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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 목 한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물래방아
대금연주와 함께 글 읽으시면 운치가 더 합니다.
해어화의 한 홍랑과 고죽 최경창의 사랑 (가문이 인정한 지고지순의 사랑) - 조선 - 남녀의 사랑에 대한 규제가 가장 완벽하도록 통제되었던 때가 조선시대였다. 절대 군주 밑에 절대 권력에 의해 지배받던 시대에 유교적 지배 논리는 철학이 아니라 법이었다. 예와 도라는 이치는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는 법률이었던 거다. 나라에서는 왕이라는 절대 군주가 있었다면 지방에서는 도백이나 군수가, 가정에서는 가장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였다. 각각의 단위에서 규율이 허물어지면 목숨과 맞바꾸던 시대였다. 지금도 가문의 체면유지란 허울로 불륜이 드러나면 죽음으로 갚아나가야 하는 나라가 있지 않은가? 때가 때이니 만큼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절대로 제 맘대로 설치지 못하던 시대였다. 시대가 윤리와 도덕을 강조한 신분 중심, 남성 중심이었고 모든 사회 시스템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정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방향으로만 향해 있었다. 이런 시대에 가슴이 터져 버릴 듯한 절절한 정한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대로 표출하고 살았던 이들이 있었을까? 과연 조선의 여인들은 열녀와 조강지처뿐이었을까? 아니다. 다만 남녀의 사랑을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 없었고 역사에서도 기록을 누락시켰을 뿐이다. 세계 역사를 살펴봐도 사회적 억압기제가 강하게 작동하면 할수록 음지에서의 불륜은 더욱 은밀하게 번성했었다. 양반가나 평민이나 더구나 부녀자들에 대해서는 엄격한 규율이 강요됐다. 다만 기생들은 열외였고 그네들을 향한 남자 양반들에게는 그게 풍류였다.. |
- 홍랑 - 이 얘기의 시작은 조선조 선조 때다. 함경도 경성 이란 곳. 5월이 돼야 눈이 녹고 9월이면 눈이 쌓인다는 그 곳. 철령관 우뚝하여 산맥은 몇 천리나 뻗어 내렸는지도 모른다. 그런 첩첩산지 산꼴짝인데 거기서도 깊은 곳으로 한참을 더 들어간 촌구석에 ‘홍랑’이라는 여자 아이가 살고 있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다. 어찌 된 일인지 세상천지에 일가친척 하나 없이 어찌 단 둘이 어미와 딸만 남았는지 모른다. 땅뙈기 하나 없이 그저 이웃집 허드렛일 해주고 밥술 얻어먹는 일로 평생을 살았기에 최하층민이었다. 자고 깨면 마주 보는 게 모녀간이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모녀지간이었다. 아이에게는 어미가 그 인생의 전부였었고 어미에게는 딸아이가 그 인생의 전부였을 것이다. 홍랑이 12살 때다. 갑자기 홍랑의 어머니가 아파 쓰러졌다. 무슨 병인 줄도 몰랐다. 이때만 해도 이 나라 평균수명이 채 30세가 안될 정도였다. 종기가 하나 나서 잘못 건사하다가는 그 길로 목숨을 잃었고, 감기도 좀 심하게 앓았다 싶으면 북망산으로 가던 시대다. 12살 아이 앞에 어미의 병은 청천벽력 같은 운명이었다. 산골짝에 약이 어디 있나? 동네 어른들에게 물어 약초 비슷한 건 다 캐다 달여 먹이고 밤낮으로 간호를 했지만 병은 차도가 없었다. 병이 여러 날 가자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했다. 이 약이 좋다. 저 약이 좋다. 그 약이란 것도 애초 돈이란 게 있을 리 없는 형편이니 나무뿌리나 들풀이 전부였다. 누가 얘기 했다. 경성 읍내 가까운 곳에 명의가 한 사람 있는데 그 사람이면 못 고치는 병이 없다 하더라... 하는 얘기였다. 80리 길이다. 어른들 말은 사람 걸음이 하루 100리 간다고 했다. 하루에 100리 걸어 본 사람은 안다. 힘들어 죽는다. 다음날은 다리가 부어서 아예 걷지도 못한다. 그런데 길 모르는 어린 아이로서는 험준한 산길 80리가 감당이 쉽지 않을 터...... 그래도 홍랑은 거기에 미련을 걸 수밖에 없었다. |
