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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서울시 시우문학지에 올릴글입니다 글이 좀 김니다
보실분만 보시기를 .....
서울시에서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두 선배님‘
김 용 상(동구리)
지금도 서울시를 공직을 시작해서 50 여년이 지난 세월에도 나의 마음속에 두 분의 ’고마운 분‘의 잊을 수 없는 분이 아직도 나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어 존경하는 심정으로 그 사연을 이야기하여 보고져 한다
나주의 촌놈이 호남선의 무임승차를 하여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공부를 하여 나의 인생의 꿈과 목표를 달성하고져 66 년도에 고등학교도 채 졸업식을 하지도 않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대학입시에 매진 하였다. 재수 끝에 K대 경제학과에 합격을 하여 다니다가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 오셔서 이제는 대학생이 아니라 부모님을 부양하여야 할 입장에 처 하였다. 어려운 여건에 출판사 문선공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면서 주경야독을 하면서 직업다운 직업을 가져야 하겠기에 ‘남산의 k.b.s 아나운서’ 시험도 보고 급기야는 인천에 있는 인천교육대에서 단기로 교육수료를 하는 ‘인천교대 양성소’에 합격하여 서해안의 어느 섬 마을에 총각선생님이 되는게 나의 꿈이었다. 부모님도 농촌에서 올라 오신분이라 농촌이나 어촌의 함께 살으시면서 나는 어느 초등초등학교 선생이 되어 부모님을 모시고 먹는 걱정 없이 사는게 나의소원 이었다. 그러나 수료 후 6 개월이 지나도, 아니 1년이 지나도 발령은 나지 않아 또 다시 모든 공직 시험에 도전을 하여 76년 2월 22일 서울시 영등포구시흥2동의 수재민촌의 동사무소로 발령을 받았다.
발령장을 들고 가난한 이웃 주민들의 버글 버글거리는 분위기는 이루 말 할 수가 없었으면 아침마다 ‘새마을사업’으로 100여 명의 이상이 동사무소에 모여서 인원 점검과 주민등록발급과 인감을 발급하는 곳에서는 다 떨어진 주민등록표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길이 없어 분실 재 작성하여 만들어 발급하여 주기도 하고, 잦은 복사기의 고장으로 수기로 주민등록표를 만들어 주기도 하다보니 민원인들이 항상 대기하면서 버글거리는 소리가 어디 시장바닥 같기도 한 사무실의 사무장에게 발령장을 가지고 신규로 발령을 받아 왔다고 하니 반갑게 맞이 하여 주었고, 동장님에게도 신규로 발령을 받아 왔다고 하니 반겨히 맞이하여 주시고 “어디에 사냐고” 묻기에 시흥2동에 산다고 하니, 더욱 좋아라 하신 모습이 지금도 잊을수가 없었다.신규직원이라 ‘주민등록 등.초본’을 발급담당을 하라고 하여, 어찌나 복잡 하던지 나 못 하겠다고 한적도 기억이 난다.
