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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2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루카 19,45-48
기도하는 집: 로고스가 레마가 되는 집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비판하십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것이 곧 ‘기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때 부모님의 성전이었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L.A. 올림픽 때 다이빙 금메달을 딴 한 중국 선수는 자신이 금메달을 딴 것이 어머니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선수는 본래 다이빙 선수가 아니었고 100m 육상선수였습니다.
이 선수는 시합 때마다 자주 넘어졌고 성적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풀이 죽은 딸에게 언제나 이렇게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나는 네가 1등을 해서 좋은 게 아니야. 엄마는 네가 달리는 것만 보아도 너무 좋아.
넘어졌을 때 계속 넘어져 있지 않고 다시 일어나 달리는 것만 보아도 엄마는 너무 기쁘단다.”
나중에 다이빙할 때도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네가 다이빙대 위에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너무 기뻐.”
이 선수는 다이빙대에 설 때 항상 엄마의 이 말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긴장이 풀리면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엄마의 말이 이 다이빙 선수에게 등불이자 빛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이런 말을 해 준다고 그 말이 한 사람의 삶에 그런 힘을 줄 수 있을까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의 말은 그저 잔소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나를 사랑해주더라도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강도가 살 때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기 전에 장사꾼을 채찍으로 쓸어내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랑의 말은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저 잔소리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나의 말이 영향을 미치게 하려면 그 듣는 사람이 나를 먼저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사랑하지 않게 만드는 자아와 삼구를 없애야 합니다.
그 자아와 삼구는 나의 피로서만 죽습니다.
주님께서 장사꾼들을 내쫓기 위해 사용하신 채찍은 곧 그리스도의 피, 성령을 의미합니다.
먼저 사랑으로 자아가 죽지 않으면 예수님은 분명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 것 같지만 우리가 그분을 벙어리 취급하는 꼴이 됩니다.
마치 ‘소리 없는 사랑’이란 태국 광고와 같습니다.
한 여학생은 자신을 홀로 키우는 아버지를 싫어합니다.
듣지 못하여 말도 못 하는 장애인이고 돈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이 학생의 등에 “아버지가 바보 같은 장애인”이라는 글을 써서 붙이며 놀립니다.
자기가 그렇게 취급당하는 것이 아버지 때문이라 여깁니다.
자기가 왜 힘들어하는지 들어주지도 못하는 아버지는 이제 싫습니다.
그래서 비뚜로 나갑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이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미안하고 다만 딸이 착하게 커달라고 수화로 말해줄 뿐입니다.
이런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딸은 더는 살고 싶지 않아 자살 시도를 합니다.
피가 너무 빠져나가 위험한 상태입니다.
아버지는 자기 재산을 다 줄 테니 딸만 살려달라고 합니다.
딸은 아빠의 피를 받고 살아납니다.
딸은 자신을 위해 피를 내어준 아버지를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손을 잡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소리 없는 말이 딸의 마음에 들어가 딸을 착하게 만들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는다고 그것이 나를 변화시킬까요? 아닙니다.
내 안에 삼구가 살아있으면 여전히 삼구는 하느님을 원망하게 할 것입니다.
이 뱀은 태초부터 하느님께 대한 불만을 심었고 아담과 하와는 삼구를 다스릴 줄 몰랐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여 강도의 소굴이 되게 하였습니다.
말씀 묵상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묵상을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먼저 하느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그런 상태라면 내 안의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는 은총으로 변합니다.
이것을 말씀이 로고스에서 레마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신 마비로 누워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을 받아들였던 미즈노 겐조의 시를 살펴봅시다.
하느님
오늘도 말씀해주세요
단 한 마디뿐이어도 좋습니다
내 마음은 작아서
많이 주셔도 넘쳐버려
아까우니까요
성경의 모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왜 굳이 따로 또 말씀해 달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는 미즈노 겐조가 이미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미즈노 겐조는 불우한 상황에서도 감사를 찾았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이 자신 안에서 로고스에 머물지 않고 레마가 되게 했습니다.
내 안에 아무리 하느님의 말씀이 뿌려져도 그것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하늘에 뜬 별과
같습니다.
세.육.마.로 땅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로고스이지만 그 별을 따라 결국에 만나게 되어 내 삶을 완전히 변하게 하는 그리스도는 레마입니다.
내가 진정한 성전이 되어 하느님의 말씀이 로고스에 머물지 않고 레마로 변하게 하려면
그리스도의 피로 내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죽은 결과는 ‘감사’로 나타납니다.
감사가 아니면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집은 감사하는 집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레마로 변해 나를 감동하게 하고 변화시키는 집입니다.
그런 집만이 성전으로 인정받고 구원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2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마카베오기 상 4,36-37.52-59
루카 19,45-48
<참된 의미의 성전이란? 예수님 발치 아래 앉아, 그분 말씀을 경청하는 충실한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지속된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거지는 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과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행동은, 가난하지만 착한 백성들에게는 꿀보다 더 단 말씀, 십년 묵은 체증이 순식간에 싹 내려가는 유쾌·통쾌·상쾌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구릴대로 구려터진 노회한 율법학자들과 이미 삯꾼으로 전락한 사제들과 지도자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그야말로 쌍날칼이요 맵디매운 고추가루였습니다.
