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세 철학자, 세계 최장수 현역 디자이너,
유쾌한 노학자 ─ 당신에게 필요한 멘토들2^^
87세, 93세 그리고 102세. 오늘 소개하는 멘토 세 분을
단순히 나이로만 말한다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나이'와 연관된 단어 외에는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세 분에게 어울리는 진짜 키워드는 현재형의 '성실', '훈련', '노력', '혁신' 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들은 시간을 쪼개어 성실한 하루를 보내고,
매일 밤 빠짐없이 훈련을 하며, 혁신으로 가기 위해 여전히 노력합니다.
그리고 세 분의 이야기는 제가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흘려 보낸 시간을,
변명에 포함하곤 했던 '나이'를 부끄럽게 합니다.
성실, 훈련, 노력, 혁신으로 채운 87세, 93세, 102세의 어른이라고 하니 이제 자세를 바로잡게 되죠.
물론, 아득해지는 면도 있지만 우리는 키워드를 바꿀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래에서 온 말들에서 각자의 답을 찾아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김형석 (1920. 7 ~ )
1920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난 김형석 교수는 일
본 상지대(上智大) 철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철학과에서 30여 년을 가르쳤다.
서울대 김태길 교수, 숭실대 안병욱 교수와 함께 대한민국 철학 1세대로 지성사를 이끌었다.
논리로 파고드는 철학자였지만 동시에 피천득을 잇는 서정적인 수필가이기도 했다.
'현역' 철학자는 매일이 바쁘다고 했다. 책상 위엔 매일매일 칸을 메워야 할 원고지가 기다리고,
일주일 단위로 강연 요청도 쇄도한다고. 노년을 앞둔 사람들을 위한
100세 인생 가이드 《백년을 살아 보니》는 발간 2주 만에 1만 5천 부가 팔렸다고 했다.
통계를 살펴보면 20대 독자도 50대 독자도 고루 100세 현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
김형석 교수는 《철학 개론》《철학 입문》《윤리학》
《역사철학》《종교의 철학적 이해》 같은 철학서 외에도
《예수》《어떻게 믿을 것인가》《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와 같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성찰을 담은 책,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
《백 년을 살아 보니》 등 서정적 문체에 철학적 사색이 깃든 에세이이집을 펴냈다.
특히 첫 수필집인 《고독이라는 병》은
피천득의 《인연》의 뒤를 잇는 수필문학의 명작으로 평가받았으며,
이태 뒤에 나온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혼란스러운 시대,
고뇌와 고독에 싸인 젊은이들에게 '인생의 등대'가 되어주었고,
60만 부 판매를 넘기며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일과 삶의 영역 모두에서 통찰과 영감을 주는 어른들의 인터뷰를 수록한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에서 그는 인격의 핵심을 '성실성'이라고 말한다.
" 남들은 모르죠. 내가 지팡이 없이 걷기 위해,
이 나이에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매일매일 얼마나 노력하는지요.
높은 산을 넘으니, 내가 산 넘는 게 쉬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고통은 아니지만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요. 아들 딸도 그 외로움을 몰라요. "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희망과 창조'를 전하는 노인 앞에 섰자니,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젊어졌는데,
나는 어쩌자고 두 손 놓고 늙기로 했던가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최근 김형석 교수와 통화를 했다. 그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고 힘이 넘쳐서 깜짝 놀랐다.
그는 99세가 되던 여름, 《행복 예습》이라는 책도 출간했다.
과연 인격의 핵심은 성실성이며, 성실한 사람 곁엔
감히 악마도 저승사자도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말이 실감났다.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 인터뷰 중에서-
2. 이근후 (1935 ~ )
이근후 교수의 인생은 격동의 현대사와 맞물려 파란만장했다.
의과대학(경북대) 레지던트 시절 4.19 주동자로 지목돼 10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출소하니 전과자 딱지가 붙어 유학길도 취직길도 막혔다.
고민 끝에 당시 의사들이 기피하던 국립정신병원 원장에게 편지를 썼고 받아들여졌다.
다행히 그곳에서 임상 경험을 쌓아 의사로서 크게 성장했다. 전화위복이었다.
인생이 순탄하게 흘러가나 했더니, 난데없이 군대 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시절이 바뀌어 4.19사면자가 되면서 입영 통지를 받은 것.
제대 후 다시 원점에 섰다. 부르는 곳이 없었지만, 낙망하지 않고 일일이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했다.
예상치도 못하게 연세대 전임 강사 제안을 받았고 이후 이화여대로 옮겨 평생을 가르쳤다.
그는 그 시절의 경험을 이렇게 썼다.
"어떻게든 살아가고자 애쓰면 마법처럼 막다른 곳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이게 여든다섯 해를 살아 본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리다."
불운과 행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게 삶.
우리가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끝난 것 같아도 끝이 아니다.
계획대로 되는 법도 없다. 그래서 불안하지만 그래서 희망한다.
85년 산(현재는 87년이다) 노학자의 통찰에 따르면 "인간은 죽을 때까지 버텨야 하는 운명"이고,
"운명 앞에서 약자인 자신의 처지를 고뇌하며 꿋꿋하게 버텨 내는 게 인간다운 삶"이다.
