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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한 자와 겸손한 자
잠 15:22-33
22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23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24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
25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26 악한 꾀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27 이익을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살게 되느니라
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30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31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
32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잠 15:22-33 / 서로의 생각을 진지하게 주고받으면 순풍에 돛단 배처럼 경영이 잘될 것이나, 그렇지 못한 계획은 물거품처럼 스러지리라. 23) 사람은 시원한 대답을 들을 때 기쁨을 얻는다. 하물며 상황에 꼭 들어맞는 말이 어찌 사람을 즐겁게 하지 않으랴! 24) 슬기로운 사람은 위로위로만 뻗어 나가 생명의 길로만 다다라 아래로 저 밑으로 내려가는 죽음의 길을 벗어난다. 25) 여호와께서는 거만하게 남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의 집은 헐어 내시나, 의지할데 없는 과부의 땅뙈기는 꼭 지켜 주신다. 26) 여호와께서 역겨워하시는 것은 못된 짓만 저지르는 자들의 음모이다. 그러나 사람을 훈훈하게 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에도 그분은 흐뭇해하신다. 27) 이익만 탐내는 자는 집안을 망쳐도, 물을 가져와도 눈하나 깜짝이지 않는 이는 생명을 얻으리라. 28) 바르게 사는 이는 생각을 깊이 하고 대답을 하지만, 남 짓누르고 착취하는 못된 자들은 함부로 입을 놀려 쉽게도 남을 저주한다. 29) 여호와께서는 못된 짓만 일삼고 남 짓누르며 착취하는 자들을 외면하시지만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이들의 기도에는 귀를 기울이신다. 30) 반짝반짝 빛나는 눈망울은 마음을 한없이 기쁘게 하고, 기쁜 소식, 즐거운 기별은 뼛속까지 살찌운다. 31)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르치는 꾸지람을 귀담아 듣는 귀는 슬기로운 사람들에게만 있다. 32) 꾸지람 듣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스스로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것, 호되게 나무라도 그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 33) 지혜가 그토록 꾸짖으며 가르치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여호와를 모시며 살아가라는 말. 사람은 겸손하면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는다.
지혜로운 사람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22-30) 22절은 의사결정 과정의 지혜에 대해서 말합니다. 의논과 지략이 필요 없는 존재는 하나님뿐입니다. 사람은 각자의 장점과 약점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가지고 있는 재능을 모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에게 약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매사에 독선적으로 행합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심사숙고 합니다. 23절은 적합한 말에 대해서 말합니다. 한 마디의 말이 사람의 마음과 생명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말을 잘하는 것도 지혜에 속한 일인데 “잘 하는 말”의 기준은 “얼마나 적절한가?”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 적절한 말을 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24절은 영생에 대해서 말합니다. “위로 향한다”는 것은 지혜자가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해 있기에 사망을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25절은 하나님의 보응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헐어버리십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의 특징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과부는 세상의 약자를 대표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는 약자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과부의 지게를 정한다”는 말은 “과부가 사는 땅의 경계를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의미로 약자의 권리를 보호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27절은 탐욕에 대해서 말합니다. “자기 집을 해롭게 한다”는 것은 불의하게 쌓은 재물의 최종결과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하는 것은 뇌물을 받는 것을 가르키는데 뇌물로 인해 온 집안이 수치와 해를 당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28-29절은 말과 기도에 대해서 말합니다. 말은 인간관계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사람에게 신중하게 말하고 때에 맞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대화 할 때도 때에 맞는 말로 기도합니다. 따라서 지혜자의 기도는 하나님께 열납됩니다. 반면에 악인은 사람에게도 함부로 말하듯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도 악을 쏟아냅니다. 그런 악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훈계라(31-33)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잘 이해하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지혜의 말씀을 들었을 때 말씀을 이해하고 순종합니다. 지혜의 훈계의 핵심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순종할 때 생명이 넘치게 됩니다.
