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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짐 소년은 밥은 부엌에서 먹고 잠은 건초를 저장하는 창고에서 잤다. 일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짐은 주인 테일러씨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짐은 아무 말도 없이 자기의 소유물을 챙겨 가지고 그 농장을 떠나고 말았다.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농장주인 테일러씨는 건초 창고를 부수고 새로운 시설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전에 짐 소년이 자던 한 구석에 짐이 자기의 성과 이름을 기둥에 파서 새기어 놓은 것이 있었다. 거기에 새기어 놓은 짐 소년의 성명은, '제임스 A. 가필드'였다. 제임스 A. 가필드라는 이름은 바로 그 당시 미국의 대통령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판단에서 초래된 것이다. 아마도 앞으로 꼭 마찬가지의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까 모르겠다. 지금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별로 중요치 않은 이름으로 잘못 판단한 사람들이 후회로 영원히 안타까워하는 날이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말이다. 당신도 지금 꼭 필요한 것들보다 믿음과 구원과 천국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으십니까? 마 13:44
구원에 대한 무서운 경고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 13:30)
그런데 구원은 절대절명의 문제이기도 하기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말로만 표현되지 않고 때로는 무서운 경고로 강하고 완고한 어조로 강조되기도 합니다. 이 구원에 대한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무시했다가는 영원히 후회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에 대한 무서운 경고들을 더욱 주의 깊게 듣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그러한 경고들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다는 말씀은 성경에 없습니다. 어떤 이는 구원 받고 어떤 이는 멸망받습니다. 이에 대해 착각하거나 어느 누구한테도 속는 일이 없기 바랍니다. 갈라 놓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밀과 가라지를 갈라 놓고, 선인과 악인을 갈라 놓고, 양과 염소를 갈라 놓는 그런 날이 반드시 옵니다.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다 이쪽인지 저쪽인지 결정되는 때가 옵니다. '당신은 구원받는 쪽에 있는가? 멸망받은 쪽에 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논쟁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면서 밀은 하나님의 자녀를, 가라지는 사단의 자녀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종들은 밀이 그대로 두고 가라지는 뽑아 버리자고 할 때 예수님은 "둘 다 추수때까지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 13:30)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밀과 가라지가 얼마동안 함께 자랄까요? 추수때까지 입니다. 추수 때는 언제 올까요? 세상 끝날입니다. 즉, 세상 끝날까지 밭에서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식은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된다면 모든 가라지가 밀이 된다는 뜻인데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국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가라지는 구원받을 수가 없고 한데 묶어서 태워 버리게 됩니다. 고기잡는 그물의 비유도 같은 뜻입니다. 그물은 좋은 고기나 나쁜 고기를 다 함께 들어올립니다. 이와 같이 그물은 보이는 교회인데, 교회 안에는 즉 그물 안에는 좋은 고기도 있고 나쁜 고기도 있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두 가지를 분리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이 이르면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는 분리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마 13:41-43에서는 "인자가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3:49에는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고 했습니다. 또 마 25:32-34에 보면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고 되어 있고 그 다음 41절에서는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고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46절에서는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렇게 분별하는 때가 있다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은 자의 편에 서시겠습니까? 멸망받을 자의 편에 아직도 서시겠습니까? 특히 마 7:13, 14에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는 사람은 소수이고 멸망 받는 사람은 다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다수의 사람을 지옥으로 보낼 수가 있겠는가? 분명히 많은 사람이 구원받고 아주 흉악한 죄인 소수만이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라고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설마 내가 다수의 구원받을 자 중에 속하지 않으랴 하고 안일하게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수가 멸망하게 됩니다. 노아 홍수 심판 때에도 노아의 여덟 식구만 구원받고, 그 외의 모든 사람은 멸망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 때는 어떠했습니까? 몇 사람이 불 심판을 피했습니까? 단 세 사람 뿐입니다. 그 외에 모든 사람은 심판받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멸망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넓은 길로 길이 미어지듯이 가고 있으나 생명의 좁은 길은 극히 적은 수의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12억이 넘는 중국 사람들과 8억이 넘는 인도의 이교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외에도 구라파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복음에 대해 점점 무지해져가고 있습니다. 미국같은 곳은 많은 수의 크리스찬이 있다고 하지만 타락해가는 자들이 엄청나게 늘어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명의 길, 좁은 길로 가지 않고 넓은 길, 멸망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모두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며 분명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가 나누어지는 때가 오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멸망받을 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슬픈 사실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줄 알았던 많은 무리들이 너무 늦게야 진정으로 거듭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단은 그들의 눈을 비늘로 덮어서 마지막 순간까지 구원의 바른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마지막에 가서야 진리에서 멀어진 자신들의 구원받지 못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은 때입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잘못된 기초 위에서 구원받지 못한 채 스스로 속고 있다가 영원히 멸망을 받게 됩니다. 그때 가서 '너무 늦었구나, 너무 늦었구나' 하고 울부짖지만 이미 긍휼의 문은 닫히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어떤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어떤 이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데 얼핏 보면 둘 다 멋있어 보입니다. 