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에게 드리는 글'
21집 약사문예집에 실린 나의 글인 ' 아버지에게 드리는 글'
을 읽에 보시면 알겠지만
‘나무위키’ 에 소개된
안신영 인물 소개 중 틀린 부분이 있어
이를 바로 잡기위 해 아래와 같이 < 안내 > 드립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안신영은 1902년 1월 26일 서울 마포구 창천동에서 태어났다고
‘나무위기’에서 기술했지만
사실 충청남도 칠갑산이 있는 청양 북실 태생이다. .
그는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대한문 등지에서 3.1 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5월 13일 경성지방법원,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 8월 12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3년 3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부임했고, 역사, 영어를 가르쳤다.
그당시 영명학교 창설자인 윌리암 교장과 협의하에 공주에 야학 영어 학원을 설립하여 일반인 대상으로 영어 교육을 시도하여 많은 응시원을 모을 수 있어 그 시대의 호평을 얻을 수 있게 교육계에 헌신하기도 했다,
공주 영명학교에서 1935년 4월 평양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1] 교사로 이직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창가집 및 한글독본을 출판해 교재로 활용했다.
한글 사용법을 창안하여 교재를 만들고 학생들에겐 아침 정교 수업 전에 담임 선생으로써의 과외 활동으로 조선어를 가르친다고 일본 선생들의 항의로 고발되어 다시 체포된 그는 1938년 7월 14일 평양 고등법원에서 출판업 위반 혐의로 금고 3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교육계에 현신하여 오던 그는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교육에 여성이 앞장서야 한다고 여성 교육에 힘써 서울의 배화여고에서 국어와 영어를 담당하여 제자를 배출한 때가 1945년 9월이었다.
배화 교사를 사임하고 1948년에는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국어와 영어 교사로 부임하였고
1950년에는 미국공보원 주관신문인 “세계주보 ” 주필이 되었다.
1961년에 배재 중 고등학교에서 1년 봉직하다가,
이어 기독교 간행물 “다락방“ 편집인으로 활동하였고 다음에 대한 계명협회 총무로 그 당시 4H 구락부와 협력하여 농촌에 한글 깨우치는 계명 운동을 벌려 한글 문맹 퇴치 운동에 다대한 공헌을 이룩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1961년에 배재 교장 발령을 받고
”의에 산다“ 교훈을 내세워 배재의 기독 정신의 얼을 학생들에게 불어 넣어 진실에 사는 목적을 학생들에게 깨우치기를 힘셨다,
이후 감리교 총리원 사무국 총무로, 나아가 기독교 방송국 국장 대리로 활동 하다가 , 서울에서 조용히 지냈으며그가 운명한 때는 1975년 5월 25일 오후였다.,
공주 영명학교 100년사 편찬에 편집위원인 박철희 님의 공주 영명하교 출신중 독립유공자 발굴 작업 7인 중 안신영이 존재한다며 우리 가족애개 알려줘 그 국가 기록을 발췌하여 보훈쳐에 알려지게 되었다.
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안신영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8년에 경기도 탄현의 기독교 교인 묘역에서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하여
그의 유해를 안장했다.
첫댓글 안신영씨는 기독교 교인묘역에서 국림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저 묘역네
유해를안장하셨으니 큰일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