적용: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며 살고 계십니까?
어느 날, 친구의 온실 안을 거닐다가 다른 여러 개의 화분으로 완전히 덮여 있는 작은 화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내가 왜 이 작은 화분 주위를 어둡게 해 놓았는지 자네는 알겠나? 그것은 더 깊이 뿌리를 내리라고 그렇게 한 것이라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뿌리를 더 깊이 내리기 위해서는 그 주위를 어둡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십니다.
< 설 교 >
잠언 15:16–33
도상원 목사
오늘 말씀 33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고 나와 있고, 16절에는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 시작됩니다. 편집하는 사람의 의도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말씀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성공한 삶 즉, 부를 쌓거나 명예를 가졌기 때문에 교만한 삶과는 정반대의 것임을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이렇듯 앞 뒤에 큰 획을 그어 놓고 그 가운데는 그에 대한 주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대한 교향곡을 만들 때에 화성악에 의해서 아주 단조로운 곡들이 서로 달라지고, 또 흘러가며 발전해 나가면서 위대한 곡을 이루는 것처럼 잠언서 전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삶이 어떤 것인가’ 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치 화성악을 이루듯 재물에 있어서나 인간관계, 직업이나 경영에 있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인가를 이야기합니다.
제가 듣게 된 이찬수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여성이 세례 받을 때 한 간증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미션 스쿨을 다녔던 이 사람은 강요에 의해 가게 된 예배나 교회에서 말하는 내용들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답니다. 졸업 후, 그동안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나가게 된 교회에 반발심을 갖고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이분이 사랑하던 딸을 잃게 되었는데,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불교를 통해 달래보려 했지만 그 슬픔을 없애지 못했다고 합니다. 잠도 이루지 못하고 마치 음악의 ‘단조’와도 같이 어두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어떤 기회로 “성경 탐구 여행” 이란 성경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보다가 “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하여 오셨다. 그 분 때문에 나는 구원함을 받았다” 는 아주 단순한, 바로 그 말씀이 마음에 꽂혔다는 것입니다. 마치 체한 사람이 다 토해 내듯 통곡을 하면서 자기 안에 있는 교만한 자아가 그렇게 드러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깨달으며, 자기를 살려 주신 그 은혜가 그렇게 깊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저 성경 속의 예수 그 이름에 자기를 순복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이십니다. 이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 분 앞에 내어 놓아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게 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예수 그 이름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교만, 자아, 자기 의, 자신의 생각들은 우리의 영혼을 더욱 메마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만져 주실 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셔서 사랑해 주시고 감싸 안아 주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이름”이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그 능력 자체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즉 그 이름의 ‘소리’는 저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할 뿐만 아니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지난 번도 말씀드렸듯이 소리의 주파수에 따라 모래나 작은 입자들이 변형됩니다. 이렇듯 ‘하늘의 소리’ 는 사람을 치유하고 새롭게 변형 시킵니다. 소리가 배후의 실제입니다. 어떤 소리를 듣고, 어떤 소리에 귀 기울이고, 어떤 소리에 마음을 두느냐에 따라 우리의 마음이 변경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 우리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소리를 듣게 될 때에 우리의 지혜롭지 못한 마음과 교만했던 영혼, 편협한 시각의 판단들을 내려놓게 됩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내 마음 속에 어떤 음성이 들리고 있습니까?
깊은 저음으로 ‘내 인생은 실패야’ 라는 소리가 있지는 않습니까?
깊은 저음으로 남을 판단하는 교만한 자아의 모습은 있지 않습니까?
깊은 저음으로 ‘나는 외로운 사람이야’ 라는 소리가 나를 흔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어떤 다른 고음의 음성들이 우리를 잠깐씩 흔들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밑에 깔려있는 음성이 실패한, 교만한, 미워하는, 외로운 마음을 갖고 있다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어떠한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잠깐 보겠습니다.
