙을써야한다.원칙없는 변칙은 사고와 직결한다.
둣째,외환관리법,인증법은 절대로 변칙이 있을수없다. 즉, 상공부 위임사항인 행장도장으로 인증 결제시는 목에 칼이들어와도 원칙을 존중한다.
(본건은 자주 직원들에게 나의 소신을 연수시켰음)
셋째,나는 외환대리 실무자로서, 신용거래액은차장,점장사항 으로서 나는 단지 담보물 관리만 하자 없이 서류만 챙긴다. 주지하시고 아시겠지만, 외환은 전결,승인한도 내에서 사전결제하고사후에 점포장에게 결제를 올리며,
대외 신용장수출관련,송금수표매입이나,수입신용장에 대한 선적서류도착후 대불발생건은 완전히 보증취급과 같은 사항으로 난 그쪽에 더 심도있게 관리해야 된다고 굳게 결심했다.
더욱 더, 중대한 결심은 업무취급 소홀로 내가개인적으로 금전 "변상을 당하면 안됀다..난 가정이 있다" 였다이렇게,마음의 결심을 하고 나니, 불완전한 외환서류도 사후보완에 신경을쓰면서 결제하니 날이 갈수록 마음의 평정도 되찾아 나아졌고 씹급(?) 외환점포에 적응도 잘 되었고 나날이근무태도가
밝아지고 활기스러워졌다..
그러던중에,
어느날 나는이차장하고 S은행에 거래하고 있는 퇴계로 2가에 회사가 있는 U 실업에 섭외를 나가게 되어서 마스터 네고가 한달에 미화 십만불가량 되는것을 알고 매우 유치에 구미가 당겨서 이차장께 부거래를 유치하면 어떠시겠냐고 섭외후에 건의드렸다.
그업체는 중동에양말을 수출하는 자체공장이 없었던 임대가공을 하는 계약에 따라서 수출을 이행하는 직원 7-8명으로 이루어진 중소업체였다. 몇주일후에,점포장의 결정으로 유실업이 광희동에 부거래 외환거래와 당좌일반 거래를 개시해서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아!
유실업이 광희동근무 2년 내내 운명의 작난이 될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다음편에 제 2편을 기대하시길...
● 광희동 지점 2부편
율맥실업은 외환거래가 시작된 후에 곧바로 어느 토요일 오후에
단합대회를 위하여 책임자(대리2명,차장 명)들을 초대해서,
회사직원들과 함께 경기도 어느 한적한
호수가에서 고기투망을 사용해서 피래미 물고기를 잡고, 즉석에서
밀가루를 바르고 해서 싱싱한 물고기 투김을 만들어 먹고 쇄주도 한잔
씩 나누면서 즐거운 오후를 보냈고 ,어둠속에 귀향하면서
제2차를 위하여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가라오케 밴드에
맞추어서 각자가 흥겨운 노래도 한곡씩 선별해서 불렀다.
나의 노래 18번지 "불 꺼진 창" 을 가라오케 밴드마이크 잡고
감질나게 부르면서 춤도 반짝거리는 조명에 맞춰 추면서
서로의 동반자로서 영원한 번영을 위하여 즐겁게 술, 춤과 노래를 함께하면서
즐거운 주말 시간을 흥겹게 보냈었다
잠시 나의 디스코 춤이야기를 언급하고자한다.
입행후 군대입대 하기 전까지 나는 토요일날 집에 귀가해서,
자주 미군방송 AFKN에서 정기적으로 방영했던 흑인들의
디스코 댄싱 "Soul Train" 이란 프로를 즐겨 시청하였다.
흑인 남녀 젊은이들의 과히 환상적인 허리를
360도 자유자제로 변환해가면서
추는 디스코 춤을 즐겨 시청하면서 강력한 음악에 맞추어서
즐기는 모습에 매료되어서 나도 그 몸돌리는 흑인남녀 댄서들시늉을 하면서
연습하곤했다.
