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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윤봉길기념관 재단장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더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29일 중국 상하이시 훙커우구 루쉰
공원 매헌기념관 광장에서 한국과
중국 정부 대표단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윤봉길 의사 의거 83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윤 의사가
조국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낭독됐다.
루쉰 공원은 윤 의사가 1932년
일왕 생일과 전쟁 승리를 축하하던
일본군 장성들에게 폭탄을 던진 장소다.
이곳에선 매년 의거일(4월 29일)에
맞춰기념식이 열린다. 올해는
매헌기념관이 6개월의 보수를 거쳐
새로 문을 열었다.
매헌은 윤 의사의 아호(雅號)다.1994년
중국 정부가 65㎡(약 20평) 남짓한 부지
를 제공해 설립된 매헌기념관은 그간 전시
물이 낡고 자료가 부족해 윤 의사의
정신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보훈처는 훙커우구 측과 협력해 작년
말부터 1억5000만원을 들여 개·보수에
나섰다. 공원 입구부터 ‘윤봉길 기념관’이
란 한국어 안내판을 걸고, 윤 의사의 업적
과 일대기를 다룬 영상물과 옥외 전시물을
제작했다.
중국 정부 역시 기념관 주변 부지를
2500평까지 늘려주었다. 양국 정부가
직접 나서 기념식을 가진 것은 처음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루쉰 공원은 중국의
문호인 루쉰의 묘역이 있는 곳이어서
중국인들에겐 매우 중요한 장소”라며
“중국 정부는 윤 의사의 정확한 폭탄
투하 위치에 대한 연구를 허용할 만큼
우호적으로 변했다”고 했다.
기념식에 참석한 윤 의사의 친손녀인
윤주경 독립기념관장은 “상하이 의거는
단순히 일본으로부터의 독립뿐 아니라,
비도덕적 제국주의에 항거한 점에서 세계
적 평화 연대 운동의 출발로 삼을 수 있다”
고 했다.
▶2012년 6·25 마지막 승전 전투영웅
故 김한준 대위 육군장 별세
▶2012년 이한림 前 건설부 장관 별세
▶2011년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2세의
장손인 케 임브리지 공작월리엄이 평민
29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의 세기의 결혼식이 열렸다.
29일 치러진 윌리엄 왕세손과 캐서린 빈의 결혼식은 단순한 왕실 결혼 이상이었다. 찰스 왕세자와 고(故) 다이애나 결혼 이후 30년 만에 세계인의 이목이 영국왕실에 집중된 순간이었다.
'저물어가는 나라' 영국은 이 결혼식에 전통과 품위, 현대적인 감각을 더했다. 결혼식은 절차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영국 성공회의 특징을 잘 보여줬다. 악단, 합창, 사진, 케이크, 공군기, 결혼식 환영회 등 각 분야에서 영국 문화의 정수(精髓)를 보여줄 최고들이 이날 오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집결했다. 세계 각국 언론이 모여들었고 유튜브 등 새롭게 등장한 소셜 미디어들도 영국 왕실의 결혼식을 세계에 중계했다.
런던 거리에 나온 수십만 시민들과 외국인들은 이날 동화 같은 신데렐라 스토리의 완성을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결혼식을 마친 왕세손 부부를 태운 마차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떠나 버킹엄궁까지 이르는 약 15분간 런던 거리는 열광과 환호 소리에 파묻혔다.
이날 오전 10시 15분 붉은 군복을 입은 신랑 윌리엄 왕세손이 동생 해리 왕자와 함께 벤틀리 승용차를 타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향하면서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1997년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다이애나 빈의 장례식도 여기서 열렸다. 당시 어머니의 관 앞에서 울먹이던 15세 소년은 이날 같은 장소에서 '결혼서약'을 했다.
영국 왕족, 세계 50여 개국 정상 등 하객 1900명은 오전 8시 15분부터 식장에 입장해 신랑 신부를 기다렸다. 이들은 이 귀한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휴대폰을 꺼내 결혼식장 주변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오전 11시 결혼식이 시작됐다. 캐서린은 주례를 맡은 영국 성공회 수장 로완 윌리엄스 대주교 앞에서 "윌리엄을 사랑하고 위로하며 존경할 것"이란 '결혼서약'을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주례의 성혼선언이 끝난 후 캐서린은 성당 입구에 있는 무명용사 묘비를 지나 윌리엄 왕자와 함께 사륜마차에 올라탔다. 이 마차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국빈을 맞이할 때 쓰는 '스테이트 랜도'로 1902년 제작됐다. 1981년 찰스 왕세자와 고(故) 다이애나 빈도 결혼식 후 퍼레이드를 할 때 이 마차를 탔다.
