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없는 새 그림
나는 일종의 풍경이다 버스 노선도를 기록하기 위한 유리창이다 첫 문장을 중얼거릴 때
바람은 이미 불고 있었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다 내 앞에 줄지어 선 버스와 사람과 고양이가 내 무릎 위로 크로스백을 가슴 위로 캐리어를 얼굴 위로 식빵을 …… 그렇다면 뒤에서 내 허리를 끌어안는 손, 이쯤에서 네가 등장할 수도 있다
아무래도 너와 나는 일기장 속이 더 잘 어울리지요 ……속삭인다
너는 영영 떠난다
나는 나를 버스에 태워 보낸다 아이와 마주 앉아 모래성을 마저 쌓는다
우리의 해변은 잔눈발이 휘날리는 곳 폐타이어와 파라솔이 흩어져 있는 곳 멀리서부터 걸어온 새들이 밀려오고 또 규칙적으로 밀려가는 파도를 바라보다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두 다리가 물결친다 두 어깨가 출렁인다 아이는 양손을 모아서 닷물을 길어 온다
……아이야 나는 너를 기다리며 꾸벅꾸벅 졸고 있을지도 모른다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수평선은 재미가 없다 사선으로 자라나는 모래성도 재미가 없다 쥐면 말이 없고 흔들면 짤랑거리는, 나는 일종의 동전 지갑이다 쓸쓸은 나의 생활처럼 소란하다 나의 생활은 쓸쓸처럼 소란하지 않다 어느 날 골목에서 나는 발견될지도 모른다
동네 사람 다 나와보세요 이것 좀 보세요 연탄재는 일단 발로 찬다 사람들이 뛰쳐나올 때까지 연탄재는 …… 발로 차고 본다 달아오르는 얼굴 가빠지는 숨, 양 손바닥이 축축해질 때까지
동네 사람 얼른 다 나와보세요
듣는다 밤의 숨소리, 젖은 낙엽 굴러가는 소리. 걷는다 연탄재하나연탄재둘연탄재넷……보이는 족족 발로, 연탄재는 일단 차고 본다
나는 흩날리는 풍경이다
일종의 풍경을 벗어나려는 풍경이다
양과 오리 그리고 피리 소리가 내 뒤를 따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소란이 대문을 차례대로 열어젖히고 있을 것이다 대문 너머로 하얀 얼굴들이 솟아오르고 또 잠에 빠져드는 것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을 것이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다
나는 공중에 뿌려진 일종의 구름 미끼였다 하늘을 찢으며 날아가는 새들아 나의 검정 부리 새들아 (그들이 오늘 밤을 증명해줄 것이다)
아이야
모래성 쌓는 아이야…… 바람에 펄럭이는 내 옷자락을 잠시라도 내버려둘 수 있겠니
골목 어귀를 돌 때마다 한 사람과 마주쳤다 롱코트 걸친 그와 표정도 없이 사랑했다 다투었다 이별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그는 나를 지나쳤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라고 쓴다면
(와르르끝장나버릴거야, 모래성)
조그마한 쓸쓸이었다 이제는 걸을 때마다 짤랑거리는 쓸쓸이다 쓸쓸 아닌 쓸쓸이다
해변이 펼쳐진다; 해변은 해변처럼 쓸쓸했다 태양은 태양처럼 타올랐다 파라솔은 파라솔처럼 골목은 또 골목처럼…… 먼 곳에서 날아드는 새들아 온몸 검게 물든 새들아 나의 우울한 새들…… 덩치 큰 새들⋯⋯ 쓸쓸한 …… 빛나는 날갯짓 …… 나의······ 새와 새떼새떼새떼새떼새떼 또 저 새 떼들
알 속에 갇혀버린 아름다운 헛발질이여
연탄재는 일단 발로 차고 본다
노란 눈동자가 스푼에 비친다 오늘의 요리는 푹 삶은 콩과…… 바람이 불고 있다 식사 시간을 묘사하는 짓도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연탄재 그러나……내가 찬 연탄재가 막 흩날리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아이와 마주 앉아 모래성을 마저 쌓는다사라지라재천천는천천히떠오르라한꺼번에흩날리라……)
오늘 나는 가 닿을 데가 없다 어쩌면 나는 시작과 동시에 흩날리던 연탄재였다
허공의 재, 흩뿌려진 나의 발목들이여
걸음마다 포말이 끓어오른다 하나 둘 셋 바닷바람, 휘날리는 모래 알갱이 연탄재
……그 연탄재 일단 발로 차고 본다
현대문학 2020년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