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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자와 교만한 자와 함께하는 것
잠 16:16-24
16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
17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
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19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21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명철하다 일컬음을 받고 입이 선한 자는 남의 학식을 더하게 하느니라
22 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것이 징계가 되느니라
23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의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의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
24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잠 16:16-24 / 슬기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더 좋은가!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애써 재산을 모으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 17) 못된 일 꾸미는 자들과는 벗하지 않는 것이 올곧게 살아가는 이의 길이니, 오직 그 길만을 줄기차게 걸어가야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리라. 18) 교만은 파멸의 앞잡이이고 거만한 마음은 망하는 지름길이다. 19) 가난한 이들과 마음을 나누며 자신을 낮추는 것이 거만한 자들과 함께 약탈물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 20)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 하는 일마다 날로날로 번창하리라. 여호와를 굳건히 믿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 21) 슬기로운 사람을 똑똑한 사람이라고 일컫고, 말한마디라도 부드럽게 하여야 그 사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법이다. 22) 슬기로운 사람에게는 지혜가 생명의 근원이고,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우매가 징벌의 근원이다. 23) 슬기로운 사람은 말 한마디에도 지혜가 담겨 있어 듣는 사람에게 세상 이치를 하나라도 더 깨닫게 한다. 24) 따뜻한 말 한마디 꿀송이 같아, 듣는 이 마음속 훈훈해지고 듣는 이 뼈 마디마디에 힘이 솟는다.
왜 지혜를 얻어야 합니까? 왜 명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본문은 지혜와 명철의 유익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나은가?(16-20) 하나님의 백성은 선택의 기준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기준이고 목표인지를 분명하게 설정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금보다 지혜를 그리고 은보다 명철을 얻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피상적으로 보기에는 금과 은이 훨씬 가치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지혜와 명철은 금과 은 보다 훨씬 가치 있습니다. 지혜(호크마)와 명철(삐나)은 모두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셉도 지혜와 명철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도 지혜와 명철이 있었습니다. 지혜와 명철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먼저 17절과 연관됩니다. 물질의 유혹을 물리치고 악에서 떠나기 위함입니다. 다음으로 18절을 보면 교만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내면에 담고 묵상하는 사람은 거만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면 말씀에 주의하는 자 즉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자는 금이나 은과 비교할 수 없는 좋은 것을 얻게 됩니다.
지혜와 명철의 유익(21-24) 명철(분별력)은 마음속에 있는 지혜(호크마의 원형인 하캄)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옵니다. 본문은 명철의 유익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입이 선하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이 말로 표현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학식을 얻는 유익이 있습니다. 또한 명철한 사람은 ‘생명의 샘’이 됩니다. 죽을 자리에서 죽지 않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요셉과 다니엘이 대표적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특징은 입과 입술에 있습니다. 입을 ‘슬기롭게 한다’는 것은 말을 ‘조심스럽게 한다’, ‘신중하게 한다’입니다. 즉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폄하하거나 파괴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24절을 보면, 선한 말을 하게 됩니다. 선한 말은 몸(뼈)과 마음을 치유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적용: 신앙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신의 입과 입술에서 선한 말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교만은 언제나 자기만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겸손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공손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학에서의 교만은 다른 사람의 탁월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겸손은 내가 모든 분야에서 뛰어나지 않고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진짜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게 아니라 예수를 높이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분,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분, 성육신 자체는 예수가 덧입으신 겸손의 옷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와 종의 형체는 하나님의 본질이요 사람의 본질입니다.