젊었던 시절이여서 나의 허리도 그들처럼
거의 따라서 회전시킬 수 있었으며, 직원들도 사석에서 내 춤을 부러워
했다. ㅋㅋㅋ
국제영업부 시절에는, 한미은행에서 명퇴했던"시비 리"하고
토요일 방과후, 제일본점 뒷골목에서 포장집에 들려서
둘이서 쇄주 2홉들이 한병씩을 마시후에,
"가자...가자..돌리려 가자!"하면서
퇴계로 입구 입장료가 무료인 디스코택 에 들려서 근 두시간 신나게
춤추며, 소리지르며,..입장객들 하고 함께추면...완전히 속옷이
땀에 번벅이 되어서 일주일간의 업무스트레스를 완전히 다 풀고
막차 버스를 타고 귀가하곤 생각이 스쳐서 몇자 부기했다.
아! 그 젊었던 그 시절! 그리고 시비 리소식이 궁금하고?
그러나, 나는 음악이 느리고 스로우 템포인 브루스 계통의 춤은
매우 싫어했다! 왜냐면 가슴과 가슴이 맞물려 닿는 불결함에
왠지 할 수는 있었지만 나는 디스코 춤을 더 좋아했다!
그해 가을 추석때에는 유실업에서
놀랍게도 책임자와 창구직원 전원에게
양복표 티켓 한장씩을 돌려서 쥐약표(?) 도 나는 받았었다!
나는 입행후 처음으로 이런 과분한 선물을 받아서
속이 편치 못해서 한달간 설압속에 티켓을 쳐박아 두고서,
결국 무교동에 가서 옷을 한벌 맞추어 입고 있던중에,
일년후에
회사가 부도가 나서 쓰기통에 재수가 없어서 쳐 놓고 말았다.
80년 초반에, 국제유류가 파동이 밀려오기 시작함 으로써
유실업을 포함한 모든 중소무역업체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더우기,수출 네고담당인 나로서는, 옆에서 보아하니,C자금을
취급하고 나면 몇일후에 유실업에서는 담보물건을 은행에
하나씩 제공하고 하는 거래 방식을 훔쳐보았었다.
.즉, 원자재 구매을 하기위해서
로칼 L/C를 발급해주면 은행으로 돌아온 것은 일부는 원재재를
구입하고 나머지 액수는 회사명으로 부동산을
구입해서 은행에 담보물로 제공한것이다.,
율맥실업 무업업체가 부동산업체로 둔갑을했나 의심스러웠다.
그 당시 만해도 나는 금융담당이 아니기에 얼마의 여신
한도를 사용하는지 또 담보내용도 지점에 얼마,몇개나 설정되었느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날이갈수록,회사는 일층 당좌계 교환 돌아온 어음 막기에 고전하기
시작했으며, 그 여파는 마스터 네고쪽으로 자금줄이 이동하기 시작
했으며,선 네고에 나는 압박을 당하기 시작했다.
선네고를정의하고자 하면 아래와 같다~
선 네고!(선화증권 없이 은행자금을 퍼주는 것!)
선 네고!(대리 전결로 집행해서 유사시엔 변상하고 혼자 감옥가는것!)
선 네고!( 윗석에서는 은근히 해주기를 바라며,공개적으론 말을 못함!)
선 네고!( 선 네고에 도장 못찍으면 외환대리 자격이 없다고 함!)
선 네고!(80년도엔 감독기관에서도 묵시적으로 인정함)
선 네고!(해주고 나면 목에 쇠사슬이 업자손에 걸려서 "숨도 제대로
못쉬고 살려달라"고 애걸 복걸하는..순서가 뒷바뀌는 것!)
선 네고(서류보완후 대내서류는 하자를 달고 늦게 결제 올린것!)
회사 자금담당 이차장은 아침 영업개시 시작후부터
옆 보조좌석에 앉아서
오후 3-4시까지 연줄 줄담배를 피우면서 눈치만 살피면서
대기 하면서 업무방해(?)를 해서, 시달리는나의 모습을상황을
함 상상해 보라!