- 의원 - 홍랑은 어미를 이웃에게 부탁하고는 길을 떠났다. 길을 잘못 들어서서 헤매기를 여러 번. 산 속의 밤이 무서워도 어미를 잃는 것 보다 크지 않았다. 사흘 밤낮을 헤매어 의원 집에 당도하였다. 막 산꼭대기에 아침 해가 올라와서 햇살이 퍼질 때다. 사흘 굶은 홍랑의 행색이야 말도 못하지... 땟국물이 쪼르르 흐르는 얼굴을 해 가지고는 삐쩍 마른 조그만 계집아이 하나가 대문에 들어섰다. 그런 아이가 주춤거리고 서 있다. 돈 한 푼 없이 와서는 차마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 지 다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린 것이었다. 최의원은 대청에 앉아 있다가 아이를 보았다. 행색은 형편없었으나 얼굴에 귀티가 나고 또랑또랑한 눈동자가 맑은 아이였다. 불러서 말을 시켰다. 더듬더듬 그간의 사정을 말하는 아이 말을 듣고는 이 어린 아이가 길도 모르는 험한 산을 넘어 밤길을 도와 찾아 왔다는 정성이 갸륵했다. 씻기고 밥을 먹였다. 최의원은 보나마나 뻔한 가난한 살림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참 잘난 의원이었다. 나귀 불러 홍랑을 태우고는 왕진 가방 하나 챙겨서 길을 나섰다. 홍랑의 집에 도착한 때는 해가 한참을 기울고 나서였다. 홍랑은 기쁜 마음으로 ‘엄마!’ 하고 소리치며 방으로 달렸다. 대답이 없었다. 그,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어미는 불귀의 객이 되었던 것이다. 이웃 얘기로는 아까 저녁나절만 해도 의식이 있어 홍랑을 찾았다는 거다. 홍랑이 돌아오는 그새를 못 참고 어미는 저 세상으로 가 버린 것이었다. 최의원은 돌아가고 홍랑은 이웃의 도움으로 어미를 거적에 싸서 묻었다. 울어서 해결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젠 천애 고아 홍랑이다. 당장 며칠은 그동안 어미가 다니던 집으로 허드렛일을 해주면서 밥을 얻어먹으며 어미 무덤을 지켰다. 앞날은 참으로 막막하였다. 최의원은 돌아가서도 며칠을 그 효심 가득하던 아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도대체 그 첩첩 산골에 사는 아이가 어찌 그리 눈매가 맑았으며 또 씻겨 놓으니 인물은 귀티가 나던지... 성정 또한 차분하여 시켜서 한 말이지만 또박또박 의사표현을 정확히 해 내던 것을 기억했다. 들으니 천애 고아라 했지... 최의원은 다시 길을 나섰다. 마을에서는 대환영이었다. 마을에서는 다 같이 가난한 살림에 입 하나 더 들여 놓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집은 없었다. 의원 나리같이 공부도 많이 하고 세상 물정을 아는 이가 어린 홍랑을 맡아 준다면야 그 以上 가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했다. 홍랑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굶어 죽지 않으려 애쓰는 일 밖에는 없었던 처지였으니까. |
- 양녀 - 홍랑은 최의원의 양녀가 되었다. 자식이 귀했던 최의원은 홍랑을 친 딸처럼 키웠다. 시문을 가르쳐 주고, 여자가 알아야 할 육예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가르쳤다. 머리가 좋은 홍랑은 공부에 재미를 붙였고 배우는 족족 잘도 받아 들였다. 자랄수록 인물은 빼어나게 아름다워서 먼 동네까지 학문 좋고 인물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홍랑은 행복하게 자랐다. 다만 마음 속에 서린 고독을 어쩌지는 못했다. 어미를 그리는 정한은 홍랑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얼굴을 아는 혈육은 이 세상에 어미 밖에는 없었다. 처마로 날아드는 제비가 새끼를 쳐 나가도 그게 가슴 미어지는 아픔으로 느끼고, 병아리 종종 어미닭을 쫓는 것만 보아도 남몰래 한숨 짓는 버릇이 들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홍랑의 가슴을 열어 그 그림자를 지워줄 사람은 없었다. 몇 년의 행복한 시절을 뒤로 하고 홍랑은 갑자기 집을 나섰다. 어미가 너무나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최의원에게도 그리 말했다. 고향을 찾아 어미 앞에서 통곡을 하였다. 서럽고 서럽고 또 서러워 며칠을 울었다. 이 세상에서 제 몸 하나 건사할 곳이 없다는 일이 이리 서러울 수가 없었다. 갈 곳도 머물 곳도 없었다. 최의원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그도 내키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에 정식으로 최의원 집에 인사를 다녀왔다. 어찌 되던 고향에서 살겠노라고 했다. 극구 말리는 의원집 식구들.. 그러나 홍랑은 눈물로 그 곳을 떠났다. |