< 설 교 >
마음을 낮추고 말씀에 주의하자
잠 16:16-19 / 김근중 목사
오늘은 우리 온교회가 지키는 성서주일입니다, 여러분도 성서주일을 맞히여 성경을 많아 읽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또한 주님의 음성을 들을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음성에 귀을 기울여볼줄 아는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느 영성학자들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방해되는 두 가지 환경이 있다고 지적을 해줍니다. 첫째는 너무 바쁘다는 것입니다. 너무 바쁘고 서두르는 이와 같은 환경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너무 산만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 우리의 감정, 우리의 삶의 환경이 너무 산만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다시 말하면, 안정성이 없고 집중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안정감이 있는 것은 아주 귀한 은혜입니다. 집중력을 가지는 것도 대단히 좋은 자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안정성을 잃어버리고 집중력을 잃어버리고 모두가 바쁘고 산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우리의 갈등이 깊어져 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대구에서 고속철도를 타고 서울을 가는데, 그날은 아주 피곤한 날이었습니다. 대구가 광역도시 이다 보니까 터미널에 그넓은 터미널 대합실도 아주 좁게 보여지는데 어느 시골아저씨 한 분이 귀가 좀 안 들리는지 대합실 TV의 볼륨을 자꾸 높여가지고 너무 시끄러웠습니다. 그 대합실이 왜 비좁은지 보니까 절반 이상을 식당에 임대를 내주고 큰 매점도 들어서 있어서 아주 좁았습니다. 식당이라는 곳이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사람들이 식사하면서 술도 먹고 시끄럽습니다. 그 대합실에 앉아서 차를 기다리면서 쉬려고 하는데 소란해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철도를 탔는데 그날따라 유독 철도안에 핸드폰을 가지고 전화 거는 사람이 몇 명 있었습니다. 승객이 20명이면 핸드폰이 20개입니다. 저녁차니까 좀 쉬면서 가야 되는데 핸드폰 벨이 심심하면 울립니다. 벨소리는 그나마 괜찮습니다. 전화 받는 사람의 말소리는 아주 듣기 힘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열차나 버스여행을 하실 때 핸드폰 관리를 잘 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특히 전화를 걸 때 상대방이 들어도 거부반응이 안 일어나도록 조용하고 세련된 목소리로 전화를 하세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전화합니다. “무슨 소리! 월말까지 갚아야 돼!” 자기는 의식도 안 하고 고함을 지릅니다. 거래 관계로 이야기 하다가 화가 나니까 그런 식으로 막 합니다. 아무튼 삼천리 반도가 조용한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우리가 귀담아 들을만한 구절이 나옵니다. 19-20절에 보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마음을 낮추는 자와 함께 하는 것이 교만한 자와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마음을 낮추는 이것과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이것이 다 연관성을 가집니다. 마음을 낮추어야 하나님의 음성이 바로 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마음이 교만한 자에게 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을 낮추어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 말씀에 주의한다는 말은 말씀을 행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마음은 낮추고 행함은 높여야 됩니다. 우리는 마음을 높이면 안 됩니다. 마음을 낮추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함은 숨어서 하면 안 됩니다. 순종은 드러나게 하십시오. 순종은 크게 하십시오. 마음은 될 수 있는 대로 하향 지향적이 되어야 됩니다. 겸손 지향적으로 가야 됩니다. 우리는 은혜 받을수록 겸손해 지고 고난이 와도 겸손해 지는 겸손 지향적으로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마음을 낮추라고 합니다. 기도를 할 때도 마음을 낮출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성경을 펼쳐 읽을 때도 우리가 마음을 낮추고 이 말씀을 대하면 하나님 음성이 들립니다. 말씀을 듣는 이 시간에 우리의 마음이 낮추어 질 때 하나님이 내 영에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릴 줄 믿습니다. 마음은 우리에게 이토록 중요한 기능을 가지게 합니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보면 한 때 이 어른이 관상학을 공부했습니다. 그것도 아버지가 ‘관상을 보는 사람은 굶어죽지 않는다’고 농담으로 하신 말씀인데, 하도 못살던 시대에 태어난 어른이기 때문에 관상은 한번 해볼만 하겠구나 싶어 공부를 했는데 상당한 식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는 거울을 펴놓고 자기 관상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험한 관상입니다. 온갖 액운을 타고난 관상입니다. ‘아 이게 아닌데 내가 이런 험한 관상을 타고 나 가지고 무슨 남의 관상을 본단 말인가’ 그래서 접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 김구 선생이 위기를 당할 때마다 관상학에 있는 글귀 하나를 좌우명으로 새겼다고 합니다. “관상은 신상보다는 좋지 못하고, 신상은 심상보다는 좋지 못하다.”라는 말입니다. 관상은 얼굴을 말합니다. 얼굴이 잘나고 아름다운 것은 신체가 건강하고 잘난 것보다 못하고, 신체가 잘나고 건강한 것보다 마음이 건강하고 잘난 것이 낫다는 표현입니다. 결국 이 관상학의 초점도 마음입니다. 관상 한번 보고 낙심하지 마세요. 마음만 고쳐먹으면 얼굴 관상하고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관상보고 길조라고 너무 방심하며 살지 마세요. 마음관리를 잘못하면 아무리 그럴듯하게 생겨도 소용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아주 나쁜 약점이 있습니다. 성공하고 배우고 가지면 교만해집니다. 이게 약점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실패하고 우리에게 어려움이 오면 그만 좌절하고 실망합니다. 이게 우리 마음이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첫째 ; 교만을 극복하라