그날! 나는 내 모든 책임하에 3일내B/L 보완조건으로 한다는
굳은 이차장의 구두 약속을 받아내고선,
결제하고 당좌계에 돌아온 교환자금을 막아주었다!
즉,나는 내목에 스스로 쇠사슬의 족쇄를 채워야만 했었다.
3일이 지난후에도,회사는 서류보완을 해 주지 않았으며, 더우기
또 다른 선 네고서류로 당좌계 교환어음을 막아달라고 아침부터
이차장은 서성거리면서....속된말로 감언이설까지...말하면서..
" 울 사장님의 대학동기생이 이재국에 있어서 내가 원하면
미주지역으로 해외발령을 내주겠다"고 유사장이 말했다고 하면서....
나는 대꾸도 않구서...같은 말만 입이 마르도록 했다.
" 보완 서류가지고 와!" "당신은 사나이로서 약속을했잖아!"
그때, 내 나이 삼십초반였지만, 일반 당좌계에서업체한테 당하고
남에게 말못하고 후회한 많은 담당자들을 보아왔다..
한번 자금 틀어 막아주어서...다음에 또 교환들어와서 어제 막아주었던
본전 생각나서 부도대전 못 작성해서 또 빌려서 2차 막아주고 3차에
부도 내어서 종국엔 되로 막을것을 말로 막아서
막대한 변상을 당했던 당좌계 직원들의 처절한 실정을!
보완서류 완결되면 또 선 네고 다시 실행해주는 이방식이내 방식이였다!
보완서류 없이 다시 선 네고는 완전히 밀린 방식이며 은행이 물려,죽는다!
보완서류 약속 못 지킨 업체의 믿음을 어찌 믿고 또 다시 선네고를 해주나?
그날, 나는, 율맥실업 수출담당 이차장을 따돌리면서,
혼자 오후,이른 시간에 점내 밖에 나와서 버스정유장 전화통에서
주임에게 전화해서 "먼저 조기퇴근하니...내 뒷 설압 열쇠를 잠구고
내일 출근해서 나에게 키를 주라"고 말을 남기면서
천호동버스에 올라탓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자 마자, 외환 이차장이 외환대리 집합시켜서
회의중에 날 호되게 나무라질 않는가! 듣고만 있다가 나도 대꾸하면서
"멀 그리 고민하십니까? 싫으면 계이동 시키면 될껄요!!"
그는 "알았다" 고 하면서회의는 끝났고
근무중에 옆 원대리가 어제 선 네고서류에 결제를 해서
부도를 막아 준것을 나중에 난 네고 주임을 통해서,알았었다.
(그 선네고 서류는 영원히 보완이 않되어서 다시 원화대전으로
나중에 매입외환 입금기표 처리했으며,
후에 감독원의 조사 대상이 되었음)
그 주 마지막 토요일 아침에
난일찍 출근해서 서류 정리중에
김점장님께서 잠시 나 좀 보자 하시면서 점장실로 호출해서
점장실로 들어갔더니...
"내일 일요일날 11시에 반포 우리집으로 오라! 이 사항은 극비다!
뉘한테도 말하지 말라 "하면서
점장님집주소를 써서 주면서 말씀하셨다.
몇일전에 이차장하고 언성이 높게 다툰 사항을
점장께서 모두 옆 점장실에서 듣고 계셨음이 분명했다!
나는 은행근무 18년동안 한번도 소속장들 집에 방문한 적이
없었다..남들은 다들 년초에 인사하러 잘들 다닌 것을 보았는데..
나는 괜히 부족한 직원들이 할 짓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는 분 집에 공적이나, 사적으로 방문한 적이 한번도
없어서 내일 일요일날 김지점장님 댁에
방문할 것이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고.....
