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운하의 건설 2】
1902년 6월에 통과된 법안은 파나마지역에 있는 프랑스의 모든 자산을 최고 4000만 달라에 매수할 수 있는 권한을 디어도 루스벨트대통령에게 위임했다.
콜롬비아정부와 체결한 조약에 의하면 미국은 운하를 건설하고 100년 동안 폭 10km의 운하지대를 관리하는 독점적 권한을 갖게 되며 그 댓가로 콜롬비아에 1000만 달라의 금화와 운하통행료 수입에서 매년 25만 달라의 임대료를 지불하기로 되어 있었다. 미국 상원은 1903년 3월,이 조약을 비준했으나 콜롬비아상원은 처음에는 돈을 더 내라고 버티다가 그 해 6월 비준을 거부해 버렸다. 이렇게 되자 파나마 일대에는 콜롬비아에 대한 분노가 일어났고,특히 과격분자의 분노는 대단했다. 그들은 콜롬비아로부터의 독립이 운하건설에 따르는 경제적 혜택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도라고 생각했다.
1903년 11월 3일 미국의 은밀한 지원을 받은 일단의 파나마인들이 혁명을 일으켰다.
그 전날 한 적의 미국군함이 콜론항에 입항했다.
미국의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상륙한 해병대는 콜롬비아군대가 봉기현장인 파나마市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3일 후 미국은 파나마공화국을 공식 승인했다.
1904년 2월에 비준된 조약은 미국이 1000만 달라를 지불하고 매년 25만 달라씩을 내는 댓가로 파나마는 파나미지협을 횡단하는 폭 16km의 운하지대에 대한 주권을 영구히 미국에 이양한다는 내용이었다. 프랑스의 운하회사가 미국측이 제시한 4000만 달라에 운하건설권을 넘기는 데 동의한 후인 1904년 한여름에 미국운하건설단의 제 1진이 파나마에 도착했다.
그들이 프랑스로부터 물려받는 자산은 상당한 것이었다.
프랑스인들은 이미 7800만 입방야드에 달하는 굴착작업을 마쳤고,75km에 달하는 단선철도를 부설했다.
또한 많은 철도차량과 버리고 떠난 엄청난 양의 기계들도 있었다. 그 밖에도 그들이 지난 20년 동안 정성들여 작성한 귀중한 지도,조사문헌,계획서,기록들이 있었다.
이처럼 많은 것들을 물려 받았지만 운하건설은 시작부터 꼬였다. 군인들로 구성된 파나마운하건설위원회는 너무 기구가 방대했다. 워커제독이 위원장이었고 워싱턴에 있던 이 위원회는 운하건설의 사정보다는 미국내의 정치적 압력에 더 민감했다.
미국국민들은 공사가 하루빨리 진척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워커제독은 적절한 준비가 완료되기 전에 공사개시를 명령했다.
그 결과 큰 혼란이 빚어졌다. 찌는 듯이 더운 내륙 산악지대 여기저기에서 낡은 장비로 개착작업이 진행되었는데 파낸 흙을 처리할 방도가 사전에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노무자들의 합숙소는 너무 비좁고 비위생적이었으며,
식량,식수,의료품의 공급량은 위험할 정도로 부족했다.
한편 워싱턴에서는 필수품의 공급을 요청하는 서류가 몇 주일씩 읽혀지지도 않은 채 쌓여 있었다.
이 혼란의 와중에 운하건설 프로젝트의 보건위생 담당 책임자였던 윌리엄 고거스가 있었다.
그는 얼마 전에 아바나에서 근무하면서 특별한 종류의 모기와 두 가지 질병-황열병과 말라리아 간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알아냈다. 프랑스인들이 파나마운하를 건설하려던 기간에 사망한 2만 명 가운데 대부분은 이 두 가지 질병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고거스의 발견은 혁명적인 업적이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가 필요로 했던 지원을 받기 힘들었다.
1904년 12월 고거스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일어났다.
황열병이 창궐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무자들은 공포에 질렸고 집단적으로 건설현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1905년 봄에 이르자 공사는 거의 중단상태에 빠졌다. 신문은 이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일반대중들이나 마찬가지로 초조함과 실망을 느낀 루스벨트대통령은 장교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해체하고 민간인들로 구성된 새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존 F.스티븐스를 새로 공사감독으로 임명했다.
전임자들의 실책을 잘 알고 있던 스티븐스는 즉시 모든 건설공사를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무엇보다도 기초작업부터 단단히 해두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선 질병퇴치라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거스에게 완전한 재량권을 주었다.
고거스는 아바나에 있을 때 모기를 퇴치하기 위한 조직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그는 습지의 물을 빼내 땅을 말렸고,가정의 음료수를 정수했고,건물에 방충망을 설치했으며 모기의 온상인 고인 물에 기름을 뿌려 유충을 박멸했다.
고거스는 파나마에서도 이 방법을 철저히 적용,1906년에 이르자 이 일대에서 황열병은 자취를 감췄다.
1912년에는 노무자의 말라리아 이환율은 11%로 떨어졌다.
(1906년에는 이환율이 82%나 되었다)
스티븐스는 간부들에게 노동력을 확보하는 문제를 일임했는데 그 결과 노동자의 수는 4만 2천 명을 넘게 되었다.
스티븐스가 파나마운하의 건설에 성공을 거둔 중요한 이유는 그가 문제의 초점이 운하를 파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양의 흙과 돌을 효율적으로 제거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데 있다. 전체 프로젝트의 성패를 가름하는 열쇠는 기존의 파나마철도였는데 스티븐스는 이 기존철도를 토대로 현대적인 철도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는 길이 75km에 이르는 이 철도를 복선화하여 열차들이 양쪽 뱡향으로 동시에 달릴 수 있게 했다. 열차들이 컨베이어벨트처럼 움직이면서 사람,기계,공급품을 날랐고 무엇보다도 파낸 산더미 같은 흙과 돌을 운반했다.(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