해가 비치는 동안은 두 집 다 안전해 보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폭풍이 불어 닥칠 때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끄떡없이 서 있고 모래 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게 됩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도 그와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기초위에 서 있으면서도 안전한 줄 알았다가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여러분은 각자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무너질 세상 지식과 이단 사설, 혹은 자신의 공적위에 서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든든한 반석이시고 다른 모든 터는 무너지는 모래바닥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7)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나 이런 비참한 운명이 자신의 운명이 될 사람은 없겠지요? 사단 마귀가 여러분의 눈을 어둡게 하고 속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많은 성경 지식도 있고 많은 봉사도 하고 많은 헌금도 하지만 그 믿음이 잘못된 기초위에 서 있지는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을 줄 알았다가 멸망으로 들어가는 일이 있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성경에서 우리는 구원과 멸망 사이에 큰 구렁(gulf) 이 끼어 있다는 말씀을 읽습니다. 첫째, 이 구렁은 고정되었다는 사실, 즉 움직일 수 없다는 것과 그 구렁은 영원하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건널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도 저편에서 이편으로 건너올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뭐라고 하든 두 번째 기회는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채 죽으면 영원히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남아 있게 됩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에게 반딧불 같은 적은 희망이라도 주는 말씀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무덤 저편에는 결코 희망이란 없고 구원받을 두 번째 기회는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 번 거절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재차재차 구원의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죽는다면 다시는 그리스도를 믿을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영원히, 영원히 잃어버린 상태에 있게 될 것이고 죽음 후에 다시는 구원의 기회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라면 다음에 믿겠다고 미루곤 합니다. 그러나 잠 27:1에 보면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내일' 이란 없습니다.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구원받을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생명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는 많은 곡식을 쌓아 놓고 천년 만년 살 줄 알았는데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하고 하나님께서 불러가니까 다음날 아침 해를 못 보고 말았습니다. 고로 생명이 불확실함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은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둘째, 갑자기 아무 예고 없이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반드시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예수의 재림은 세상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고 누누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주의 재림이 멀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로 오늘밤 재림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진정 여러분은 부끄러움 당하시지 않겠습니까? '바위야 날아 가거라. 산아 내 위에 떨어져서 주님의 얼굴을 피하게 하라' 하고 부르짖지는 않겠습니까? 남들은 공중으로 들림받을 때에 지상에 남아 있을 사람은 없습니까? 갑자기 예수님이 오실텐데 그날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바로 구원받을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셋째, 성령의 역사가 끝날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사울왕이 '하나님은 내게서 떠났다' 고 했는데 이 말은 참으로 슬픈 말입니다.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가 하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거절하는 죄입니다. 무디(D. L. Moody) 선생의 슬픈 경험담이 있습니다. 그가 맡고 있던 젊은이들을 거의 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는데, 한 청년만이 끝까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청년은 끝내 '무디 선생님, 나는 서부로 가야 합니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온 다음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겠습니다' 하고 돌아서 가버렸습니다. 몇 주 후에 이 젊은이가 몹시 아파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무디 선생은 다시 병원에 찾아가서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무디 선생님, 나는 이대로 죽지 않습니다. 전에 말한대로 서부로 가서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와서 크리스찬이 되겠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무디 선생은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느날, 그 청년은 건강을 되찾아 가지고 무디 선생을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왔습니다. 저는 서부로 떠납니다' 무디 선생은 다시 그 청년의 어깨에 손을 얹고 간곡히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화를 내면서 무디 선생의 손을 뿌리쳤습니다. '무디 선생님, 내 영혼 구원에 대해서 다시는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시 돌아와서 결심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전에는 절대로 안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 젊은이가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무디의 마음에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 큰 소리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무디 선생이 깨어 일어났습니다.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보니까 숄을 감은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무디 선생님 빨리 좀 와 주십시오.' 그녀는 울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내 남편이 몹시 아픈데 걱정됩니다. 빨리 좀 가주세요.' 바로 그 젊은이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무디 선생은 안타깝지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야 소용없습니다. 당신의 남편은 오늘 오후 마지막 거절의 말을 했습니다. 이미 위험선을 넘어섰습니다. 내가 가야 소용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여자의 간청에 못 이겨 옷을 입고 따라갔습니다. 계단을 올라 서는데 그 청년이 침대에 누워서 눈을 번쩍 뜬 채 의식을 잃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로 두 마디만 되풀이하는데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어!' (Too late! Too late!) 무디 선생은 그 옆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손을 꼭 쥐고 성경을 열어 읽어주며 기도를 따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어!' 하고 중얼거리기만 했습니다. 무다 선생은 최선을 다해서 정신을 일깨우려 했으나 그 젊은이는 끝내 알아듣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너무 늦었어!' 하면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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