12시 23분 신랑 신부를 태운 마차가 버킹엄궁으로 들어가고 1시간 뒤, 신랑 신부가 버킹엄궁의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자 힘찬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첫 키스가 너무 짧다며 사람들이 "다시 한 번!"을
외치자 부부는 좀 더 길게 입을 맞춘 뒤 환하게 웃었고, 결혼식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발코니 키스가 진행되는 사이 영국 공군기들이 버킹엄궁 상공을 축하 비행하는 이벤트로 결혼식은 끝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언가 아쉬운 듯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런던 거리 2000여곳에서 열린 스트리트 파티에서 샴페인을 마시고 케이크를 먹었다.
▶2010년 '천안함 46용사'에 대한 합동
영결식이 침몰사고 34일째인 29일 엄숙한
분위기 속에 이 명박 대통령과 유가족1 천
400여명을 포함해 2천 8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결식이 진행됐다.
▶2009년 롯데백화점, 중국에 첫 단독 진출 -
2011년 텐진에 개점.
▶2009년 '한국산업은행 민영화 법안'
국회 본회 의 통과.
▶2009년 대한민국에서 4월 29일 재
보궐선거가 국회의원 5곳(인천 부평구을,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
사전편찬 위원회는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2004년 캄보디아장로교공의회 직영
신학교 캄 장신 설립 결의 맞아 자작한시
(漢詩) 번역서 출간
▶2004년 박태영 전남지사 투신자살
▶2004년 윤봉길 의사 의거 72주년 맞아
자작한시(漢詩) 번역서 출간
매헌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일왕 생일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진 의거가 72주년을 맞는 2004년 4월 28일 윤 의사가 자작한 한시(漢詩) 번역서가 출간됐다.
윤 의사가 의거 하루 전인 1932년 4월 28일 의거 장소를 사전답사하고 지은 한글시 ‘훙커우 공원을 답청(踏靑)하며’는 그 같은 대사를 앞둔 스물네 살 청년의 놀랍도록 침착한 모습에 더해 서정이 가득하다.
“처처(凄凄)한 방초(芳草)여/ 명년에 춘색(春色)이 이르거든 왕손(王孫)으로 더불어 같이 오세// 청청(靑靑)한 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고려강산에도 다녀가오// 다정한 방초여/ 금년 4월 29일에/ 방포일성(放砲一聲)으로 맹세하세.”
‘시인 윤봉길과 지인(知人)의 서정시 340수’(역사공간, 진영미·김승일 역)가 의거 기념일을 맞아 출간돼 서정 시인으로서의 윤 의사의 면모를 드러냈다. 이 번역서는 보물 568호로 지정돼 충남 예산의 윤 의사 생가인 충의사에 전시 중인 시문집 다섯 편 중 ‘명추(鳴椎)’ ‘임추(壬椎)’ ‘옥타(玉唾)’ ‘한시집(漢詩集)’에 수록된 한문 시들을 처음 우리 말로 번역한 것들이다.
국민대 국사학과 장석흥 교수는 “많은 시들이 서정적인 인간애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윤 의사가 펼친 의열투쟁의 본질이 테러리즘이 아닌 인도주의에 바탕을 둔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평가했다.
▶2004년 애국지사 장봉숙 선생 별세
▶2004년 다목적 실용위성 `아리랑 2호`
본체 핵심부품 국산화 작업에 성공, 세계
최고 수준의 고정밀 관측 가능
세계 최고 수준의 고정밀 관측 가능
아리랑 2호에 장착된 카메라는 지상의 가로, 세로 약 1m 정도의 물체를 하나의 점으로 인식하여, 자동차와 도로 등의 다양한 지형지물의 식별이 가능하다. 아리랑 2호의 영상자료는 국토모니터링, 영상지도제작, 농작물 작황 분석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고 있다.
