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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의 단오 선물
배정순
“태리 누나, 놀아줘. 심심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네 살 동생 태우가 놀자고 보챘다. 나는 못 들은 척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시장 갔던 엄마와 할머니가 양손 가득 짐을 들고 현관에 들어섰다.
오늘은 강릉단오제 날이다. 해마다 단옷날이면 할머니 댁에 친척 어른들이 모여 단오를 즐긴다. 강릉단오제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세계인의 축제다.
“태리야, 태우는 어디 있니? 혼자 텔레비전만 본 거야?”
엄마가 손에서 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이고 덥다. 앵두화채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뒀다.”
할머니가 안방으로 갔다.
“아니, 이게 뭔 일이냐? 우리 태우가 일을 저질렀구나!”
놀라는 할머니 소리에 엄마가 안방으로 달려갔다. 나는 얼른 텔레비전을 끄고 안방으로 갔다.
“어머나, 어떡해요?”
엄마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할머니 얼굴은 하얗게 되었다.
안방은 난장판이었다. 문갑 문들이 모두 활짝 열려 있고, 그 속에 있던 물건들이 온통 방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뚜껑이 열린 인주통과 여기저기 도장이 마구 찍힌 누런 한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걸 어쩌냐! 귀한 부채를 태우가 건드린 모양이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집안 공기를 흔들었다. 엄마가 난장판이 된 물건들 사이에 나뒹구는 부채를 얼른 집어 들었다.
“다행히도 부채는 괜찮네요. 인주는 포장지에다 묻혔어요.”
엄마가 부챗살 하나하나 펴들고 확인하였다.
“아이고, 조상님 감사합니다.”
할머니가 말했다.
“이젠 너희가 간직하라고 이번 단오에 주려던 참이었다. 한지에 싸고 매듭으로 잘 묶어두었는데, 이만하길 다행이야.”
할머니의 당황한 목소리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너는 동생이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는데도 몰랐니?”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나는 한마디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엄마의 잔소리 폭탄을 늘 막아주던 할머니가 아닌가? 그런데 이번 폭탄은 막아줄 것 같지 않았다. 할머니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주방으로 갔다.
“이 방 싹 치워! 고모할머니, 작은할아버지 오시기 전에 정리하고 방바닥도 걸레로 깨끗이 닦아. 그리고 태우 좀 신경 써. 6학년이면 네 살짜리 혼자 두면 저지리 한다는 걸 알아야지.”
엄마는 할 말을 다했는지 주방으로 갔다. 태우가 사태를 알아챘는지 침대 위로 올라가더니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누나, 미안해.”
나는 잔뜩 겁먹은 태우를 한 번 끌어안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된통 혼날 줄 알았는데 이쯤 해서 마무리된 걸 다행으로 여기며 부지런히 정리했다. 도장으로 찍기 놀이라도 한 듯한 누런 포장지는 버렸다. 엄마가 꺼내준 새 한지로 부채를 말고 매듭으로 돌려 묶으려는데 잘 안되었다. 풀어서 다시 묶으려는데 할머니가 얼른 받아 매듭으로 묶어 문갑 위에 반듯하게 올려놓고 나갔다. 바닥의 물건들을 다 정리하고 돌아보니 태우는 그새 잠이 들었다.
‘이 부채가 뭐길래 그리 화내실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할머니와 엄마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던 모습이 의아했다. 임금이 준 선물로 목숨을 건진 조상이 있다는 말을 할머니께 들은 적이 있다. 그런 거라면 몰라도 부채를 가지고 화를 내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매듭을 살짝 당겨서 조심스럽게 한지를 열었다. 그리곤 살그머니 부채를 펼쳤다.
“음, 시원한걸. 단오는 왜 열려서 정신없게 하는지 몰라. 부채야, 너 때문에 오늘 단오 구경이고 뭐고 할머니 댁에서 집으로 쫓겨갈 뻔했어. 내 쪼그라든 심장에 바람 좀 불어넣어 줘라.”
나는 눈을 감고 부채질을 하며 바람의 맛을 느꼈다.
“서둘러라. 서둘러! 거기 새로 들어 온 생각시, 뭘 꾸물거리는 게냐?”
낯선 말투가 귀에 거슬렸다. 눈을 떴다.
‘뭐지?’
눈을 비비며 다시 떴다.
