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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단종 복위 사건 처벌에 나타난 조선 가족제의 특성
112)이 순 구*
머리말
Ⅰ. 단종 복위 사건의 전말
Ⅱ. 조선 모반죄 연좌법의 특성
Ⅲ. 단종 복위 사건에 나타난 처가, 외가와의 친연성
맺음말
요약
단종복위사건은 조선 역사상 현 관직자가 가장 많이 참여한 謀反이었
다. 명분이 뚜렷하고 현직자가 많았던 만큼 국가에 대한 위험성은 높았고
따라서 이에 대한 처벌을 철저했다.
그런데 처벌이 강력했다고 해도 조선이 차용했던 대명률에 따르면
시집간 딸에 대해서는 연좌를 안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조선은 단
종복위사건 처벌 시 사위들에게도 유배형을 내린다. 중국과는 다른 조치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투고일: 2010년 5월 28일
심사일: 2010년 5월 31일
심사완료일: 2010년 6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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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조선은 왜 이런 특별한 조치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뭔가 조선의
가족제적 특성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조선은 오랫동안 남귀여가혼은 해왔다. 혼인 후 남자가 여자 집에 거
주하는 비율이 높은 만큼 장인과 사위의 관계는 돈독했다. 사위와 장인뿐
만 아니라 외조와 외손의 관계도 긴밀했다. 따라서 사위는 장인 때문에
관직을 더해 받기도 하고 또 장인의 죄에 연좌되기도 했다. 즉 이익을 얻
기도 하고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던 것이다.
단종복위사건의 주도자였던 성삼문의 외손들은 외조의 역모로 인해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첫째 외손 박증은 과거를 포기하고 낙향하여 평생
을 지냈다. 관직진출이 용이치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관직생활에 대한 회
의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동생 박호는 관직에 나가기는 했으나
관직생활 내내 역모자의 외손이라는 사실로 불편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 무안 박씨 집안은 끝내 불이익만 당하지는 않았다. 조선
후기 단종복위사건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면서 오히려 혜택을 받게 된다.
외손으로서 관직을 제수 받기도 하고 박증을 배향한 서원에 사액을 받기
도 했다. 시대 상황에 따라 때로는 불이익을 또 때로는 혜택의 양면 모두
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주목할 것은 박씨 집안의 이러한 변화가 모두 외
조 성삼문에게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조선에서 장인과 사위, 외조와 외
손이 긴밀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생긴 일인 것이다.
조선은 오랫동안 혼인에서 두 집안이 함께 공조하는 시스템을 편리하
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국과는 다른 독특한 가족
관계를 형성했던 것이다. 조선에서 처가, 외가의 비중은 높았다. 단종복위
사건에는 이러한 조선 가족제의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주제어 : 단종복위사건, 대명률, 남귀여가혼, 장인, 사위, 외손, 외조,
박증, 박호, 외손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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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세조는 단종 복위 모의에 참여했던 주모자들이 처벌되고 난 며칠 후
다음과 같은 명령들을 내린다. “역모한 사람들의 사위들도 모두 먼 지방
에 안치하라.” “亂臣에게 연좌되어 관가의 노비로 定役된 사람과 사위[女
壻]로서 안치된 사람들 가운데, 각각 親屬들끼리 모여 살기를 자원하는
자는 원대로 들어 주라.” 이는 조선이 차용했던 대명률에는 없는 처벌
규정이다. 율 밖의 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세조는 이 명령을
내리고 또 그것은 그대로 시행했는가?
이 처벌에서 우선 일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사위들이 장인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다는 것은
누구와의 관계가 긴밀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조선에서는 왜 중국과는
달리 이렇게 장인과 사위가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었을까?
이는 아마도 조선의 男歸女家婚 전통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혼인 후
여자는 자신의 집에 그대로 있고 남자가 여자 집과 자신의 집을 오가거나
혹은 아예 여자 집에서 생활하는 형태는 장인과 사위의 동거 비율을 높인
다. 자연 장인과 사위의 관계는 친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장인과 사위뿐만 아니라 외조와 외손의 사이에서도 중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을 법한 일들이 발생하게 한다. 조선에서는 代加를 할 때
‘子婿弟姪’의 순으로1) 사위가 아들에 버금가는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반면
1) 태종 32권, 16년(1416 병신 / 명 永樂 14년) 7월 8일(정유) 7번째기사. 본 논문은
조선왕조실록을 인용할 때 웹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을 사용했다. 따
라서 태종 32권으로 시작되는 기사는 태종실록 표시를 따로 하지 않았지만 태
종실록의 32권의 기사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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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장인이 죄를 지었을 때 사위가 연좌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단종 복위 모의가 실패로 끝난 후 참여자에 대한 처벌은 철저했다. 무
위로 끝나긴 했지만, 복위 계획이 아주 구체적이었고 또 참여자의 절대
다수가 관직자였던 것이 처벌의 강도를 높였을 것으로 보인다. 주모자들
의 혈손은 특히 남자혈손은 거의 살아남을 수 없었다. 따라서 주모자들의
제사도 사실상 유지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성삼문의 제사는 오랫동안 유지됐다. 무안 박씨 집안이 외손
봉사를 한 것이다. 외손 朴壕에 의해 제사가 지내지기 시작했고 중간에
우여곡절을 거치기는 했지만, 후대까지도 계속됐다. 전형적으로 조선의
장인과 사위, 외조와 외손의 특수한 관계에서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장인 또는 외조가 죄를 범하면 사위와 외손은 구체적으로
어떤 불이익을 당했을까? 그리고 그 불이익은 시종일관 불이익으로 끝났
을까? 후에 성삼문이 육신의 하나로 추앙받게 됐을 때 무안 박씨 집안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됐을까? 때론 불이익을 당하고 또 때로는 이익을 얻기
도 하는 장인과 사위, 또는 외조와 외손의 관계를 조선은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했을까? 단종 복위 모의에 대한 처벌 또는 추숭 과
정에서 조선 가족제도의 특성을 논의해볼 수 있다.