발사 준비를 위해 페어링에 탑재된 우리나라의
지구 관측 위성 아리랑 2호.
▶2003년 근무중 얼굴흉터 남녀보상
똑같도록 국무회의 시행령 개정
▶2003년 ‘제2건국위원회’ 4년 6개월 만에 해체
2003년 4월 29일 제2건국위원회가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제8차 전체회의를 열고 ‘활동마감’을 공식 결의했다. 1998년 10월 김대중정권하에서 출범한 이후 4년6개월 만에 깃발을 내린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8년 광복절 축사에서 ‘제2건국운동’을 주창한 뒤, 그해 10월 창립된 제2건국위는 전국 205곳의 추진위와 1만명의 추진위원을 두고 있으나 성과가 없어 존폐 기로에 몰렸었다. IMF환란 극복에 온국민이 힘을 쏟고 있던 1998년 9월, 대통령 말 한마디로 제도·의식·생활 등 3대개혁을 하겠다며 제2건국위가 출범했다. 그러나 곧 제2건국위는 정책 과정 수행 중 관(官)을 뒤에 두고 민(民)을 앞세우는 대중쇼의 대표적인 단체라는 비판을 들어야했다.
이날 회의는 각계 원로와 주요인사들이 대거 참여해 당당하게 출범하던 때와는 달리, 교수들과 시민운동가들이 대거 불참하는 등 참석 대상 500여명의 위원들 중 300여명만 참석했다. 제2건국위의 해체를 두고 4년 반 활동 내역에 대해 철저한 감사와 엄정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2001년 내리교회 이주석 선교사 말레이시아,
조호바루로 파송.
▶2001년 중국·러시아 신조약 의정서 교환.
▶1999년 여성산악인 지현옥,
안나푸르나봉 등정 후 하산 중 실종
여성산악인 지현옥이 1999년 4월 29일 안나푸르나봉을 등정하고 하산하다 실종됐다.
지현옥은 1959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청주 서원대 미술교육학과에 입학하면서 산과 인연을 맺었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전문 산악인의 길로 들어서 1988년 한국 여성 최초로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를 등정했고, 1989년 안나푸르나(8,091m), 1990년 캉첸중가(8,586m) 원정에 참가했다.
1991년에는 서원대 산악부 원정대장으로 나서 우리나라 산악인 최초로 중국 쿤룬산맥의 무즈타그아타(7,546m)를 등정했으며, 1993년 5월 10일에는 ‘한국여성 에베레스트원정대’의 등반대장을 맡아 최오순, 김순주 대원과 함께 마침내 히말라야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에 올랐다.
1997년 가셔브룸1봉(8,068m)을 등정한 데 이어 1998년에는 세계 여성 최초로 가셔브롬2봉(8,035m)을 단독 등정했다. 이때까지 그녀는 한국 여성 산악인으로서 히말라야 고산등반에 관한 한 독보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1999년 4월 29일 엄홍길 대장과 함께 캠프3을 떠나 안나푸르나 정상에 올랐으나 하산 도중 해발 7,800m 지점에서 실종됐다. 그녀의 나이 40세였다.
지현옥이 실종되기 이전까지 국내 여성 산악인 가운데 한 번 또는 두 번 정도 고산 등반을 해본 사람은 있지만, 그녀처럼 지속적으로 고산 등반을 추구해 온 여성 산악인은 없었다. 그녀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실종 후인 1999년 가을 ‘올해의 산악인상’을 수상하고, 2000년엔 체육훈장 백마장을 받았으며, 2012년엔 대한민국 산악계를 빛낸 50인에 선정됐다.
서원대학교 내에는 그녀의 흉상이 설치되어 있으며 충북산악연맹은 그녀의 뜻을 기리고 추모하기 매년 추모제를 열고 있다. 그녀가 대학 산악부 시절 주로 훈련한 장소였고, 가장 좋아했던 문경 조령산 정상에는 그녀의 추모비가 있다. 이 비는 서원대 산악부에서 세운 것이다.