- 해어화 - 기생을 해어화라 한다. 꽃의 말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꽃이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스스로 꽃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생은 꽃이다. 남자들을 위한 꽃. 홍랑은 스스로 관기로 기적에 이름을 올렸다. 홍랑의 선택은 그 자신에게는 새로운 속박의 굴레이며 또한 새로운 자유를 의미했다. 관기란 관청에 속한 기생이다. 기생이 기적에 이름을 한 번 올리면 죽을 때까지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다. 높은 벼슬의 영감이나 부자집 후취로 들어가 빠져 나가는 길이 있기는 하다. 또는 ‘대비정속 ’이라 하여 나이가 차면 다른 기생을 대신 들여 놓고 빠져 나오는 길도 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한 번 기생이면 영원한 기생이다. 조선에서의 관기란 부임지로 가는 관리들의 생활 보좌역이었다. 지방의 먼 곳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갈 수 없었다. 말하자면 기생들은 현지처 역할도 하고 청소와 빨래 등 모든 뒤치다꺼리를 도맡기도 하였다. 조선 실록에 보면 세종 18년에 "군사들이 가정을 멀리 떠나서 추위와 더위를 두 번 씩이나 지나므로 일상의 사소한 일도 어려울 것이니, 기녀를 두는 게 합당하다". 고 했다. 당시 변방의 부대에는 관기가 배치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기생들이 제일 많은 곳은 군사기지, 두 번 째가 관아였다. 홍랑이 최의원 집에 그대로 있는다 해도 나이 차서 시집을 가는 일 밖에는 다른 일이 없다. 조선시대 여자는 나이차서 시집가 아이 낳고 사는 게 최고의 미덕이었다. 그렇지 못하면 팔자가 사납다고 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하면 그게 더 팔자가 사나운 거다. 남존여비 사상이 극도로 활개를 치던 때이니 ‘여자와 북어는 수시로 두드려야 한다.’는 속담대로 집집마다 계집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을 때였다. 홍랑처럼 의지가지도 없는 여인은 책잡히기 딱 좋은 八字였다. 시집가는 날이 바로 지옥문 들어서는 일이었다. 홍랑에겐 혈혈단신 홀로 살아가는 자신에게는 자유인으로의 선택이 최선이었다. 기적에 오르는 속박이 있으나 더 많은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홍랑을 아는 모든 이들이 아깝다고 했다. 경성은 도호부가 있는 곳이다. 경성 도호부는 이 지방 전체를 다스리는 곳이어서 꽤나 큰 고을이다. 홍랑은 경성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해졌다. 홍랑의 미모, 홍랑의 시문, 홍랑의 예의범절........ 홍랑은 경성 최고의 예기가 되었다. 입적 후에나 안돌아가는 머리로 억지로 배운 다른 기생들과는 달리 홍랑은 스스로 익히며 몸에 밴 것들이어서 온몸에 저절로 녹아들어간 시문과 예능으로 뭇남자들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한다하는 한량들과 대가집 자제들은 돈 꾸러미를 싸들고 홍랑을 찾았다. 조선에서는 참으로 묘한 신분이 기생이었다. 명목상으로는 팔천-(여덟 가지의 가장 낮은 천민: 사노비, 광대, 무당, 백정, 승려, 기생, 상여꾼, 공장)에 들어가는 가장 낮은 신분의 천민이었다. 그러나 신분만 천민이었지 어느 양반댁 규수 못지않은 호사를 누릴 수도 있었다. 당장 경국대전에서는 기생만큼은 양반집에서도 함부로 못 입는 금은수식이나 능라의복을 걸칠 수 있도록 했다. 노리개와 장신구들은 첨단의 패션을 걸었다. 업무는 술자리 시중이었으나 그 대상은 고관대작이나 상류층인사들이었다. 그래서 글과 춤과 노래와 악기와 서화에 능해야 했고 학식 또한 뛰어나야 했다. 당자의 노력에 따라 능력이 뛰어나면 대우가 달라졌다. ‘명기’라는 칭호가 붙으면 고고한 절개를 지키는 이도 있었고 뭇남성들을 쥐고 흔드는 수완을 발휘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돈을 싸들고 찾아오더라도 풍류도 모르고 시문을 모르는 멋대가리 없는 사내들은 상대도 안 해주고 돌려보내니 남자들 애간장을 태우는 일도 잦았다. 그러니 신분은 천민이었으나, 사는 방법은 일류의 양반댁이 부럽지 않았고 나라에서도 그걸 인정해 주었다. 홍랑으로서는 혈혈단신이었던 자신의 입장으로서는 그 시대 최고의 자유인이 되기를 선택한 셈이었다. 기생에게도 등급이 있었다. 1패, 2패, 3패가 있는데 1패란 궁중에 나아가 여악(여자 악공)으로 가무를 하는 일급기생이다. 2패는 관가나 재상집에 출입하는 기생이다. 이 중 겉으로는 기생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은근짜’라고 하여 내놓고 몸을 팔지는 않지만 은밀히 매음도 하는 기생도 있었다. 3패는 술좌석에서 품위있는 기생의 가무하는 재주가 없으니 잡가나 부르며 내놓고 매음하는 유녀(노는계집)다. 지방 기생은 2패나 3패에 속했다. |
