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무엇인가?
요즘 새삼스럽게 드는 궁금증이 하나 있다.
어쩌다 하나님은 별로 신앙적이지 않은 필자에게까지 그동안 여러 차례나 교회건축을 맡겨 오셨는지가 그것이다. 별로 신앙적이진 않아도 내 삶의 모든 것이 그분의 섭리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철썩 같이 믿고 있다. 하물며 그분의 말씀을 가르치는 성전을 건축하는 따위의 막중한 소명이 그분의 허락 없이 내 의지 하나로 맡겨졌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오랜 세월동안 인테리어회사를 운영하면서도 교회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접해보지 못하다가 근 5년 남짓 집중적으로 교회건축을 하게 되면서 동시에 교회라는 존재에 대해 심각한 고민(신앙적인 사람에게는 묵상이 되겠지만...)을 하게 되었다.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도 없이 교회건축에 임한다는 무례를 클라이언트인 하나님과 교인들에게 저지를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스스로 자처한 고민이었다. 그러다가 이 교회건축 전문잡지에 고정칼럼도 맡게 되고 보니 얄팍하게 시작했던 고민이 자꾸 자라 눈덩이처럼 커지고 말았다.
아, 매일 저녁 퇴근하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찾아가는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같은 자식이 기다리는 집처럼, 그렇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삼십년을 한결같이 주일마다 성경책 들고 시계추마냥 오가던 교회라는 곳에 대해서 꼬치꼬치 따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랬더니... 그동안 내가 교회를 통해 배워 알고 있던 교회와, 고민 끝에 새삼 발견한 본래의 교회라는 것에 대한 괴리가 실로 엄청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바람에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진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그 고민의 후유증은 벌써 몇 주 째나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집구석에 틀어박혀 TV앞 소파위에서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게으른 나 때문에 덩달아 당신의 거룩한 교회 문턱에도 못가고 마신 내 안의 하나님께 ‘무한도전’같은 하찮은 구경이나 시켜드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10년 남짓 열심히 출석했다고 안수집사라는 허울까지 하사해준, 한 주만 못 봐도 눈에 아른거리는 사랑하는 지체들이 우글우글한 우리 교회인데도 말이다.
술.담배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술.담배를 신앙의 잣대로 삼는 교회풍조가 못마땅한 나머지, 보란듯이 술.담배를 피워대며 ‘술.담배가 어때서?’ 하고 들이대는 치졸한 반항처럼, 교회만을 성스러운 성지로 왜곡시키며 하나님 만나려면 교회로 와야만 된다고 가르치는 교회에 반항하기 위해서 집구석에 앉아 ‘하나님이 어째서 교회에만 있는데?’ 하고 따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긴 하지만 아직은 몸도 마음도 편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와중에 받은 원고독촉이니 속 시커먼 걸 감추지 못하는 투명한 비닐껍데기를 쓰고 사는 필자에게서 무슨 점잖은 글이 나오겠는가? 기자님이 날을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 잡지의 고상한 권위를 지키기 위해 혹시 몽땅 편집해버리고 필자와의 인연을 끊는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내친김에 오늘은 정말 ‘교회’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한번 얘기해보고 싶다.
그래, 교회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인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유일하신 아들(우리는 그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인데...) 예수그리스도 부자를 찬양하고 경배하고 떠받드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그런 예배를 누가 가르쳤는가?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런 예배를 가르쳤는가? 눈을 씻고 아무리 성경을 봐도 예수께서는 어느 한 구절에서도 교회 안에만 하나님이 거한다고 말씀하신 적도, 예배는 하나님과 예수 자신을 찬미하고 숭배하는 것이라고 시킨 적도 없다. ‘부모가 어떻게 자기에게만 찬양하고 극진히 떠받들라고 가르치느냐, 그냥 자식이 알아서 효도하는 거지...’ 뭐 이런 논리인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른다는 것이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복을 비는 따위의 숭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으로 드리는 ‘산제사’를 말씀하셨지, 교회당 안에서 드리는 죽은 제사를 권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거리와 회중이 모인 곳에서 기도하는 이들을 가리켜 ‘회칠한 자’라고 까지 꾸짖으셨다. 그런데도 교회는 모든 교인들의 얼굴에 회칠을 시키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를 내고, 설문지에 ‘기독교신자’라고 잉크자국을 남겨야 하나님의 아들인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다고 목사님께 허락받아야하고, 허락받았다는 의미로 세례까지 받아야만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가? 하나님과 예수님이 교회처럼 그렇게 유치하고 쩨쩨한 분이라고 믿게 하고 싶은 것인가?
