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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6일 [사순 제2주일]
루카 9,28ㄴ-36
타볼산에 오르는 법
우리는 모두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뵈옵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딱 맡기고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표징’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 얼굴을 뵈옵자고 하는 사람들을 악하다고 하십니다.
저도 사제가 되라고 불러주실 때, “그럼 먼저 당신 얼굴을 보여주세요~!”라고 청했습니다.
그게 정말 성모님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분께서 성모상에서 당신을 나타내 보이셔도
저는 “내가 술을 마셔서 헛것을 봤지!”라고 생각해버렸습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마음은 순종하고 싶지 않은데 그 핑계를 하느님께 대는 것입니다.
자기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하느님 탓만 하는 것입니다.
복권은 사지 않고 복권에 당첨되면 믿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나를 타볼산 꼭대기까지 데려다줄 이를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변모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모하시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제자들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기에 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김흥순 자매는 불교 신자였습니다.
장이 유착된 상태여서 음식을 넘기지도 못하고
다 게워내며 걷지도 못하는 극단적 상황이었습니다.
유명한 병원엔 다 다녀봤지만 수술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진단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 병원에서는 수술하면 2~3년, 길면 5년은 더 살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매는 수술이 두려워서인지 이미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이 설득하자 자매는 자신들을 위해 고생하는 수녀들 인생이 참
딱하다고 말했습니다.
수녀님은 딱한 수녀 말 한 번만 들어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대세를 받고 수술도 받아보겠다고 했습니다.
데레사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고는 “나는 무조건 하느님을 믿습니다.”라고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수술실에 들어설 때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인자한 모습으로 다른 의사들과 간호사들 사이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마치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겁니다.”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의사가 자신을 분명히 고쳐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고 그렇게 수술을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깨어나서는 수술받을 때 자기 발 쪽에 서 계셨던 흰 가운을 입은 의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수술실에는 모두 청색 가운을 입게 되어 있어서 흰색 가운 입은 의사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매는 빠른 속도로 회복하였습니다.
두 달 후 교리를 받고 정식 세례를 받았습니다.
병자성사를 받을 때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짐을 느꼈고 걷지도 못했던 그 자매는
기쁨에 취해 병실을 두 바퀴나 돌았습니다. 그리고 기도실에 들어선 자매는 감실 쪽을 보더니
“선생님, 여기 계셨군요! 얼마나 찾았는데요. 저를 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는 기적적으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기적이라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으며
퇴원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수녀님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잘 사신다고 합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이영숙 베드로 수녀는 예수님과 같이 말을 듣기만 하면 타볼산에 오를 수 있게 하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였습니다.
파견된 자의 특징은 사랑을 위해 고생한다는 것입니다.
파견된 자는 마치 아이에게 엄마와 같습니다. 엄마를 믿지 못하면 아빠는 자동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엄마를 파견한 아빠의 사랑은 더더욱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하느님 신성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하는 분”이십니다. 그런 고생은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명과 힘을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는 이들은 반드시 주님의 얼굴을 뵐 수밖에 없습니다.
별을 따라오다 보면 구유의 메시아를 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저도 ‘하.사.시.’를 읽게 된 것이, 그 책을 쓴 ‘마리아 발토르타’란 분을 보면서였습니다.
‘왜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시는 분이 살아생전에 영광도 보지 못했는데 수만 페이지에
해당하는 광대한 예수님의 생애를 썼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사도들의 삶에 저도 순종하였고 그렇게 “다 주시는 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예수님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고생하는 새로운 예수님입니다.
교회의 말을 듣고 순종한다면 우리는 분명 타볼산에 있게 될 것이고 그 가운데서 모세의 말씀도 듣고 엘리야의 은총도 받으며 밝게 빛나는 하느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별을 존중하고 공경하지 않는다면 구유의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6일 [사순 제 2주일]
복음: 루카 9,28-36
귀찮더라도 또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단 가운데 핵심급이라고 할수 있는 제자 세명,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타볼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정상에 도달한 제자들은 잠시후 기상천외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스승님의 얼굴과 분위기가 평소와는 완전 다른 모습, 거룩하고 태양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놀라움의 시작일뿐이었습니다.
