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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스터디는 미끼일 뿐, 진짜 목적은.>
하늘이 무척 맑았다. 고개를 들어 무한대의 하늘을 쳐다보고 있자면, 금방이라도 그 장황한 하늘이 쇼리의 조그마한 몸짓을 송두리 째 앗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그녀 앞에 나타난 엔도 렌의 등장에 쇼리는 앞으로의 대학 생활이 조금은 설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도쿄대로 유학 온 한국유학생이 없다는 소식에 실망하고 있던 찰나, 다행이도 엔도 군을 만난 것이었다.
그 당시의 분위기를 다시 떠올리자면 그랬다. 낯선 타향에 와서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어린 쇼리가 한국어가 아닌 일어를 다시 깨우쳐야 한다는 사실은 몹시 고된 일이었다. 아무리 영리한 6살의 소녀라 해도 당시 쇼리에겐 든든한 부모님을 빽으로 당당히 앞으로 나갈 자신감 따윈 소멸된 후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녀가 더 넓은 세상에서 자신의 기량을 맘껏 펼치는 것도 보지 못한 채.
“무슨 일이시죠?”
“아, 엔도 군을 만나러 왔는데요. 스터디 모임이 오늘이라 그의 집에서 모이기로 해서요.”
집사쯤 되 보이는 홀쭉한 키의 남자가 철장 같이 촘촘히 세워진 대문 사이로 다가와 대뜸 물어왔다. 아무래도 쇼리의 옷매무새 상태가 후줄근한 탓이라 그런지 의구심이 서린 눈으로 먼저 말을 건네 온 것이다. 스터디라는 말에 집사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 모습이 역력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는 검은 슈트를 바르게 차려입고 대문 앞에 선 채 다시금 쇼리의 동태를 살폈다. 글쎄다, 이런 여자는 본 적이 없는데……. 그의 눈이 그렇게 말을 해왔다. 그러다가도 잠시, 그는 선뜻 그녀를 돌려보내기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을 해보겠다며 이미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꽤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약속시간까진 30분도 채 남지 않는 상태였다. 겉으로 보아도 엔도 군의 집은 대궐같이 으리으리한 인테리어뿐이었다. 그녀가 사는 신코이와(新小岩)는 시내 같은 동네가 아니라 크고 화려한 건물이 없어 사람 사는 냄새가 솔솔 풍기는 골목과 풍경이 인상 깊은 곳이었다. 지유가오카(ジユがオカ)에서나 볼 수 있는 고급주택과 화려한 부티크 숍, 해외 유명 브랜드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 소소한 지역이었다. 신코이와는 한적하고 진짜 일본스러운 동네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주택가들이 많이 모여 있지만 부촌보다는 일반 서민들의 가까운 낡은 주택들이 많았고, 무엇보다 학교가 꽤 많았다. 신코이와거리를 거닐고 다니면 교복 입은 학생들과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다니는 어머니들을 많이 볼 수가 있다.
그래서인지 지유가오카의 풍경들은 그녀에게 있어 몹시 낯선 풍경이 참 많았다. 신코이와에서 지유가오카로 넘어오는 거리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른 아침부터 일찍이 부지런을 떤 것은, 바로 엔도 군의 지난 한마디 때문이었다.
‘나도 너 같은 한국 사람이야. 물론, 반쪽짜리이긴 하지만.’
그 말이 쇼리에겐 예쁘다, 역시 도쿄대의 브레인답다, 퀸이다, 라는 말보다 더 듣기 좋은 한마디로 자리했다. 집사가 안으로 모습을 감춘 것도 어느 덧 10여분이 흐른 뒤였다. 멀리서 딱딱한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집사였다. 집사는 아까보다 한층 더 밝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지그시 웃어보였다.
“이런, 제가 숙녀 분을 오래 기다리게 했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도련님, 친구 분이시라는 걸 알았더라면 제가 미리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 우선 안으로 들어오시죠.”