교만은 성경이 죄로 규정합니다. 낙심도 성경은 죄로 규정합니다. 우리는 교만하지도 말고 절망하지도 말기 바랍니다. 사울왕은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왕입니다. 그러나 이 왕은 교만해졌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의 충고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일등공신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와서 충고하는 그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을 대항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솔로몬의 기도 중에 한 가지를 보면,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이 백성을 판단하게 하옵소서.”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지혜로운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영어표현에 ‘hearing heart’ 즉 말씀을 듣는 마음입니다. 말씀을 듣는 마음이 지혜로운 마음입니다. 말씀이 들리는 마음이 겸손한 마음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두 남녀는 정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잉태가 일어났습니다. 위기입니다. 요셉은 파혼을 결심합니다. 그때 천사가 현몽하여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 말아라. 그에게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천사가 일러준 말을 요셉은 들었습니다. 마리아도 놀랐을 때 하나님이 일러 주십니다. “두려워 말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 두 남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천사가 와서 일러주니까 들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순종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걸로 끝난 게 아니라 그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모험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것과 이 말씀에 행하는 것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낮추면 하나님 음성은 들립니다. 그러나 이 들려진 말씀을 삼가 순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마음을 낮추어야 되는가 하면, 마음을 낮추어서 하나님 음성을 들어야 하나님이 의도하는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이 교만한 상태에서 음성이 들리면 내 자의적으로 해석합니다. 내 욕심을 이루는 일에 말씀을 적용합니다. 비일비재한 실수들입니다.
둘째 ; 섬김의 삶
스탠리 팜은 크리스찬 사업가입니다. 이 분은 기도하는 사업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기도 가운데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나의 가장 좋은 것을 드리며, 한 평생 내 사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주여, 최선의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팜에게 들려왔습니다. 마음속에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팜아 너는 평생 종업원으로 일해라.” 처음에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그 말씀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나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의 뜻은 너는 평생 종업원 의식으로 일하고 나를 주인으로 섬기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회장이지만 한 평생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종업원 의식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다 들립니다만, 이 하나님의 음성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게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은 마음이 낮아진 자라야 깨닫는 것입니다. 마음이 높아진 사람은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낮춘다는 것은 회개의 자세입니다.
절망도 교만입니다. 절망하는 사람이 겸손해 보일 수 있습니다. 좌절감에 빠진 사람은 남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좌절감에 빠진 사람은 이야기 잘 안 합니다. 겉으로 보면 아주 겸손해 보입니다. 그러나 절망과 겸손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겸손을 요구하지 교만이나 절망을 요구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교만과 절망은 다 죄악입니다. 겸손만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는 이 말씀은 운명론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선을 이루는구나.’ 이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을 이루게 역사하시려면 내가 낮아져야 됩니다. 내 마음을 낮추고 기다려야 됩니다. 내 마음을 낮추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까지 기도하고 인내하고 기다릴 때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선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셋쨰 ; 주를 닮아 가라