Ⅰ. 단종 복위 사건의 전말
세조가 왕위에 오른 지 2년째인 1456년(병자) 6월 2일, 성균 사예 김질
이 우찬성 정찬손과 함께 성삼문의 不軌를 고하였다.2) 즉 성삼문이 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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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꾀하였다는 것이다. 김질은 성삼문이 자신을 집으로 불러 ‘근래에 혜
성이 나타나고 사옹방의 시루가 저절로 울었다.’라고 하면서 상왕(단종)
복위 모의에 참여할 것을 권했다고 말했다. 세조실록과 연려실기술
을 통해 본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김질의 고변이 있기 하루 전인 6월 1일, 세조는 명나라 사신을 위해
창덕궁에서 연회를 베풀기로 했다. 창덕궁을 택한 것은 여기에 머물고 있
는 단종의 참여를 위한 것이었다. 성삼문 등은 이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원래 왕이 있는 곳에는 늘 2품 이상 무반 2명이 큰 칼을 차고 좌우에서
시립하는 雲劒이 있게 된다. 이날 연회에는 마침 운검을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 박쟁 등이 맡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 복위에 뜻을 같이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성삼문은 이들이 운검으
로 시위하다가 신숙주, 한명회, 권남 등 왕의 측근을 제거한다면 일은 비
교적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3)
그러나 일을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세조가 한명회의 말을 듣고
창덕궁 광연전이 협소하다며 운검을 들이지 말라고 명한 것이다. 성삼문
은 모든 행사에 운검이 없을 수 없다며 운검을 반드시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조는 신숙주에게 다시 한 번 전내를 둘러보게 한 후
에도 결국 운검을 들이지 않게 했다.4) 성삼문 쪽에서는 당황했다. 게다가
본래 연회에 참여하기로 했던 세자도 오지 않았다. 한명회 등을 죽인다고
해도 세자가 오지 않으면 일의 성패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사
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경복궁에 있던 세자가 군사를 몰고 오면 대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성삼문의 생각이었다. 성삼문과 박팽년은 ‘운검을 들
2) 세조 4권, 2년(1456 병자 / 명 景泰 7년) 6월 2일(경자) 2번째기사.
3) 민족문화추진회, 1966, 국역 연려실기술 I, <단종조 고사본말> 육신의 상왕 복위
모의.
4) 세조 4권, 2년(1456 병자 / 명 景泰 7년) 6월 2일(경자)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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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않고 세자가 본궁에 있게 된 것이 모두 하늘의 뜻’이라며 거사를 다
음으로 미루자고 했다.
그러나 성승과 유응부는 그대로 일을 진행시키자고 주장했다. 특히
유응부는 “일이란 빨리 하는 것이 중한 것인데, 만일 다른 날로 미루면
일이 누설될까 두렵고 세자가 비록 본궁에 있다지만, 그 외의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왔으니 오늘 이 무리를 다 죽이고 상왕을 복위하면 세자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밀어붙이자고 했다. 그러나 박팽년과
성삼문이 끝내 이를 저지했고, 거사는 착수되지 않았다. 후에 반역으로
심문을 받을 때 유응부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서생과는 같이 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다.”라고 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한 성삼문을
원망했다고 한다.5)
복위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은 거사가 진행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이
미 일은 틀어졌다고 판단하고, 다음 날 장인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나아가 변을 고한 것이다. 김질이 굳이 장인과 함께 고변하러 가게 된 것
은 처음에 성삼문으로부터 정창손도 함께 모의에 참여할 것을 제안 받았
기 때문이다. “일이 성사되면 자네 장인 정찬손이 수상이 될 것이다.”라는
말을 성삼문이 했다고 한다.6)
세조는 성삼문의 원에 따라 김질과 성삼문을 대질시켰다. 성삼문은
“상왕께서 한창 젊으신데 손위하였으니 다시 세우려 함은 신하된 자의 마
땅한 일이라.”라고 하며 자신이 모의한 이유를 말했다. 그리고 함께 한 인
물들로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박쟁 등을 거론했다. 박팽
년은 여기에 김문기, 권자신, 송석동, 윤영손, 이휘와 자신의 아버지를 더
했다. 이 때 거명된 인물들은 모두 공초에 승복했다. 다만 김문기만이 불
5) 민족문화추진회, 1966, 국역 연려실기술 I, <단종조 고사본말> 육신의 상왕 복위
모의.
6)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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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했다.
“박팽년․유성원․허조 등이 지난해 겨울부터 성삼문․이개․하위
지․성승․유응부․권자신과 함께 당파를 맺어 반역을 도모하였으니 그
죄가 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청컨대 허조․박팽년․유성원의 시체를 車
裂하고 목을 베어 효수하여 팔도에 전하여 보일 것이며, 그 재산을 몰수
하고, 연좌된 자들도 아울러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소서.”7)
반역 사건이 고변된 지 5일 만인 6월 7일 의금부는 위와 같이 아뢰었
다. 모두 능지처사형이라는 것이다. 이때 박팽년은 공초에 자복한 후 옥
중에서 죽었고 유성원과 허조는 사건이 발각되었다는 말을 듣고 집에서
스스로 죽었다.8) 허조는 공초에서 이름이 직접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이
개의 매부로서 모반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죽은 것이다.
그런데 이미 이렇게 죽은 사람들인데도 그냥 죽은 것은 처벌을 받은 것이
아니므로 다시 율에 따라 다시 벌을 주었다.
조선은 형률로 大明律을 차용해서 썼는데, 그 謀反大逆條9)에는 ‘무
릇 謀反과 大逆은 다만 공모한 자라도 首犯과 從犯을 가리지 않고 다 능
지처사한다.’라고 되어 있다. 같은 死刑이라도 신체 형태를 그대로 유지
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처벌 강도가 다르다. 능지처사는 신체를 찢는 형벌
이므로 모든 형벌 중에 가장 중한 형벌이다. 성삼문 등의 모반에는 대명
률의 법률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미 죽은 박팽년, 유성원, 허조 등도 그
시체를 다시 거열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친족들에게는 “친자식들은 모조리 絞刑에 처하고, 어미와
7) 세조 4권,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6월 7일(을사) 2번째기사.
8) 세조 4권,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6월 6일(갑진) 2번째기사.
9) 大明律直解 권18, 刑律, 盜賊, 謀反大逆. 여기에서 모반은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고 대역은 종묘와 산릉, 궁궐 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단종복위사건
은 모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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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처첩․祖孫․형제․자매와 아들의 처첩 등은 極邊 殘邑의 노비로
영구히 소속시키고, 백숙부와 형제의 자식들은 먼 지방의 잔읍의 노비로
영원히 소속시키고, 그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단종 복위 모의 참여자들에게는 모반, 대역으로서 최고의 형벌이 적
용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전 역사를 통해서 이렇게 많은 현직자가 또 구
체적인 거사 계획을 가지고 모반을 일으킨 경우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가
장 모반다운 모반이었다. 사실 이들이 성공을 했다면 반정이 됐을 것이다.
그럴 만큼 규모가 크고 명분이 뚜렷했다. 그러나 명분이 그럴듯할수록 상
대로부터의 혐오는 더 강렬할 수밖에 없다. 모반이 성공하지 못했을 때
처벌은 더 철저했다.