집사는 밝은 표정으로 가벼운 목례까지 더해가며 쇼리를 대궐 같이 으리으리한 대저택으로 안내했다. 엔도 가(家)의 저택은 단연 지유가오카에서도 으뜸이었다. 알록달록한 벽돌과 어디서든 볼 수 없는 희귀한 인테리어 건축물. 대문에서부터 무언으로 인도하는 좁은 벽돌바닥 역시 어느 하나 고급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집사의 호리호리한 몸을 따라 쇼리가 이쪽저쪽을 둘러보며 안쪽으로 천천히 따라 들어갔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푸릇푸릇한 정원 위로 스프링클러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흩뿌려지는 물방울 위로 희미하지만 형형색색의 무지개가 얼핏 떠올랐다.
“무지개…….”
쇼리는 걸음을 우뚝 멈춰 선 채, 나직이 읊조렸다. 무지개를 본 게 얼마 만이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니 꽤 오래된 옛 일이었다. 6살,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아빠와 개울가에서 본 게 전부였다. 정말이지, 이런 곳에서 무지개를 보게 될 줄이야……. 볕이 맑은 탓에 정원에 무성히 피어 오른 잔디와 꽃들이 갖추고 있는 그 알록달록한 옷들이 더욱 뚜렷해진 느낌이다.
도쿄의 6월은 악명 높은 더위로 유명했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연분홍빛의 벚꽃나무가, 길을 따라 들어갈 때마다 뜨거운 볕을 가려주니, 이보다 더 시원하고 맑을 순 없을 것이다. 쇼리는 집사가 안내하는 방향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엔도 가의 저택은 두 개의 건물로 나뉘었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 고급스럽지만 나름 심플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건물로 그녀를, 집사가 안내했다. 손수 그가 열어주는 문을 따라 쇼리의 몸이 어느 새 엔도 가의 집안 안으로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다급히 그녀 쪽으로 다가와 배꼽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이런 일이 익숙지 않아 어색한 눈웃음부터 지으며 쇼리 또한 그들을 따라 허리를 굽혔다. 서글서글한 눈웃음으로 그녀를 안내한 것은 집사가 아닌, 중후한 느낌의 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시에’ 라 칭했고, 또 그렇게 불러달라고 말했다. 시에는 집사와 같이 단정한 검은 슈트를 입고, 승무원처럼 머리를 시원스레 묶어 올린 채, 검은 망핀으로 삐져나온 머리칼을 단정히 집어넣은 꽤 깔끔한 이미지였다. 그래서인지 쇼리 눈엔 그녀 역시 승무원처럼, 그녀의 몸에 밴 격식이 무척 좋으면서도 낯설다는 생각을 해봤다.
프랑스의 유명한 인테리어 건축 팀이 엔도 가의 집을 건축했다는 기사를 언젠가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다. 무척 흐릿한 기억이라 잘 기억나진 않지만 그들의 말마따나 엔도 가의 저택은 그야말로 호화스럽기 짝이 없었다. 외형은 실내가 보일 것 같은 투명한 블랙 컬러의 유리벽으로 되어있다면, 실내는 그와 정 반대의 느낌을 갖게 했다. 화이트와 블랙의 조화는 언제 보아도 심플하고 멋들어지는 색 조합임에는 틀림없었다. 엔도 가의 저택은 그것들을 잘 말해주는 본보기인 셈이었다. 건물은 총 3층으로 이뤄져 있었다. 시에를 따라 동그랗게 말아 올린 듯한 화이트 컬러의 원형 계단을 밟았다. 금색의 핸드레일을 짚을 때마다 쇼리는 자신이 마치 판타지 세계에 온 것 같은 이질감마저 들었다.
“도련님께선 조깅하러 가셨어요. 아침에 나가셨으니, 곧 오실 겁니다. 안에서 기다리세요.”
“네, 감사합니다.”
“금방 차도 올려드리겠습니다. 그럼.”
시에는 배꼽에 두 손을 올려놓고, 정중히 쇼리에게 허리를 숙였다. 이런 분위기 따위 어차피 익숙할 리도 없겠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더 있어 뵈는 그녀의 딱딱한 격식이 쇼리는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2층엔 1층과 같은 널따란 거실을 제외하곤 서너 개의 방문만 보였다. 모두 다 깨끗한 화이트 컬러였고, 바닥에 깔린 카펫은 아이보리로 색조화가 상당히 산뜻하고 예쁜 곳이었다.