동사무소라는 일이라는게 사무실일 외에 각 통마다 담당이 있어 봄이면‘적십자 회비’징수를 하여 하며, 5월 달에는 ‘오물수거 수수료’를 목표 활당량을 모아야 한다. 나는 출근전에 통을 찾아 일을 보고 출근을 하여 주민등록 등초본을 발급하여주는 일을 보았다.시흥2동 칼바위 밑에 서울시 수재민들의 4만여 생활이 어려운 지역에 산비탈의 야산에 이주를 시킨 마을이다. 동일초등학교 옆에는 ‘상이용사촌’도 아에 정착을 시켜서 주거를 하게 큼 하였다. 동사무소에서 ‘생활보호 대상자’가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동사무소의 ’새마을 일‘을 하여 밀가루를 타 가지고 가서 생활을 하는 주민들이 대 다수이며,평일에도 동사무소를 찾아와 밀가루를 주라고 땡강을 부르고 사무소 집기를 부수는 일이 비일 비재하는 사무실이다. 직원들이 기피하는 동사무소이다.대중교통이라고는’옥성운수‘가 유일 하게 있어 생활을 위하여 아침 일찍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가는 주민들이 밤 늦게는 나의 집자리를 찾아오는’달동네‘이다 77년 여름에는 갑작히 쏟아지는 대홍수가 안양천을 범람을 하여 시흥2동 온 동네가 산태가 나서 판집을 무너지고 사람은 죽어서 마을 개천에 널려 있어 동장님과 일부 직원들이 밤을 세워 들걷으로 시체를 옥성운수로 날으면서 병원으로 이송을 하였고,동사무소가 수재민 구호 물품으로 가득 쌓여 모든 일이 수재민 구호 활동이었다.구자춘 서울시장님이 오시고, 박근혜씨가 영부인을 대신하여 방문을 하는등 수해 구호에 정신이 없었다.이로 인해 신출 내기가 수해 유공 공무원 수상을 받게 되었다.하루는 이러한 여러 가지 나의 근무 실태를 보고, 동장님이 신출내기인 나를 ’서무주임‘의 일을 보라고 하신다.동사무소 서무주임은 7급 주임을 보았다. 동장님과 서무주임 입장에서 하루는 생활이 제일 어려운 가정을 방문을 하였다. 온돌도 없고 땅바닥에서 생활을 하며 동장님이 생활실태를 불었다. 정말 어려운 가정이다.이렇게 그 때에는 8급 고참이 승진을 위하여 보는 자리이다. 그래서 신출내기 신규직원이 서무주임을 보기도 하였다.
그 다음으로 양평2동으로 발령을 받아 근무를 하는데, 시흥2동의 집 하고도 먼 동사무소에 근무를 하여 보았자 별로 희망도 없고, 월급도 쥐꼬리만 하고 그 때 나의 가족은 홀로 계시는 아버지를 포함하여 나의 가족4 명 모두 5명이 이 월급으로 생활을 한다는게 사실상 어려웠다. 결국에는 사무실에 사표서를 내고 말았다. 사표서는 동사무소에 접수하여 영등포구청 총무과에 접수되어 사표를 수리 할 것으로 나는 알고 계속 행정7급 시험에 돈전을 하였다.그러나 총무과 인사담당을 하신분은 이 사표수리는 않하고 구청으로 들어오라는 전갈만 시흥2동 사무소로 연락이 온다. 나는 사표서를 수리하라고 들어가지 않고 버티다가 하두 그래서 한 번은 들어갔다.인사담을 하신 주임님이 반갑게 맞이 하며 지하에 가서 차 한 잔을 하자며 지하 시당으로 가서 사표 경위를 물어 본다.그래서 사실대로 ’꿈도 없고,월급도적고‘하니 그만 두겠다고 말을 하였다.
그랬더니 “무얼 하겠느냐?”라고 반문을 하신다. 그래서“전에 행정 7급 준비를 하였으니 그냥 시험 준비나 하여야겠다고”라고 답변을 하였더니,그러면 “그냥 다니면서 시험준비를 하면 어떻겠느냐?”라고 하신다. 그렇게 해서 시험기간 까지 아마도 3~4개월 가량의 기간을 동사무소에 오전 만 근무를 하고 오후에는 나의 시험준비를 하게큼 하여준 특혜을 주셨다. 동사무소 입장에서는 일은 많고 직원 하나가 소중하고 바쁜 일이 산적한 사무소에서 다른 직원들의 불만도 많을 것이고 어려움도 많았을 것이다. 나만의 욕심을 위하여 그렇게 하였던 일이 지금에 와서 사실상 미안하고,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 나의 특혜를 주신 서울시의 인사담당 선배님의 고마움이 세월의 흐름속에서도 고마움을 잊을수가 없다.
그래서 30 여 년 간의 기나긴 정년까지 근무를 잘하여 명예스럽게 나의 인생을 마무리 할 수가 있었으며,노후에 주는 연금의 혜택을 생각할 때 더욱더 그 고마움 앞에 머리를 숙인다. 인제는 연세도 많아 몸도 불편 하신다는데 더 건강히 행복하게 사셨으면 하는 마음이다.자금도 가끔 고마워서 연락을 하면서 그때의 고마움을 마음으로 전한다.그 존경하는 그 선배님도 ’서울시문학지‘에 글을 내시는데 주로 동시.동요를 쓰신 김중근 선배님이시다.