현실의 고통을 못마땅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를 억압하는 현실의 고통. 지금 우리가 힘든 현실의 고통을 너무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음을 낮추는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고통 중에 우리가 마음을 낮출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고통은 새로운 은사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낮은 마음은 우리에게 많은 마음을 줍니다. 마음을 낮출 때 겸손해 집니다. 마음을 낮출 때 깨끗해집니다. 마음을 높이면 추해집니다. 그리고 마음을 낮추면 더 높은 곳을 하나님이 보게 해 주십니다. 우리 스스로 아무리 높은 곳을 보려 해도 아무리 발돋움을 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낮추면 성령께서 내가 알지 못하던 영의 세계를 보게 해 주시고, 하늘의 것을 보게 해 주시고, 먼데 있는 것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덕군자가 되기 위해서 마음을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말씀에 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에 주의하기 위해서 이 말씀에 행하기 위해서 우리가 마음을 낮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주님이 마태복음 11장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빌립보서 2장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이로서 영광을 비우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뜻을 붙잡았습니다. 왜 내가 이 땅에 메시아로 왔는가? 그것을 늘 붙잡았습니다. 낮아진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낮아지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 나는 광야의 소리라.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 세례요한은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아가 보였습니다. 세례요한이 자기를 높였다면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메시아로 숭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내 뒤에 오는 그 분이 메시아시다. 그분이 오시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분이 천국이니라. 세례요한이 자기를 낮추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드러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낮추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구원의 역사가 성취된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생활의 비법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바쁘고 산만해도 우리가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진실로 연말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지금 세상과 우리 환경은 너무 요란합니다. 세속의 소리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제 DMB시대가 열렸습니다. 너무 몰두하면 안 됩니다. 너무 세상소리에 심취하면 하나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세상 소리를 삼가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절제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을 낮추고 삼가 말씀에 행하는 이 축복 안에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
잠 16:16-20 / 곽선희 목사
이러한 우스개 소리가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 무슨 일에든지 성공하려면 ‘ㄱ’으로 시작되는 여섯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꿈, 꾀, 꼴, 끈, 끼, 깡”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꿈은 이상이고 꾀는 지혜고 꼴은 외모이고 끈은 연고이고 끼는 소질이고 깡은 끈기를 의미합니다. 글쎄올시다. 하버드 대학의 대니얼 골맨(D. Goleman) 교수는 성공하는 사람들을 나름대로 사회학적으로 잘 분석을 하고 요약하여 딱 두가지로 말합니다. I.Q.가 20%, E.Q.가 80%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기대와 좀 다릅니다. 우리 생각에는 I.Q.가 높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I.Q.라고 하게 되면 지식, 재능, 기술을 다 포함한 것입니다. 머리가 좋아야, I.Q. 이것은 20%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E.Q. 입니다. Emotional Intelligence, 감성지수가 높아야 된다. 그저 우리가 쉽게 말해서 마음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씨가 좋아야 된다는 것은 의외입니다. 바로 어제도 어떤 예쁘게 생긴 탤런트 아가씨가 텔레비전에 나왔는데 인터뷰를 하면서 “장차 어떤 남자와 결혼을 하겠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제가 어렸을 때는 누구누구같은 미남, 뭐 키가 얼마고 머리가 좋고,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요새 나이가 30이 넘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저 마음이 좋은 사람이면 좋습니다.” 그래서 제가 ‘철이 났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마음씨라는 것, 이 감성지수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능이 높아도 감성이 낮으면 그 지능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머리 좋은 것 가지고 자신도 고생하고 남도 고생합니다. 성공이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감성에 있다, 하는 것입니다.