쇼리는 문고리를 틀어, 주인이 없는 빈 방에 살포시 발을 디뎠다. 시에의 말대로 그는 이미 나가고 없는 후였다. 문을 닫고, 주위를 살펴보자니 쇼리는 그저 렌의 방이 아찔하게만 보였다. 부모님을 여의고 세상에 피붙이라곤 이제 할머니뿐이 없는 그녀가 사는 집은 풀 냄새가 물씬 풍기는 ‘엔도 군의 방보다 훨씬 더 작은’ 다다미가 깔린 소소한 5평 남짓한 집이었다. 그것도 다달이 돈을 지불하고 사는 월세인터라 자신의 집이라곤 할 수 없었다. 괜스레 한숨이 뽑아져 나왔다. 모두는 아니래도 누구나가 그렇듯, 도쿄대 생들은 명문가의 엑기스만 뽑아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그런 곳에서, 이런 휘황찬란한 생활을 즐기는 부촌의 무리들과 고학생인 그녀가 어울리는 건 뭔가 언밸런스한 느낌이 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런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라도 고학생의 도쿄대 최고의 퀸이 있는 거겠지만.
쇼리는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하늘을 무리 없이 볼 수 있는 탁 트인 네모진 창, 그 아래 배치돼있는 화이트 가죽 침대와 그가 잠들었다 깬 흔적이 역력한 침대 시트. 그리고 방 한 가운데 동그랗게 깔린 널찍한 화이트 컬러의 카펫까지. 해외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유명 브랜드 제품들은 매장 따윌 가지 않아도 이곳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길쭉하고 심플하게 나있는 소파 쪽으로 시선을 기울인 그녀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에 아기자기하게 걸려있는 엔도 군의 사진을 보기 위해서였다.
“엔도 교수님……?”
사진 속 나란히 어깨동무를 한 채 활짝 갠 웃음을 보인 한 여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설마 했지만 설마, 그 설마가 정말일 줄이야. 단지 성만 같을 거라 생각했는데…… 엔도 군과 서슴없는 스킨십이 더해지는 사진 속 흐름은 그녀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누나인가? 추측에 들어선 쇼리의 의문이, 적막을 깨는 나직한 감성적 목소리에 의해 무참히 깨져 나갔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엔도 군이 큰 타월 한 장을 허리춤에 걸친 채 들어오는 게 아닌가.
“고모야.”
무심한 말투. 그녀 생각을 읽었다는 듯 대답했다.
“보통은 누나가 아니냐고 말들 해. 어딘가 꽤 닮은 구석이 있어서.”
“아.”
“또 궁금한 건?”
렌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쇼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낯선 여자에게 반 전라 상태의 몸을 보인다는 걸 전혀 개의치 않은 눈빛이다. 쇼리는 대답이 없었다. 다만 렌을 향해 무의미한 시선을 던질 뿐. 시니컬하게 웃음 짓는 렌이 다시 그녀를 등지고, 라디오를 틀었다. 잔잔한 팝송이 흘러나오는 걸보니 이 남자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되는 듯싶다. 어정쩡한 채로 서 있다가 쇼리는 액자에서 눈을 뗀 채 기다란 소파에 몸을 앉혔다. 남자와 한 방에 단 둘이 있다니, 무척이나 어색했다.
“길은 잘 찾아왔나 보네, 좀 걱정했었는데. 이 지역이 여간 복잡해야 말이지.”
“좀 헤매긴 했는데 다행이 쉽게 찾았어.”
“그래? 어떻게 찾았는데?”
슬리퍼 끌리는 소리가 부드럽게 들렸다. 그녀 쪽으로 다가서는 렌의 시선이 무척 자연스럽다. 아무래도 그는 조깅을 한 게 아니라 샤워를 마치고 나온 것 같다. 허리에 걸쳐있는 타월만 봐도 그랬다. 거기다 윤기 나는 그의 머리칼이 저렇게 젖어있으니……. 렌은 그녀가 앉아있는 소파 쪽으로 다가와 마찬가지로 쇼리의 눈높이로 자신의 시선 또한 낮춰 주었다.
왠지 모를 모호한 분위기. 쇼리는 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읊조렸다.
“그냥…… 사람들한테 물어서.”
