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믿는 한, 세상과 인생은 허무하지 않습니다
코헬 1,2-11; 루카 9,7-9 /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2024.9.26.
1846년 9월의 어느 날, 김대건 신부는 오는 16일에 참수 처형되리라는 통고를 받고 나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교우들에게 마지막 옥중편지를 썼습니다. 그 서두가 이렇습니다: “교우들,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태초에 천지 만물을 제자리에 놓으시고, 그 가운데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만드시어 세상에 내놓으신 창조주님과 그 뜻을 생각해 봅시다. 온갖 세상일을 곰곰이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습니다. 이같이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 번 태어나서 우리를 내신 주님을 알지 못하면 태어난 보람이 없고, 살아 있더라도 쓸데없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독서는 코헬렛인데, ‘코헬렛’이란 성서의 책 이름이기도 하고 그 책을 쓴 저자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즉, ‘코헬렛’은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코헬 1,1) 즉 이스라엘에서 가장 지혜로운 임금이었던 솔로몬의 명성을 빌려서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전해 내려온 지혜의 가르침을 후손들에게 전해주려던 어느 현자가, 그리스계 정권을 상대로 마카베오 가문이 독립전쟁을 벌이려던 기원전 3세기 경에 쓴 작품입니다. 이 당시 나라의 상황과 백성의 운명은 참담하였습니다. 바빌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이 70년 만에 운 좋게 풀려나기는 했으나, 다시 돌아온 고향 땅에서 그리스 마케도니아에서 생겨난 알렉산더의 군대와 헬레니즘 정치세력에게 또 다시 지배당하는 비극을 맞게 되었으니, 이제는 남의 땅이 아니라 자기 땅에서 종살이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코헬렛이 “모두가 허무로다!” 하고 한탄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 ‘허무’는 나중에 서양에서 유행하게 된 실존적 허무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무조건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절대적 허무가 아니라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또는 “그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는 상대적 허무입니다. 그러니까 김대건 신부의 옥중서한의 서두에도 나오는 것처럼,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 번 태어나서 우리를 내신 주님을 알지 못하면 태어난 보람이 없고, 살아 있더라도 쓸데없을 것입니다.” 하는 의미의 ‘허무’입니다. 사실, 코헬렛 저자가 살던 기원전 3세기 경의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상황이나, 김대건 신부가 활약하던 19세기 조선의 상황이나 비슷했습니다. 권력자들은 무신론을 강요했고, 신앙인들을 박해했습니다. 이런 암담한 상황에서 신앙을 버리고 배교할 수 없었던 신앙인들은 신앙에 의지하며 죽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허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오셨을 때, 지배세력만 그리스에서 로마로 바뀌었을 뿐 똑같이 이런 암울한 상황을 보시고 마치 혼돈 속에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던 하느님처럼, 이제 다시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을 창조하시려는 지향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셨고 이들을 사도로 양성하시고자 방방곡곡으로 파견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드는 마귀를 쫓아내고 허무한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이 걸린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도 주시며 희망에 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고 파견하셨습니다.(루카 9,1-2) 여기서 마귀를 쫓아내라는 뜻은 사회악에 맞서라는 것이며, 치유해 주라는 뜻은 사회악의 희생자를 돌보아서 공동선을 증진시키라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뜻은 사회악을 근본적으로 예방할 수 있도록 최고선을 지향하라는 선교 명령이었습니다.(루카 9,6)
이로 인하여 예수님의 명성은 더욱 더 널리 전국에 퍼지게 되었는데 이 소문을 듣고 당황한 사람은 헤로데 영주였습니다. 곳곳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들을 본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은,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루카 9,7ㄴ)거나,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루카 9,8)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반응들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파견된 제자들은 예수님의 파견 명령에 충실하게 처신하였던 것 같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제자들의 활동을 통해서도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마귀가 쫓겨나고 병자들이 치유되는 기적들을 체험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셨던 성령께서 제자들과도 함께 하셨기 때문이겠지요. 이러한 분위기에서 루카는 몹시 당황해 하던 헤로데 영주의 반응을 전하며 그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고 쓰고 있습니다.
천박할 정도로 물질지향적인 가치관이 팽배해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허무의 세계관’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구마의 사도직을 통해 사회악에 맞서고 치유의 사도직을 통해 사회악의 피해자들을 돌봄으로써 공동선을 증진시키며, 그리고 이러한 공동선 증진 활동이 최고선을 지향하도록 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삶은 허무를 충만으로 바꾸기 위해서 대단히 필요한 일입니다. 선교 활동은 이에 맞서서 사회를 복음적으로 변혁시켜서 허무적 가치관으로 살던 이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하느님을 믿도록 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사회 공동선에 대한 관심은 그러한 노력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한, 세상은 결코 허무하지 않으며 인생은 절대로 허무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미로 충만한 인생이요 세상이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지난 23일에 정의구현사제단이 이 척박한 땅에 진리와 정의의 빛을 비추고자 지난한 노력을 기울였던 반세기를 기념하여 박노해 시인이 보내온 시 ‘다시 새벽에 길을 떠난다’를 들려드립니다. 우리도 허무가 아니라 희망을 품고 다시 길을 떠나자고 다짐합니다.
제 몸을 때려 울리는 종은
스스로 소리를 듣고자 귀를 만들지 않는다
평생 나무와 함께 살아온 목수는
자기가 살기 위해 집을 짓지 않는다
잠든 아이의 머리맡에서 기도하는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우리들, 한 번은 다 바치고 돌아와
새근 새근 숨쉬는 상처를 품고
지금 시린 눈빛으로 앞을 뚫어 보지만
과거를 내세워 오늘을 살지 않는다
긴 호흡으로 흙과 뿌리를 보살피지만
스스로 꽃이 되고 과실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
내일이면 모두가 웃으며 오실 길을
오늘 젖은 얼굴로 걸어갈 뿐이다
다시
새벽에 길을 떠난다
참 좋은 날이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창립 50주년을 축하하며
시인, 사진작가 박노해
첫댓글 참좋은 강론~늘 감사히 보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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