일개 보통사람인 나도 내 아들이 혹시 나를 몰라보고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아도 내 아들임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이?
일개 보통사람인 나도 모든 사람이 먹고 살 영원한 양식이 내게 있으면 한사람도 빠짐없이 나눠줄 생각을 하지, 내 앞에 줄 서서 내게 “오빠, 오빠” 부르는 사람들에게만 나눠 주는 몰상식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 같다. 하물며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열어놓은 창문으로 구원의 빛은 비취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일진대, 모든 사람들의 삶은 곧 예배가 되고, 모든 사람들의 모임은 교회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단지 ‘아직’ 모르는 것뿐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모를 뿐이고, 자신이 예수께서 열어놓은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모를 뿐이고, 자신 안에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사신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의 모든 조각들이 예배가 되는 것이고, 그렇기에 자신의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그리고 예배답게 가꿔야하는지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교회는 그것을 알려주는 곳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해 주는 곳, 자신이 이미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자신 안에 언제나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곳이다. 진실, 곧 뻔한 것을 알려주는 곳이 교회일 뿐이다.
목사만 특별히 기름부음 받았고, 목사의 안수기도가 특별히 효험이 있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호도하는 것은 미신이나 무당들이 하는 짓이지 결코 교회에서 들을 말씀이 아닌 것이다. 어째서 옛 유대인들의 미개한 제사흉내를 내는 것이 예수께서 가르쳐준 예배방식이라는 것인가? 우상을 섬기면 안 된다며 돌아가신 제 부모에게까지 절도 못하게 가르치면서, 정작 그 많은 교회들은 왜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꼬락서니를 하고 있는가?
교회가 본연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교회의 본래 모습은 예수님의 행적을 좇는 것이다. 예수님의 흉내라도 내면서 예수의 제자임을 자처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난한 이웃에게는 눈길 한 번 주는 것도 인색해하면서, 부자들의 개업식과 추도예배에는 문턱이 닳도록 떼 지어 몰려다니는 것이 제자에게 분부하신 예수님의 명이었는가?
계산대로라면 부자들이 많아야 교회가 크게 성장할 수 있다. 건물을 더욱 크게 지을 수 있고, 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교회 재정도 풍성해져 다시 더 큰 교회도 세울 수 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할 수 있다.
더, 더, 더....교회는 더 크게, 사람은 더 많이...
이게 예수님이 교회에 시키신 지상과제인가? 아니다! 그 반대다.
땅 끝까지 가라고는 하셨어도 교회당 안에 끌어 모으라고는 하지 않으셨다.
교회가 예수님이 시키지 않은 짓을 하고 있다면 더 이상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면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교회가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않으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는 얘기다. 집에서 가족들이, 회사에서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벌이고 있다면, 그래서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그게 바로 진짜 교회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진짜 교회다.
대부분의 교회는 처음 시작할 때만큼은 순수한 믿음과 열정으로 세워진다. 창업이 그렇듯 숱한 어려움을 감당하려면 그런 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거대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습이나, 세습을 세습처럼 보이지 않도록 아들목사님에게 수백억짜리 큰 교회하나 지어주는 따위의 변태적 교회에는 해당되지 않겠지만...
하긴 세습이야말로 가장 교회적이라고 구약을 들먹이며 제 아들에게 세습시키는 낯 두꺼운 대형교회 목사님도 있다. 변태적 교회의 공통된 특징은, 자행하는 모든 모순과 독선을 성경적이라고 우기는데 있다. 다윗도 그랬고, 솔로몬도 그랬다고 우기지만, 정작 예수님의 뜻과 정반대라는 말은 꿀꺽 삼킨다.