작게 오물거리는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참 먹음직스럽게 움직이자, 렌은 한 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채 대꾸했다.
“발음이 귀엽네.”
“…….”
“누구한테 배운 거야?”
이상야릇했다. 그의 눈동자도 필요 이상으로 영롱했고, 목소리 또한 낮고 무척이나 달큰했다. 쇼리는 마주친 눈과 눈 사이에 평범함은 없다 생각하여, 얼른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보다, 옷 좀…… 입어줬으면 좋겠는데.”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한 그녀의 옅은 미소. 복숭아처럼 뽀얗게 오른 홍조가 그녀만큼이나 참 귀여웠다. 그런 그녀의 태세에 렌은 확신을 가졌다. 감히 요루이치 따위가 함부로 가질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는 걸. 더하자면, 그녀가 경험이 없다는 것 또한. 이성에 대한 빠삭한 지식은 없지만 이건 그냥 남자로서 느낀 ‘직감’ 같은 거였다. 분명 둘의 시선은 허공에서 마주한 채 미묘하게 이뤄져 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올곧음이 없었고, 무척이나 흔들렸다는 것. 그게 렌에게 주어진 결정적 힌트였다.
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피식 웃으며 다시 그녀를 등졌다. 좁다란 터널처럼 이어진 통로를 지나 드레스 룸으로 들어간 그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스터디는 아마 2시간 뒤에 이뤄질 거야. 멤버들이 게으름쟁이들이라 지금쯤 부랴부랴 준비해서 이쪽으로 오고 있을 거니까. 것보다, 아침은 먹었냐?”
차 대신 간단히 끼니를 챙길 수 있는 식사를 준비해 달라고, 렌은 시에에게 말했다.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시에는 다시 모습을 감췄고, 렌은 학교에서 보았을 때처럼 깔끔한 상태로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의 정적이겠지만 은 쇼리는 낯선 남자와의 눈빛교류가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류와는 오랜 시간 눈을 마주보고 있어도 어색함 따위는 없었는데……. 분명 그가 편하고, 유일하게 말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이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자신을 달랬다. 렌은 친구라 하기엔 다소 이질감이 드는 사내였다.
시에가 토스트를 몇 장 준비해왔다. 노크를 하고, 나갈 때도 어김없이 그녀의 목례는 한 치의 틀어짐도 없었다. 나란히 소파에 앉아, 그녀가 준비해 온 따끈따끈한 토스트를 보자니 집에서 혼자 적적한 채로 계실 할머니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쇼리는 자신의 끼니는 거를지언정 할머니의 식사까지 깜빡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이런 황금 같은 주말에 아침조차도 함께 하질 못한다니……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졌다.
“무슨 생각 해? 배고픈 거 아니었어?”
빵 조각을 한 입 깨문 채 렌이, 멍한 시선으로 미동도 하지 않는 쇼리에게 말문을 텄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며 또 다시 옅은 미소를 뗬다. 아무것도 아니긴, 분명 깊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짐작뿐이지만 렌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다 말고, 다시 토스트를 한 입 깨문 채 읊조렸다.
“요루이치랑은 무슨 사이?”
그녀는 우유를 홀짝 마시는 렌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냥 친구.”
“같은 클래스도 아니지 않나? 어떻게 하다 알게 됐는지 물어봐도 돼?”
“그러는 넌? 요루이치랑 예전부터 알던 사이 같은데, 무슨 사이야?”
“글쎄, 확실히 애인은 아니지.”
렌의 반응에 쇼리는 천천히 식도를 따라 떠넘기던 우유에 의해 사례가 걸렸다. 케엑! 켁!
“혹시, 게이니?”
“그렇게 보여?”
“아니, 전혀.”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봤다. 그가 시선을 올리자 또다시 허공 위에서 그들의 시선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냥, 동네 아는 애.”
짧고, 굵게. 렌은 요루이치를 동네 아는 애라고 칭했지만 쇼리는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더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봤다. 요루이치가 대뜸 자신께로 다가온 그를 보고 이유 없이 화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집요하게 묻는 것 역시 예의가 아니라 생각하여, 쇼리는 머릿속에 맴도는 ‘엔도 군과 요루이치의 관계’를 머릿속에서 얼른 정리했다.