▶1997년 화학무기 금지협약(CWC) 발효
▶1992년 LA 흑인폭동으로 58명 사망, 2천383명 부상
1992년 4월 29일부터 미국 LA지역을 무법천지로 몰아넣은 흑인폭동은 미국 사회의 암적 요소인 인종간 불평등과 상호갈등이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LA 폭동은 ‘로드니 킹 사건’이 촉발했다. 흑인청년 로드니 킹을 백인 경찰들이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현장이 TV로 공개되면서 피소된 사건이다. 하지만 흑인은 한 명도 없이 백인 10명을 포함한 배심원 12명은 4월 29일 경찰관들에게 무죄 평결을 냈다.
이날 저녁부터 흑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주방위군 6000명과 연방군 1000명이 사태를 장악하기까지 58명이 사망하고 2,383명이 부상했으며 3010명이 연행됐다. LA 폭동은 근본적으로 백인 주류사회에 대한 증오의 폭발이었다. 인구 12%를 차지하는 흑인들은 열악한 생활여건에 시달려왔다. 흑인 가구당 수입은 미국 평균치의 60%밖에 안되고, 실업률은 2배를 넘었다. 25년 동안 공화당 행정부 아래 지속된 ‘가진 자만을 위한 보수적 인종정책’이 갈등을 부채질했다. 그로인해 교포들만 애꿎게 집중적인 화를 입었다. 재산피해 3억달러로 총 피해액 5억500만달러의 절반을 넘었다.
흑인촌도 불사하는 억척스러움이, 그리고 흑인촌에 코리아타운이 인접한 게 ‘죄’였다. 코리아타운은 폭도들에게 초토화됨으로써 북쪽 백인 주택가에 불똥이 튀지않게 하는 방화벽 구실을 했다. 미국 언론은 경찰력이 보호해주지 않는 가게를 지키려고 총격전도 불사하는 한인들을 클로스업하면서 사태를 한-흑갈등으로 보도하려는 경향마저 보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한인사회의 성숙한 적응규범과 화합윤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반성을 일깨우기도 했다. 흑백갈등은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로 남아 있다.
▶1991년 남북단일팀,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우승
1991년 4월 29일 남북이 하나 되어 세계를 제패했다. 이날 일본 지바현(千葉縣) 닛폰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체결승전. 최초의 남북 단일팀인 `코리아`가 7000만 동포의 관심 속에 녹색테이블의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대는 대회 9연패를 노리는 중국이었다. `마녀` 덩야핑이 버티는 `철옹성`이었지만 출발은 상큼했다.
제1, 2단식에 나선 유순복과 현정화가 덩야핑과 가오준을 각각 꺾어 2-0으로 앞서 나갔다. 다음은 환상의 복식조 이분희-현정화. 남북 단일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믿었던 현-이 조는 덩야핑-가오준 조에 2-1로 역전패했다. 이어 현정화도 제4단식에서 패해 2-2로 승부는 원점.
마지막 단식에 나선 유순복의 어깨에 `코리아`의 우승여부가 걸렸다. 유순복은 변칙공격의 명수 가오준과의 첫 세트를 과감한 백드라이브로 21-19로 이겼다. 유순복은 2세트도 13-17로 끌려가던 경기를 21-19로 뒤집으며 승리, 코리아팀에 감격적인 우승을 안겼다.
단체전 우승은 1973년 사라예보 승전보 이후 18년 만이었다. 시상식서 한반도를 그린 `단일기`가 오르고, 단일팀 단가인 아리랑이 연주되자 1000여 응원단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코리아팀 우승은 남북이 하나되어 이룩한 쾌거였고, 남북청소년축구 단일팀 출전으로 이어져 한반도 화해무드 조성에 큰 몫을 했다.
▶1989년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세르지오 레오네 사망
▶1987년 시화지구 간척사업 착공
▶1986년 고리원자력발전 4호기 최초 발전
▶1985년 서울서 태평양경제협력회의 개막
▶1982년 폴란드, 구속자 1천명 석방
▶1981년 언론중재위원회 업무 개시
▶1980년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사망
최고 흥행작 <사이코>촬영 당시의 히치콕
영화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이 1980년 4월 29일, 81세로 미국에서 타계했다. 히치콕은 독창적 영상기법으로 현대인들의 불안·공포 심리를 세련되게 다뤄온 영상의 마술사다.