무엇을 사가야 하는가 한동안 고민하면서
음료수 쥬스 한병을 사들고
다음 일요일날 반포동 점장집 아파트를 향해서 풍납동에서 좌석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다음에 3부가 다시....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광희동 제3편
난생 처음으로 소속장집 방문과, 그리고 한번도 한국서아파트내부 구경을 하지 못했던 나로서는 김점장님 댁이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내내 버스창가 를 보면서 궁금한 생각에 잠겼었다
. 내집 풍납동집은 삼표골제 뒷문 바로 옆에 위치한 37평형단독 주택였기에 일년 내내 골재 모래먼지를 먹고 살았었고,
일년 내내 장독위에 석회가루흰먼지가 부엿게 깔렸었다.
더우기 전체 방4개중 방2개는 각각 따로전세를 주어서 안방과 골방에서 3딸과 우리 부부가 기거하면서 은행주택 대출은행이자와 적금,보험금을 납부하고 나면 매달 적자로서 외상으로 쌀,연탄을 구입후, 다음 월급에 변제하곤 해서 생활고에 매우 시달려야만 했었다.
어느날엔,
동내 친했던 이웃 부인이 우리집에와서 “저기~건너편 국민은행 대리집은 항상 대형냉장고에 고기,생선,과일등이 꽉차 있는데 우리집은 왜?그리 도 초라하고 냉장고가 비어있느냐?” 고 핀찬을 주고 갔다며
울 여보가 나에게 울먹이며 이야기를 해서 나를 매우 우울하게 만들었었다.
나와 비교해서 지점장댁은 얼마나 부유하게 살꼬가 무척 궁금하게 생각되었다.
점장님 댁에 도착하니,
사모님과 자녀들은 외출해서보이질 않했고, 점장님께서"어서오너 라"고 문을 열어주시며 응접실로 안내해주셨다.
응접실엔 미리 방석 두 개가 깔려있었고
그 중간에 작은 상위에 엽차 잔과 흰색깔로 막 데운 주전자가 놓여있었다. 점장님께서 엽차를 따라주셔서 나는 감사히 한잔 마시면서 주위를 옆눈으로 살펴보 니,(집구경을시켜주지 않했음) 가지런히 정리된 가구에 다가 서민적인 장식에 약간은 실망했었다.
한마디로,생각보다는 너무 검소하게 사신다고 생각했고 별로 큰 평수의 아파트는아니였다고 생각되었다.
엽차 차 3잔을 근 한시간 동안 마시면서,점장님은 나를 편하게 대화상대로 하 시면서, 전반적인 외환거래처에 대한 나의 생각을 하나,하나, 업체별로 위험도 측면에서 나의 생각을묻곤 하셔서 나는 솔직하게 내가 현재 생각하고 있는20여개의 광희동 외환거래처를 생각해 가면서 (모범답안 준비없이) 문제점들을 즉석으로 생각하며 말씀을 올렸다!
김점장님께서는 S대출신에 은행경력 및 외환경력이 월등히 높고,연배시고 일개 야전군 대대장님으로서 소위 초년생인 신삥 소대장한테 허심탄회하게 독대하면 서 의견을 청취하시고, 야전전투를 승리로 지휘 하실려고 하시는 그 겸손함에 나 는 존경과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우기,
대대장님은 개인보다는 먼저 단체를 위하여,단체보다는 더욱이 조직을위해서, 투철하고 사고대출 없이 점 포를 하자없이 운영 하실려고 하시는 점장님의 지론에 나는 그 자리에서그의 위 풍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 나는 김점장님께서 외환책임자 미팅 에서 항상 말씀하셨던 주의 권고사항을 잊지 않고 기억중에 있다."아무리 대리라고 해도,"내가 지점장이다"는 Mind 로 또 "내가Owner 다"..그러 니, 업체섭외시에는 심지어는 그 업체의 화장실에 들어가서 화장지가 잘 정리되었는가.. 또 담배꽁초가 바닥에 널려 있나..하나 하나 체크해서 그 업체에 대한 정보로서 마음에 간직하고 평가를 해야한다!!!"는 점장님의 평소 말씀이 나는 아직 오늘까지 내 귀에 반향하며, 나는 평소 근무시엔 그대로실행하며 전투 대대장님께 목숨을 걸고 전투에 승리로 충성하자고 그 당시에 맹세했었다!