16절에 삶의 바닥의 목소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에 세상의 목소리와 비교할 수 없음이 나와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는 자의 삶의 양태임이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평안이 임하고 노를 더디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입니다(18절).
주님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경영하는 자는 본인이 인식하지 못하여도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신다는 말씀이 19절에 있습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버지의 권위에 순종하지만 미련한 자는 자기가 교만하기 때문에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까지도 업신여긴다고 말씀하십니다(20절). 남의 이야기에 겸손히 귀 기울이는 것이 경영에 성공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22절). 아무리 옳은 이야기라 해도 듣는 사람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때에 맞춰 이야기하는 것도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의 중요한 미덕이라 볼 수 있습니다 (23절). 하늘 음성 듣는 자는 땅에 있는 소리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24절).
28절은 입의 경영, 혀의 경영입니다. 말을 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지를 묵상하며 하는 말과 거저 다 쏟아내는 것과는 자세가 틀리다는 말씀입니다. 30절의 눈이 밝다는 것은 얼굴이 밝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얼굴에서 영혼이 밝음이 나타나며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지혜와 겸손을 허락하신다는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원하고 기도하옵기는 나의 영혼 깊은 곳에서 어떤 음성이 있는가를 기도 가운데 듣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의 것이다” 라는 음성이 저희를 움직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아름다운 말을 합시다
잠언 15 : 22 ∼ 33
하나님의 사랑으로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평안을 누리기 위하여 말이 행복하여야 합니다. 그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자신의 말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기억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얼마 전, 자기 자동차의 블랙박스에 녹화된 영상을 올린 것을 보았습니다. 엄마가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갑니다. 차가 과속 방지턱을 지나면서 엄마의 엄청난 잔소리가 시작됩니다. 과격하게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엄마는 마음 놓고 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아주 험한 소리를 넉넉하게 퍼붓습니다. 이에 비하여 아들은 엄마에게 깍듯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엄마는 자신의 말이 녹화된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녹화가 되는 것을 알고 많이 조심한 모양새입니다. 물론 엄마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꽤나 거칠게 느껴졌습니다.
자신의 말을 다른 사람이 듣는다고 생각하면 조심합니다. 그러면 좀 교양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면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가끔 유명 인사들의 거르지 않은 말이 공개되어, 맨 얼굴이 고스라니 드러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취중 진담이, 또는 객기를 부려 본 것이 그대로 드러나서 망신을 당하고, 공개 사과를 해도 수습이 안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2)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일터인데, 말의 실수가 많으니 온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말실수를 합니다. 이런 인간이 어떻게 온전하게 될 수 있겠습니까? 아예 말하지 않으면 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말을 전혀 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조심’하면 대부분 말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물론 말을 줄여야 합니다. 하지만 말조심은 말을 감추고 쉬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 목회를 하신 목사님의 조언에 따르면 교인들에게 말조심을 시켰더니, 목사에게만 이야기하지 않고 쉬쉬거리더랍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부작용이 나더랍니다. 과연 그것이 말조심이겠습니까?
우리의 영에 함께 계신 성령님은 마음속의 생각까지 들으십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바꾸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기 보다는, 좋은 말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말조심은 말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말을 더 하는 것입니다. 좋은 말, 아름다운 말을 더 잘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말이 우리가 힘써 해야 할 좋은 말입니까?
신양성경 에베소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음행이나 온갖 더러운 행위나 탐욕은 그 이름조차도 여러분의 입에 담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성도에게 합당합니다. 더러운 말과 어리석은 말과 상스러운 농담은 여러분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감사에 찬 말을 하십시오.”(엡 5:3∼4 [새])
성도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엡 5:17∼18[새])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자신의 영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자신의 언어생활도 이끌어 가시도록 순종해야 합니다. 함께 계신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도우심 받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하려고 힘쓰라고 하십니까?
먼저 23절 말씀입니다.