두 번째로 고마운 선배님은 ’노원구청에서‘같이 근무 한 고) 양이국 선배님이시다. 이미 4~5년전에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 아직도 이렇게 명절이 닥치거나 특이한 날에는 많이 생각이 난다. 같이 근무한 인연으로 똑같이 동거동락을 하신 분이시다. 일요일에는 공기가 좋은 산정호수를 찾았고, 공기가 좋고 산수가 좋은 ’종자산과 한탄강‘을 찾아 일주일간의 피로를 등산과 자연속에서 하루를 즐기고 귀가하여 직장에 최선을 다 하였다. 나중에는 부부간에 다 같이 이렇게 삶에 지친 생활을 같이 즐겼다. 온천도 같이 다니고 식사도 같이 하고,나보다 생활이 더 나아 꼭 비용을 더 쓰신다. 성격상 인정도 많으시고 다정다감 하시고 저를 아에 동생처럼 생각을 하신걸로 안다. 우리 집에서도 식사도 같이 많이 하시고 ,선배님의 집에서도 늘 같이 식사도 같이 많이 하였다.
여름철 휴가는 꼭 부부간에 설악산이나 강원도 ’무릉계곡‘으로 피서를 같이 다녔고 환선굴도 단종의 역사가 베어 있는 강원도 영월등도 자주 찾았다. 항상 여행은 내가 자가용이 있으니 나의 차를 이용한다. 한 번은 이 선배님은 자가용 면허증은 있으나, 실제로 운전을 할 수가 없고 일명 장롱면허증만 가지고 있는데, 나의 차로 거의 운전연습을 시킨적이 있다. 나에게 그 수고비를 줄려고 하신다.나는 당장 거절을 하였다 나는 원래가 그렇게 돈에 욕심이 없다.직장에서 좋은 자리,승진를 위하여 상사에게 아부를 못하는 무능한 공직자이다,
노원구에 가서는 생활이 어려운 주민들과 함께 근무를 주로 하였다. 행정이라는게 어렵고 힘든 주민을 위하여 봉사를 하는게 더 보람이 있다고 판단이 되어 노원구 중계3동, 노원마을이 있는 상계1동에서 근무를 하여 이 동사무소에서 서울시 공직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서울시민들과 삶의 애환을 같이 했던 30여 년의 공직을 마무리하고 나의 무대를 내려와야만 하였다. 나에게는 서울시공직이라는게 천직이었고, 보람이 많이 느꼈던 직업이며 ’자랑스러운 공무원상‘도 수상하게 되었다. 함께 하였던 서울시 시민들과 30여년의 세월은 나에게 보람과 그리고 가끔 대접도 하여 준 시민들, 너무나 그립습니다.
2004년 6월30일 나의 공직의 마무리로 그 정들었던 서울시 공직의 무대에서 내려 오고야 말았다. 더 훌륭한 연기를 하고져 하나 이제 무대가 없어진 것이다. 그 직장을 나온 허전함,도봉산을 바라보며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옴을 어찌 하랴! 아내는 유방암이라는 암환자로 퇴직과 동시에 선고를 하니 설상가상으로 눈앞이 캄캄한 세월을 맞이하여야 하였다. 투병생활 3년여만에 저 세상으로 떠나고 직장과 아내를 동시에 잃은 그 가슴아픈 사연을 겪어야 하는게 나의 인생인가? 아내가 없는 집안은 풍지박산이고 가정은 이미 파괴되고 말았으며, 나의 식생활을 이미 말이 아니었다.
여기에 나의 곁에서 나를 오늘날까지 있게 큼 하여준 선배님이 고) 양이국 선배님이시다. 항상 나의 곁에서 위로 하여 주셨으며, 나의 힘든 나날을 잊을 수 있게큼 배려하여 주신 분이시다. 일주일에 3~4번은 집에서 사모님이 만들어 주시는 반찬을 차에다 실고 와서 같이 식사를 하여 주셨다.이게 아마도 4~5년은 이렇게 반찬을 만들어주시니 내가 생활을 적응을 하게 된거 같다. 나는 산 음식을 못 먹는 식성이 까따로운 사람이다. 정년퇴직을 같은 해에 하여 ’노정회‘라라는 모임도 같이하여 퇴직 후의 허전한 마음을 같이 서로 달레고 지냈다.