아무튼 많은 교회들이 순수한 열정과 사명감으로 시작은 했지만 조금씩 교인이 늘어나고 어느 정도 규모가 생기면, 그런 덜 떨어져 보이는 추상적 신념보다, 능률적이고 체계적인 관리에너지가 필요하게 된다.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 크기를 유지시키기 위한 관리체계는 더욱 견고해져야 하고, 견고해지기 위해 전혀 하나님답지도, 예수님답지도 않은 형식들이 교회 안의 질서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런 형식 우선 논리에서는 내용의 순수함과 진정성은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그 커지고 싶은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에 작고 낮아져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예수의 말씀쯤은 안중에도 없어지고, 솔로몬처럼 교회 규모의 창대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부추기며 온 성도들을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그리고는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역할이 있다고 주장한다. 자기들의 거대화되는 몸집 때문에 주변의 작은 교회들이 동네 가게들처럼 하나씩 문을 닫는 것은 내 알바 아니라는 식이다. 모든 것은 대를 위해서 소가 희생되는 것이 마땅한, 변질된 예수정신으로 핑계대면 다 넘어간다. 예수라는데....
큰 교회를 위해 작은 교회가 희생되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부자들을 위해 가난한 자가 희생되어도 좋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부자들은 부자들끼리 모여 살게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끼리 모여 살아야 서로 다투지 않고, 자존심도 상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고마운 정책을 펴는 곳이 바로 대형교회의 부자장로님을 대통령으로 모시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그래서 서울 땅은 전부 재개발시켜 아파트 짓고 철거민들에게 이사비용까지 대주면서 어디로든 알아서 너희들끼리 살 곳을 찾아 가라는 친절한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이다.
교회 걱정이 나라 걱정으로 빗나갔다. 다시 교회로 가서, 이렇듯 대형 교회는 필연적으로 작은 교회를 먹잇감으로 하고 있다면, 그래서 내가 지금 큰 교회건축을 원하는 것이 작은 교회들을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라면, 정말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을 아프시게 하는 행위가 교회에서 일어난다면 교회라는 간판을 떼고 기업, 그것도 악덕기업으로 다시 써 붙여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교회가 되더라도 반드시 대형교회를 일구고 싶은 야망(사명은 아닐테니까)을 가지고 계신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은 어쩌면 교회보다는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싶다. 잘하면 대통령도 될 수 있는데...
교회건축을 해서 밥 먹고 사는 필자의 입장에서 어쩌면 마음에만 품고 입에 담지 말아야 할 소리들을 떠벌린 것 같은데, 어찌됐든 속이 다 후련하다.
대형교회? 앞으로 수주 안 하면 그만이지!
우리 회사에서 수주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것이 룸싸롱과, 도박장과, 러브호텔 외에 한 가지 더 늘었다. 까짓 수주에 연연하지 않아도 밥 먹고 살게 해 주실 분이 있는데 무얼 걱정하랴!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가?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시는 당신이 바로 교회다.
당신이 거룩하고, 내가 거룩하다. 거룩한 당신과 내가 만나는 곳이 교회다. 거룩한 당신과 내가 교회에서 만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하자.
(주)빅터하우스 대표이사 박종성
첫댓글 잡지사가 배짱이 없어 못실었다고...한번만 더 검토해서 보내주면 다음호에 싣겠다는군요.^^ 혹시 고칠 부분이 있으시면 도와주세요.
하느님과 교회에 대해 바로 알릴 배짱 없는 잡지사에 무엇을 기대하고 계시지는 않지요? 잡지에 실리지 않아도 여기서도 잘 나누고 퍼 나르기도 할테니까요...
고맙습니다. 교회에 대해 생각을 또 다시 곧추세웁니다.
불편한 진실...아루나님의 글에 동감 합니다...정말 마음이 아픔니다...예전부터 항상 의문이였습니다..대부분의 사역자들은 왜 진실을 말해주지 안는지...진짜 모르셔서 말씀을 안해주시는건지 알아도 외면하시는건지...
아프겠다~ 나도 너도~ 그래도 아픈만큼 성숙해 지겠지요 나도 너도~?
노미오 님과 같은 고민을 늘 해 왔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교인들과 함께 나눌 수 없다는 게 답답하고 가슴 아픕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또 하나의 교회인 저를 돌아보고 성찰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