몇 가지 점만 유념하면 대번에 그의 영화임을 알 수 있는 것도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다. 카메오와 맥거핀)MacGuffin) 기법이 등장하는 서스펜서 스릴러, 게다가 미남배우와 금발의 여배우가 주연을 맡고 흑인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100% 히치콕 작(作)이다. 히치콕은 150kg의 거구이면서도 자신의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는 것을 즐겼고, 줄거리를 좇는 관객들이 헛다리를 짚도록 속임수를 쓰는 맥거핀 기법도 보편화시켰다.
1899년 영국에서 태어난 히치콕은 1925년 ‘기쁨의 정원’ 으로 데뷔해 1976년 ‘가족의 음모’ 를 찍을 때까지 52년 동안 53편의 장편 극영화를 남겼다. 무성에서 유성영화로, 흑백에서 컬러영화로 20세기 영화계를 풍미한 당대 최고의 감독이었다. 그는 배우에 대한 거침없는 독설로도 유명하지만 히치콕 영화에 대한 논문의 제목을 모아놓은 책이 발간될 정도로 영화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21세기까지 이어오고 있다.
▶1980년 동양 최대의 대웅전 `설법보전`
충북 단양 구인사에 세워져 낙성
▶1980년 부산 동국제강 종업원 1000여명 임금,
상여금 인상 요구 농성 끝에 방화, 파괴
▶1979년 서울서 제8회 세계여자농구대회 개막
▶1978년 고리원자력발전 1호기 상업운전 시작
국내 첫 원자력발전소인 부산 기장군 한국전력 고리원자력본부의 고리원전 1호기가 1978년 4월 29일 상업운전에 들어갔다.
고리원전 1호기는 87개월에 걸친 공사끝에 1978년 7월 20일 준공됐으나 당시 심각한 전력난 해소를 위해 준공전인 이날부터 상업운전을 시작하게 됐다.
외자 8백40억원 등 총 1천5백60억원의 공사비가 든 고리원전 1호기는 발전 시설용량 58만7천kw의 가압경수로형으로서 당시 국내 기술이 전무해 미국의 웰코사가 전반적인 건설책임을 지고 원자로 설비와 연료공급을 맡았고 영국의 제너럴일렉트릭사가 터빈 발전기 공급과 토건공사의 감독을 맡았다.
우리나라는 고리원전 1호기 가동으로 세계에서 22번째 원전보유국이 됐다.
- 국내 원자력 발전 현황
1 운전/건설 중인 국내 원자력 발전소의 위치
2 고리 원자력발전소 3 영광 원자력발전소
4 울진 원자력발전소 5 월성 원자력발전소
한국 원자로의 구조도 (PWR - 가압경수로형)
한국형 원전 APR 1400의 내부단면도
▶1975년 주월(駐越) 한국대사관 사이공 철수
1975년 3월 월맹군이 베트남에 대해 총공세를 감행한다. 티우 대통령이 하야(4월21일)하고 베트남 전역이 무법천지로 돌변하면서 주월(駐越) 한국대사관도 철수준비를 서두른다.
4월26일, 한국에서 파견한 2척의 LST함에 교민들을 실려보내 1차 고비는 넘겼지만 상황이 급박해지자 4월28일, 한국 대사관은 전원철수를 결정한다. 국기를 내리고 통신기기와 비밀서류를 소각했다. 100여 명이 탄손누트 공항을 통해 빠져나갔다는 소식이 전해져 희망을 주었으나 곧 공항도 파괴돼 의지할 것이라곤 미군 헬기 뿐이었다.
29일 날이 밝았다. 집결지는 미 대사관 후문 헬기장. 이미 3000여명의 각국 난민들로 통제불능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다행히 오후 4시부터 미군 헬기가 난민들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것이 목격됐다. 교민탈출을 위해 미국측과 만반의 준비를 다 갖췄다고 판단한 김영관 대사 일행은 오후 6시경, 헬기를 타고 미 대사관을 떠났다.
월남 패망일인 4월30일 새벽 4시15분, 밤샘한 일부 교민이 헬기로 미 대사관을 벗어나고 마지막 남은 9명의 공관원과 165명의 교민들이 마음을 조아리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4시30분, 이륙하는 헬기만 보일 뿐 착륙하는 헬기는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생명선이 끊긴 것이다. 사이공에 내버려진 교민들은 1년 안에 모두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들의 철수를 도왔던 이대용 공사와 서병호ㆍ안희완 영사 세 사람은 현지 감옥에서 5년간을 더 보내야 했다. 이들은 1980년 4월 12일에야 마침내 그리던 조국 땅을 밟았다.
