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놈놈놈
2023년 한 해는 다른 지나간 해가 으레 그렇듯 참으로 ‘다사다난(多事多難)’한 해였어요.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나에게는 정말 그러했답니다. 내 가까이에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그리고 ‘본디 그런 놈’을 모두 만났거든요. 무슨 일이기에 스파게티 웨스턴까지 들먹이느냐고요? 참,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제목의 영화가 있었죠.
2008년에 상영한 <좋은 놈, 이상한 놈, 나쁜 놈(감독 김지운)>은 '한국형 퓨전 웨스턴'을 표방하여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야기 얼개는 일본 강점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감추어진 보물 지도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질입니다. 독립군과 일본군의 대치상황에 끼어든 3인(마적단 두목 이병헌, 현상금 사냥꾼 정우성, 열차털이범 송강호)의 엇갈리는 생존방식과 갈등을 다루었어요. 이야기 전개에 개연성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광활한 만주 벌판을 담은 카메라 워크, 국경 마을과 아편 매음굴의 실감 나는 재현, 마지막 대평원의 추격전 등은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제공했습니다.
이 영화는 스파게티 웨스턴의 창시자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1969)>을 오마주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석양의 무법자>라는 번안 제목으로 상영되었죠. 주연 배우 3인의 연기 앙상블이 뛰어났습니다. 어깨에 망토를 걸치고 입에는 불 꺼진 시가를 물었으며 권태와 허무에 찌든 눈빛을 한 ‘간지남’ 클린트 이스트우드(좋은 놈이라기보다 그냥 괜찮은 놈), 영화 <하이 눈>에서 ‘찌질이’ 악당으로 출연해 될성부른 싹을 보였던 ‘시조새' 리 반 클립(나쁜 놈), 영화 <황야의 7인>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악당 두목이었지만 ‘허당꾼’으로 폭망(暴亡)한 일라이 월랙(이상한 놈).
영화에 나오는 놈들하고 내가 만난 놈들이 어떻게 연결되느냐고요? 그놈들은 실체가 없는 유령 같은 놈들이었습니다. 고약한 병에 걸린 것이어서요. 그것도 한꺼번에. 전립선암, 척추디스크, 코로나19, 그리고... 평소 밤에 자주 깨 소변을 보는 습성이 있는 터라 동네 의사가 한 달에 한 번 처방해주는 전립선약(그 무슨 쏘팔OOO)을 복용하고 있었지요. 그런가 보다 하며 병원을 간단없이 드나들던 차 의사가 PSA(전립선 특이항원) 수치가 높다고 큰 병원에 한번 가보라는 것이 아니겠어요. 집에서 가까운 대학병원을 방문했습니다. 각종 검사를 마치고 ‘룰루랄라~’ 의사 앞에 앉으니 하시는 말씀. “다른 것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암이지 말입니다.”
암 선고를 받았을 때의 심정을 지금도 확실히 잡을 수는 없습니다. 걱정과 체념에 더해 이런저런 웃기지도 않는 생각이 뒤섞였어요. ‘아니 왜 하필 내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내가 무슨 액티브 주니어도 아니고 솔찬히 나이가 들었잖아. 아니 내 나이가 어때서? 새 정부 들어서고 바뀐 나이 셈법으로 내가 정확히 몇 살이더라? 그래도 다행이긴 하네. 요새 암은 감기나 마찬가지라니까. 그래도 그렇지, 노인 흉내 한 번 제대로 내네!’ 나중에는 이런 생각에 이르렀어요. ‘그래봤자 더 살아서 나쁠 것도 없고 덜 살아서 좋을 것도 없지 뭘. 아니 그 반대인가?’
입원 일정이 길다 보니 평소 하지 않던 별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그중에서도 욜로(YOLO) 취향에다 자기 욕구를 우선시하는 허랑방탕한 세월을 보냈다는 회한과 자괴감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얼핏 신통한 생각이 들기도 했답니다. 홍익인간(弘益人間), 국리민복(國利民福), 무엇보다 동료 시민을 위하는 삶 어쩌고저쩌고... 한편으론 정치권(여의도, 서초동) 사투리를 ‘지대로’ 흉내내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요. ‘그래, 그냥 가정에 지금보다 조금만 더 충실하자. 그러면 되잖아. 뭐 퇴원하면 입원 전으로 돌아가겠지만서도.’
다시 ‘놈놈놈놈’으로 돌아옵니다. 가장 치명적일 수도 있는 전립선암이야 아프지도 않고 모르고 지냈으니까 좋은 놈! 척추디스크는 ‘어마무시하게’ 아픈 데다 도적처럼 출몰해 날짜 잡아둔 암 수술에 앞서 자기 처지를 먼저 살펴봐달라고 위협했으니까 나쁜 놈! 코로나19는 낯설지도 않고 이웃처럼 지내온 터라 우습지도 않게 여겼는데 갑자기 끼어들어 훼방을 놓았으니 이상한 놈! 그런데 마지막 다른 한 놈은? 고혈압입니다. 수십 년째 동행하면서도 평소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게 살갑게 지내오는 터에 비슷한 연령대면 누구나 소유하는 필수 아이템이니까 본디 그런 놈! 이놈들을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음 같아선 대충 쓸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고. 그저 억울함을 호소하며 관대한 처분을 바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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