Ⅱ. 조선 모반죄 연좌법의 특성
‘무릇 모반과 대역은 다만 공모한 자라도 수범과 종범을 가리지 않고
능지처사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가 16세 이상이면 모두 絞刑에 처하
고, 15세 이하와 어미와 딸, 처․첩, 할아버지․祖孫, 형제자매 또는 아들
의 처첩은 공신의 집에 주어서 종을 삼고, 재산은 모두 관가에 몰수한다.
남자로서 나이 80세가 된 자와 篤疾者, 부인으로서 나이 60세 된 자와 廢
疾者는 모두 연좌죄를 면죄하고, 백숙(백숙)․형제의 아들은 호적의 같고
다름에 관계없이 모두 3천리 밖으로 귀양 보내어 안치하고 연좌된 사람이
라도 동거하지 않는 자의 재산은 관가에서 몰수 하는 범위에 넣지 않으며,
만약 딸이 시집가기로 허락하고 이미 그 지아비에게로 갈 것이 확정된 자
와 자손 가운데 過房10)으로 남에게 준 자와 아내로 결정을 보았지만 아직
성례하지 못한 자는 모두 연좌하지 않는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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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률 형률에 있는 모반 대역죄에 대한 처벌 규정인데, 단종 복위
모의가 발각된 3일 후 의금부는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세조에게 아뢴다.
대명률을 가져다 쓴 조선으로서는 이 조항을 인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이 형률을 통해 단종 복위 모의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부모,
형제자매, 부인과 딸들에 대한 처벌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해 보자. 우선
일반적으로 가장 중한 연좌법을 적용받는 대상은 직계 남자들이다. 아버
지와 아들로 성인인 경우는 모두 교형이며 아직 15세 이하로 어린 아들만
교형을 면할 수 있었다.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죽이지는 않고 종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 경우
관계의 친소를 면밀히 따지진 않았다. 어머니나 딸과 자매 혹은 아들의
처첩이 구별 없이 처벌되었다. 즉 딸과 며느리가 외형상으로는 같은 형벌
을 받고 있다.
그런데 여자들에 대한 연좌에서 주목되는 것은 시집가기로 한 딸은
연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딸이 시집가기로 허락하고 이미 그 지아비
에게로 갈 것이 확정된 자’로 표현되어 있다. 혼인이 약속된 딸이 그렇다
면 이미 시집간 딸은 더군다나 연좌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사위는
언급되지 않았다. 대명률이 부계 중심의 형법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확
인할 수 있다.
그런데 세조는 단종 복위 역모가 있은 며칠 후 의금부에 “역모한 사람
들의 사위들도 모두 먼 지방에 안치하라.”는 명을 내렸다.12) 대명률이
상의 형벌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에 안치한다’ 는 것은 단순한 불
이익이 아니다. 명백히 형을 받은 것이다. 대명률에서 백숙과 형제의
10) 아들이 없을 때 친척을 양자로 삼는 일.
11) 세조 4권, 2년(1456 병자 / 명 景泰 7년) 6월 5일(계묘) 2번째기사; 大明律直解
권18, 刑律 盜賊 謀反大逆.
12) 세조 4권, 2년(1456 병자 / 명 景泰 7년) 6월 8일(병오) 4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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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들이 3천리 밖으로 귀양 가서 안치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사위가 처벌 대상이 됐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명률과 달리 조선에서 이
처럼 사위를 처벌대상으로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조선의 전통적인 가족관계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고구려에 서
옥제가 있는 이후로 우리나라의 혼인은 혼인 후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움직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조선에서도 혼인은 이른바 男歸女家婚으로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혼례식을 하고 여자 집에서 그대로 살림을 시작하
거나 아니면 남자가 본가와 처가를 오가는 생활했다.13) 따라서 조선의 현
실에서 혼인은 ‘아내를 取하는’ 것이기 보다 ‘장가드는〔入丈〕’ 행위였다.
조선 사림파의 종장 김종직은 아버지 김숙자의 고향이 경북 선산(현
재 구미)이었지만, 어머니의 고향인 밀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리고
장가들어서는 서울에서 벼슬살이 할 때를 빼고는 대부분 부인 조씨의 근
거지인 金山에 살았다. 아들이 어려서 일찍 죽었을 때 김종직은 아들을
金山의 장모 무덤 곁에 묻기도 했다. 즉 김종직에게 혼인 후 거주지는 처
가였던 것이다. 그리고 후에 김종직은 조씨부인을 잃고 재혼을 하게 됐는
데, 막상 김종직이 죽었을 때는 그의 장례를 첫 번째 부인의 동생 즉 처남
曺偉가 담당했다.14) 물론 김종직과 조위가 평소부터 학문적으로 친분이
두터웠다는 배경이 있기도 했지만, 본가의 조카들을 제쳐두고 처남이 상
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당시 그렇게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또 신사임당은 혼인 후 20년 가까이 친정인 강릉과 그 주변에 살면서
13) 태종 29권, 15년(1415 을미 / 명 永樂 13년) 1월 15일(갑인) 2번째기사: “전조의
舊俗에는 혼인하던 예법이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들어 아들과 손자를 낳아서
外家에서 자라게 하기 때문에 외가 친척의 은혜가 중함으로 해서 외조부모와 처
부모의 服을 당하면 모두 30일을 給暇하였습니다. 本朝에 이르러서 아직도 그대
로 옛 풍속을 따르므로 친소에 차등이 없음은 실로 미편하니, 빌건대, 이제부터는
외조부모의 大功 에는 말미를 20일 주고, 처부모의 小功에는 15일 주도록 하소서.”
14)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점필재집 부록,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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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을 낳고 길렀다. 그 사이 남편 이원수는 서울과 강릉을 오가며 생활
했다. 흔히 사임당이 친정을 떠나지 않은 것은 아버지 신명화가 이 딸을
유난히 아껴서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상 당시의 혼인제도가 그것을 가
능하게 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15)
이러한 혼인제도 하에서는 장인, 장모와 사위가 함께 살 기회가 많아
서 그 관계가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조선 초기 당사자의 관작이 차서 다
른 사람이 대신 받고자 할 때 순서는 子, 壻, 弟, 姪의 순이었다. 동생이나
조카 보다 사위가 앞선다. 이는 장인과 사위의 관계가 부자 관계 못지않
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조선에서는 이성사촌 간의 간통을 근친상간으
로 규정하고 아울러 혼인을 금지했다.