:23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이 말씀에서 ‘그 입의 대답’과 ‘때에 맞는 말’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 입의 대답’은 곧 ‘때에 맞는 말’입니다. 적절한 대답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처럼, 때맞춰 하는 말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절절한 대답, 때에 맞는 말이 아름답습니다. 여기에서 아름답다[b/f토브2896]는 말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할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그 말입니다. 적절한 말이 보기에도 좋고 아름답습니다.
사람의 말은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말을 언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효과가 달라집니다. 같은 말이라도 한 참 뒤에 하는 말과 바로 하는 말이 듣는 사람에게 달리 들립니다. 같은 대답도 바로 듣는 대답과 한참 지나서 듣는 대답이 다릅니다. 같은 말이라도 적합할 때가 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해야 할 때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가려서 해야 합니다. 가려서 하는 말이 아름답습니다. 입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말을 가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선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 때에 맞는 말이 아름답습니다.
‘말에도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흔히 ‘지금이 그런 말을 할 때냐?’는 핀잔을 듣는 것은 상황 파악을 못하는 아둔함을 꾸짖는 말입니다. 물론 말할 기회를 살피다가 영영 말할 기회 놓칠 수 있습니다. 또 지나치게 때에 맞는 말을 하려다가 아부 떠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때에 맞는 말이 아름답습니다.
오래 전, 이런 이야기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서울 신랑 신부와 경상도 신랑 신부의 이야기지요. 신혼여행 간 두 쌍의 신랑 신부의 대화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신혼 여행지 해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서울 신부 : (신랑을 툭 치고 달아나며) 자기야! 나 잡아봐라~
서울 신랑 : (천천히 뒤 따라가며) 자기~ 사랑해!
이걸 보고 샘이 난 경상도 신부, 신랑을 툭 친다는 것이 너무 세게 치고 말았습니다. 아차, 싶었지만, 도망치면서 “날 잡아보이소! 나 잡아보이소!” 하였습니다. 그러자 잔뜩 화가 난 그 신랑이 씩씩대며 말했다지요. “니 내 손에 잡히면 쥑이 삔다!”
두 번째 이야기는 밤에 별을 새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서울 신부 : 자기야! 저 별이 더 예뻐, 내 눈이 더 예뻐?
서울 신랑 : (살포시 포옹을 하며) 그야 자기 눈이 더 예쁘지.
샘이 날 만도 한 경상도 신부가 말했습니다. “보이소! 저 별이 더 예쁩니꺼, 내 눈이 더 예쁩니꺼?” 그 신랑이 하는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별이 니한테 머라 카드나?”
세 번째로 둥근 달을 보며 서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서울 신부 : 자기! 저 달이 더 예뽀, 내가 더 예뽀?
서울 신랑 : (볼에 살며시 입 맞추며) 자기가 훨씬 더 예쁘지.
지금까지 있었던 일로 있는 대로 열 받은 경상도 신부가 씩씩거리며 신랑 앞에 탁 버티고 서서 말합니다. “보이소! 내가 이쁜교, 저 달이 이쁜교?” 그러자 그 신랑이 결정적으로 이렇게 말했다지요. “아! 대가리 치워라 마! 달 안 보인다 아이가!”
요즘 아이들 말로 참 썰렁한 이야기입니다. 결코 어느 지역 사람들을 특정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요즘 신혼부부들이 이런 이야기를 할 일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지에 대하여는 역시 물어야 합니다. 요즘 신혼부부는 같은 침대에 누워 각자의 스마트폰으로 다른 영상을 본다고 합니다. 공감을 잃었습니다.
