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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을 길 위에서 지내 많은 얼굴을 만났다. 하는 일은 물론, 이름도 모르는 이들이 그립다. 그들이 순례길을 찾은 이유를 찾았길, 그리고 어느 신부님의 당부대로 사는 모든 곳을 카미노로 만들길 바란다.
피레네를 넘어 론세스바예스 수도원 알베르게에 묵은 이들 가운데 순례자 메뉴로 저녁을 함께 먹은 이들이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미국 시애틀 근처에서 찾아온 40대 남자 A는 예쁜 딸 사진을 아내에게 보여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조용했다. 하지만 며칠 뒤 로그로뇨의 네덜란드인 알베르게의 6인용 객실에 함께 썼을 때 라운지에서 청년 여럿과 얘기를 나누는 그는 카리스마 있는 영적 지도자처럼 보였다. 그 뒤 '용서의 언덕'을 넘으며 만났는데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스틱이 날 살렸다"고 노래하듯 말했다. 그가 행복하길.
론세스바예스 수도원 알베르게 저녁 식사 테이블에는 프랑스길을 반대로 걸어와 마지막 저녁을 먹는다는 남미 여행객 둘과 가이드 여성, 우리 침대 맞은 편 침대에서 하룻밤을 너무도 조용히 지내 인상적이었던 젊은 프랑스 커플, 영어를 못한다며 나랑 와인만 연신 비워낸 남미 남성 등이 기억에 남아 있다. 프랑스 커플의 아가씨는 남이 남긴 음식을 먹겠다며 건네받아 먹고 남은 빵으로 올리브 오일을 찍어 깨끗이 비워냈다. 이런 게 허물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으며 모든 이들이 흐뭇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우리가 팜플로나에서 연박을 하는 바람에 그 뒤로 이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론세스바예스 도미토리에 맨먼저 입실했는지 가장 안쪽 조용한 구석에 배정받은 한국 아가씨 셋 중 한 명은 새벽에 화장실 다녀오면서도 슬리퍼를 짝짝 소리내 끌었다. 그 중 한 명은 피레네 넘을 때 비에 완전히 절은 신발이 마르지 않아 다음날 아침 신발 보관소에서 드라이어로 신발을 말리고 있었다. 꼰대 아니랄까봐 난 "여기 모두가 신발을 말리기 위해 신문지를 말아 신발 안에 넣어두고 그것이 젖으면 다시 끼워놓고 온갖 노력을 했다"며 다음부터 신발이 젖으면 같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했다. 그 아가씨들도 순례길을 찾은 의미를 발견했길 바란다.
서양인들이 한국인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랬다. 특히 혼자 순례길을 걷는 여성이 금발이라면 도무지 분간이 안됐다. 길 위에서 짧은 만남, 스몰 토크를 하다보니 그런 일이 많았다.
로그로뇨의 6인용 숙소를 함께 쓴 프랑스 가족은 부부와 중학생쯤 돼 보이는 아들이 프랑스 중부의 어느 마을에서부터 죽 걸어왔다고 했다. 그 아들은 이런 6인용 객실에서는 조용히 지내야 한다는 교육을 부모로부터 철저히 받았는지 도무지 소음이란 것을 발생시키지 않았다. 이 가족은 객실을 드나들 때는 물론 잠자리에서도 기척을 내지 않았다. 옷가지를 빨아 뒷마당에 넌 뒤 외식을 하고 돌아와 짐을 미리 꾸린 뒤 다음날 날이 밝기 전 눈을 뜨자마자 짐을 들고 나갔다. 그날 프랑스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 가족이 무탈하길 바란다.
부부처럼 남자랑 꼭 붙어다닌 프랑스 여성 B는 우리와 길에서 자주 마주쳤다. 순례자들 중에 거의 유일하게 아내 이름을 물어보고 자신의 이름을 말해줘 둘은 길에서 만나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했다. 그들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요르니오스 델 카미노가 내려다 보이는 벤치에서였다. 이 커플은 바르에서 각자 먹은 것을 따로 계산해 아내를 놀래켰다. 그리고 길에서 만난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고 스스럼없이 다가갔다. 우리는 많은 것을 이 커플에게 배웠다.
나 혼자 카스트로해리스 성채에 올랐을 때 70대로 보이는 스페인 남성 C가 다가와 일본말 인사를 해 영어로 내 국적을 밝혔다. 그랬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30여년 전 한국외대에서 가르친 적이 있는 교수 출신이라고 했다. 3년쯤 머물러 한국을 잘 안다고 해 C와 10여분쯤 노을을 바라보며 대화했다. 한국이 얼마나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는지 침을 튀겨가며 얘기했고, C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해줬다. 그런데 모지리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이 정확히 한 달 뒤 일이었다. 그가 한국을 민주적이지 않은 나라가 아니라 재빠르게 복원해낸 나라로 기억하길.