글렌 힐슨(Glann Hinson)이라고 하는 현대 영성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가까이 귀담아 듣지 못하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다, 그렇게 말합니다. 첫째가 Too Busy, 너무 바쁘다는 것입니다. ‘일 자체에 몰두하고 성과주의에 빠져서 그저 성공에만 급하고 성공이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못한다. 의미도 깊이도 없이 그저 뛰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고 뛰는 것이 아니고 뛰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열심히 뛰고 바쁜데 왜 바쁜지도 모르겠고 이 바쁨의 결과가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 수밖에.’ 두 번째는 Noise 라고 했습니다. 너무 산만하다고 했습니다. 많은 볼거리가 있습니다. 많은 들을 거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요즘에 우리는 많이 보고 듣고 삽니다. 요즘에 휴가 가는 사람들을 보니까 강릉까지 두시간 십오분이면 가는 것을 요새 여덟시간, 열시간을 간다고 합니다. 열시간이 얼마나 힘듭니까? 텔레비전에 해운대가 나오는 것을 보니 목욕탕이 아니고 죽탕입니다. 물은 하나도 안보이고 사람만 보이더라고요. 도대체 그래야 되나? “이 사람들이 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네”라고 했더니 제 말을 들은 사람이 제게 말하길 “목사님,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 재미에 가는 겁니다.” 시끄러운 재미에 가는 것이랍니다. 와글와글 해야지 쓸쓸하면 사람들이 가겠습니까? 그것도 또 말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새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들어야 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보아야 됩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만나야 됩니다. 겪고 싶지 않은 일도 겪어야 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제일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주 산천 경치가 좋은 유원지에 좀 조용했으면 좋으련만 거기다 대고 식당에서 스피커를 틀어놓고 흘러간 노래를 크게 들려대는데 참 유감스러웠습니다. 시장님께 전화를 좀 걸든지 해 보아야지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좀 조용한 곳을 찾아왔는데 서울 시내보다도 더 복잡하고 더 시끄러웠습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 합니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면서 우리들의 마음이 산만해졌습니다. 어느 사이에 그만 산만해졌습니다. 깊은 명상도 깊은 생각도 없습니다. 이제 인간 궁극에서 하나님의 만나게 돼있는데 조용하게 이 모든 관계를 끊고 하나님과 만날 수 있으려면 어떠해야 할 것 같습니까? 미안하지만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는 안됩니다. 엄청난 사건을 만나기 전에는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냥 맞물려 돌아가는 것입니다. 시끄럽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보니까 기도하는 시간이 없습니다. 물어보았더니 딱 세 번 기도한다고 합니다. 식사할 때.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혼이 황폐해질 수 밖에요. 그래서 영혼에 병이 생기고 마음에 병이 생깁니다. 이기심이 있고 자기 우상화가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짜증이 나고 교만해집니다. 낙심도 절망도 다 교만에서 옵니다. 끝없는 욕심의 노예가 되어 모두가 피해자입니다. 비참합니다. 큰 전쟁을 치른 다음에 오는 패잔병의 모습입니다. 이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역사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양심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들을 길이 없습니다. 너무 바쁘고 너무 시끄럽습니다.
여러분,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 들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심판입니다. 기도할 때 성경 볼 때 설교를 들을 때, 나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는다면 이미 현재적으로 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현재 어디로 가고 있느냐 말입니다. 여러분, 멸망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패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을 즐기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 그랬습니다. 교만하면 멸망합니다. 그런데 멸망은 싫지만 교만은 즐기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번 월드컵이라는 큰 행사 속에서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크게 배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는 것입니다. 오만한 사람은 다 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교만을 즐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멸망을 자초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내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내 마음의 성향이 어디로 기울어지고 있습니까? 점점 겸손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점점 교만해지고 있습니까? 구약성경에서 예를 들어봅시다. 가장 큰 예가 아마 사울왕에 대한 것일 것입니다. 사울왕이 겸손할 때,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고 높여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교만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습니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내가 너를 버리노라”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사울왕은 전쟁에 성공하였습니다. 승전했습니다.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전쟁에는 이겼는데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실패했습니다. 교만해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은사를 모독하였습니다. 제사는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 외에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왕이라고 하더라도 왕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 대신 자신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교만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모독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십니다. 그 뿐입니까.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닙니다. 가만히 상상해 보십시오. 다윗은 자신의 사위이고 게다가 충성된 신하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을 죽이겠다고 쫓아다니는 이 늙은 사울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한심합니까? 무엇에 씌웠지 않습니까. 악령에 씌워서 이렇게 행동을 하다가 결국엔 죽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작은 성공이 미래를 망친다.’ 그는 전쟁에 이겼습니다. 