간단한 끼니 해결로 방 안엔 노릇한 토스트 냄새가 진동했다. 네모진 예쁜 창을 활짝 열어놓자, 바깥에서 부는 여름 바람이 방안의 공기를 실컷 깨뜨려 놓았다. 바람이 참 좋았다. 여름이 곧 시작인데도 절대 바람만은 덥지가 않았다. 이런 따뜻한 날씨와 배부른 기운이 그녀를 더욱 나른하게 만들었다.
“주말엔 대체로 뭐해?”
물어온 쪽은 엔도 군이었다.
“아르바이트. 하라주쿠(原宿)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 해.”
“명문대에 아르바이트라…… 고학생이라더니, 사실인가 보네.”
고학생을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렌은 그저 사실을 알고 싶었다. 도쿄대 최고의 퀸이 고학생이라니, 어딘지 이질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보통 퀸이라 하면 부유한 집안의 여식이라든지 빵빵한 뒤 배경에 못지않은 그에 합당한 권력이 있어야 ‘도쿄대 퀸’이라 칭할 텐데, 그녀는 단지 수석입학과 수려한 외모, 그에 걸 맞는 명석한 두뇌 덕에 단 번에 퀸으로 자리매김 한 것 같았다.
게다가 하라주쿠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니, 그 음식점은 불티나게 팔리겠군. 천하의 도쿄대 퀸을 보려면 그 음식점을 거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렌은 저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어느 덧 네모진 창문으로 다가간 쇼리가 렌의 시선을 끌었다. 긴 머리를 출렁이며 볕을 쬐고 있는 그녀는 정말 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다. 요루이치가 그렇게 성화를 부렸으니, 지금 쯤 남모르게 이를 갈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피실피실 웃음이 세기 시작했다.
“요루이치가 화내지 않아?”
“화내다니…… 뭘?”
“그쪽 무리들이랑 스터디 하고 있는 게 아닌 가해서. 만약 그렇다면 요루이치 쪽에서 널 좋은 시선으로 보고 있지만은 않을 텐데.”
“요루이치는 그렇게 속 좁은 남자가 아냐. 분명 내가 모르는 너와의 일로 요루이치가 화를 내는 거라면 글쎄…… 난, 굳이 편 같은 거 가르면서 편식하듯 사람 만나는 거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아.”
“꽤 사무적인 대답이네.”
“그러는 넌?”
창틀에서 몸을 돌렸다. 쇼리의 시선이 단숨에 렌의 모호한 눈빛과 맞닥뜨렸다. 그녀는 보통의 일본 여자처럼 수줍어하거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은 아니었다. 분명, 자신의 생각이나 주관이 확실한 여자였고 그런 아사 쇼리를 보며, 렌은 그녀를 토대로 한국 여자에 대한 환상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그의 어머니가 지금도 살아 있었더라면, 분명 저런 여자가 아니었나 생각할 정도로 그녀는 왠지 모를 편안함을 지니고 있었다.
“스터디는 그냥 미끼일 뿐, 진짜 네 목적이 궁금한데?”
만만히 봐선 안 될 계집, 아사 쇼리. 렌은 절대 모를 거라 여겼던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괜스레 웃음이 세 나왔다. 공부벌레라 이런 방면으론 숙맥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하기야, 공부를 잘하는 만큼 연애도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어야 하는 법. 렌은 점차 그녀에 대한 진지한 호기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단순한 흥미에 얼굴만 예쁜, 일본 인형 같은 여자인 줄로만 알았다. 겉은 그럴싸하지만 속은 솜뭉치를 구겨 넣은 것 같은 지극히 콧대만 높은 당돌한 여자.
하지만 생각이 빗나갔다. 당돌한 건 맞지만 솜뭉치 대신 그녀의 속은 그가 절대 꿰뚫어 볼 수 없는 영민한 내공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책잡힐 줄은 몰랐는데, 흠. 되레 그의 꾀에 그가 당한 것 같은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는 애교 아닌가?”
“애교로 봐달라는 거겠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연기하는 네 본심은 뭐고? 적어도 난 너처럼 그렇게 대범한 여우 짓은 하지 않는다고 보는데?”
