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했던 고창국민학교 시절
제33회 조병달
나는 1941년 4월 1일에 고창초등학교(고쇼아사히고구민각고)에서 입학시험을 거쳐서 학교에 갔다. 일제치하의 초등교육은 지원제로 월사금 61전씩 납부하였다. 교육과정은 일본어, 수신, 산수, 과학, 실과, 음악 등 일본인화 하는데 교육 목표를 두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일본어 사용을 강요 하고, 천황을 신으로 섬기고, 창씨 개명으로 이름을 일본식으로 부르게 강요하였다.
그리고 무궁화나무는 눈병나무라고 접근을 금했다.
부모님의 품팔이로 연명해 가는 나는 일요일에는 어머니와 같이 저수지 공사장에 나가 흙 나르기를 하고 받은 맘보(표)로 콩 깨묵과 교환해 끼니를 이어갔다.
더구나 2차 세계대전 상황이 일본에 불리해지면서, 검은 제복에 칼을 찬 순사가 가정집을 뒤져서 놋그릇, 곡식, 베 등을 공출해 갔다. 더구나 개토벌이라 하여 읍내에 있는 건달들과 면 직원들이 동네에서 키우는 개들을 쇠갈꾸리와 몽둥이로 때려 죽여서 모조리 수레에 싣고 가는 만행 앞에서는 내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참아야 했다.
4학년부터는 지게와 톱, 낫을 갖고 등교하여 수업보다는 보리 베기, 모심기, 퇴비와 마초베기, 솔괭이 자르기, 운동장에 고구마 심기, 실습지 가꾸기와 생산물 팔아 오기, 학교 동물관리, 방공호 파기와 방공 연습, 징병 징용 환송식 등 끼니도 제대로 못 먹는 학교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봄, 가을 소풍(원족)때면 어머님이 아껴두셨던 잡곡 도시락과 기름소금 반찬은 단꿀 맛이었다. 수업시간에는 일본군이 연전연승한다고 허위로 선전하였고, 가정에서는 천황폐하에게 매일매일 그 은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사에 참배하라고 가르쳤다.
학년말에는 낙제생은 자퇴하거나 후배들과 한반이 되었다. 등하교 때에는 동네별로 일본 전승가를 부르며 걷게 하고, 공습경보가 울리면 낮은 자세로 엎드려 대피하다가 해지사이렌이 울리면 그 날은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 때마다 학교가기 싫은 학생은 공습경보가 울리기를 기다렸다.
공습경보가 울릴 때 하늘을 보면 높은 하늘 저 멀리 미군 폭격기 (B29)가 흰 빛을 반짝이며 서 너 대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미군이 남서해안에 상륙할 것에 대비해서 만주에 있던 일본 관동군을 이동 시켰고, 고창초등학교 교실 몇 개와 모양성내에도 관동군이 주둔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두 방면 한 길 양편 산기슭에도 군용 차량을 은폐시켜 놓았고, 긴 칼(일본도)을 찬 일본군 장교들의 눈에는 살기를 띠고 분주히 움직였다.
그 때의 모양성 벚꽃나무는 일본 군마를 메어 놓은 자리마다 찢기고 갈라져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나라(주권)없는 국민들의 서러움이 뼈 속 깊이 아리어 온다
첫댓글 평소.. 일제시대에 관심이 있었는데...글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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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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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건강 다복하시길 축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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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
고창
고창











"고창" 
"고창"
"고창" 








그러게요. 감사합니다.
조병달 선생님은 교장선생님 아니셨나
맞습니다.
!!!!!!!!
일정 말기 혹독했던 시절이었네요^^* 70년대도 그런 시절을 흉내냈던 기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