차라리 패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전쟁에 이겼다는 것 때문에 아주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교만해지면서 그와 그 가문, 그 족벌이 다 망했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이야기입니까? 문자 그대로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말씀은 말하십니다. “삼가 주의 말씀을 들으라.” 삼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라,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내가 직접 대면하는 바른 자세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 환경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남이야 어렵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과의 직선적이고 종말론적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야곱이라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가 20년 동안 집을 떠나 다니다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압복강변에서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단독으로, 홀로 남았다고 했습니다. 홀로. 아내가 넷입니다. 위로가 되지를 않습니다. 자식이 열둘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많은 재산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서서 밤새 기도합니다. 이러한 대면적,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인 관계가 필요합니다. 괜히 이 생각 저 생각, 세상이 어떻고... 그러지 마십시오. 남이 어떻고,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순간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딱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들으십시오. 나의 소원을 말씀드리고 내 욕망에 사로잡힌 기도가 앞서서는 안됩니다. ‘주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께 물으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해 주실 기회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마음 문을 열어야 되는 것입니다. 듣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주의 말씀에 주의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솔로몬 왕이 하나님 앞에서 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십시오.’ 히브리 원문으로 보면 ‘메부쉐 미드’라는 말입니다. 듣는 마음을 주십시오. 옛날 구(舊) 역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Hearing heart’ 요새 번역에는 ‘Understanding mind’ Hearing heart, ‘하나님이여 나에게 듣는 마음을 주십시오. 주의 음성을 듣는 그런 조용한 맘을 주십시오’ 바로 이것이 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의 고집 나의 형편에 메이지 말고 마음을 열고 주님이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또 한가지 있습니다. 이해에 겸손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을 듣는 대로 자신의 멋대로 해석하지 마십시오. 해석에 너무 조급하지 마십시오. 조용히 기다리십시오.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인정하면서 너의 이성을 재현하라.” 이성, 우리에게 주신 이상과 판단이 참으로 중요하지만 그 판단을 서두르지 마십시오. 나의 이성이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이성이 건강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무 빨리 해석하고 빨리 판단을 내리지 마십시오. 기다리십시오. 우리는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청교도 신앙에서 신앙 생활 원칙을 말할 때에 Waiting on the Lord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기다리는 마음. ‘기다린다’ 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꼽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실 때의 마리아의 남편, 요셉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약혼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내가 관계를 한 일이 없는데 이 여자가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 들려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떠하겠습니까? 난리가 나죠. 벼락이 떨어지죠.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답니다.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그럴 이유가 있겠지,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조용히 물러나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굉장합니까? 속단을 하지 마시고 너무 빨리 비판을 하지 마십시오. 기다리십시오. 그럴 수 있는 이유가 있겠지. 무슨 뜻인가가 있겠지, 하고 기다리십시오. 이해를 기다리십시오. 해석을 기다리십시오. 판단을 기다리십시오. 죠지 뮬러라고 하는 유명한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아라. 성령보다 앞서지 말아라. 기도보다 앞서지 말아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앞세우십시오. 조용히 기다리십시오. 성령이 감화하여 문제의 해결을 주실 것입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성령의 역사를 기다리십시오. 무엇보다도 기도부터 먼저 하십시오. 기도하고 말하십시오. 많이 기도하고 기다리십시오.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러면 조용히 주의 음성이 올 것입니다. 기도하라. 기도보다 앞서지 말아라. 이 얼마나 참 명언입니까?
그리고 삼가 순종하라. 듣는다는 말은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조용히 조심스럽게 말씀에 순종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스탠리 팜(Stanley Pam)이라고 하는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업에 크게 성공을 한 사업가입니다. 그가 젊었을 때에 사업을 시작할 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나의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한평생을 주님 앞에 바쳐서 사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방법을 가르쳐 주소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너는 평생 종업원으로 일하라. 언제라도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아멘” 그는 이렇게 받아들이고 “나는 종업원이다.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이 회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나도 종업원이고 너도 종업원이다.” 오로지 종업원 의식으로만 부지런히 일을 했습니다. 크게 성공을 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삼가 조심할 것이요.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목적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실 것입니다. 나는 조용히 삼가 듣고 순종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주신 말씀과 같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면 화를 당합니다. 겸손한자와 함께 하면 은혜가 있습니다.