정창손, 김국광등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 풍속은 外家를 중시
하여 異姓六寸이라도 모두 서로 혼인하지 않는 후한 풍속이 있습니다.” 세
종께서 일찍이 교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는 본래 外姓 친척을 중
시하여 서로 친한 것이 후하였는데 간혹 규문이 문란해지는 경우가 있었
다. 옛날 呂榮公이 사촌과 혼인한 일이 소학에 실려 있으니 나는 사촌
이하라도 서로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여 가깝게 대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서로 문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재상들
은 모두 외성이 서로 친한 것이 우리나라의 후한 풍속이니 사촌이 서로 혼
인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이에 세종도 그 의논을 정
지시키고 사촌은 서로 혼인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미풍은 쉽게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16)
중국에서 이성사촌 간에 비교적 자유롭게 혼인이 이루어졌던 것과는
대조적이다.17) 조선은 이를 ‘외성 친척을 중시하여 서로 친한 것이 후하
1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 국역 율곡전서 ⅳ, 권18 先妣行狀.
16) 성종 95권, 9년(1478 무술 / 명 成化 14년) 8월 10일(기해) 4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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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으로 설명하고 있다. 외성 친척이 친하다는 것은 처가, 외가와 관
계가 돈독하다는 것을 다시 말해주는 것이다.
“문밖 어머님 기제사였는데 조별좌가 오려고 하였으나 비 때문에 못 오
시는가 싶다. 천남이를 데리고 띠를 띠우고 관을 씌워 제사를 지내니 슬프
고 설운 정이 그지없다. 외손자라도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
기 그지없다. 조카들도 하나도 못 오니 그런 섭섭함이 없다.”18)
이는 조선 17세기 양반 집 부인이 친정어머니(문밖 어머니) 제사를 지
내는 장면이다. 남편인 사위가 주체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어째든 딸과
사위집에서 장모의 기제사가 지내지고 있는 것이다.
재산상속에서 딸과 아들이 동등한 상속권을 가졌다는 것도 유념할 필
요가 있다. 율곡이 자신의 누이인 이매창과 상속분에 거의 차이가 없었다
는 것은 율곡 남매 분재기에 잘 나타나 있다.19) 이러한 관계 속에 있었기
때문에 세조가 역모에 관계된 사람들의 사위를 안치시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관작을 대신 받기도 하고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받는 등
아들과 다를 바 없는 혜택을 받았다면, 반대로 나쁜 일에서 불이익은 받
는 것도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세조는 사육신 모반에 연좌된 사위들을 안치하라고 명한 며칠 후, 그
들이 친속끼리 같이 모여 살기를 원할 경우 그 말을 들어주라고 한다.20)
그들의 편의를 봐 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배려이지 연좌를
면해주는 차원은 아니었다. 중국에는 없는 사위 연좌제도가 조선에서는
17) 이종서, 2003, 14-16세기 한국의 친족용어와 일상 친족관계, 서울대학교 국사학
과 박사학위논문, 189쪽.
18) 전형신, 박경신 역주, 1991, 병자일기, 예전사, 169쪽, 1638년 1월 18일.
19) 보물 제477호, <율곡선생남매분재기>.
20) 세조 4권, 2년(1456 병자 / 명 景泰 7년) 6월 12일(경술) 2번째기사.
단종 복위 사건 처벌에 나타난 조선 가족제의 특성
151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Ⅲ. 단종 복위 사건에 나타난 처가, 외가와의 친연성
1. 성삼문 외손 무안 박씨 집안의 불이익 사례
‘1672년(현종13) 호조 아전 엄의룡이 유연히 인왕산 비탈 무너진 곳에서
오지그릇을 발견했는데 그 속에는 밤나무 신주 세 개가 있었다. 하나는 죽
은 승지 성삼문의 것이요, 둘은 성삼문의 외손 참찬 朴壕 부처의 것이었다.
성승지의 신주에는 <성삼문 무술생>이라고 쓰여 있었다. 엄의룡이 놀랍고
이상하여 달려와 여러 사대부에게 고하였더니 이에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몰려가서 배례를 했다. 그리고 가마에 담아 떠메고 와서
임시로 외손인 진사 박엄찬의 집에 봉안하고 이내 홍주에 사는 외후손들
에게 기별하여 가져가게 했다. 이때까지 홍주 노은골에는 성삼문의 구택이
있었다.’21)
연려실기술에 있는 성삼문의 신주에 대한 기록이다. 성삼문의 신주
는 왜 단종 복위 사건이 있은 지 200여년이 지나 그것도 외손자의 신주와
함께 발견되었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성삼문의 신주는 다시 외손에
게 보내진 것일까? 이 얘기가 모두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여기에
서 적어도 성삼문의 외손이 성삼문의 제사가 계속되는데 결정적인 역할
을 했으리라는 사실만큼은 짐작할 수 있다.
21) 국역 연려실기술 I, <단종조 고사본말> 육신의 상왕 복위 모의, 민족문화추진회,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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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대명률의 규정대로 성삼문 집안의 직계 남자 혈손은 모두 처형을
당했다. 그리고 부인 次山은 딸 효옥과 함께 당시 운성부원군 박종우에게
노비로 보내졌다.22) 사실상 성삼문의 신주를 보관하여 제사를 지낼 수 있
는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장릉지에 의하면 성삼문의 부인 김씨가 신주를 종에게 부탁
하여 봉사하게 했고 그것이 김씨 사후 외손인 박호에게 돌아갔다는 것이
다.23) 그렇다면 외손 박호는 누구이며 그가 외조 성삼문의 제사를 담당하
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성삼문에게는 무안 박씨 집안으로 시집간 딸이 하나 있었다. 이 딸은
물론 대명률에 따라 일단 반역 사건의 연좌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사위는 박임경인데, 이 사람이 성삼문의 흩어진 시신을 거두고 노량에 묻
었다고 전해진다.24)
박경임은 후대의 기록인 茅谷祠誌25)에 당시 관직생활을 하고 있었
던 것으로 서술돼 있다. 그러나 장인 성삼문의 역모사건이 있은 후 관직
생활을 지속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박임경과 성삼문의 딸 사이
에는 모두 세 아들이 있었다. 첫째가 박증이고 박호는 둘째이다. 그렇다
면 왜 성삼문의 제사가 첫째인 박증이 아니라 둘째 박호에게 간 것일까?
朴增은 단종 복위 사건이 있고 난 5년 후에 태어났다.26) 따라서 본인
이 직접 외조의 역모사건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버
22) 세조 5권, 2년(1456 병자 / 명 景泰 7년) 9월 7일(갑술) 4번째기사.
“…성삼문의 아내 次山․딸 孝玉, 李承老의 누이 者斤阿只는 雲城府院君 朴從愚
에게 주고…”
23) 국역 연려실기술 I, <단종조 고사본말> 단종조의 상신, 민족문화추진회, 1966.
24) 김경수, 2005, 「무안 박문과 호서 유림의 교유」, 암천 박증의 도학정신과 유물유
적,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편, 심지, 148쪽.