▶1972년 남북직통전화 비공식 개통
▶1969년 나시루딘 말레이시아 국왕 내한
▶1968년 미국, 흑인들의 `빈자(貧者)의 행진` 시작
▶1967년 김일, 레슬링 세계 헤비급 챔피언 등극
전남 고흥의 섬마을에서 태어난 김일(1929~2006)은 젊어서 유명한 씨름꾼이었다. 체구도 183㎝, 90㎏이나 되어 당당했다.
1956년 어느 날, 김일은 여수에서 우연히 본 일본의 한 잡지에서 역도산(1924~1963)과 관련된 기사를 읽고 그의 제자가 될 것을 결심했다. 김일이 아내와 아이들을 집에 남겨둔 채 시모노세키로 건너간 것은 1956년 10월이었다.
김일은 역도산 도장 문하생 제1기 제자로 입문했다. 훈련은 온 몸이 매일 상처투성이가 될 정도로 힘들었다.
김일은 1958년 5월에 데뷔했다. 초반 성적은 좋지 않았다. 일찍부터 평양 박치기의 위력을 잘 알고 있던 역도산은 “너는 조선 사람이니 박치기 기술을 익혀라”라며 박치기를 권했다. 야구광이었던 김일은 일본 프로야구의 강타자 왕정치의 외다리 타법을 보고, 한 손으로 머리를 잡고 한쪽 다리를 들었다가 상대의 머리를 내리찍는 박치기 자세를 완성했다. 기술 종류도 늘려 박치기 외에 헤드시저스와 드롭킥을 익혔고 상대 선수를 만(卍)자로 감는 ‘코브라 트위스트’도 연마했다.
1963년 9월 김일은 역도산의 지원을 받아 미국에서 열리는 WWA 세계 태그챔피언대회에 도전장을 냈다. 시합 하루 전인 12월 9일 일본에서 역도산이 칼에 맞았다는 전화가 미국으로 걸려왔으나 다행히 경미하다는 말을 듣고 시합에 나가 일본의 모토와 조를 이뤄 WWA 세계 태그챔피언이 되었다.
김일은 1965년 6월 일본이 아닌 한국으로 귀국했다. 8월 11일 장영철, 천규덕 등과 함께 극동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전에 출전했다. 국내파 장영철이 2회전에서 패해 그동안 국내에서 쌓아 온 70연승에 제동이 걸린 것과 달리 김일은 챔피언이 되었다. 그것은 한국 레슬링의 맹주가 장영철에서 김일로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일은 1966년 12월 도쿄에서 아시아 태그챔피언에 오른 뒤 여세를 몰아 마크 루인 WWA(세계레슬링연맹)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게 도전장을 냈다. WWA는 NWA(전미 레슬링협회), WWWF(전 세계 레슬링협회) 등과 더불어 세계 레슬링계를 주도하는 대표 단체였다.
루인은 1966년 10월 루 테즈를, 1967년 3월 복면의 디스트로이어를 물리친 세계 최고 선수였지만 김일은 1967년 4월 29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대회에서 박치기로 그를 물리쳐 세계 정상에 올랐다. 한국 프로레슬링 사상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 탄생한 것이다. 당시 신문을 보면 스포츠면 1단 크기로 처리할 만큼 프로레슬링을 스포츠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으나 국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 김일의 프로레슬링 경기가 있는 날이면 사람들은 너나 없이 동네에 하나뿐인 흑백TV 앞에 모여들었다. 초반엔 늘 상대편의 잔악무도한 반칙에 당하다가도 꼭 막판 박치기 한방으로 내로라 하는 거구의 서양 선수들을 일거에 거꾸러뜨리는 김일의 모습에 국민들은 환호하고 열광했다.