시간이 있으면 여행도 같이 다니고,내가 고향화순으로 내려와서는 1년에 한 번은 저의 집으로 오셔서 내가 불편한 몸 때문에 집안의 청소도 다하여 주시고 나에게 꼭 용돈도 주시고 가신다.나를 서울로 자주 오라고 하신다. 그러면 꼭 차비를 주시어 나를 돌려 보낸다. 이 사랑이 애틋한 선배님을 세월이 지났어도 나의 가슴속에 잊을수가 없다. 경쟁이 치열한 공직에서 이러한 잊을 수 없는 두분이 계셔서 정년까지, 아니 정년 후의 나의 삶을 이어 나가고 혼자 살 수 있는 면력력이 생겨 잘 지내다 보다. 퇴직 후의 나의 삶은 책보기를 하여 문학활동을 하여 ’화순문학회‘ ’서울시문학회‘ 그리고 지역사회에 글을 내면서 고향의 문제점들을 나름 생각하며 고향 발전과 향토문학에 관심을 갖고 노후를 맞이하고 있다. 끝으로 두 선배님의 잊을 수 없는 고마움은 평생 갖을 것 같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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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마우신 선배 님들을 그리시는 고운 마음에
제게 고움을 주셨던 님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자신 보다 더 나를 아껴주셨던 님을 그리며
아쉬웠던 날들을,,, 그 분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새해 인사드립니다
선배 님 늘 건강한 삶이 행복한 삶이
선배 님과 함께 하시길 새해 인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나이가 있어 다른사람들의 글을 다읽고 댓글을 잘아드리기가 힘이 듭니다
겨우 예전에 아시던분들이나 소톹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희정님에게는 미안한 생각뿐입니다
깊은 양지를 하여주시기를 부타드림니다 그리고 새해 건강하시고 행복한 삶을 이어가시기를 기원드림니다
어려울때 도움이 되셨던 분들을 오래도록 맘에 두게 되지요
저도 시흥동으로 노래교실을 다니는데 그시대의 시흥동 의 어려움을 많이 들었어요
동구리님이 추억하시는거와 일치하네요 참 힘든시절을 겪어온 세대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저의 공직의 어려움과 삶의 어려움을 생각할때에는 깊은 눈물과 옛회상이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 여건도 어려운 공직의 출발 ,힘든 삶이었습니다 정말 어려운 고비를 넘어온 삶들이었습니다 .
선배님 동안 편히 잘 지내셨는지요,
섦의 방에서 만나네요 오랜만이지요,
건강 챙기시면서 추위에~
편안히 행복하게 지내시기바랍니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색동이님도 편안하고 어려움이 없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람니다
이제 찾아오는 노화와 힘에 겨운 삶들이 기웃거리네요
열심히 사셨고
보람있는 일도 많이 하셨지요.
특히 사람의 관계도 좋은신 가운데
유난히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으시지요
고) 양이국 선배님의 사랑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렇게 주위 분들 챙기기가 쉽지는 않은데요.
늘 건강하십시요
감사합니다 가난이 뭐 인지 ? 농촌에서 살대에도 서울에 막 올라와서도 이놈의 가난때문에
가족들이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그 가난을 이겨 나갈려고 박봉의 공직이라도 묵묵히 지켜 나갔습니다
고 양선배님의 딸하고는 선배님의 그리움이 나면 통화로 나를 달레고 그의 아버지의고마움을 많이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림니다
\서울시 문학지에 글을 쓴다고 하니 좋아라 하데요 감사합니다
동사무소 근무하실 때
고생도 보람도 많으셨네요.
좋은 분들과 인연은
정말 귀한 행운이지요.
문학지에 올릴 글이니
조금만 짧게 다듬으시면
읽기에 더욱 좋을거같아요.ㅎ
감사합니다 좋은 지적을 하여 주셨습니다
이게 A포 용지 4장이 나오더라고요 사실은 나에게는 다 하고 싶은이야기이지만 읽어볼분들에게는'
편하고 감명을 주는 간단한 내용이 필요하지요 저도 줄일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