25) 모곡사지는 1808년 창건된 암천 박증을 배향하는 모곡사 관련 기록 모음집이다.
2001년 박재홍 박철희에 의해 편찬됐다.
26)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편, 2005, 암천 박증의 도학정신과 유물유적 부록 「巖川
先生實記」 行狀, 270쪽.
단종 복위 사건 처벌에 나타난 조선 가족제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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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들었을 것이다. 어머니 성씨는 성삼문 처형 후
자리에 누워 눈물만 흘리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박증은 날마다 어머니
를 위로하는데 모든 노력을 다했다.27) 오랜 기간 어머니의 슬픔과 아버지
의 불이익을 보면서 박증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됐을까?
박임경은 ‘우리 집안의 명성을 이을 사람은 바로 이 아이다’라고 하면
서 아들 박증의 재능을 칭찬했다.28)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박증이 큰 인
물이 될 것을 기대했고 어떤 사람은 구체적으로 과거를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증은 과거 권유에 ‘웃으면서 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서거정이 박증의 능력에 대해 ‘신선 같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名利를 밝히
는 마음이 사라지게 한다’고 말했을 때도 그는 역시 담백한 자세로 세속
에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29) 이러한 태도로 후에 김시습이나 남효
온 등에게 知己로 받아들여졌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박증은 정말 출세에 대한 욕구가 없었을까? 과거를 권하는
사람들의 말에 웃으면서 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박증이 심리적인 갈등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과거에 뜻이 없지는 않았으
나 현실에서 입신출세가 쉽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나온 태도로 보이
는 것이다.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고 나자 박증은 낙향을 결심한다. 32살 때의 일
이다. 일종의 은둔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박증이 낙향한 곳이 흥
미롭다. 바로 외조 성삼문과 연고가 깊은 지역이었다. 노성현 암천(현재
논산시 상월면 학당리)은 성삼문의 별장과 묘가 있는 곳이고 또 외가인
홍주(현재의 홍성)와도 가까운 곳이었다. 성삼문은 자신의 외가인 홍주
노은골에서 태어나고 자랐다.30)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무덤도 노은골
27) 위의 책, 270쪽.
28) 위의 책, 269쪽.
29) 위의 책, 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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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다. 노은골은 그러니까 성승에게는 처가이고 성삼문에게는 외가인
것이다. 박증은 왜 굳이 이 지역을 택한 것일까?
노은은 외갓집 옛터인데
부모 분부 받들어 언제나 오가네.
거친 정원 무성한 쑥밭이 되고
옛 집터 벼 기장만 기름지네.
차마 어머니 자라난 곳 바라볼 수 있을까
다만 외조부 낚시하던 연못만 남아 있네.
삼년 만에 더딘 걸음으로 슬퍼 살피니
오래된 무덤가에 쓸쓸한 백양나무만 있네31)
박증의 實記에 실려 있는 시이다. 외가에 대한 회한이 절절하다. 부모
의 명으로 자주 오간다는 말이 의미 있어 보인다. 어머니가 성장한 곳이
기도 하다. 박증의 외가에 대한 기억을 충실하고 또 익숙해 보인다. 그렇
다면 노성의 암천을 낙향지로 택할 때 홍주 외가와의 연관성은 충분히
고려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박증은 외가 때문에 관직을 포기하게 됐으나
또 낙향을 결심할 때는 다시 외가를 고려하고 있다. 외가와의 친연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박증은 외조의 제사는 자신이 맡지 않았다. 성
삼문의 신주는 동생인 박호에게 맡겼다.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유리된 이상 외조의 제사를 자신이 맡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낙향 중에 자신을 찾아낸 동생을 보고 “형제가 이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너와 나는 처지가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니 너는 나의 처지
30) 민족문화추진회, 1966, 국역 연려실기술 I, <단종조 고사본말> 단종조의 상신.
31)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편, 2005, 암천 박증의 도학정신과 유물유적 부록 「巖川
先生實記」 訪外宅遺墟韻, 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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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안타깝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32) 자신은 세상으로부터 숨었지만
동생은 그렇지 않으니 서로 갈 길을 가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보다는
그래도 세상과 함께 소통하는 동생이 외조 제사를 지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를 폐인으로 칭하고 있는 것에서도 이를 짐
작할 수 있다.
훗날 박증은 “나는 이미 폐인이 되었으나 우리 큰집은 조카가 제사를
주관할 것이고 외조부는 참찬공(박호)이 주관했는데 오히려 후사가 없어
졌다. 훗날 일은 마땅히 너희들에게 달렸으니 너희들은 외할아버지의 향
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33)라고 말하면서 여전히 외조의 제사에
신경 쓴다. 실제 박호가 자식이 없자 자신의 셋째 아들을 양자로 보냈다.
그러나 박호 집안의 제사가 이 양자를 통해 제사를 계속 잘 유지된 것으
로 보이지는 않는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672년(현종 13) 성삼문과 박호
부처의 신주가 인왕산 비탈에서 발견됐다고 하니 말이다. 이 얘기는 송시
열이 쓴 「成先生神主遷奉記」에도 잘 정리돼 있다.34)
박호가 양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어느 시점에 성삼문의 제사는
계속되지 못하고 그 신주가 땅에 묻히게 된 것일까? 박호는 형과는 또 다
르게 성삼문의 외손으로서 제약을 받아야 했다.
“조종조에서, 반역한 사람의 외손은 淸要한 벼슬에 서용하지 않았으니,
이제 만약에 서용한다면 반드시 조정과 함께 의논해 정한 뒤에야 할 수 있
을 것입니다. 執義 박호는 성삼문의 외손입니다. 성삼문․박팽년의 일에
대하여 반역의 예가 아니라 하고 절의로 논하고자 하는 의논이 있으니, 이
조가 이 의논 때문에 서용한 듯합니다. 박호의 사람됨은 아깝게 여길 만하
32) 위의 책, 296쪽.
33) 위의 책, 302쪽.
34) 이춘진, 2005, 「유물과 유적을 통해 본 노성 무안 박씨」, 암천 박증의 도학정신과
유물유적, 심지,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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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判事가 되는 것은 신 등도 陞敍를 청하려다가 못하였으나, 이조의 경우
라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35)
중종 12년(1517) 박호가 집의로 있을 때 조정에서는 그의 가문 내력을
문제 삼았다. 외조가 반역자인데, 어떻게 청요직에 둘 수 있느냐는 것이
다. 박호는 과거에 급제를 했다. 그러나 그의 관직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조정에서는 틈틈이 그의 외조를 문제 삼았다. 이미 중종 9년(1514)에 박호
는 장령으로 있다가 신하들에 의해 체직을 당한 적이 있었다.