- 고죽 - 조선 선조 때 팔문장이 있었다. 당시 조선 최고의 문장가들이었다. 조선실록에 보면 崔慶昌(최경창), 宋翼畢(송익필), 李山海(이산해), 白光弘(백광홍), 崔岦(최립), 李純仁(이순인), 尹卓然(윤탁연), 河應臨(하응림)이 그들이다. 또는 唐詩(당시)를 짓는 게 이백과 두보 등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하여 삼당파 시인이라 불리운 사람들이 있었다. 삼당시인은 고죽 최경창, 손곡 이달, 백광훈(앞의 팔문장의 백광홍은 백광훈의 兄이다.)으로 또 다른 일파를 이루었다. 최경창의 시는 淸淑(청숙)하다 했고 이달의 시는 孤絶(고절)한 특징이 있다하였으며 백광훈의 시는 麗雅(여아)하다고 했단다. 최경창은 이달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이달이 누군가? 바로 허균과 허란설헌의 스승이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써서 사회시스템을 과감히 개혁하려고 했던 이유는 스승 이달의 영향이었다. 뛰어난 문장가이며 천재적인 머리를 지닌 이달은 그 어미가 천민이었다. 이달은 서출 출신이어서 아무데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벼슬도 못하고 아예 과거도 볼 수 없었던 조선이란 시스템은 숨 막히는 곳이었다. 그런 이달과 막역지우였던 최경창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여기 이 사람, 최경창(1539∼1583)은 전라도 영암에서 출생하였으며, 자는 가운, 호는 고죽이다. 태어난 때는 명종조였다. 어려서부터 천재라 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박순과 양응정에게서 글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고, 퉁소를 잘 불었다. 1555년 17세 때 을묘왜란(임진왜란 전)이 일어나 왜구가 영암을 포위하고 청년들을 붙잡아 가자, 어린 고죽과 마을 사람들은 배를 타고 달아났다. 그러나 이내 왜구가 배를 타고 쫓아 왔다. 고죽은 옥퉁소를 꺼내어 '사향가'를 불렀다. 마침 달 밝은 밤이라 그 소리를 들은 왜구들은 모두 고향 생각에 젖게 되었고, 아울러 신선이 하강한 것으로 착각하였다. 넋을 잃고 듣느라고 포위망이 허술해지는 틈을 타 재빨리 달아나 살아날 수 있었다 한다. 문장에도 뛰어나 이이(李栗谷), 정철, 송익필 등과 함께 삼청동에서 어울려 몇 날 낮과 밤을 지새우며 시문으로 문답하였다 하니 그의 재주는 하늘이 내린 듯하다고 하였다. 고죽은 1568년(선조1) 우리 나이로 서른 나이에야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치다가, 그 5년 후인 35세 되던 해인 1573년(선조6)에 함경도의 북평사로 경성도호부에 부임하면서 홍랑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북평사란 조선 때 국경지방이었던 함경도에만 있었던 북병영에 딸린 정육품 문관으로 북병사를 보좌하는 참모벼슬이었다. 즉 병사가 사령관이면 평사는 부사령관 정도 되는 벼슬이었다. |
- 해후 - 하루는 고죽이 취우정에 나갔다. 경성도호부 부사가 주재하는 술자리여서 여러 사람이 어울렸다. 홍랑을 비롯한 여러 기생들이 술시중을 들고 있었다. 취흥이 도도해져 갔다. 정자에서는 술판이 질펀하게 벌어 졌고 남녀들의 웃음소리가 밖으로 퍼져 나왔다. 부사는 새로 취임한 최평사(崔慶昌)가 나라의 팔문장이요. 삼당시인이란 소문을 익히 들었던 터라 그의 입으로 나오는 시가를 듣고 싶었다. 조선 한량이라면 첫째 조건이 시문이다. 막힘없이 주욱 흘러나오는 시가 한 가락이면 아무리 빼어난 기생이며 열녀라 해도 오줌을 지리던 시절이다. 알아들어야만 황홀한 게 아니다. 못 알아들어도 좋았다. 그런데 도대체 최평사는 조용하기만 할 뿐이었다. 