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씨넥스'를 꼭 폐관해야 하나
당대 최고의 전문가들이 만든 극장의 예술품
신승렬 기자 phlip@now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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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넥스 극장이 있는 삼성생명 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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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cine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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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퇴근하고 저희 동네로 오는 마을버스를 기다리다가, 무언가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니 항상 그 자리에 있었던 프라모델 전문점이 사라졌더군요. 어느 새인가 그 자리엔 그 자리엔 맥주가게가 공사를 시작했고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올 때 그 곳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잠시 진열된
프라모델들을 보면서 피로를 잊곤 했었지요. 딱 한 번이지만 어릴 적
기억을 살려 아내와 함께 들어가서 프라모델을 사 와서 며칠간 집에서 만들었던 기억도 있고요.
그렇지요. 한국에서 프라모델 취미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어른들은
꿈을 잃은 데다, 시간도 없지요. 청소년에겐 입시가 기다리고, 그들은
돈이 주어지면 피시방으로 달려갈 뿐 프라모델을 만들 여유가 없습니다. 부모들은 저 어릴 때나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프라모델 만드는 걸
사시뜬 눈으로 볼테고요.
그게 꼭 프라모델뿐이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문화란 정말로 사치일
따름입니다. 중고등학생은 입시에 치여서, 어른들은 살아남기 위한
경쟁에 치여서 문화 '따위'를 누릴 시간따윈 어디에도 없는 거지요.
겨우 입시경쟁의 수혜자인 일부 대학생들만이 그 사치를 항유하지만,
그것도 요즘 같은 취업전쟁 속에선 남의 이야기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더 나쁜 것, 문화를 향유하고 싶은 사람들조차 그걸 이해 못하는 사람들한테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거지요. 단지 그들이 더 힘(혹은
돈)이 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씨넥스'라는 극장이 이번 11월 21일에 문을 닫습니다. 98년 개장했던 이 극장은 당시 삼성영상사업단이 영화사업 진출을 위해 만들었던
극장입니다. 최초 극장 공사를 시작했던 97년 당시 삼성은 막대한 반도체 이익을 바탕으로 의욕적으로 영상사업에 투자를 했지요.
이 극장은 당대 최고의 전문가들이 만든 극장의 예술품입니다. 단 한
번만 이 극장을 찾아와서 소리를 들어보면 다른 극장의 소리는 TV 스피커로밖엔 들리지 않을 만큼 크고 단단한 소리를 자랑합니다. 소리가 단순히 커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고음, 저음의 조화, 서라운드의
분리도, 사운드를 받쳐줄 수 있는 흡음재까지 완벽에 가까워야만 씨넥스와 같은 소리가 납니다.
같은 수와 질의 스피커를 썼다 해도 1/3밖에 안되는 앰프, 스티로폼과
베니어판으로 극장 사이를 막아놓은 멀티플렉스들은 절대 씨넥스와
같은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그 외에도 국내 최초의 오픈 매표소, 고객이 스스로 자기 자리를 정하는 매표시스템, 당시 국내 최고의 좌석간 거리, 극장의자 중 최고가의
피가레스크 의자 등 이 극장은 말 그대로 '꿈의 극장'이었습니다. 수많은 극장전문가와 영사기사분들이 이 극장을 찾아와서 감탄했으며,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의 극장평가에서도 항상 1위를 고수했습니다.
그러나 이 극장은 지독하게도 운나쁘게 98년에 본격적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당시 생존을 위해서는 적자기업들은 살아남기 힘든 시대, 삼성영상사업단은 삼성 내부 경영진간의 갈등에 휘말려 공중분해되고
맙니다. 그 원인은 경영실패에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단지 핑계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당시 말단직원으로 씨넥스의 운영을 맡았던 저는 한국에서 문화 비즈니스가 얼마나 '핫바지'로 취급되는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며 회사가 분해되기 전에 스스로 뛰쳐나왔습니다. 그 뒤 저는 다른 직업을 갖게 되었지만, 가끔 씨넥스를 찾아가 매니저님이나 영사기사님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환상적인 사운드를 자랑하는 영화를 함께 보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달에 전 제 마음의 고향과도 같던 이 곳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삼성영상사업단의 해체 이유와 유사하더군요. 즉 겉으로는 경영악화를 핑계대고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기업 경영진의 문화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가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겹친
것이 씨넥스를 문 닫게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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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넥스 내부- 1.05미터의 좌석간거리는 평균 좌석간거리가
70cm이던 당시로는 파격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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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cine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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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극장은 삼성생명 본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애시당초 삼성생명의
강당으로 쓰이던 곳이죠. 최초 극장이 들어선 것은 그룹 고위층의 지시로 삼성본관, 생명, 금융빌딩의 지하를 이어서 쇼핑센터를 만들면서 그 부대시설로 극장을 만드는 계획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고위층
지시로 그룹의 의사와 관계없이 진행된 이 리노베이션 작업 자체가
한국에서만 가능한 넌센스입니다.
