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여행] 무신(武神) 관성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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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관성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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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고속도로를 타고 전주를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전주 IC를 나가면 천 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
는 고장답게 전주의 위상을 대변하는 듯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이라는 관문이 전주 방문객을 반겨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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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은 원래 전주부성 사대문의 하나인 풍남문의 현판에 적힌 호남제일성(湖南
第一城)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유랑자는 칭구의 안내에 따라 관성묘를 찾았다. 처음에는 관성묘가
무엇인지 잘 몰라 급하게 핸폰으로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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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운장(關雲長)을 모신 사당이었다. 일단 여기까지만 알고 나머지는 가서 보리라....관성묘는 고덕산
자락의 남고산성 내에 있다. 전주천 한벽루를 지나 전주교육대 옆을 돌아올라 좁은 길로 2km쯤 올라
가면 돌을 쌓은 성곽이 나오고 외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길 좌측에 관성묘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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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나라에는 관우 장군을 무신(武神)으로 받들어 제사 지내는 곳이 제법 여러곳에서 본적이 있
다. 먼저 관성묘 들어가는 입구에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하여 ‘신분이 높은 사람이건 낮
은 사람이건 모두 말에서 내려라’라는 뜻을 지닌 하마비가 우뚝 서 있다. 보통 종묘, 궐문, 내지는 향
교나. 서원같은 입구에 주로 설치되어 있는 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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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묘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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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문 좌,우 각 방에 모셔져 있는 적토마를 끌고 있는 관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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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묘 입구에서 약 30여 개의 돌계단을 올라가면 좌측에 관성묘의 유래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
고 들어가는 문 위에 ‘關聖墓(관성묘)’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곳에 외삼문이다. 문 좌우에는 관운장
이 타고 다녔다는 적토마와 마부의 상이 준비된 듯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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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지나 다시 20여개의 돌계단을 올라가면 중간 문이 나오고, 또 다시 30여개의 돌계단을 올라가면
관성묘의 본당이 나온다. 진입로에서 두 개의 문 과 3번 의 돌계단을 올라야만 본당에 도달할 수 있었
다. 관운장을 모신 본당은 길에서 보면 가파르고 높은 위치에 있어 관운장을 숭상하는 곳임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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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본당 앞에 다다르면 중앙에 본전이 있고 좌측에 서무, 우측에 동무가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동
무와 서무 내부 벽에는 조선 말기 의 화가 소정산이 그렸다는 [삼국연의도] 10폭 그림이 있다.
본당 건물의 형태는 맞배지붕 형식에 정면 3칸, 측면 3칸에 예를 취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본
당 앞으로 맞배지붕의 건물을 세워 정(丁) 자 모양의 정자각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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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전 네 기둥에 유려한 필체로 장수 관우를 봉안한 목적 등이 기록되었고, 본당내부에 모셔진 인물들
을 보면, 협천대제(協天大帝)라 하여 ‘하늘을 돕는 대제’라는 뜻으로 삼수 에 대춧빛 얼굴의 관운장 상
이 황금색 용포를 입고 앉아 있고, 앞쪽 좌우에는 부장들의 상을 모셨는데 오른편은 아들 관평장군과
조무장군이, 왼편으로 주창장군 과 왕보장군의 상이 있다. 관우상의 뒤편 좌우로는 제갈공명 과 관우
에게 도움을 준 옥천사의 보정스님(옥천대사)이 모셔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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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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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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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벽에는 삼국지연의도 벽화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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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우의 관성묘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1594년 명나라 신종(神宗, 1563~1620)이 관
운장을 나라 와 백성을 수호하는 무신(武神)이라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자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고 이여송(李如松), 진린(陳璘) 등 명나라 장수들이 들어오면서 전투에서 승
리를 기원하기 위하여 주둔지마다 관성묘를 세울 정도로 신앙의 열의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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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선조 35년(1602)에 당시 명나라 신종은 조선에서의 왜병을 격퇴시킨 공은 오로지 관운
장의 음공에 의한 것이라 하여 내탕금 4천 냥을 보내 동대문 밖 숭인동에 관왕묘를 짓게 했다. 이로부
터 조선 조정, 특히 왕가에서는 열성으로 신앙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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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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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벽에는 삼국지연의도 벽화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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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懲毖錄)]03이나 [임진록(壬辰錄)]04등에 보면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관우의 신조
(神助)에 힘입어 승리하게 된 영험기와 이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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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묘는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동묘(東廟), 도동의 남묘(南廟), 혜화동의 북묘(北廟), 서대문 밖 천
연동의 서묘(西廟) 그리고 종로 보신각 뒤에 중묘(中廟)가 있었으나 지금은 동묘만 남아 있다. 지방
에는 안동, 성주, 전주, 남원, 진안 등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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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묘 정전, 우로부터, 문무성신(文武聖神),:일제강점기 1930년대 전주에 거주했던 화교거상 의화길이
기증한 현판이다.
위령현혁(威靈顯赫), 중화민국 10년(1921년) 산동동향회 전주에 거주하는 화교 동향회에서 건 현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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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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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유비.관우,장비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것으로 믿는다. 290년경에 저술
된 역사 소설책으로, 후한이 멸망한 뒤 위(魏), 촉(蜀), 오(吳) 세 나라가 다투던 세상을 그렸다고는
하나 중국이 그렇듯이 허구가 많이 가미된 소설쯤으로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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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주인공인 관우는 삼국 시대 촉나라의 무장으로 유비, 장비와 도원결의로 의형제를 맺고, 유
비를 보좌하여 손권의 연합군과 함께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했던 지장(智將),덕장(德將),
용장(勇將)으로 지.덕.용을 두루갖춘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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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는 의제 장비(張飛)와 더불어 유비(劉備)를 오랫동안 섬기며 촉한(蜀漢) 건국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충성심과 의리, 당당한 성품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로 손꼽히며, 한대
(漢代) 이후로 남송(南宋)의 악비(岳飛)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각 중국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후세사
람들은 '용맹한 자' 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관우, 장비의 경우를 들어 말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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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의 화신(化身)으로 중국의 민담이나 민간전승, 민간전설에서 널리 이야기되었고 나중에는 신격
화되어 관제묘(關帝墓)가 세워졌다. 공자와 함께 ‘문무이성(文武二聖)’으로 일컬어진다.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이 숭배하는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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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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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현혁(威靈顯赫) 현판 ;1966년 당시 전주화교소학교 교장이며 진미반점을 운영하던 임국량씨가
기증한 현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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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운장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운장주(雲長呪)이다. 봉의 눈에 삼각수를 휘날리며 적토마를 타
고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는 모습은 운장주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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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관성묘는 고종 32년(1895)에 당시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金聲根1835~1919)과 남고산성을 지
키던 남고별장 무장 이신문(李信文)의 발기로 각처 유지들의 헌납성금으로 건립한 것이다.
당시 김성근은 청렴 결백했고 서예에 뛰어났으며 필체는 미남궁체(米南宮體)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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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 때에는 일제에 의하여 자작이 수여되었다. 또한 1911년 한일합병에
대한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5만원의 은사공채를 수령, 1912년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기도 하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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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의 사후인 1919년 11월에 종3위로 추서되었던 인물등등....., 이상과 같은 반민족 행위로 규정
되어.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7·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
자로 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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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묘(關聖廟)은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의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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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http://cafe.daum.net/b2345/9t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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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시 완산구 남고산성1길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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