카스트로해리스의 해돋이를 고개 위에서 완상하는데 한국인들만 멈춰서 있었다. 대다수 서양인들은 그저 무심한 하루로 여기는 듯 걸음을 서둘렀다. 그 중 가장 젊은 친구 D가 우리 부부 사진을 찍어줬다. 본인이 우리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핸드폰을 건네 받았다. 강렬한 사진이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지만 빛이 너무 좋네요" 하면서 구릿빛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는 "확실히 젊은 사람이라 앵글이 완전 다르네요" 하며 좋아라 했다. D의 걸음이 특이했다. 느리게 걷는 것 같지만 어느새 저 앞으로 치고나갔다. 이상했다. 20대 초반인 듯 했는데 그가 순례길에서 삶의 방향을 잘 찾았길 바란다.
어느 마을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드는데 자전거 한 대가 우리를 앞질러간다. 마침 내가 고개를 돌렸는데 웬 아가씨가 환한 웃음을 지었다. 한국 아가씨네. 며칠 뒤 길에서 만났다. 배낭도 없이 아주 가벼운 차림인 것이 이상했다. "며칠 전에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라고 아는 척을 하자 E는 "렌트했는데 고장 나 버리고 이제는 걸어간다"고 답했다. 아재 아니랄까봐 "혼자 무섭지 않느냐"고 말하자 "일행이 있는데 늘 제가 앞장서 걷는다"고 했다.
며칠 뒤 또 만났는데 E는 스페인어를 조금 할 줄 알아 여행사의 프로그램에 따라 숙소를 미리 잡고 식사할 곳을 찾아 예약해야 해 늘 혼자 서두른다고 씩씩하게 말했다. 어느 바르에서 쉴 때 길에서 낯을 익힌 아르헨티나 30대 F가 "한국을 간다면 꼭 봐야할 역사 유적같은 것을 소개해 달라"고 해 마침 이 아가씨가 옆에 있길래 짧은 통역을 해달라고 부탁한 일이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참 많이도 한국인들을 만나고 헤어졌다. 우리처럼 나이 든 이들을 한국 젊은이들이 가급적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해 안타까웠다. 예를 들어 이런 말을 들었다. 어느 어르신이 스페인 음식을 먹을 수 없어 끼니를 거르다 쓰러졌다. 해서 40대 남성이 길을 멈추고 쌀을 사 밥을 지어 드시게 했다. 우연히 어떤 중년 여성이 이 어르신과 가깝게 지내게 됐다. 40대 남성은 고민하다 중년 여성에게 어르신을 잘 돌보라고 신신당부하고 내뺐다.
순례길에서 한국인들에 관한 정보는 엄청 빨리 퍼진다. 예를 들어 "지금 이 마을에 한국인 10명이 들어오고 있답니다" 식이다.
숙소 2층 객실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오는 남녀 커플이 있어 내가 우리말로 인사하자 멈칫하며 당황해하는 여성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신혼 부부라고 했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닷새 정도 계속 길에서 만났는데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일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둘이, 셋이 어울려 다니던 한국 청년들이 알베르게에서 곧잘 외국인들과 어울리며 짧은 인삿말 등을 가르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배운 서툰 우리 인삿말을 많이도 들었다. F는 우리만 보면 "안뇽" "안녕히 가세요"라고 귀엽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인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스페인인이었던 G는 사랑꾼이었다. 아침에 부인과 일정 지점까지 함께 걷고 돌아와 차를 몰아 그날 숙소가 있는 마을에 가 차를 주차하고 걸어와 부인과 함께 걷는다. 80대 초입일 수도 있는 자신의 다리 힘 때문에 그런 식으로 순례길을 걷는 것 같았다. 우리 부부가 G의 이런 낭만적인 행동을 알아챈 것은 어느 날 숙소에 미리 도착한 F가 G와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면서였다. G는 다음 날 숙소 여주인과 전화는 연결됐지만 언어 소통이 안돼 쩔쩔 매는 날 보고 도와줬다. 시늉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7분, 8분 정도 통화하며 성심껏 도왔다. 며칠 뒤 부르고스 시내 진입하는 과정에서 그가 어느 가게 안에 들어가는 장면을 보고 내가 따라 들어가 "정말 고마웠다. 지나는 길에 보고 인사 드리려고 들어온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는 사랑꾼 답게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가 무탈한 일상을 영위하길.
평원의 재미없는 길을 걷는데 영락없는 한국 남성이 자전거를 탄 채 우리를 앞질렀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 H에게 물었더니 어학연수를 왔다고 했다. 살라망카에서 스페인어를 6개월 일정으로 배우는데 이제 한 달이 돼 주말을 틈타 순례길을 경험하러 왔다고 했다. 나랑 동갑이라 올해 퇴직하고 뭘할까 고민하다가 스페인 어학연수를 결심해 감행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살라망카에서 스페인어를 갈고 닦아 목적했던 소기의 성과를 얻어 돌아오길.