박필교수는 ‘감정언어’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호주에 사는 어느 한국인 부부가 아주 오랜만에 본다이 비치라는 시드니 바닷가에 갔습니다. 바닷가 벤치에 앉아 있던 중 휘영청 달빛을 보고 아내가 남편에게 “어쩜 한국의 보름달과 똑 같지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똑같은 달이니까 똑같지.” 하고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아내는 혼수에 빠졌습니다. 아내의 말은 ‘당신과 함께 오랜 만에 해변에 오니 기분이 좋다’는 감정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정확한 사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감정언어는 사실보다 감정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감정언어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도, 슬프게도 할 수 있습니다. 아내가 ‘아, 멋있어, 한국 보름달과 똑같지요?’ 라고 말할 때, 남편도 ‘한국 보름달처럼 환한 게 참 좋구나! 하고 동의해 주었으면 서로 마음이 흐뭇해졌을 것입니다.”[박필, 대화의 법칙. p139]
우리가 어떻게 때에 맞은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고 합니다. 이것을 공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감(共感)이란 다른 사람의 말이나 감정에 자신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기꺼이 함께 즐거워하고,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함께 울어주는 것이 바로 공감입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공감하는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힘써 해야 할 말은 어떤 말입니까?
26절 말씀입니다.
:26 악한 꾀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여기에서는 ‘악한 꾀’와 ‘선한 말’을 대조합니다. 악한 사람의 꾀는 선한 말이 아닙니다. 선한 말은 악한 꾀가 아닙니다. “악한 사람의 꾀는 주님께서 역겨워하시지만, 친절한 사람의 말은 정결한 제물처럼 받으신다.”[새]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앞서 ‘때에 맞는 말이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때에 맞는 말이라도 악한 마음으로 지어낸 말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십니다. 반대로 선한 말은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선함[!['n노암5278]이란 ‘유쾌하다’는 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즉 기뻐하다, 즐거워하다는 말입니다. 선한 마음은 모두를 즐겁게 합니다. 악한 꾀는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선한 말은 정결하므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힘써 해야 할 말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선한 말입니다.
2. 선한 말이 아름답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말이 어떤 말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27절 말씀입니다.
:27 이익을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살게 되느니라.
불의한 이익을 탐내는 사람은 자기 집에 해를 끼치게 됩니다. 사람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하지만 이익을 탐하여 뇌물을 거절하지 못하면 자기 집을 해롭게 합니다. 때에 맞는 말은 아름답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것은 선한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함께 공감하려고 한다면 선합니다.
계속해서 28절 말씀입니다.
: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여기에서는 ‘의인의 마음’과 ‘악인의 입’을 대조합니다. 의인의 마음은 악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악인의 입은 의로운 마음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선한 말의 구체적인 모습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깊은 지혜를 가졌고, 많은 학식을 쌓았더라도 생각 없이 내뱉으면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 엄청난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생각 없이 마구 쏟아내는 말은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으로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의인의 마음이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때에 맞는 말이 공감이라면, 선한 말은 바로 배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서 말해야 합니다.
썰렁한 이야기로 계속 가겠습니다.
감자네 집에 아기 감자가 있었답니다. 아기 감자는 다른 식구들과 달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였습니다. 출생의 비밀은 없는지 알기 위하여 엄마 감자에게 “엄마. 나 감자 맞아?”하고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엄마는 당연하다는 뜻에서 말했습니다.
“그야 당근이지!”
아기 감자는 자기를 당근이라고 하는 말인 줄 알고, 몹시 실망하였습니다. 그래도 용기를 가지고 이번에 할머니 감자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나 감자 맞아?”
할머니는 그렇다는 뜻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오— 이야!”
아기 감자는 자기를 오이라고 하는 말인 줄 알고 너무 실망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 감자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기 감자가 묻는 것이 너무 어의가 없기도 하였지만, 고민하는 손자의 모습이 너무 재미있어서 최불암처럼 크게 웃었습니다.
“파- ”
결국 아기 감자는 뜨거운 솥으로 뛰어들어 찐 감자가 되었습니다.