이근후 교수의 저서로는 번역서 네팔 장편소설
《화이트 타이거》, 《Yeti 히말라야 하늘 위를 걷다》
《Yeti 네팔·한국 꽃 우표를 가꾸다》《Yeti 네팔 국왕을 알현하다》
《Yeti 네팔의 역사적 인물을 만나다》 등
'네팔 문화 시리즈' 11권과 산문집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마음의 위안을 주는 나의 어릴 적 이바구》 외, 의학전문서 《정신분석학》 외 30여 권이 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40만부 이상이 팔린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2019년, <김지수의 인터스텔라>에 이근후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가 나간 후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연관 검색어로 '행복은 신기루'라는 문구가 뒤따랐다.
사람들은 '행복은 신기루'라는 단어를 마른 사막에서 발견한 샘물처럼 기뻐 들이켰다.
이 인터뷰는 김지수 기자의 두 번째 인터뷰집 《자존가들》에 모두 담겨 있다.
그리고...
마이크임팩트에서 주최하는 그랜드마스터클래스(GRAND MASTER CLASS 2021 - 희망의 증거)에
김형석 교수와 이근후 교수가 멘토로서 강연을 진행합니다.
어두운 절망에서 벗어나고, 근거 없는 희망에서 나아가
함께 희망의 증거를 찾고, 모으는 과정에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2월 27일에는 <자존가들>의 또 다른 인터뷰이인 이어령 선생님의 온라인 생중계 강연이,
2월 28일에는 김형석, 이근후 선생님의 강연이 진행됩니다.
아래의 이미지를 클릭하면, 관련 사이트로 이동합니다.
3. 노라노 (1928. 3 ~ )
노라노는 1928년 한국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을 설립한 아버지(노창성)와
한국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인 어머니(이옥경) 사이에 10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열아홉 살 때 패션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지만,
혼돈 속의 고국으로 다시 돌아와 한국 최초의 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의 본명은 노명자. 노라는 여성해방의 불씨를 당긴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의 <인형의 집> 주인공 이름이며,
동시에 열아홉 살에 이혼 후 독립을 선언한 노명자가 미국행 여권에 써넣은 제2의 이름이다.
노스웨스트 항공 기록에 따르면 김자경오페라단의 김자경에 이어
미국행 비행기를 탄 두 번째 여성이 노라노였다.
1974년에 LA의 프랭크 왜건 테크니컬 칼리지(Frank Waggon Techinical College)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스포츠의류 회사에서 일하던 노라노는
1949년에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했다.
이듬해 6.25 전쟁이 터졌다. 그녀는 피난지 부산으로 내려가 병원에서 피난민들을 간호했다.
서울로 돌아와서는 수순처럼 다시 의상실을 개업했다.
많은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 노릇은 그녀 몫이었다.
그렇게 전쟁은 전쟁대로 일상은 일상대로 흘러갔다.
1973년, 그녀는 국산 물실크를 개발하기 위해 한강에 돛단배를 띄우고
실크 원단을 매달아 물에 씻는 혁신적인 수세 공법을 감행했다.
우리나라에서 패션이란 장르가 꽃을 피우려면
반드시 우리 땅에서 생산된 원단을 써야 한다는 철칙 때문이었다.
" 국산 물실크를 개발해서 만든 내 옷이 뉴욕 삭스 백화점에서 나부낄 때,
<뉴욕타임스>나 <시카고 데일리 뉴스>에서 "노라노는
시대감각에 맞고 절제된 멋이 흐른다"는 평을 봤을 때, 기분 최고였죠.
하와이 쇼 후엔 "마담 노는 뼛속까지 시크하다",
"엘레강스의 정점이다"라는 찬사를 들었어요. 정말 신이 났지요. (웃음)
"70년 동안 쉬지 않았다는 점에선 내가 샤넬을 이겼어!"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세계 최장수 현역 디자이너 노라노.
1974년 그는 뉴욕에서 <노라노 실크 패션쇼>를 열었다.
근현대사를 관통한 디자이너 노라노의 인생은 2013년, 영화 <노라노>로 제작되기도 했다.
" 생각은 옳은 길을 가면 다 만나게 되어 있어요.
성실과 혁신도 다르지 않아요.
성실이 쌓이면 자연스레 혁신으로 가게 되는 거죠. "
" 디자이너는 고상하지 않아요. 항
상 고객의 신체와 취향을 맞추는 감정노동자고 동시에 장인이에요.
과대평가는 싫어.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던 사람.
욕심 없이 순리대로 쉬지 않고 계속 갔던 사람. 그 정도면 좋겠어요.
이제까지 노라노를 세 번 만났다. 70대 중반, 80대 초반,
그리고 90세가 되던 해. (···) 나 또한 노라노 여사처럼 즐겁게 오래 일하고 싶다.
내 그릇을 알고, 야망을 앞세우지 말며, 에너지의 10퍼센트를 남겨 둔다면,
앞으로 100세가 되는 노라노 여사를 한번 더 인터뷰할 수 있으리라.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 인터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