기생들도 온통 그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흥을 돋구려 기생 하나가 춘면곡을 뽑았다. -- 春眠曲-- 두 손목 마주 잡고 평생을 언약함이 너는 죽어 꽃이 되고 나는 죽어 나비되어 청춘이 진하도록 떠나 살지 말자더니 인간의 일이 하고 조물조차 새암하여 신정미흡하여 애닯을 손 이별이라 청강에 떴는 원앙 울어예고 떠나는 지 광풍에 놀란 봉접 가다가 돌치는 듯 석양은 재를 넘고 정마는 자주 울 제 나삼을 부여잡고 암연히 여윈 후에 슬픈 노래 긴 한숨을 벗을 삼아 돌아오니 이제 님이어 생각하니 원수로다 간장이 다 썩으니 목숨인들 보전하랴 인간의 병이 되고 만사에 무심하여 서창을 궂이 닫고 섬거이 누었으니 화용월태는 안중에 암암하고 분벽창은 침변에 의의하여 화총에 노적하니 별루를 뿌리는 듯 유막에 연총하니 이한을 먹음은 듯 ----(이하 생략)---- 기생들이 돌아가며 한 수씩 읊어서 취흥을 돋우어도 최평사는 그저 잠잠... 한 심술궂은 벼슬아치가 홍랑의 어깨를 잡아끌어 당겼다. 홍랑은 조심스럽게 그 손을 뿌리치더니 한 수 하겠다고 했다. 다들 홍랑에게 시선이 모아졌다. 최평사는 그윽히 눈을 감고 듣고 있었다. 含情還不語 함정환불어 如夢復如痴 여몽복여치 綠綺江南曲 녹기강남곡 無人問所思 무인문소사 하소연할 길 바이 없어 말 못하는 이 마음 이것이 진정 꿈일까 아니면 어리석음일까. 대답없는 <江南曲>을 비파에 실어 보나 내 심정 묻는 이는 한 사람도 없구려. 처음으로 최평사의 가늘고 기인 숨소리가 들렸다. ‘명문이로고.’ 그가 조선 최고의 문장이 아닌가? 이런 지방 구석에선 그의 찬사, 한마디만 듣는다 해도 다시 없는 영광이었고 대단한 기회였다. 그의 입에서 떨어진 한 마디에 누구나 ‘과연 경성의 홍랑이로구나.’ 감탄해 마지않았다. 홍랑은 자리를 옮겨 최평사의 옆으로 갔다. ‘네 속을 다 알겠다.’ 긴 말이 필요 없었다. ‘자네 얘기야 익히 소문을 들어 다 아는 바이지만 이리도 능할 줄은 몰랐네.’ 오늘날 말에도 있지 않은가?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단다. 홍랑은 그냥 그의 여자가 되었다. 그냥 그렇게 되었어도 아무도 뭐라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조선 최고의 문장과 경성 최고의 기생이 만나는 걸 누가 뭐라 할 건가? 명기 황진이가 그랬고, 명기 일타홍이 그랬고, 명기 매창이 그러하지 않았는가? 명기는 제 눈에 차야 님을 맞는다. 춘향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었지 않았는가? 최경창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의 문장은 그런 그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말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말 한마디를 해도 홍랑의 폐부를 적셨다. 홍랑의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느끼고, 다 받아 주었다. 홍랑은 어미를 잃고 난 후 처음으로 맛보는 혈육같은 정을 느껴졌다. 텅 빈 가슴 한 켠에 어두운 그림자만 남았던 그림을 차츰 지워나갈 수 있었다. 홍랑에게 고죽은 아버지이자 그녀만의 남자였다. 일설에는 그들 사이에 아이가 하나 있었다 하는데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고죽이 서울로 돌아오며 입적시켰을 거라는 얘기도 있고 어려서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 |
- 이별 - 2년의 세월은 그리 흘렀다. 꿈보다 더 달콤한 세월이었다. 관직이란 그런 것. 2년의 임기가 끝나면 내직으로 순환 근무를 해야 한다. 경성 땅에서는 아직 이른 봄. 고죽이 가야 한단다. 말 없는 고죽의 가슴이야 어찌 타들어가도 상관없다. 남자는 참을 만하다. 서울 가면 자식도 있고 아내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홍랑의 속은 말도 못한다. 눈물로 며칠을 새우며 이별을 아쉬워해도 나랏님의 부름에는 거역할 수는 없는 일.. ‘날 잊지 않으실 거지요?’ 다짐에 다짐을 받아도 맘 놓이지 않는 말 뿐인 것을........ 함경도는 변경지방이다. 함경도는 원래 고려 때까지는 영흥과 길주의 이름을 따 영길도라 불렀다. 태종 때 이성계가 머물던 함주를 함흥부로 승격, 함흥과 길주를 따서 함길도라 하였다. 세조 때는 이시애의 난으로 함흥부가 함흥군으로 강등되는 바람에 영흥부로 본영을 옮겨, 영흥부와 안변도호부를 따서 영안도가 되었고, 다시 중종 때 함흥부와 경성도호부의 이름을 따서 함경도가 되었다. 내란도 외침도 많은 이곳은 조정에서는 첨예한 관리대상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함경도 지방에만 일부러 북병사와 북평사란 관직을 만들어 병력을 관리하게 하였다. 제일 큰 문제는 치안이 불안하여 인구 감소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양계(평안도, 함경도)지방 사람들은 그 곳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법을 만들었다. 