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하스님의 열반경 이야기 <22> 대자대비는 하루 아침에 성취되지 않는다
대자(大慈), 대비(大悲), 대희(大喜), 대사(大舍)라는 것
성내는 마음은 불더미 같고
사랑의 마음은 번개 빛 같다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보살이 대승의 대반열반에 머물러서 자심(慈心)과 비심(悲心)을 얻더라도 대자대비의 마음(大慈大悲心)이 아닐 수도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럴 수 있다. 선남자야, 보살이 만일 중생들 가운데 3품으로 분별하면 첫째는 친한 이, 둘째는 원수, 셋째는 친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친한 이를 또 3품으로 나누면 상품ㆍ중품ㆍ하품이며 원수도 그러하다. 이 보살마하살이 처음에는 모든 중생에게 낙을 주되, 상ㆍ중ㆍ하에 따라 친한 이에게 차별하여 낙을 주고, 다시 원수에게도 상ㆍ중ㆍ하에 따라 차별하여 낙을 준다. 보살이 이렇게 점점 더 닦아서 상품의 원수에게 중품 낙을 주고, 중품ㆍ하품의 원수에게 평등하게 더 나은 낙을 주며, 점점 더 닦으면 상품ㆍ중품ㆍ하품에게 모두 평등하게 상품 낙을 준다. 보살이 그때는 친한 이와 상품의 원수에게 모두 평등한 마음을 얻어 차별이 없을 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자심을 얻었다 한다. 그러나 이것을 대자(大慈)라고 하지는 않는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보살이 이렇게 자심을 얻은 것을, 오히려 대자심이라고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선남자야, 대자란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지나간 옛적 한량없는 세월에 오래오래 번뇌만 쌓았고 선한 법을 닦지 못하였으므로 하루 아침에 마음을 조복할 수 없는 것이다. 선남자야, 마치 완두콩이 말랐을 때는 송곳으로 찌를 수 없는 것처럼, 번뇌의 굳기도 그와 같아서 하루 밤낮에 마음을 두어 산란하지 않아도 조복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 집에 있는 개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산에 있는 들사슴은 사람을 보면 무서워서 달아난다. 성내는 마음을 버리기 어렵기는 집을 지키는 개와 같고,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기 쉽기는 들사슴 같으므로 조복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뜻으로 대자라 이름하지 않는다.
또 돌에 그린 그림은 그 흔적이 오래도록 있지만 물에 그린 것은 빨리 없어져서 오래가지 못하는 것처럼, 성내는 마음은 돌에 그린 그림 같고 선한 근본은 물에 그린 그림 같다. 그러므로 조복하기 어려운 것이다. 마치 큰 불더미는 밝은 빛이 오래 머물고, 번개 빛의 밝은 것은 잠깐도 머물 수 없는 것처럼 성내는 마음은 불더미 같고 사랑하는 마음은 번개 빛 같으므로 조복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 뜻으로 대자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초지(初地)에 머물면 비로소 대자라고 이름한다. 왜냐하면 가장 나쁜 이를 일천제라고 하는데, 초지 보살은 대자를 닦을 때 일천제에 대하여 차별하는 마음이 없으며, 그의 허물을 보지 않으므로 성을 내지 않는다. 이런 뜻으로 대자라고 한다.
선남자야, 중생들을 위하여 이익 없는 일을 덜어 버리므로 대자(大慈)라 하고, 중생들에게 한량없는 이익을 주고자 하므로 대비(大悲)라 하고, 중생들에 대하여 환희한 마음을 내므로 대희(大喜)라 하고, 내 것이라 하여 옹호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대사(大舍)라 한다.
선남자야, 4무량심이라야 보살이 6바라밀을 늘게 하며 구족하게 할 것이며 다른 행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대반열반경> 제15권 ‘범행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