마지막으로,유실업에 대해서 나의 관심과 업체에 대한 평가를 솔직하게 말씀드렸으며 요주의 업체 1위라고만 말씀드리고 대다수의 업체가 유류파동으로 언제 넘어질주 모르니..나도 정신차리고 근무하겠다고 마지막으로 말을 올리고 점장님 댁을 빠져 나왔다!
그후,
몇주후에 나는 외환계 대리 계이동으로 금융책임자로 명을 받아서 드디어, 마지막 코스인 금융과 외자관련 업무를 배우게 되었었다! 금융업무는 대 한국은 행의 업무지침서가주종이었고, 담보물에 대한 사항으로 크게 구분되었었다.
나 는 행원시절에 대부시다(보조)는 몇 점포에서 해보았지만,실제적으로 주임업무 는해보지 못해서 처음 몇 달간은 외환 이차장은 나의 업무실력에 분명히 실망을 했을 것이다..이차장은 국제영업부외자통이 아니셨는가!
곧바로,
나는 아래층 금고에 보관되어 있는 모든 업체들의 채권서류를 들고 나와 서 시간중에 내 나름대로 한장씩 한장씩 종이 위에모든업체의 담보현황내역과 기일도래.보험만기일,채권서류만기일,신용보증서 만기도래,신용평가서내용.등 을 부기하면서 일록요연하게내 나름대로 보기싶게 파일을 만들어 나갔다.
그중에서,나는 유실업의 담보내용을 보고 심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본부승인 7억에 담보 5억.신용2억 이라....담보는 무려 보증서 포함해서 물건이16개나 담보로 제공이 되어있지 않는가! 임야,영동에 아파트.주택,빌라.등으로 알짜 담보물로 구성되어 있었다.뜻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는 말처럼 나는 유실 업에대해서는 비상 5분대기조로서 언제 비상이 걸릴줄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며 마음을 굳혀가기시작했다.
몇주후에는 금융업체로서는 유일하게 자체 공장을 가리봉동에 소재한 무역 B업체 가 또,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여공원 근60여명의 섬유업체로서, 광희동이 부거 래인 외환업체였다. 금융이 만기가 도래 되어서 연체가 발생하면 벌써, 그 업체 는 경종을 울리는 것이 아닌가!
연체중에는 모든 로컬거래의 개설이 중지 되어서 사형선고나 다름없고,.. 자금의 흐름이 일단 막히면 자체 회사현금 자금으로 연 체금융을 막아야 하는데(무역업체는 네고해서금융결제를 해야 함이 정상적임) 현금으로 금융을 막는자체는 벌써 무언가 회사가 잘 못 돌아가는 것이었다!회사 를 방문해서 보니..회사는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수출 네고의 지연으로 인해서연 체가 발생된 것을 확인하고 나는 그 회사는 일단 한번의 고비를 넘기면 소생하겠 다는 확고한 판단이 스고 김이사와 진솔한 대화 중에 나는 결심을했다!
편법을 써서라도 살려야 한다..
걸린 신용대출이 이 문제가 아니고 종업원들의 미래가 눈에 떠올 랐다! 나는 Local L/C를 신청서를 받고 발행하고서 직접 들고서 (어제 날자로 소급해서) 김이사와 함께 동대문 모 지점으로 가서 수혜자 명의로 매입 의뢰해 서그 회사 통장에 넣어서 자금을 현찰로 인출해서 마대로 현금을 이송해 와서 곧 바로 지점의 출납에 소급해서, 어제 날자로 입금하고, 연체를 결제 시켰다.,
말하자면,나는 007 작전으로B회사를 소생시켰다!