그걸 ‘양계의 금’이라 했다. 일개 기생이 그 법을 어겼다가는 아무리 빽이 좋아도 중한 벌을 받아야 했다. 떠나는 날 경성 땅에서 쌍성(영흥) 땅이 어디인가? 홍랑은 함경도 최북단 경성에서 최남단 쌍성(영흥)땅까지 따라왔다. 1,000리(400Km)길이다. 더 밑으로는 그 놈의 나라 법이 무서워 따라 올 수가 없었다. 쌍성(영흥) 넘어 강원도로 가는 고갯길. 함관령이다. 이제 정녕 이별의 시간이었다. 홍랑은 문득 함관령 고개 길가의 버들가지 하나를 꺾어 고죽에게 주며 이리 읊었다. 묏버들 가려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 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에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옛말이라 어렵다면 현대말로 한 번 풀어 보자.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조선 최고의 연정가다. 사람의 애간장을 다 녹이지 않는가? 그냥 듣고 나서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다. 교과서에도 나와 있다. 현대의 어떤 시가도 이런 정염의 속뜻을 나타낼 말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게 뭔가? 그냥 불이다. 불씨 꺼뜨리지 말고 두고두고 잘 살려 놓으라는 얘기다. 언제든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도 전혀 속되지 않고 차원 높은 애정이 흐르듯 그대로 전달된다. 조선이란 극심한 통제의 시대에 은유로 나타낼 수 있는 최고의 사랑시다. 조선후기 기록인 ‘성호사설’에 보면, 남녀 간에 길을 떠날 때 동구 밖에서 버들가지를 꺾어 주는 풍습이 있다고 했다. 이걸 ‘折柳枝(절류지)’라 한단다. 절류지 하나에 사랑을 싣고, 그 불씨를 꺼드리지 말아달라고 절절한 시가 한 마디 덧붙이는 이런 풍류는 이즘 세상에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순수 우리말 시였던 홍랑의 이 시를 고죽은 ‘고죽유고’에 한시로 번역하여 옮겨놓았다. 이른 바 ‘번방곡’이다. 飜方曲(번방곡) 折楊柳寄與千里人 절양기여천리인 爲我試向庭前種 위아시향정전종 須知一夜新生葉 수지일야신생엽 憔悴愁眉是妾身 초췌수미시첩신 버들가지 꺾어 천리 머나먼 임에게 보내오니 뜰 앞에 고이 심어두고 이 내인가 여기소서. 모름지기 하룻밤 지나면 새잎 돋아나리니 이 내의 초췌하게 시름 쌓인 아미인 줄 아옵소서. 고죽이 받았다. 相看泳泳贈幽蘭 상간영영증유란 此去天涯幾日還 차거천애기일환 莫唱咸關舊時曲 막창함관구시곡 至今雲雨暗靑山 지금운우암청산 맥맥히 서로 보며 건넨 그윽한 난초 이제 한 번 멀리 가면 언제 오려나 함관에선 옛노래랑은 부르지를 마오. 지금까지 운우가 청산에 어둑하구려. 고죽의 구구절절 이별의 슬픔은 홍랑에 못지않았다. 고죽 최경창이 서른일곱, 아마도 홍랑은 2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그때가 1575년, 임진왜란(1592年)이 나기 전이다. 변방인 함경도 첩첩산중 끝자락에서 익어간 사랑 얘기의 제일막이다. |
- 병 - 서울로 돌아 온 고죽은 이 말 많은 조선 조정에서 부침을 거듭했다. 고죽이란 호는 중국 고죽국의 굴원, 백이, 숙제의 절의를 본받고자 해서 지은 것이다. 정철, 이이 등과 함께 서인 계열이었던 고죽은 그 말 많고 걸핏하면 사화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피로써 당쟁을 해결하던 시대에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구봉 송익필은 고죽이 ‘은벽지행이 아니더라도 명리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고 했다. 최경창은 선조임금의 부름을 받아 명나라에 사신으로도 다녀오게 되고 전라도 영광군수에 제수된다. 삼당시인의 한 사람인 손곡 이달과는 자별한 사이다. 한 번은 이달이 고죽의 임소를 지나는데 정을 주었던 기생이 상인이 파는 자운금을 보고 사 달라고 요구하였다. 때마침 이달은 가진 돈이 없었으므로 최경창에게 [증 최경창]이란 시를 써서 보냈다. 湖商賣錦江南市 호상매금강남시 朝日照之生紫煙 조일조지생자연 住人正欲作裙帶 주인정욕작군대 手探粧? 無直錢 수탐장? 무직전 호남의 장사꾼이 강남시에서 비단을 파는데 아침 햇살이 비치어 자줏빛 연기가 나는구려. 정을 주었던 여인이 치맛감을 보채는데 화장그릇 뒤져 보나 내 줄 돈이 한 푼도 없구려. 고죽이 이 시를 보고 회답했다. "시의 가치로 말하자면 어찌 금액으로만 헤아리겠소? 우리 고을이 본시 작으니 넉넉하지는 못하오." 