“장령 박호는 인물이 대간과 侍從에 합당하나, 난신 성삼문의 외손이
니 교체하소서.”라는 것이 논의의 핵심이었다. 이때 왕은 일단 박호를 체
직했다. 그러나 위의 실록 기사에서 보듯이 박호는 곧 다시 청요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후에는 관직이 우참찬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성삼문의
외손이라는 사실은 끝까지 그를 따라 다녔다.
사신은 논한다. 壕는 성삼문의 외손이다. 천성이 진실하고 순박하여 각
박한 행실이 없었다. 관직에 있으면서 직무를 처리하는데 남다른 재능과
지혜는 없었으나 몸가짐이 근신하고 사람을 너그러이 대했으므로, 지위가
六卿에 이르렀어도 지위가 높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36)
졸기에서도 성삼문의 외손이라는 사실은 명기된다. 난신의 후손이라
고 노골적으로 쓰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성삼문의 외손임을 가장 먼저
기록하고 있다. 박호는 반역자의 외손으로서 끊임없이 주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외할아버지 제사 지내기가 그렇게 편한 일은 아니었
을 것이다. 박호의 후손으로서는 외손봉사로 성삼문의 제사를 담당하는
35) 중종 30권, 12년(1517 정축 / 명 正德 12년) 11월 25일(정유) 1번째기사.
36) 중종 73권, 28년(1533 계사 / 명 嘉靖 12년) 1월 30일(계유) 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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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여의치 않았고 따라서 신주를 땅에 묻게 됐을 것으로 보인다. 결과
적으로 관직생활을 한 박호도 낙향한 박증 못지않게 역모자의 외손으로
서 편치 않은 생활을 해야 했다.
2. 육신에 대한 재평가와 무안 박씨 집안의 위상 변화
박증의 낙향과 은둔, 박호의 쉽지 않은 관직생활은 물론 외조 성삼문
의 단종 복위 모역으로 인한 불이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이익은 불이
익으로만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단종복위사건은 여
타의 역모와는 달리 그 명분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즉 세조가 ‘성삼문 등
은 금세의 亂臣이나 후세의 충신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듯이37) 이 모역은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육신의 행위는 조선이 도덕성을
강조해가면 갈수록 높이 평가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육신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때 무안 박씨 집안에는 변화가 오게 됐다.
박증의 낙향 이후 노성은 무안 박씨의 세거지가 된다. 이른바 무안 박
씨 노성파가 생긴 것이다. 물론 은둔 초기에는 이렇다 할 활동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박증으로부터 4-5대가 지나면서는 변화가 나타난다.
먼저 이 지역의 강학 장소인 보인당을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보인당
이란 노성 지역 선비들이 공부하는 장소이다. 1566년 처음 문을 열었는데
여기에 율곡이 「보인당기」를 써 줬다고 한다.38)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왜
노성 지역에 세워졌느냐는 것이다. 일부에는 보인당이 성삼문의 의리정
신에 영향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근거가 명확
하지 않다. 율곡도 언급한 바가 없다. 하지만 이 보인당에 중요 인물로
37) 숙종 10권, 6년(1680 경신 / 청 康熙 19년) 12월 22일(정미) 2번째기사.
38) 이혜준, 2005, 「모곡서원 창건의 역사적 의의」, 암천 박증의 도학정신과 유물유
적, 심지,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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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했던 사람들이 17세기 이후 박증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사실만큼은
주목할 만하다.
보인당의 중요 인물들이 결국 기호사림의 중심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
는데, 이들이 박증의 운둔과 나아가서는 성삼문 등 육신에 대한 재평가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은 의미 있다. 보인당의 초기 인물인 김집은 “암천
의 고상한 은둔정신은 성삼문 선생의 충의에 빛을 더했다.”고 했다. 아직
공식적으로 단종복위사건 관련자에 대한 신원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
만, 성삼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당시 宣祖는 여전히 육신과 관련해서 “엉터리 같은 말을 많이
써서 先祖를 모욕하였으니, 나는 앞으로 모두 찾아내어 불태우겠다. 그리
고 그 책에 대해 말하는 자의 죄도 다스리겠다.”라고 할 정도로 금기시
하였다.39) 그러나 김집은 개인적으로 성삼문의 충의를 존중하고 있는 것
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성지역 특히 보인당 출신들의 박증과 성삼문에 대
한 경도됨은 커져 갔다. 역시 보인당의 중요 인물인 윤순거가 노릉지를
써서 사육신과 생육신의 사적을 정리했고 또 윤원거와 윤문거 등이 각각
박증의 묘비문과 묘갈명을 썼다. 모두 성삼문을 다시 평가하고 또 그 외
손 박증을 존중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이러한 분위기가 성숙됨으로
써 1672년(현종 13) 인왕산에서 발견된 성삼문 신주가 원만히 처리 됐고
또 1691년(숙종 17) 육신 復爵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40)
그런데 이렇게 상황이 변화된 데에는 무안 박씨 집안 스스로의 노력
도 없지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박증의 증손 박종원을 주목하게 된
다. 박종원은 김장생과 김집의 문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중요하게 기
억되는 부분은 한 고을을 움직일 정도의 재산을 가졌다는 점이다. 1624년
39) 선수 10권, 9년(1576 병자 / 명 萬曆 4년) 6월 1일(임술) 2번째기사.
40) 숙종 23권, 17년(1691 신미 / 청 康熙 30년) 12월 6일(병술) 2번째기사.
단종 복위 사건 처벌에 나타난 조선 가족제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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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2) 이괄의 난 때 군량미 2천석을 바치고 또 호란 때에도 8백석을
냈다고 한다. 그리고 김장생의 천거를 받아 통천군수를 제수 받았다.41)
그의 묘비는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썼으며 그의 어머니 輓詞를 김반이
지었다. 또 증조 박증은 호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됐으며 그 묘비
가 건립되었다. 박종원의 지역 내 위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국가
가 육신에 대해 새롭게 평가하는 중에 또 무안 박씨 집안에서는 박종원이
라는 인물이 집안을 부흥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쪽의 노력이
함께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임금이 친히 都目政을 살폈다. 兩銓에 명하여 三南․西北의 인재와 성
삼문 등 육신의 후예도 수용하게 하였다.42)
숙종 17년의 기록이다. 여기서 성삼문의 후예는 당연히 외손인 무안
박씨 집안이 된다. 친손은 없기 때문이다.