생각 없이 가볍게 내뱉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엄청난 상처가 됩니다. 선한 말은 깊이 생각하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너무 깊이 생각하면 때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감하고 배려하는 말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선한 말은 배려의 말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이전에 사용하던 개역 성경으로, 예수님께서 친히 우러러 보신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요즘 성경은 개역개정)
예수님께서 여리고라는 마을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그 마을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가려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키가 작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러서 ‘우러러 보시고’(개역 한글)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의 집으로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고 수군거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무 위의 삭개오에게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자기의 집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고 하셨습니다.(눅 19:1∼9)
어떤 사람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닌데 ‘정나미’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른 말인데 야박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말투가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듣는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도 기쁘고, 듣는 사람도 기쁜 말이 바로 선한 말입니다. 이것이 배려하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배려하는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우리는 어려운 숙제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말에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니 더욱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31절 말씀입니다.
:31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가를 설명합니다.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가 있는 사람이 지혜롭습니다. 다른 사람의 책망을 듣는 사람이 지혜롭습니다. 좀 단순하게 말하면 듣는 귀가 있는 사람이 지혜롭습니다. 여기에서 듣다[[m'v;솨마8085]는 말은 구약 성경에 아주 자주 나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람의 귀청에 울리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뜻에 찬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주의 깊게 경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하려는 말만 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3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32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듣는 귀를 가진 사람이 지혜롭다는 말씀에서 더 나아갑니다. 즉 “훈계를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지만, 책망을 잘 듣는 사람은 지식을 얻는 사람이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달게 받다’는 말은 앞에서 ‘듣다[솨마]’와 같은 단어입니다. 역시 마음을 기울여 듣고 바르게 이해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3. 듣는 귀가 아름답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경청입니다. 경청은 우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공감과 배려가 부족한 것은 바로 경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니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고, 그 사람의 마음을 모르니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윽박지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의 지혜’란 무엇입니까?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을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기브온이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 제단에 일천 마리의 짐승을 번제물로 드려 예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브온에서 솔로몬의 꿈속에 나타나셨습니다. “내게 구하여라.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능력 있어서 왕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은 아직 어리고 어떻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많은 백성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정확하게 ‘듣는 마음’[레브 솨마]입니다. 이것은 백성들을 재판할 때 옳고 그름을 가려내기 위하여 그들의 마음을 듣는 것입니다. 듣는 마음을 구한 그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지혜롭게 분별하는 마음을 줄 것이다.”(왕상 3:12)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말을 들어야 어떻게 판결할지 지혜가 생깁니다.
솔로몬의 재판으로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아기를 서로 자기의 아기라고 우기는 두 엄마가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엉뚱하게도 살아있는 아기를 둘로 나누어 가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아기를 둘로 나누면 분명히 죽습니다. 아기의 진짜 엄마는 아기가 죽는 것을 막기 위하여 아기를 상대에게 주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아기의 엄마를 가리기 위하여 진짜 엄마의 마음을 들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듣는 지혜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솔로몬의 말년에 그의 귀가 막혀 백성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의 유혹에 빠져서 들을 귀가 막혔습니다. 백성들에게 강제 노동을 심하게 시켰습니다. 결국 그가 죽은 후 나라는 둘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남의 소리를 들을 때는 지혜로웠지만, 듣지 않을 때는 어리석었습니다.
경청과 함께 기억하여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22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의논 없이 세워진 계획은 실패합니다. 하지만, 조언자들이 많으면 그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고 혼자서 세운 계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언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성공합니다. 역시 듣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합니다(계 2:29 등등). 귀는 있는데, 들을 마음이 없는 것은 재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조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힘써 아름다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말은 때에 맞는 말입니다. 이것은 공감입니다. 또, 선한 말입니다. 이것은 배려입니다. 그리고 듣는 말입니다. 이것은 경청입니다. 우리는 말조심으로 이런 아름다운 말을 하도록 더욱 힘써야 합니다.
말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말이 곧 그 사람이기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의지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