하고 쌀 한 섬을 보내니, 이달이 그 기생에게 자운금(비단) 한 필을 사서 주었다고 한다. 3년이 흘렀다. 다시 내직으로 올라온 고죽은 어쩐 일인지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도대체 낫지 않는 병... 그때는 그런 병이 많았다. 그 소문이 어찌 천리만리 땅 끝에 있는 경성 땅까지 전달되었는지 홍랑의 귀에 들어갔다. ‘양계의 금’(평안도 함경도 사람은 도경계를 넘어오지 말라는 법)이 문제던가? 세상 태어나 단 하나 뿐인 정인이 죽어 간다질 않는가? 죽고 나면 무슨 소용? 겁나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함경도 끝자락에서 서울까지 천오백리(600Km)가 넘는 길이다. 어렸을 때 어미 아플 때 의원 찾아 산길을 사흘 밤낮으로 걸어 보았다. 그까짓 걷는 거.... 홍랑은 남장을 하고 칠일 밤낮으로 잠 안자고 걸었다. 몰골이야 말로 옮길 수도 없었다. 그 덕분에 미색이 감추어져서 걸리적거림 없이 한 달음에 달려 올 수 있기도 했다. 서울에 와 물어물어 고죽의 집으로 들어섰다. 아픈 게 언제냐? 싶게 누워있던 고죽은 벌떡 일어났다. 큰 마누라 있는 집에 시앗이 당당하게 들어와 제 남편 간호한다고 붙어 있으면 눈에서 불이 난다. 그래도 고죽이 한참을 병마에 시달렸던 터라 제가 별 수 있겠나 싶고, 집안 체신도 생각하여 그쯤 용인해 주었을 게다. 병간호는 극진했다. 홍랑의 간호 덕분이었는지 고죽의 병은 금세 호전되었다. 고죽과 홍랑은 단 며칠이라도 꿈같은 세월을 보냈다. 고죽은 병이 다 나아 조정에도 나갔다. 문제는 그 놈의 당쟁이었다. 서인이 눈에 가시였던 동인들이 시비를 걸었다. 고죽은 별로 중요인물도 아니었지만 서인인 게 문제였다. ‘양계의 금’을 어긴 여자를 집으로 맞이해서 같이 산다하니 그게 제일의 문제고... 더구나 관기라 하니, 관기란 관의 부속물이나 마찬가지여서 관기를 개인이 소유한다는 일은 공금을 횡령하는 거나 마찬가지 중죄로서 그게 또 문제이고....... 명종의 인순왕비의 상이 끝난 지 1년도 안된 국상기간에 기생을 첩으로 만들어 끼고 노는 꼴은 또 뭔가고 조정을 들 쑤셔댔다. |
- 생이별 - 최경창은 연연하지 않았다. 서인의 중심에 있지 않았지만 서인 선배들에게 누를 기치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정말로 홍랑만 있으면 세상을 다 버려도 좋았다. 파직을 시키자 ‘얼씨구 고맙습니다.’하고 물러났다. 그래도 홍랑은 경성으로 복귀를 시켜야 했다. 홍랑이 떠나던 날 봉성(지금의 파주 땅)까지 배웅을 나갔다. 그 놈의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한 걸음 옮기고 뒤 돌아 보며 눈물 한 방울 찍어내고, 또 한걸음 옮긴 후 뒤돌아보고 손수건 한번 훔치며 홍랑은 그리 떠나갔다. 고죽이 시 한수를 읊었다. 玉頰隻啼出鳳城 옥협척제출봉성 曉鶯千澱爲離情 효앵천전위이정 羅衫寶馬河關外 나삼보마하관외 草色超超送獨行 초색초초송독행 고운 뺨에 눈물지며 봉성을 나올 적에 새벽에 우짖는 꾀꼬리소리 더욱 서러워. 말 위에 비단 적삼을 강 건너에 두고서 풀잎은 아득한데 나 홀로 떠나야만 하는가? 그래도 산다. 사람은 그래도 산다. 검게 그을린 쓰린 멍을 가슴에 가득 안고서도 산다. 사람에 따라서는 멍울이 점점 흐려지는 이도 있으나 웬 돌연변이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멍울의 색깔이 점점 더 짙어지는 이들도 있다. 홍랑이 그랬다. 아무리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잊지를 못하겠다. 고죽은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지방의 한직으로만 떠돌았다. 그 자신에게는 차라리 그게 나았다. 어디에도 정을 못 붙였다.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지바고의 심정이 그랬을까? 어느 때 경성을 지나면서 객관에서 잠시 홍랑을 만났어도 그 정을 다 하지 못하여 안타까움만 남았을 뿐... 이승에서의 인연은 그게 끝이었다. |