박팽년은 후손 朴慶餘가 있고 성삼문은 단지 외손 朴重龜만 있으므로
숙종께서 임용하여 수령을 삼았었는데, 이 두 사람이 벼슬에 있을 적에는
六臣들의 제사를 일체로 차렸으나, 지금은 이 두 사람이 모두 죽고 그 가
문이 매우 빈한하므로 제사를 받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43)
영조 3년의 실록 기사이지만 이전에 성삼문의 외손 박중귀가 수령으
로 임명됐음을 알 수 있다. 관직만이 아니라 서원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적몰되었던 성삼문의 토지도 면세의 혜택을 입게 된다.44) 육신 중 대부분
41) 이혜준, 2005, 「모곡서원 창건의 역사적 의의」, 암천 박증의 도학정신과 유물유
적, 심지, 130쪽.
42) 숙종 23권, 17년(1691 신미 / 청 康熙 30년) 12월 21일(신축) 1번째기사.
43) 영조 11권, 3년(1727 정미 / 청 雍正 5년) 4월 21일(정미) 3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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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집안은 후손이 남아 있지 않아 혜택을 받기 어려웠으나 무안 박씨 집
안은 박증의 낙향과 그에 따른 집안의 보존으로 이 혜택을 누릴 수가 있
었다.
1791년(정조 15) 정조에 의해 단종 복위에 관계됐던 사람들을 추향하
는 장릉 배식단이 정해진 후에 무안 박씨 집안은 茅谷祠까지 창건하게
된다. 모곡사의 전신이 이미 있었다고 하지만, 1804년 정식으로 모곡사를
열 때 박씨 집안은 당시의 자신의 외가 쪽 지원까지 받아가면서 사업을
성공시켰다. 박증의 낙향 초기 노성지역의 소외된 집안일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변화이다. 결론적으로 박씨 집안은 성삼문 집안의 외손이라는 것
으로 많은 불이익을 당했으나 또 성삼문 집안의 외손이기 때문에 혜택과
추앙을 받는 양면을 모두 경험하게 됐다.
3. 박팽년 집안의 외가와의 관련성
사육신 중에 박팽년에게는 후손이 있다고 한다. 장성한 아들들은 모
두 죽였기 때문에 누구나 직계 후손이 남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
런데 박팽년 집안에 후손이 있게 된 것은 며느리가 집안의 종과 아이를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모반 사건이 났을 당시 박팽년 며느리는 임
44) 영조 28권, 6년(1730 경술 / 청 雍正 8년) 11월 4일(기사) 2번째기사.
“성삼문의 집 전토 십수여 결이 도내의 連山 땅에 있는데, 당초에는 충훈부에
적몰됐던 것을 특명으로 환급하여 면세해 온 지가 거의 3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계묘년에 이르러 갑자기 전세를 내라는 영이 있었으나, 大臣의 건의로
노은 서원의 位土는 모두 면세할 것을 특교로 判下하였습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전세를 내라는 영이 다시 그전과 같아서 지금 십수 결의 전세가 곧 관아의 督納하
는 속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寧考께서 획급하신 성대
한 뜻을 추념하여, 전일에 이미 반하하신 성명대로 특별히 전세를 징수하지 못하
도록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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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 며느리를 관비로 귀양 보내면서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했다.45)
박팽년의 며느리 이씨는 대구에 사는 현감 이일근의 딸이었는데, 귀
양 갈 때 대구를 자청했다. 박씨는 자신의 친정 근처에 있는 것이 후일을
도모하는데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침 이때
박씨 집안 종도 임신을 하고 있었다. 이 종은 “주인이 딸을 낳으면 다행이
요, 비록 나와 함께 아들은 낳더라도 내가 낳은 애로 대신 죽게 하리라.”
라고 마음먹고 있었다고 한다. 과연 해산을 하니 주인은 아들을 낳고 종
은 딸을 낳았다. 이에 자식을 바꾸어 아이 이름을 朴婢라고 했다. 그리고
진짜 박팽년의 손자는 종의 자식으로 살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명확
히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후대에 사실로서 인정된듯하다. 실록에서는 다
음과 같이 전해진다.
박충후는 문종조의 충신 박팽년의 후손이다. 세조가 육신을 모두 주살
한 뒤에, 박팽년의 손자 朴斐는 갓 낳았을 적에 당시의 현명한 사람을 힘
입어 딸을 낳았다고 속여서 말을 하고 이름을 斐라고 했으며, 죄인들을 점
검할 때마다 슬쩍 계집종으로 대신하곤 함으로써 홀로 화를 모면하여 제
사가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 박충후는 곧 그의 증손으로서 육신들 중에 유
독 박팽년만 후손이 있게 된 것이다.46)
후일 아이가 장성하였을 때 아버지 朴珣의 동서인 이극균이 경상도
감사로 왔다. 이극균은 사정을 알고 아이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장성하
였는데 왜 자수하지 않고 끝끝내 조정에 숨기는가?”라고 하고는 드디어
자수를 시켰다.47) 성종은 특별히 사면하고 이름을 壹珊으로 고쳐주었다.
45) 민족문화추진회, 1966, 국역 연려실기술 I, <단종조 고사본말> 단종조의 상신.
46) 선조 161권, 36년(1603 계묘 / 명 萬曆 31년) 4월 21일(정미) 1번째기사.
47) 민족문화추진회, 1966, 국역 연려실기술 I, <단종조 고사본말> 단종조의 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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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의 손자 즉 박일산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며
느리와 종의 지혜 때문이었지만, 아이가 장성해서 다시 세상에서 인정받
을 수 있었던 것은 이극균의 노력이 컸다. 신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어줬기 때문이다. 이극균이 이런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역시 조선 특유의
외가 또는 처가와의 친밀성에 기인하는 면이 크다. 즉 이극균이 박순과
동서지간이라면 박일산에게 이극균은 이모부가 될 것이다. 이는 어머니
쪽 친족으로서 외가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극균에게는 처가의 일이다.
우리나라는 성이 다르지만 어머니 쪽으로 사촌이 되는 형제들은 친족
이라고 보았다. 물론 이는 남귀여가혼적인 풍속에 기인한다. 자매의 아이
들이 함께 자라거나 혹은 왕래가 잦았을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자연히
가까운 사이가 될 수밖에 없다. 이는 조정에서도 인정하고 있던 사실이다.