‘여기는 어디지? 사극 드라마에서 봤던 곳이네. 어머, 내가 궁녀 옷을 입었잖아. 내가 궁녀가 된 거야?’
그때였다.
“네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소주방 생각시로구나. 단오연회 준비하는데 손이 부족하여 불렀는데 행동이 굼뜨면 되겠느냐.”
놀란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바삐 움직이는 궁녀들 사이에 떨고 서 있었다.
“떡시루에 김이 오르도록 불을 더 지펴라. 한 시루 더 쪄야 하는데 늦구나.”
나이 지긋한 궁녀가 이리저리 다니며 일을 시키느라 바빴다.
“떡을 이렇게 많이 한다고요?”
“불 지피라는데 웬 말이 많은 게냐?”
옆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궁녀가 눈을 흘겼다.
“아, 네.”
나는 자꾸 말하다간 내 정체가 탄로 날까 봐 고개를 숙이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옆에서는 궁녀 두 명이 으깬 생선으로 완자를 빚고 있었다. 떡시루 옆 솥에는 소고기를 넣고 육수를 만들고 있는 듯했다. 구수한 냄새 때문인지 입에 침이 고였다. 나는 낯선 풍경이 신기하여 연신 주변을 힐끔거렸다.
“민어는 어디서 구해왔을꼬?”
“어알탕 한다고 상궁님이 궐밖에 다녀왔다더라. 이번 단오연회는 종2품까지 참석한다잖아. 거기다 내·외명부 부인들도 궁궐로 초청했다더니 음식 장만이 끝도 없는 게여.”
“어휴, 힘들어. 어서 단옷날이 지나가야 두 다리 뻗고 잘 텐데.”
두 궁녀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내 귀로 쏙쏙 들어왔다.
“오늘 새로 온 생각시는 어디 있는 게냐?”
나는 불이 활활 타는 아궁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얘, 널 찾잖아. 얼른 저기 상궁님 따라가 봐라.”
나는 벌떡 일어나 상궁을 따라갔다.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뛰는 걸음이라야 따라갈 수 있었다.
“이 연회장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이다. 서둘러라.”
“저,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상궁은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휑하니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앞에 걸레가 있었다. 걸레를 들고 부지런히 마루를 닦았다. 땀이 절로 흘렀다.
청소가 끝나자 궁녀들이 상을 펼치더니 음식을 나르기 시작하였다. 상이 금방 다 차려졌다. 나는 바닥을 구석구석 닦으면서 차려지는 상을 살펴보았다. 임금님이 앉는 정면에는 커다란 상이 놓였고 옆으로 신하들이 앉는 자리는 한 사람 앞에 상 하나씩 놓였다. 여러 명의 신하가 각각 상을 따로 받는 것이 신기했다.
상의 수를 세고 있는데 상궁이 또 나를 불렀다.
“얼른 이 부채를 중전마마께 드리러 가거라. 부인들에게 선물할 부채의 수가 모자란다는구나. 내‧외명부 부인들이 다 모이기 전에 서둘러 전해야 한다.”
“예, 그런데 중전마마는 어디 계시온지요?”
“날 따라오면 된다.”
손에 짐을 든 다른 상궁이 나섰다. 나는 그 상궁을 따라가면서 예단에 담긴 부채를 힐끔거리며 보았다. 할머니 댁에서 본 부채와 같아서 나도 모르게 부채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어디 손으로 만지느냐. 이 부채는 단옷날 임금님이 하사하는 선물로 단오선이라고 한다. 감히 손으로 만지다니 조심하거라.”
“네. 저도 모르게 만졌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너는 다시 연회장으로 가거라. 이 부채는 내가 중전마마께 전하마.”
나는 돌아서서 다시 연회장으로 향했다. 부지런히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궁궐이 참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궐 안에 시냇물이 흐르고 다리를 건너야 하는 것도 신기하였다. 다리 밑에는 듬성듬성 베어낸 흔적이 보이는 창포가 보였다. 창포를 보니 반가웠다. 강릉단오장에서 창포물에 머리 감기 체험을 했던 일이 생각났다. 체험장 옆에 베어다 놓은 창포가 세워져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옛날에는 궁궐 안에도 창포가 있었구나. 저걸 베어 삶은 물에 왕비도 공주도 머리를 감았겠지?’