그들은 의기투합해서 조용하고 거룩해야 할 성전,
하느님을 향한 찬미가와 영가가 울려퍼져야할 성전을, 장사꾼들과 사기꾼들, 야바위꾼들의 호객소리가 넘쳐나는 장터로 훼손시켜놓았습니다.
대사제들과 사제 가문의 귀족들은 성전 경내에서 이루어지던 매매에서 큰 수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특히 대사제는 당시 유다 최고의회인 산헤린의 의장이었으니, 그 권한이 막강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상인들이 상행위를 하는 조건으로 막대한 검은 돈을 정기적으로 상납받고 있었습니다.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어, 발을 빼려고 해도 늦었습니다.
속화될대로 속화된 성전 주변은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 모든 안타까운 현실을 당신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거룩한 분노를 터트리십니다.
복음서 그 어디서도 발견할수 없는 과격함과 뜨거움으로 타락한 성전을 정화시키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루카 복음 19장 46절)
상상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초강력 펀치 앞에 백성들은 쌍수를 들고 환호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반면에 구린 속을 들켜버린 적대자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정확한 지적이었기에, 뭐라 반박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다만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어떻게하면 예수님을 없애 버릴까, 고민하기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없애 버리려는 그들의 사악한 계략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심에 자리하시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백성들이 그분 주위에 뺑 둘러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진정한 성전의 개념을 파악할수가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말씀에 충실한 백성들!
그것이 바로 참된 의미의 성전인 것입니다.
성전을 건립할 때, 건물을 짓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해야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랑의 영적 공동체를 먼저 건설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공동체 중심에 두는 일입니다.
공동체 전체가 그분의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뜻을 공동체 안에 실현시키는 일입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친교와 소통과 일치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건물은 그 후의 일입니다.
진정한 성전 건립은 영적 성전 건립, 그 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성전이 건립된다 할지라도, 그안에 주님의 사랑과 희생, 헌신과 나눔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성전은 진정한 의미의 성전이 아닙니다.
작고 허름해도, 주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구성원들이 그분 말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다면, 그곳은 주님으로부터 크게 칭찬 받을 아름다운 성전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도를 넘어서는 지나친 상거래는 하느님 집에 결코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 하느님의 크신 업적을 찬미하는 집, 무한하신 그분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집, 형제적 친교를 나누는 집이어야 마땅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강론>(2024. 11. 22. 금)(루카 19,45-48)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신앙인들에게 지금 이 시대는 분명히 ‘위기의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5-48).”
1) 온 백성이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말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백성들이 지지했음을 나타냅니다.
그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서민들에게는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장사꾼들에게 자릿세를 받은 사제들은 사실은 한통속이었습니다.
<어쩌면 사제들이 장사꾼들을 고용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제물로 바칠 짐승이나, 여러 가지 물품들을 다른 곳에서는 사지 못하게 하고, 성전에서만 사라고 강요하면서, 아주 비싼 값으로 그것들을 팔았는데, 그것은 서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이었고, ‘강도짓’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예수님께서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라고 꾸짖으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백성들이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지지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성전 정화를 지지했다고 해서 백성들이 예수님을 지지한 것은 아니고, 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른 것도 아니지만, 어떻든 기득권층 사람들에게는 백성들이 성전 정화를 지지하면서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은 크게 부담스럽고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2)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당시 ‘최고의회 의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하게 말하면 서민이 아니었던 사람들,
즉 기득권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기존의 종교 질서와 사회 질서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자기들의 기득권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하느님의 일’이고 ‘선한 일’인데,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그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과 기득권층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느님의 일’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선한 일’로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예수님의 비판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는 말씀을 듣고서 자기들이 모욕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는 예수라는 자가 성전을 모독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성전을 모독한 것은 그자들인데, 그자들은 반대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3)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2-3).”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자기들은 하느님 편에 서 있고, 예수님은 반대편에 서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는 일은 곧 하느님께 충성하고 봉사하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그들은 어쩌다가 선과 악을 판단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탐욕’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들은 왜 그렇게 어리석은 위선자가 되었을까?
4) 이천 년 전의 유대교와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긴 하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은(신앙생활은) 어떤가?”입니다.
중세 때의 교회의 모습을 보면,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타락했었고, 더 큰 죄들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만일에 그때 훌륭한 성인 성녀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교회는 아마도 그대로 망해 버렸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우리 교회에게는 분명히 여러 가지 이유로 ‘위기의 시대’입니다.
통계표를 보지 않아도, 성소자 수가 줄어들고,
새 영세자 수도 줄어들고, 냉담자 수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고, 사회에서 교회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고, 그만큼 ‘복음화의 힘’은 약해지고 ‘세속화의 힘’은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가 심각하게 타락했을 때 성인 성녀들이 나타나서 교회를 쇄신하고 개혁하면서,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무너지는 교회를 다시 세운 것은,
분명히 ‘성령의 도우심과 보호’입니다.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성령을 통해서 교회와 신앙인들을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성실하게 응답하고 회개하는 생활을 할 때에만 그 보호와 도우심이 ‘살아 있는 힘’이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