실제로 이들 간에 간통이 많은 것도 함께 자라면서 공유한 시간이 많
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이극균은 異姓 조카인 박일산의 일에
신경을 쓰고 나아가서는 성종이 특별사면을 해줄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
성했던 것이다. 박팽년 집안에서 후손이 계속되는 데에도 외가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맺음말
조선에서는 장인의 역모에 사위가 연좌되기도 했다. 성삼문의 사위였
던 박임경과 외손 박증은 단종복위사건이 있은 직후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박증이 과거를 포기하고 낙향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단종 복위 사건 처벌에 나타난 조선 가족제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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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외조 성삼문의 역모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외할아버지가 역모의 주
도자로서 능지처사 당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박증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됐을까? 물론 외조를 역모자로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은 드러낼 수 없는 생각이고 현실적으로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게 살 수밖
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 것이다. 이는 관직생활에 대한 회의로 이어
졌다. 자신이 긍정할 수 있는 조정이 아니고 또 관직에 나간다하더라도
운신의 폭이 좁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보라는 주위의 권유에 대해
‘웃으면서 답을 하지 않았다’는 박증의 태도에서 그런 심리상태를 읽을
수 있다.
결국 박증은 낙향을 결심하게 된다. 그런데 그 낙향지 노성현 암천은
성삼문의 묘가 있는 곳이고 또 성삼문의 생가 즉 외가가 있는 홍주와도
멀지 않은 곳이었다. 박증은 외조 때문에 관직생활을 포기해야 했지만,
여전히 외조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외가의 영향으로
복잡해진 박증의 삶이 잘 드러난다.
박증의 동생 박호도 또 다른 면에서 외가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박
호는 형과 달리 과거를 보고 관직에 진출했다. 그런데 관직생활 중에 여
러 차례 논박을 당했다. 반역한 사람의 외손은 청요직에 나갈 수 없다는
것 등이다. 그래도 박호는 관직생활을 꾸준히 했고 육경의 위치에까지 올
랐다. 그러나 졸기에는 여전히 그가 성삼문의 외손이라는 사실이 가장 먼
저 기록돼 있다. 외조로 인해 관직생활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박증과 박호 집안의 불이익은 끝내 불이익으로만 끝나지는 않
았다. 단종복위사건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달라지면서 무안 박씨 집안은
다른 대우를 받게 된다. 세조의 말대로 ‘금세의 난신이나 후세의 충신’이
된 것이다. 외손으로서 성삼문의 제사를 계속해왔던 박씨 집안은 후에 성
삼문이 복권되고 추숭된 후 관직을 제수 받기도 하고 또 추향 서원에 사
액을 받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로부터 최고의 도덕성을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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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한 집안으로 존중 받게 되었다.
무안 박씨 집안은 시대 상황에 따라 때로는 불이익을 받고 또 때로는
혜택을 받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러한 변화에도 불
구하고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 모든 일이 외조 성삼문
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외조 때문에 불이익을 받고 또 외조 때문에
혜택도 받은 것이다. 조선의 장인과 사위, 외조와 외손의 긴밀한 관계에
연유한다.
조선은 17세기까지도 혼인을 하면 남자가 움직이는 시스템이었다. 혼
인 후 남자가 자신의 집과 여자 집을 오가거나 아니면 아예 여자 집에
눌러 사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들은 여자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중국
에서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여자를 맞이해와 남자 집에서 거주하며
생활하는 이른바 親迎과는 달랐다. 자연 장인과 사위, 외조와 외손의 관
계는 긴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조선은 왜 이런 혼인 방식을 오랫동안 유지했을까? 조선에
서는 혼인에서 어느 한 쪽 집안이 주도권을 갖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으
로 보인다. 그 보다는 두 집안이 적절하게 공조하면서 대사회적으로 자신
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봤던 것 같다. 두
집안의 공조가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여자가 시집을 가버리는 것 보다는
남자가 처가와 본가를 오가는 것이 편리한데, 그것이 남귀여가혼을 지속
시켰을 것이다.
물론 조선 후기가 되면 이러한 시스템에는 변화가 온다. 한쪽 집안 즉
부계 쪽이 주도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 초기에는 양쪽 집안
의 대등한 파트너십이 유지됐고 거기에서 장인과 사위, 외조와 외손의 관
계는 가까웠다. 단종복위사건과 관련한 무안 박씨 집안의 부침 과정에는
조선의 이러한 가족제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단종 복위 사건 처벌에 나타난 조선 가족제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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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Unique Joseon Family System Appeared in the
Punishment of Danjong Restoration Incident
Lee, Soon-Gu
When punishing the conspirators of Danjong restoration incident, Joseon
court extended the penalty to include the leaders' sons-in-law. The action was
not stated in Daemyeongnyul, the Great Ming Code. Joseon court practiced a
law outside the Great Code. Why did Joseon make the special arrangement?
For a long time, people of Joseon practiced Namguiyeogahon. A newly-wed
couple lived with the wife's family for a certain period of time. Such practice
gave sons-in-law and their fathers an opportunity to develop close relationship.
The relationship between grandfathers and their maternal grandsons was also
very intimate. Sons-in-law often benefitted from powerful fathers-in-law, but
they were also associated with the fathers' crimes.
The grandchildren of Seong Sam-Moon, the leader of Danjong restoration
incident, were disadvantaged because of their maternal grandfather's crime.
The first grandchild, Park Jeng, gave up on civil service examination and spent
his whole life in the countryside. His younger brother Park Ho served in the
court, but as a traitor's grandson, he met many difficulties throughout his
career.
And yet, the Park family of Muahn did not stay in the disadvantaged
position forever. In the late Joseon, with the re-evaluation of Danjong
restoration incident, Park family suddenly started to benefit from what the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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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ernal ancestor had done. They received official posts and charters from the
king. Thus, the Park family experienced both the privilege and disgrace,
depending on the political situation of the time. The interesting fact is that all
these impacts on the Park family, good or bad, were caused by their maternal
ancestor Seong Sam-Moon. Such outcome was possible only because the
fathers and sons-in-law, grandfathers and maternal grandchildren formed a
close relationship in Joseon.
It seems that Joseon people thought the mutual assistance between two
families linked by marriage as a convenient system. In this way, Joseon enjoyed
a family relationship different from that of China. Danjong restoration incident
clearly shows the unique family system of Joseon.
Key Words:Danjong Restoration Incident, Daemyeongnyul, the Great
Ming Code, Namguiyeogahon. Fathers-in-law, Sons-inlaw,
Maternal grandfather, Maternal grandchild, Park
Jeng, Park Ho, Park family.
첫댓글 Shindonghoon 님의 글속에 성삼문등 사육신의 후손들이 절손된 사실이 안타까워
관련 내용에 대한 인터넷 서핑중
선조님의 생활기반 또는 묘소등이 집합적으로 여러 지역으로 이전 또는 변천ㅎ게된 연유로
男歸女家婚/ 모반죄 연좌법의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는 글이기에
우리 족보에 대한 해석도 쉽게 느껴지지 않을까 해서 펌 하였습니다.
성삼문의 제사를 지낸 외가 무안 박씨에 관한 記事를 읽게 되다니, 뜻밖입니다. 지식의 外然을 넓히게 되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