“차라리 대범한 게 낫다고 봐. 하지만 나쁘진 않았어. 요루이치가 그렇게 화내는 것도 처음이었고.”
쇼리는 영롱한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크게 눈웃음 지었다.
“요루이치가 아무 의미 없이 너와 어울리고 있지 않는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해?”
“그 말은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거야?”
“별 의미 없어. 다만 친구는 아니라는 거지, 친구 그 이상이면 몰라도.”
“내 생각은 좀 달라. 그와 친구 이상으로 관계를 진전하기엔 내 감정에 다소 무리가 있으니까.”
“그렇담 다행이고.”
“물론, 엔도 군과도 어디까지나 같은 클래스 친구로 지내고 싶어.”
아아, 이런. 이 여자는 확실한 걸 좋아하나 보군. 렌은 그녀의 똑 부러지는 대답에 잠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과 요루이치가 같은 인간일 리는 없었다. 그러므로 요루이치보다 한 단계 더, 한 발짝 더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사내라면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 갖게 하는 여자를 만나곤 한다. 더욱이 쇼리는, 렌의 구미를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한 큐에 당기게 하는 기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런 여잘 놓친다면 아마 자신도 후회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미안하지만 난 너랑 친구 따위로 지내고 싶은 맘 없어.”
이건 선전포고이자 동시에 자신의 맘을 보여주는 애매모호한, 고백, 비슷한 거였다.
“그리고 ‘엔도’보다 렌으로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아사 쇼리.”
“아, 미안. 하지만 고마워, 렌.”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 일가견이 있어. 보통 남자라면 분명 이런 새침한 반응에 금세 기분이 붕 떴을 것이다. 그녀의 귀여운 입술 사이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다니…… 꼭 멜로디 같다. 가벼운 홍조를 머금은 뺨과 옅은 분홍빛 입술이 새초롬해 보인다. 끼니를 해결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다시 공복이란 장애가 찾아온 것 같다. 당장, 이 자리에서 그녀를 집어 삼켜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상당히 유감이었다.
그만큼이나 욕심이 났다. 그러면서도 끌리는 게 꼭…….
“집이 참 좋다.”
어색함을 지우고자 건넨 말이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좋을 것도 없어. 잠만 잘 수 있음 어디든 상관없잖아? 설사, 후미진 창고라고 해도.”
“렌은 다른 애들이랑 많이 다른 것 같아. 보통은 그런 칭찬을 하면, 더 자신을 부추겨 세우는 게 정석인데 말이야.”
“칭찬이었어? 그런 칭찬은 별로, 나한텐 좋은 게 아니라서.”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은 한 번쯤은 꿈꿔보는 곳이야. 자신의 처지에 감사할 줄 아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해, 엔도 군.”
“너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
“음……. 가진 것 없는 가난한 고학생? 하하.”
웃을 대목은 아니지만 어색함을 낮추기 위해 소리 내어 웃어 보인 것 같다. 그 모습이 구차하거나 가여워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 좋았달 까.
“일본엔 어떻게 오게 된 거야?”
렌이 물었다.
“6살 때, 아빠가 해외로 파견됐거든. 해서 오게 됐어.”
“부모님은 뭐하시는지 물어도 돼?”
“글쎄, 하늘나라에서 뭐든 하고 계시지 않을까?”
일순 침묵이 고수됐다. 몸이 경직된 것 마냥 렌은 다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에게 시선이 간 채 그는 묵묵부답으로 침묵을 일관했다. 헌데도 그녀는 우울하거나 슬픔을 짓는 얼굴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당당했고, 지금의 자신을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한 가지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고 했다. 물론, 렌 그 자신도 어미를 잃은 슬픔을 남몰래 간직해야만 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자신과 같은 아픔을 지닌 사람을 만났다는 게 그에게는 더없을 신선한 충격이었다.
슬프지 않아? 보고 싶지 않아? 묻고 싶었다. 몇 번이고 되뇌면서도 할 말은 입 안에서만 맴돌 뿐, 정작 말은 입을 뚫고 나오지 못했다.