어느 누구도 내 작전을 지시 하지 않았으며 나는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고 단독작전을 실행했다.
그날 저녁에 김이사는 감사하다며, 삼겹살에 쇄주한잔 사준것을 나도 같이 마시면서 "앞으로 잘 하시라"고 응수했다.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필히 회사에서 촌지를 주는가 보는데.. 나는..절대로..죽어도 업체하고는 돈(쥐약) 거래는 하지 않은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인간적인 마음만 통하면 나는 항상 만족했다.
그리고,나는 자주 문제업체라고 생각되면 회사 실무자하고 퇴근하고 자주일차로 쇄주, 2차로 맥주등을 많이했다. 왜냐면 정보를 얻기 얻기 위해서였다..쇄주에 맥주를 타면 나중엔 횡설수설해져서 회사의 비밀야기가 무언중에 튀어나오고 해서 나도 술취해 미친척하면서 모두 귀담아 들어서.. 그 회사의 정보로 이용을 했기에 과하게 늘 원치 않은 자리에 합석했었다.
나는 속질히 말해서 은행의 안전여신을 위하여 정보원 노릇을 했었다.
그 변칙적인 사건이 있는 후론 B회사는 정상적으 로 잘가동 되었으며, 지점에 일반,외환에 손익면에서 기여도가 높았었다.
몇주간 조용히 잘 나가던 유실업이 드디어, 연체 발생의 위험에 직면하면서외환계는 긴장하기 시작해서 나는 외환계 책임자 미팅시간에 이차장께 건의 올렸다.
“저의 사견 생각으로는 절대 유실업의 금융이자 부담으로 인해서 회사가 지탱하기 어렵 고 그렇타고 해서 수출 실적이 급상승하는것도 아니니,사장님께 종용해서 은행 에 들어온 담보물을 일부 처분해서 금융을 변제해서 금융비용을 축소하면회사가 소생할 여지도 있으니 어떻게 생각하신지? 아니면,유회사의 생존을위해서는 계속적인 보증포션을 늘려주어서 여신확대를 하시던지?" 하면서 감히 건의 올렸다!
나의 솔직한 결론이건데..
수출해서 그 당시 어느 대한민국 무역업체가 채산을 맞 추느냐? 그래서 유실업사장은 부동산을 많이 구입해서 은행에 담보로 넣고 상승 한 차액을 몇 년후에 노리는 술수를 경영전략으로 쓰는 것이 분명하다고생각했다!
나의 제안은 결국 무시되었고..
이럭저럭 회사는 연체를 현금 결제하더니...몇주 후에는 거액 금융액이날자가 도래해서 선적할 물건은 없고..진짜 위기가 와서.. 윗분들은마지막 부도를 낼 작정으로 결심을 해서(로칼 개설중지) 나도 초긴장하며우리는 대기했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에는 본부 승인대출로 서 보증이 2억이 걸렸어도 전행이아니고 승인사항이니 점장 변상의 책임이 없 다고 쉽게 유사시엔 부도 결정되는 것이 은행의 상례였다.
그러나, 이점에서 나의 판단과,경영소신은 달랐다.
승인대출도 불실로 물리면 신용대출액이 은행 에 손실이 되지 않는가!!!
다음날 아침,책임자 미팅시간에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유실업에 대한 마 지막 나의 해결 카드를 건의 올렸다!" 회사도 살고 , 우리 은행도 사는(보증금 회수) 길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지금 부도 내면회사도 죽고 은행도 2억이 물린다. 말하자면 둘다 죽는다.그러니, 둘다 사는 길을 찾고 그 기간은 앞으로 60일이걸립니다!!"
외환계 이차장은 무척 궁금해서
"어서 말해 보라"하시며 날 다구치면서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다음편에 마지막편을 기대하십시요.
83년 점내
남이섬 야유회 당시
외환계 그릅/ 저 멀리
김남현 점장님이
서서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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