잠시 후 전설로만 여겨왔던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 할아버지와 대 예언자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장차 이루어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핵심 제자들에게 살짝 미리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에게만 살짝 천국 문을 열어 보여준 사건이라고나 할까요.
그야말로 황홀경에 도취된 베드로 사도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마음과 더불어, 이 좋은 곳에서 저 위대하신 인물들과 함께 영원히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시끄럽고 복잡하고 아귀다툼의 산밑의 세상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 9,33)
베드로의 제안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에 대해서 복음사가들은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 놀라서 반쯤 얼이 빠진 제자들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어서들 일어나거라.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황홀한 산 위 풍경을 뒤로한 채, 다시금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수난을 향한 여행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어리석은 베드로 사도의 표현을 통해 어찌 그리도 우리들의 생각과 흡사한지 놀랄 지경입니다.
우리 역시 얼마나 부족한 존재입니까?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너무나 게으르고, 잠시 편안하기만 하면 그냥 그곳에서 주저앉고 맙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아직 멀고도 멉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계속 가야만 합니다.
중간에 힘들다고 주저앉아 버리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편하고 안락한 길을 찾는다면 우리는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 될 것이고,
주님 십자가와 원수로 살게 될 것 입니다.(김승훈 신부,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 빛두레 참조)
형제들과 공동체 식사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원장 신부님께서는 식사 후 기도를 하려고, 계속 분위기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 식탁에서는 한 형제의 주도로 나라와 민족, 인류와 지구 온난화 등을 주제로 한 범국가적, 범세계적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원장 신부님은 이런 말로 대화를 종료시켰습니다.
“자, 그럼 나라는 나중에 구하고, 우선 마침 기도부터 바칩시다.”
그렇습니다.
이상은 원대하게, 뜻은 크게 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늘 우리의 발밑을 향해야겠습니다.
매일의 귀찮고 짜증 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굳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부족하고 죄투성이인 우리 공동체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산 위에만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귀찮더라도 또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형편이 좋든지 나쁘든지, 내려가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조금 전에 맛본 감미로운 천상 체험을 이웃들에게 나눠야겠습니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복음 때문에 고생하고 박해받으며, 멸시당하고 배척당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2주일 강론>
(2025. 3. 16.)(루카 9,28ㄴ-36)
<십자가의 길을 생략하고 부활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루카 9,28ㄴ-36).”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하느님 나라’를 사도들이 직접 목격하고 체험했다는 증언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서간문에서
다시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 1,16-18).”
베드로 사도는, 사도들이 직접 보았고, 직접 들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라는 말은, “옛날이야기들을 짜깁기 하는 식으로 잘 만들어낸 이론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학문을 연구하거나 공부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삶 안에서’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은 세 가지 중요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 자신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일이고, 두 번째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일이고, 세 번째는 하느님께서 직접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일은,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계시하신) 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일은, 율법의 대표자와 예언자들의 대표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긴다는 것과 구약과 신약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구약의 율법과 예언들이 예수님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나눈 대화 내용은
중요하지 않고,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대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은, 예수님은 당신이 보내신 메시아라고 선포하시고 보증하신 말씀입니다.
3) 33절의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신성과 하느님 나라를 직접 체험하면서 ‘황홀경’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헛소리도 아니고, 아무 말이나 막 한 것도 아닙니다.>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은, 너무 황홀해서 “그냥 이대로 영원히 이곳에서 살고 싶다.” 라고 소망하게 되었음을 나타낸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소망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씀에서 ‘그의 말’은 바로 앞의 23절에 있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의 길을 생략하고 부활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아무리 좋아도 지상에서의 인생을 중단하고 그곳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자살은 원래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대죄’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끝까지 살아야 하는 것은, 사람마다 맡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루카복음에는 제자들이 스스로 침묵을 지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차이는 중요하지 않고, 어떻든 제자들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부터 믿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4)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것은, 또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신 것은, “수난 예고 말씀을 듣고 기가 꺾여 있는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해서” 라고 해석됩니다.
이 해석에 대해서, “그렇다면, 제자들은 왜, 예수님 수난 때에 모두 달아나 버렸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수난 전에는 사도들이 ‘머리로만’ 믿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부활 후에야 비로소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