김일은 1980년 5월 제주도에서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그동안 3,000여 회의 경기를 치르고 세계 타이틀을 20차례나 방어했다. 이후 TV에서는 프로레슬링도 김일도 볼 수 없었다. 빈 화면에는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채워졌다. 은퇴 후 김일은 레슬링 후유증과 스트레스 때문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불우한 말년을 보내다 2006년 10월 26일 운명했다.
▶1965년 도미니카의 쿠데타, 내란으로 발전
▶1964년 한국-인도 무역협정 조인
▶1961년 충주비료공장 준공
1961년 4월 29일 충주비료공장이 착공 5년8개월 만에 준공됐다. 정부수립 이후 비료공장을 건설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는 지난 1955년 5월 13일 미국 맥크로 하이드로 가본회사와 ICA(미국국제협력기구)차관자금 1천9백55만달러와 내자 15억환을 들여 한해에 요소비료 8만5천t을 생산하는 공장을 짓기로 계약을 체결했으나 완공하는데 든 건설비는 외자3천1백54만3천달러와 내자 27억5천만환이다.
이는 계약 당시보다 외자 56%, 내자 54%가 늘어난 것이다. 이밖에도 30개월을 기한으로 한 기술용역 계약체결로 인건비 2백만달러를 포함한 계약상의 경비 5백13만5천달러가 더 들었다. 이 때문에 요소비료 t당 생산비가 시가 7만9천환을 훨씬웃돈 13만2천환으로 올랐다.
이같이 추가자금이 많이 들어간 것은 고정보수와 실비청산제 계약을 적용, 맥크로회사 측이 계약당시보다 자재와 포장비, 운임이 크게 올랐다는 이유로 외자 91만4천달러와 내자 8억8백50만환의 추가자금을 요구한데다 그후 자금추가조치가 8개월이나 지연됐다는 이유를 내세워 다시 경비조로 2백78만달러 등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국제계약 체결에 미숙해서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6년 프랑스군, 인도차이나서 완전 철수
▶1951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사망
▶1950년 국립극장(서울특별시의회 의사당)에 창설
1950년 4월 29일 미군이 오락장으로 사용하던 1천9백97석의 옛 경성부민관(舊 경성부민관 : 현 서울시의회 의사당)건물에 국립극장이 개관됐다. 광복이후 줄기차게 이어진 무대예술인들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였다.
첫 무대에 오른 작품은 유치진의 `원술랑`. 1주일간 무려 5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국내 최초의 창작 오페라인 현제명의 `춘향전`도 이 시기에 초연됐다. 영화 관람료의 3배나 될 정도로 비싼 관람료에도 공연마다 표를 사려는 인파가 광화문 네거리와 덕수궁까지 뻗칠 정도였다.
그러나 문을 연지 채 두달도 못돼 발발한 6.25와 계속된 공연 실패는 국립극장의 위상을 흔들어 놓았고 국립극장은 문화예술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3년 10월 17일 현재의 장충동으로 자리를 옮겨 장충동시대의 막을 열었다.
▶1944년 포루투갈의 대통령
(1915~1917, 1925~1926) 마샤두 사망
▶1932년 윤봉길 의사,
상해 홍구공원서 일왕 생일 경축식에 투탄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 겸 상해사변 전승축하 기념식장에 물통과 도시락에 장착한 폭탄을 던져, 참석한 주요인사들을 폭살했다.
참석자중 상해 파견 일본군 시리카와 대장, 상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 등이 즉사했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타,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총영사 무라이 등이 중상을 입었다.
거사직후 체포된 윤의사는 5월25일 상해 파견 군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11월 18일 일본 오사카의 한 형무소로 옮겨졌고 12월 18일 가나자와 형무소로 옮겨져 이튿날 총상형에 처해져 순국했다. 본명은 우의, 아호는 매헌이었다.