이 지역은 상업지구가 아닌 업무지구로, 주말에는 텅텅 비는 유령도시처럼 되어버리는 곳인데 쇼핑센터와 극장이라뇨?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진 이 쇼핑센터는 막대한 적자를 보다가 결국 점점 규모를
줄여 이젠 1/3만 남았습니다. 씨넥스 역시 위치상의 문제 및 애시당초
극장을 반기지 않았던 삼성생명측의 비협조로 인해 무척 어렵게 운영되어 왔습니다.
이를테면 개관 당시 씨넥스는 오후 4시 30분이 첫 상영시간이라는 특이한 극장 시간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회사 업무시간(당시 삼성은 7시 출근 4시 퇴근이라는 기형적인 업무시간을 강요했죠. 물론
당시에도 마지막 극장상영이 끝나는 밤 11시에 건물을 나와 보면 건물의 불들은 꺼지지 않았습니다)에는 상영을 하지 말라는 지시였죠.
얼마 후 겨우 대관료의 인상을 미끼로 타 극장처럼 11시를 첫 상영시간으로 조정했지만, 그 이후에도 걸핏하면 사내 행사, 그룹 행사로 극장 상영시간을 잡아먹곤 했습니다.
그뿐인가요. 안 그래도 극장으로 보이지 않는 건물 외형의 극장 외벽에 영화광고 크기까지 제한하니 극장이 어디 있는지 몰라 찾아오지
못하는 관객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AV 매니아를 중심으로 입소문이 퍼지면서 씨넥스에 대해
알아주시는 분들은 점점 더 늘어났습니다. 각종 매체들이 뽑은 최고의 극장에도 어김없이 씨넥스는 넘버원으로 선정되었고요.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쓴 '씨넥스 최고'라는 글을 읽을 때마다 저는 이미 극장을 떠난 몸이었지만 정말 기뻤습니다.
이제 이런 극장이 왜 사라지는가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죠. 아까 말씀드렸듯이 경영악화, 즉 장사가 안된다는 건 외형적인 이유가 될 겁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애시당초 문화에는 관심도 없고 고위층에서 하라니까 만들긴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만큼 관심이 식었으니 원래대로 되돌리겠다는 거지요. 국내 굴지 대기업의 사회 환원 내지는 문화에 대한 애정, 기업의 고객에 대한 자세는 딱 이 정도입니다.
심지어 폐관 사실조차 폐관 일주일 전까지는 비밀에 붙이고, 물어봐도 답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며, 일부의 불만따윈 신경쓰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한 대기업이 문화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덕분에 겨우 겨우 시간을 쪼개가면서, 영화를 만든 이들이 의도한 그대로의 화면과 음향의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 씨넥스를 찾곤 했던 수많은 이들은 이제 그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극장은 한국에선 절대 다시 만들어질 수 없을 겁니다. 이
극장 하나를 만들 돈이면 멀티플렉스 서너 관을 만드는데 어느 누가 1개관에 이런 투자를 하겠습니까?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정말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건 팬시 상품, '붕어빵'일 뿐 진정한 의미의 '극장'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차이니스 극장 같은 진짜배기 단관 극장들이 여전히 스타들이 등장하는 영화의 첫 시사회(premiere)장으로 쓰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화면은 비슷해도 음향과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에 그 극장에서는 최고의 조건으로 영화관람이 가능한 거죠. 정말 영화를 영화답게 감상하도록 최고의 문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대기업이 사회를
위해 환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요?
기자들만큼 씨넥스에서 영화를 많이 본 분들도 없을 겁니다. 모든 영화사들은 시간만 맞으면 기자시사만큼은 씨넥스에서 하려고 했습니다. 정말 영화를 멋지게 보이게 만들어주니까요.
도대체 그 많은 기자들, 씨넥스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던 기자들은
지금 무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같은 인터넷 게릴라가 기사를 올려야 할 만큼 우리나라 문화부 기자들은 바쁜가 봅니다. 혹시 그들에겐 딱 우리나라 대기업만큼의 문화 인프라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