순례길 중반에 만나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서까지 인연을 이어간 포르투갈 여인 I도 행복하길. I는 붙임성이 대단했다. 늘 유쾌하게 순례객들과 어울렸다. 우리 부부는 처음에 그의 나이가 우리보다 위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부터 유심히 살펴보니 같거나 아래 연배인 것 같았다. 늘 길에서 마주치며 반갑게 인사하던 I가 어느 비오는 날, 대단히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왜 저러지 하는데 앞서 걷던 그가 순례객들이 쉴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가더니 우리가 걸어오는 쪽을 보면서 바지춤을 내리는 것이었다. 설마? 하는데 정말로 바지를 내리며 주저앉아 볼일 보는 품새를 하는 것이었다. 아이쿠야! 정말 볼일을 보는 거야? 우리 부부는 믿을 수 없어 하며 잰걸음을 놀렸다. 빨리 달아나 I와 다시 얼굴을 마주 대지 않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런데 몇 시간 뒤 I가 우리가 쉬는 곳을 지나치며 반갑게 아는 척을 한다. 정말, 저 여자 왜 저러는 거야? 나 같으면 우리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이렇게 얘기하며 걸었는데 저앞에 쉬는 곳에서 또 아는 척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얼마 뒤 우리 부부 사진을 찍었다며 왓츠앱으로 보내주겠다며 친구로 등록하자는 것이었다. 정말? 정말로? 반신반의하며 전화번호를 건넸더니 사진을 보내왔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됐다.
레온이란 대도시에서 우리는 사흘을 쉬었다. 빌바오도 다녀오느라 그랬다. 당연히 I를 길에서 만나지 않았는데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도착한 다음날, 길에서 딱 마주쳤다. 어머, 이게 웬일이래, 우리 부부와 I는 서로 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알베르게에서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해 그렇다며 수척해진 얼굴을 붉혔다. 다음날 포르투갈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는 지리적 여건 덕에 짬만 나면 순례길을 걷는다고 했다. 언젠가 우리 부부가 순례길을 다시 찾으면 I와 마주칠지 모르겠다. 그때까지 그가 건강하고 무탈하길.
실제로 순례길에서는 볼일을 마구, 함부로 보는 이들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후반부에는 키가 190cm는 돼 보이는 서양인 순례객이 길을 걷다 멈춰서 그대로 볼일을 봤다. 보통 숲이나 나무 뒤로 가서 볼일을 보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바지 지퍼를 내렸다. 나중에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자 우리 부부는 어디 아픈가 보다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우리도 몰래 살짝 볼일을 보곤 했다. 그런 때 뒤돌아보고 한참 살핀 뒤 볼일을 봤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뜻밖에 순례객이 나타나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아래 J와 K 부부도 그랬다. "분명히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 볼일을 보는데 갑자기 순례객이 나타나 놀란 기억 누구나 있죠."
50대 초반쯤 되는 부부다. 아내 K가 워낙 여행을 좋아해 2019년 봄에 처음 프랑스길을 걸었고, 올해 둘 다 직장을 그만 두며 여행에 나서 9개월째 여행 중이라고 했다. 용서의 언덕 넘을 때 우리 부부를 봤다는데 우리 부부는 그들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아무튼 중간에 거의 만나지 않았다가 부르고스~레온~사리아~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마주치는 날이 많았다. 공립(무니시팔) 알베르게에 묵는 이 부부와는 오후에 맥주를 마시거나 저녁 식사를 함께 사먹곤 했다. 올해 은의 길과 북쪽 길을 걸었고 프랑스길을 두 번째 걷는다고 했다. 이들은 길을 걷다 포도나 먹을거리 서리도 잘했고, 숙소 근처에서 우리를 만나면 아주 반가워했다. 숙소 근처에 가볼 만한 식당이나 음식을 추천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많은 힘이 됐다.
이 부부가 다리를 놓아 두 차례 정도 식사를 함께 한 L도 40대 중후반인데 직장을 옮기게 돼 짬을 내 충동적으로 순례길을 찾았다고 했다. 물론 순례길에 대한 정보는 틈틈이 알아둔 상태에서 우연찮은 계기에 직장을 옮기게 돼 결행을 앞당기게 됐는데 상당히 만족스럽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아내와 아이들 생각을 많이 하는 눈치였다. 그가 다음에는 가족과 함께 순례길을 찾아 온전한 기쁨을 누렸으면.
아울러 순례길을 함께 걸은 모두가 세상의 다른 곳을 카미노로 만들기를,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