“할머니가 계셔. 이민 올 때 같이 올라왔거든.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도쿄대에 올 수 있는 것도 다 할머니 공이 커. 지금 내가 행복한 것도 다 할머니가 있어서야. 할머니까지 곁에 없었다면 분명, 나도 없었을 거라 생각하면서 늘 살거든.”
그녀는 창밖으로 던진 새침한 눈을 다시 렌에게 돌렸다.
“네가 부럽다.”
작게 속삭이듯 그녀의 입술이 틀어졌다. 뭐라 말할 수 있으리. 지금은 그 어떤 말로도 그녀를 갖지 못함이 분명한데……. 전보다 더 짙어졌다. 영롱한 그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부러워하지 마. 부러울 거 없어.”
나직이 읊조린 그의 어투에 그녀가 머금은 미소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래, 정말 부러울 것도 없어. 호화스러운 저택? 풍족한 삶? 그만큼이나 그의 마음도 공허하다.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황폐한 거리를 홀로 떠도는 느낌이 들 정도로. 외로웠다. 지독히 외로웠다. 아무 생각 없이, 단지 자신만을 위해 단 한 번이라도 편하게 즐겁게 웃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생각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정말 행복했던 때, 바로 그 때가.
“널 위로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 역시, 너랑 비슷한 처지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부러운 눈총으로 날 볼 것 없어. 나야말로 정말 아무것도 아닌 놈이니까.”
“고마워, 어쩐지 좀 위안이 되는 것 같아. 같은 처지라니…… 우습지만 꼭 동지 같다.”
“그러니까, 널 위로하는 차원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고.”
“아사 쇼리, 그냥 쇼리라고 불러도 좋아.”
화제를 돌리기 위한 빤한 수작이었지만 나름 귀엽게 봐줄 만 했다. 그게 본연 그녀의 매력이구나 생각하고 얼버무렸다. 더 집요해져봤자 남자로서 치졸해질 뿐, 더는 없었다. 하지만 아까보다 한층 더 밝아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렌은 마음 한 편이 무거우면서도 동시에 가벼운 모순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웃고 있으면 자신까지 밝아지는 기분. 터무니 없는 말이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덩달아 렌도 그녀를 따라 픽, 실소를 터트렸다.
“그저 반만이라도 좋았던 것 같아. 사실 처음엔 굉장히 놀랐거든.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걸 어디서 듣고 와선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꽤 한국어가 자연스러워서.”
“뭐가?”
“너, 말이야.”
“…….”
“그 치열한 학구열 속에서 나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기뻤어.”
사막에서, 황량한 사막, 아무도 없고 오로지 나 혼자만이 존재하는 그 무서운 곳에서, 너라는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그게 이유야. 네 애교가 너무 귀여워서, 그래서 모른 척 눈감아준 이유.”
착한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녀는 그걸 알고 있었다. 적당히 속아 넘어가주고, 짓궂지만 그런 속임수를 애교라 부르며, 렌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자신의 오만한 생각이 그녀 앞에선 속수무책에 얼마나 어린아이 같은 생각인지, 렌은 미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왜 그녀가 도쿄대 최고의 퀸이라 불리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단지 허울 좋은 ‘퀸’이란 이름을 쉽사리 거머쥔 여자가 아니다.
‘아사 쇼리’ 기억해 두지.
만약 세상에 일곱 빛깔 무지개 여우가 있다면, 그건 바로 아사 쇼리, 너를 두고 하는 말일 테지.
얼마 후, 신지와 타쿠미, 아키가 렌의 저택을 찾았다. 모두 쇼리의 등장에 당황해 하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그것은 차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그 무리들 속에 자연히 스며들었다. 만남은 언제나 늘 설레고, 들뜨게 만들었다. 쇼리는 새로운 도쿄대 생들과의 만남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잼있어 담편이 기대되
우와우~ 재밌는데요!
1편엔 못남기고 이렇게 리플 달아요 ㅠㅠ 아 너무 좋아요~~ 뭔가 봄바람 같은 느낌이네요 ^^; 아.. 그리고 나중에라도 글을 수정하신다면 다행이-> 다행히로 고쳐주시겠어요..ㅠㅠ;
진짜 완전 재미있어요!!!
집중하게 만드네요
ㅎㅎ 잘 읽고 갑니다^^
재밌네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