- 시묘 - 고죽은 1583년(임진왜란이 나기 9년 전) 방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어서 상경 도중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말았다. 마침 경성 부근이어서 홍랑의 귀에도 들어갔다. 홍랑은 만사 제쳐두고 고죽의 시신을 따라 갔다. ‘양계의 금’이고 뭐고 모르겠다. 고죽은 선영이 있는 파주에 묻혔다. 그날부터 고죽의 묘에는 누군지도 모르는 부랑자가 한 사람 살았다. 홍랑이었다. 얼굴에는 숯검정을 칠하고 다 떨어진 옷으로 남장을 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은 홍랑은 칼로 제 얼굴을 그어 여러 군데 상처를 내었다. 흉한 몰골이 되어야 어느 누구도 알아볼 수도 없고 남정네들이 접근도 안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강 하구인 그 곳에는 겨울에는 살을 에는 찬바람이 불어왔다. 작은 몸을 움막 하나에 의지하기엔 너무나 험한 세월이었다. 그렇게 시묘살이를 했다. 고죽의 가족들과 일가들은 다 알았으나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홍랑의 일편단심에 감복했기 때문이었다. 홍랑은 3년 시묘살이를 지나고도 갈 곳이 없었다. 그냥 눌러 있었다. 그곳은 살아서는 맺어지지 못한 정인의 몸이 누워 있는 곳이다. 홍랑에게는 세상 어느 곳 보다 따뜻한 곳이었다. |
- 시인 홍랑 - 10년이 지나 왜란(임진왜란 1592년~1598년)이 터졌다. 조선 천지에 쓸 만한 집은 다 불타고, 왜군들은 사람이 보이는 족족 죽이거나 끌고 갔다. 피폐될 대로 피폐된 국토, 아무 곳도 안전하지 못했다. 파주에 더 머무를 수는 없었다.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남은 생을 정인과 함께 하고팠던 홍랑의 바램은 이어지질 못했다. 7년 전쟁 동안 홍랑이 어디서 무얼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함경도 고향에 가 있었다는 얘기가 있지만 확인은 불가능한 얘기다. 전쟁이 끝나고 어느 해 고죽의 무덤 옆에 사람이 하나 죽어 있었다. 아들이 보고 알았다. 홍랑이었다. 죽은 사람이 귀중하게 품고 있던 보자기를 풀었다. 거기에는 고죽이 생전에 쓴 시가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전부 200수가 넘었다. 해주 최씨 가문은 인심이 넉넉하였다. 해주 최씨 문중에서는 홍랑의 장사를 지내고 고죽이 누운 자리 앞에 무덤을 마련해 주었다. 지금도 시제 때면 ‘할머니’란 호칭으로 제수를 받고 있다고 한다. 해주 최씨의 가문은 그때나 이제나 후손들이 이 아름다운 사랑을 불륜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안 그러면 본부인인 할머니의 시앗을 어찌 할아버지 묘 바로 앞에 모실 수 있겠는가? 고죽(최경창)의 원고향인 전라도 영암 땅에서도 고죽과 홍랑의 묘를 이장하여 모시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단다. 홍랑의 사랑은 이 땅에 400年을 넘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다.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청석초등학교 북편 산자락에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는 고죽 최경창 부부의 묘소와 그 아래로 홍랑의 무덤이 있다. 1969년 6월에 홍랑의 묘비를 세우며 비제를 <詩人洪娘之墓>라 했다. 홍랑의 묘소 아래에는 1981년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가 세운 홍랑가 비가 서있다 거기에는 번방가 - 묏버들 가려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에...-가 새겨져 있다. 비록 홍랑의 몸은 따로 묻히었으나 고죽의 혼이 그 아래 홍랑의 댁으로 와 밤낮으로 머물 것이다. 몰라! 죽어서까지 본부인의 질투가 심하다면 자신에게 오는 시간까지 조절하여 낭군을 맞이하는 여유를 부릴 지... 그의 손자가 숙종대에 이르러 [고죽유고]를 출판하였다. 1책 104장. 한시 250수. 1683년(숙종9) 손자 석영이 편집하여 자기의 《역촌유고》를 부록으로 붙여 간행하였다. 책머리에 송시렬이 1683년에 쓴 서가 있고, 책 끝에는 판서 이민서의 발문과 남구만의 서가 실려 있다. 고죽의 명문장들은 정녕 홍랑의 사랑의 집념이 아니었으면 후세에 남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서문에서 우암 송시열은 고죽의 시뿐 아니라 사람됨까지도 크게 평가하면서 율곡 이이의 표현을 인용하고 있다. "율곡 선생이 말하기를 고죽은 그 성품이 깨끗하고 하는 일마다 선이 되는 사람이니 그 청고한 절조는 사람마다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 송시열 자신은 "사람 때문에 시가 가려진다더니 오히려 시 때문에 사람이 가려졌구나"라는 말로 고죽의 문장과 성품을 칭송하였다. 또 조선 중기의 학자 남학명은 그의 문집 회은집에 홍랑의 고죽에 대한 사랑이 오늘날 이 시들을 후대에 전할 수 있었다는 얘기를 실었다. [옮긴 글]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