독립위해 살화한 영원한 청년 의사, 윤봉길
19세의 나이에 이미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든 의사는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계몽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백범 김구를 만난 의사는 의열투쟁에 뜻을 모으고 한인애국단에 가입, 김구와 함께 홍구공원 거사를 계획한다. 의사의 의거는 널리 알려져 중국의 한인독립운동 지원과 임시정부의 활성화 등 이후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의사는 25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다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1908. 6. 21~1932. 12. 19)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부친 윤황(尹墴)과 모친 김원상(金元祥)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禹儀), 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이다. 11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독립운동의 함성과 함께 학교를 자퇴하고, 이후 1921년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문하에 들어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전통교육을 받으면서도 의사는 당시 민족잡지인 [개벽]등을 구독하며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갔다. 1926년 서당에서 수학하던 중, 의사는 산책길에 건너편 공동묘지에서 여러 묘표(墓表)를 뽑아 들고 선친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간청하는 무지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 이때 의사는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적(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당시 의사의 나이는 19세였다. 의사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농민계몽은 야학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의사는 1927년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저술하여 본격적으로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농민독본]의 구성이 ‘낙심말라’, ‘백두산’, ‘조선지도’, ‘자유’, ‘농민과 공동정신’ 등이었던 것만 보아도 당시의 농촌계몽운동이 단순히 계몽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민족 얼의 부흥을 목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28년에는 부흥원을 세워 구체적인 농촌개혁을 실시하여 갔다. 주된 사업은 농가부업장려 등의 증산운동과 공동판매, 공공구입의 구매조합 설치, 토산품(국산품) 애용과 일화배척(日貨排斥), 생활개선 등이었다. 이듬해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개혁운동을 추진할 중심인물들을 규합하였고, 위친계(爲親稧), 수암체육회 결성을 통한 친목, 체력향상 등 의사의 활동은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1929년에 접어들자 농민계몽, 농촌개혁 운동은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하였지만, 이러한 운동은 결국 민족운동, 즉 독립운동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은 개량과 개혁의 수준에서 머물 수 없었고 완전한 독립을 달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1929년 12월 16일자 일기에 의사는 “함흥수리조합 일본인들이 조선인 3명을 타살. 아! 가엾어라, 이 압박 어느 날 갚을는지” 라고 적어 넣기도 했다. 이는 의사가 막연하나마 일제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 행동의 싹을 틔우고 있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다
계몽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의사는 그곳에서 백범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드디어 의사는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망명에 이르기까지 의사의 고뇌와 결단은 중국 청도(靑島)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라는 서신에 잘 드러나 있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저도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합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의사에게 있어 그 사랑은 곧 민족애였다. 근대적 사고와 혁명가적 열정을 함께 갖춘 사람이 바로 의사였다. 월진회원들이 마련해준 여비를 갚기 위해 중국 청도의 세탁소에서 1년여간 일한 것만 보아도 그 인격의 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1931년 의사는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던져 조국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소원하던 조국독립의 제단에 몸을 던지게 된 것이다. 백범 선생과 의사는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에 접하게 된다. 얼마나 기다리던 기회였던가. 오로지 자신의 몸을 던져 독립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천리 먼 길을 달려온 의사였다. 의사와 백범 선생은 드디어 그 기회를 맞은 것이다.
1931년 선생이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 쓴 선언문과 함께 찍은 사진(왼쪽). 오른쪽은 선언문 사본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의거를 결행하다
거사를 위해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의거 3일 전인 4월 26일 의사는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의사는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을 답사하여 거사의 만전을 기하였다. 상해 병공창(兵工廠)의 주임이었던 김홍일 장군의 주선으로 폭탄이 마련되었고 거사 장소는 눈이 시리도록 익혀두었다.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백범 선생과 마지막 조반을 들고서도 시계를 바꾸어 갖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거사 후 자결하기 위해 자결용 폭탄까지 마련한 그 아침의 모습이다.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의 시계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 일본거류민단장 카와바다(河端), 상해총영사 무라이(村井)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전 11시 40분 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의사는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빼자 앞 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위로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와 시게미츠의 면전에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가 부러졌으며, 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며 감격해 하고,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 또한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이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의거 직후 홍구 공원의 모습
1932년 12월 19일, 25세의 나이로 순국하다
피체된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그 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받았는데, 이 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쓰레기하치장에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의사는 “부모는 자식의 소유주가 아니요,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고 말할 만큼 선각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었다. 하지만 거사를 며칠 앞두고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유언은 의사가 참으로 지금의 우리에게 띄우는 당부일지도 모른다.
의거 직후 일 군경에게 연행되어 가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 거사 직후인 1932년 4월 30일 North China Daily에 실렸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08년 광무 신문지법 개정
▶1901년 히로히토 일왕 출생
https://youtu.be/5WTj4ooemfc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