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필가 / 백남오
요즘 사오십 대 직장인의 주요 관심사는 노후대책에 관한 것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60에 퇴직을 한다 해도 20년 이상의 여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실로 중요한 화두다. 돈도 돈이지만 평생 직장생활을 한 사람은 분초를 다투는 시간에 맞추어 움직여 왔을 터인데,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멈춰 버린다는 사실은 또 다른 고통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렇게도 꿈꾸던 제2의 인생은 물거품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은 텃밭이 있는 전원주택을 꿈꾸기도 하고, 고향으로 귀거래 하여 부모님이 살던 옛집을 털어내고 현대식 집을 지어 살아갈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또 새로운 직장에 도전하는 삶을 설계하는 사람도 있다. 그 어떤 방식이든 무한정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하는 방안이 핵심이 아니겠는가. 자칫 자유에 눌려 죽는다는 말도 나오리라.
의사 변호사 등 고급 전문직에 있는 사람이야 무슨 걱정이 있으랴. 대를 이어 경영을 해온 기업가나 전분 자영업자도 노후의 일거리에 대해서만은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평생 농사를 지어온 농부나 고기를 잡는 어부도 이런 면에서는 행복한 사람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최소한의 평생직장을 보장받은 것이 아닌가. 평범한 직장인은 정년이 되면 반드시 그만두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사람은 참 평등하다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나 역시 퇴직 이후의 생활이 걱정이다. 좀 젊었던 시절에는 고향에 들어가 산길이나 닦으며 아예 세상과 등지고 살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사람에 대한 상처가 두려웠음이다. 지금은 그 계획이 조금 수정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과 고립된 첩첩산골에서 혼자 사는 방법을 터득할 자신이 없어서이다. 그렇다고 도시에서의 구체적인 삶의 방안이 마련된 것도 아니다. 지금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허락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이후가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믿는 구석도 있다. 나는 수필가가 아닌가. 이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쉰이라는 늦깎이로 등단이라는 준비를 해온 것도 사실이다. 농부는 평생 농사를 짓고 어부는 고기를 잡듯 이 작가는 창작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시인은 시를 쓰고 수필가는 수필을 쓰고 소설가는 소설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그 약속으로 작가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원했고 또한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 선명한 해답을 두고 잠시 흔들린 것은 내가 쓰는 수필이 과연 그런 가치 있는 문학작품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열등의식도 작용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나의 아버지는 평생 고된 노동과 농사일만 하셨다. 백발마저도 다 빠져버린 80세가 되어서도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하셨다. 가끔은 힘에 부대끼고 몸살이 나서 며칠간 병원에 입원하신 후에도 퇴원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지게를 지고 들로 나가 농작물을 돌보셨다. 젊은 시절에는 달빛을 벗 삼아 밭을 매고 논을 쳤으며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달빛 아래서 혼자 휘적휘적 씨앗을 뿌리기도 하셨다고 한다. 시계가 없던 그 시절, 새벽인 줄 알고 일어나 일을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침은 오지 않고 첫닭 우는소리만 들렸다는 일화도 들었다. 평생을 일만 하시다 돌아가신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죽는 날까지 농사를 지으셨던 아버지를 닮고 싶다. 잠 못 이루는 밤의 별빛 아래서 희망의 씨를 뿌리셨던 아버지처럼 나는 수필을 다듬으면서 회한을 다스려 가야 할 일이라고 마음 다잡아 본다. 아버지께서 농부로서 당당했듯이 나는 자랑스러운 수필가로서 서야 할 일이다.
아버지의 농사일처럼 수필의 줄기를 세우고 단락을 만들어 배열하고 멋진 비유와 아름다운 문장을 가려 철학적 사색에 깃든 행간의 의미가 깔린 울림이 있는 수필 한 편 남겨야 하리라. 꽃피는 봄날의 적막감 속에서도 장대비 쏟아지는 한여름 밤의 우수에도 낙엽 지는 가을의 고적감에도 눈 내리는 겨울밤의 그리움 속에서도 말이다.
수필을 쓰다가 무료해진다거나 시상이 잘 풀리지 않는 날에는 동네 한 바퀴 돌다 오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성에 차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는 작은 배낭 하나 들쳐 메고 무학산 학봉이라도 한 번 타고 내려오면 맺혔던 상념들이 보석처럼 피어나리라. 그래도, 그래도 외롭다고 생각이 되면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훨훨 지리산이라도 날아갈 일이다. 노고단이나 만복대에 올라 작은 세상 한번 내려다보거나, 홀로 핀 야생화 한 송이와 눈 한 번 맞추거나, 무심히 흐르는 구름 한줄기 벗 삼고 돌아오면 가슴에 뭉쳐 있는 작은 회한 하나쯤은 위로받으리라.
농부는 농사를 짓고 어부는 고기를 잡고 상인은 장사를 하고 교사는 수업을 하고 시인은 시를 쓰고 수필가는 수필을 쓴다. 참 아름다운 세상이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