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이 아니었습니다
시편 16: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여호와 하나님이 시편기자(다윗)의 복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내가 너의 상급이라고 하였습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복이 되시면서 상급이 되신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복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아주 달콤하고 감미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 복을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구약성경에서 복(바라크)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축복하다, 무릎을 꿇다라는 의미를 갖는 단어입니다. 단순히 복을 받는 의미를 넘어서서 무릎을 꿇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의미는 구걸하는 자세가 아니라 권위에 압도당하여 엎드리는 자세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시95;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바라크)“
신약에서도 성도들을 향하여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의 자세를 말씀하고 있는데 결국 주신다고 하신 결론은 성령(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구하는 문제에 있어서 잘못된 썩을 양식을 구하는 자의 태도에 대하여서도 지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도대체 어떻게 구하는 것이 썩는 양식이었으면서 또한 어떻게 구하면 참된 양식이었는지에 대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근거로 나타나는 썩는 양식을 욕심을 따라서 행하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에베소서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말씀인데 에베소교회의 성도의 처음 상태가 욕심을 따라 살던 존재였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상태가 욕심을 따라 사는 존재였다는 것이면서, 그 욕심을 따라 살던 위치에서 성도만이 욕심을 따라 살던 존재에서 더 이상 그 욕심으로 살지 못하게 되는 자들이 성도라는 것입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누구나가 차이가 없는 동일한 상태에서 구원받는 자와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로 구별되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들에게 어떤 행위를 하지 말라는 요구가 아니라 너희들은 그런 지경에 놓여있는 존재들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으로 살지 않고 인간 스스로 사는 것은 결국 그 어떤 선행을 하더라고 욕심을 따라 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욕심으로 살지 않는 성도는 어떤 삶으로 사는 자들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인 자신으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그리스도=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는 자들을 성도라고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것은 인간 스스로 절제하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 인간을 욕심대로 살지 못하게 하시는 통치를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멍에)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멍에라는 짐을 메우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로 매우신 것은 인간은 스스로 살면 망하지만 인간 스스로 살지 못하게 하는 방편이 십자가라는 멍에를 예수님께 지게 하시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이 예수님의 모범사례처럼 비록 나무 십자가는 아니지만 모두가 그 하나님에 의해 십자가를 지는 자들로 사는 것을 그리스도에 의해 날마다 죽임당하는 자들(그리스도인)로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처럼 성도가 그 하나님의 복(성령)을 받게 되면 날마다 죽게 되는 엎드림의 자세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함이 인간에게서 드러나기 때문에 인간의 욕심은 삭제되고 하나님의 뜻(그리스도)만 나타나기 때문에 그 성도들을 성경은 산자들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유는 산자들만이 죽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만 죽은 자들은 여전히 죽어있기에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여전히 죽어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성도)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죽는 성도의 삶을 산자(부활한 자)이기 때문에 죽을 수 있는 자들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그래서 인간이 욕심을 따라 행하는 그 삶은 여전히 죽어 있는 상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그 목숨을 위하는 삶이 결국 참 목숨을 잃게 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8: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는 복(상급)은 인간이 목숨을 위하여 행하는 그 욕심을 끊어내기 위한 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세상교회는 진짜 목숨을 잃게 되는 그 목숨을 위하여 구하고 있는 삶에 올인하고 있는 것이 다수의 세상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떤 상태로 살기에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하신 말씀인데 예수님의 입과 삶을 통하여 행하신 삶이 바로 영(성령)이 사람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도구로 삼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입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전달되는 그 영(하나님의 마음=성령)으로 살게 되는 자들은 예수님을 본받기 위하여 사는 삶이 아니라 그 예수가 되어 사는 자들(성도들)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기 위한 삶의 사례가 구체적으로 예시를 한다면 예수님처럼 거룩거룩하게 사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은 그 하나님에 의해 불가피하게 죽임당하면서 끌려가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그 예수님의 삶을 오해한 무리들은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닮아가기 위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성경은 외식하는 자들의 삶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바리새인들의 삶은 그 중심이 하나님에 의해 죽임당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서 거룩거룩한 모양의 삶으로 많은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위치에서 인간의 자랑만 드러내는 자들로 책망받는 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이 드러나지 않고 인간의 거룩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성도들에게 주시고자 약속하신 그 복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마음 즉, 성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을 받게 되는 성도들의 상태는 자신의 욕심대로 살지 못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로 목숨을 잃어서 마지막에 목숨을 얻게 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복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복이신 하나님의 뜻이 성도에게 자리하게 되면 성도는 그 복에 의해 무릎꿇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에 의해 죽임당하는 일이 날마다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자신의 과거 삶이 죄로 인하여 죽은 상태였음을 아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죄의 자각은 율법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일어나게 되는 현상입니다.
갈라디아서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율법은 에덴 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생명나무의 효력에 의한 것인데 인간이 마귀의 가르침에 훈련되어 스스로 먹은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모세=예수님=천사)에 의해 가르침을 받아서 알게 되는 성령의 일하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예수)을 거울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의해 내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하는 도구가 거울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고린도후서 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수건이 마음을 덮은 그 상태가 되어서 구하는 것이 바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는 세상의 모습이었고 하나님처럼 거룩한 흉내내기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은 하나님이 없어서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예수(천사, 말씀, 율법)를 통하여 일러주는 그 말씀으로 사는 자들이어서 자신의 말을 내어놓지 못하고 그리스도께서 일러주시는 그 말씀으로 살기에 하나님으로 사는 자들이어서 목숨을 잃지 않는 자들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첫댓글 아멘, 이해는 합니다. 기도할 때 세상의 복(재물, 건강, 명예)을 구하면 기복신양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