나는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신기한 이곳을 살피는 것이 재미있었다.
연회장에 도착하니 이미 연회가 시작되었다.
임금님은 기분이 좋은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이 5월 5일 단오요. 1년 중 양의 기운이 가장 센 날이라 하였소. 올여름도 그대들이 건강하게 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음식을 마련하였소. 단오 음식은 수리취떡과 어알탕이 아니겠소. 이번에는 특별히 명나라 재상들이 즐겨 먹었다는 제호탕도 준비하였고, 단오주도 있으니 많이 들고 올여름도 무탈하게 보내길 바라오.”
임금님이 자리에 앉자 신하들이 한목소리를 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임금님이 건강하게 여름을 나라고 신하들을 격려하면서 단옷날 오찬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조선시대는 임금이 나라의 주인이요, 백성은 종으로 여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임금이 백성을 생각하는 어버이 같았다.
나는 부채가 놓여 있는 옆에서 연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끝날 때 부채를 하나씩 나누어 줄 거라고 상궁이 말했다. 중간 부분을 비단 끈으로 곱게 묶은 부채들을 들여다보았다. 손잡이 끝에 밤알 크기 덩어리가 하나씩 오색실에 묶여 달려 있었다. 할머니 댁에서 본 부채에는 없어서 자세히 보고 싶었다.
‘이건 뭐지?’
손끝으로 살짝 건드리는데 상궁이 무서운 눈초리로 나를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알려 주었다.
“궁금한 게 많구나. 그건 옥추단이다. 일종의 구급약이지. 그걸 부채에 달고 다니다가 배탈이라도 나면 응급으로 사용하는 거다.”
상궁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로부터 단오 선물은 부채요, 동지 선물은 책력이라고 하였소. 오늘 그대들에게 부채를 하나씩 선물로 주겠소. 어서 부채를 가져오너라.”
임금이 나를 가리켰다. 상궁이 내게 부채를 담은 예반을 들려주었다. 얼결에 임금님 옆에 서서 부채를 하나씩 임금님께 드렸다. 신하들이 한 사람씩 나와서 황송해하면서 임금님이 주는 부채를 받아 들고 자리로 갔다. 더 이상 신하들이 나오지 않자, 나는 상궁이 있는 자리로 왔다. 상궁이 예반을 보며 눈이 둥그레졌다.
“하나 남았구나. 한 분이 참석 못한 모양이다. 혹시 부채를 찾을지 모르니 연회 마칠 때까지 잘 간직하고 있어라.”
나는 부채를 들고 뒤로 물러났다.
‘이게 임금님이 내리신 단오선이란 말이지.’
나는 아무도 보지 않은 걸 확인하고 부채를 살짝 펴서 부쳐보았다. 얼굴 가득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고모님 오셨어요? 작은아버님 어서 오세요.”
“우리 온다고 자네가 괜한 고생이구먼. 단오장에서 국밥 한 그릇 먹으면 되는데 이리 부산을 떨까?”
엄마의 인사 소리에 이어 고모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두리번거렸다. 안방이었다. 내 손엔 할머니가 귀하게 여기는 부채가 들려 있었다.
‘아, 임금님이 준 단오 선물! 조상님이 부채에 달린 옥추단으로 생명을 구한 거였구나. 이렇게 귀한 부채가 우리 집에 있다니!’
어깨가 으쓱해졌다. 단오가 의미 있게 다가왔다.
“태리야, 태우야 나와 봐. 고모할머니, 작은할아버지 오셨다.”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부채를 싸서 올려놓고 거실로 나갔다. 상 위에 수리취떡과 앵두화채가 놓여 있었다.
“아이구 덥다, 더워. 어서 먹자.”
할머니가 앵두화채를 떠서 마셨다. 나는 수리취떡을 먹으면서 빨리 단오구경을 가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였다.
강원문단 3호 추천작
첫댓글 공유해 주셔서 고마워요. 동화작가의 길도 찬란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강릉 단오제와 관련한 동화 잘 읽었습니다.
다시한번 축하드립니다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단오제에 얽힌 이야기,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었네요.
축하드립니다.^^
동화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추천 작품이네요.
축하드립니다.^^
단오와 얽힌 역사를 알 수 있어서 더욱 유익한 동화네요. 감사히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