심리학자 아치발트 하트라고 하는 분이 ‘마음의 습관’이라 하는 책을 쓰셨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책입니다. 우리는 흔히 행동의 습관을 이야기합니다. 오랫동안 반복하면서 무의식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 습관입니다. 그런데 습관이 마음에도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한 방향으로만 마음이 가게 됩니다. 이것을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타인의 좋은 점을 보는가?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는가? 만약 당신이 좋은 점만 보고 있다면 당신은 겸손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나쁜 점이 자꾸 눈에 들어오고 그것을 마음에 두게 된다면 그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 ‘자신의 실패를 용납하라.’ 이것은 중요한 말입니다. 내가 실패했을 때에 실수했을 때에 ‘그럼, 이 부족한 사람이 언제나 실수할 수 있는 거지. 하나님의 긍휼로 사는데’ 이렇게 생각을 해야지 가끔 보면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실패를 하다니, 내가 실수를 하다니 말도 안돼!” 참 웃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찌 실수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교만입니다. 자기가 실패해놓고 자신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이럴 수가 없다고. 아니오, 그것이 교만입니다. 그쪽으로 기울어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실패를 인정할 줄 알아야합니다. 그런가 하면 양심이 맑아야 합니다. 양심이 흐려지면 무엇에 지금 붙들려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자신을 너무 가혹하게 대하지 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인데 자신에 대해 가혹해서는 안됩니다. 그것도 교만입니다. 또 ‘작은 은총을 소중히 여기라.’ 그것이 겸손입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대하라.’ 하나님께서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할 것이니까. 그것이 믿음입니다. ‘올바른 낙관론자가 되어라.’ 다 합동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종국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절망하는 것은 바로 교만입니다.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여러분, 현실이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이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조용하게 겸손히 받아들이십시오. 현실을 못마땅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바로 그것이 교만입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생각하십시다.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인정하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여기에 함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못 알아보는 것, 그것이 교만입니다. 교만한 사람을 사랑할 줄도 모르고 사랑 받을 줄도 모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마음을 한 번 진단해 보십시다. 겸손 지향적입니까? 교만 지향적입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집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점점 성숙하면서 겸손해지고 있습니까? 이것만을 잊지 마십시오. 사탄은 나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절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은 나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감사하게 만듭니다. 성령이 나와 함께 할 때에 나의 마음이 낮아지고 겸손해집니다. 동시에 조용하게 주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주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말씀에 순종하는 순간, 더욱더 크게크게 말씀의 역사가 우리 영혼 안에 우리 실제 생활 속에 크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너무 복잡해서 너무나도 흔들리고 있어서 너무 바빠서 주의 음성을 가까이 듣지 못함을 용서하옵소서. 주여 어느 사이에 나도 모르게 교만해져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이웃에 대해서 불평하는, 자기 자신에 절망하는 사람이 된 것도 용서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사 이제 겸손 겸손하게 하시고 삼가 주의 음성을 잘 듣고 그 음성에 응답하며 사는 주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
잠16:16-20 / 오창우 목사
봉독한 말씀 중에 20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자.
“삼가 주의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성경을 읽고 무엇 때문에 성경을 공부하는가?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20절의 말씀은 ‘말씀을 주의하라 좋은 것을 얻는다 ’하더니 그 후에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다’ 라고 한다. 무슨 뜻인가?
‘말씀을 주의하라’는 말은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써서 말씀을 대하라는 것이다. 쉽게, 가볍게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한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하여 보면 성경을 통해 깨닫게 되는 중요한 진리의 말씀은 “성경을 주의하여 보면 좋은 것을 얻으며 복을 받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이다.
성경을 보라. 그곳에는 많은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을 보게 될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스라엘의 위대한 임금 다윗, 지혜의 왕 솔로몬,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 홍수에서 구원받은 노아, 고난의 승리자 욥....이들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중요한 사실은 이들은 과연 위대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은 보잘것없는 인생들이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이방신을 섬기고 우상을 만들어 팔던 장사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셔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요 믿는 이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모세는 애굽의 궁전에서 자랐으나 나이 40에 살인자가 되어 사람이 살지 않는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서 40년을 살면서 참으로 쓸모없는 노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셔서 애굽의 바로를 대항하여 이기는 출애굽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게 하신 것이다. 다윗은 어떤가? 한낱 가난한 목동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게 하신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간음죄를 범하고 살인을 하는 어리석은 인생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끝까지 그의 인생을 책임지시고 자손 대대로 복을 받게 하셨다.
이들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중요한 사실은 인간은 약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하다. 그럼으로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의지해야만하고 의지할 때 좋은 것을 얻고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복음송 중에 “ 나는 비록 약하나 주 예수는 강하다.. 나를 보호해주는 주님 곁에 더 가까이 가리라....” 우리는 약하다.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살 수 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복 받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인간의 부족을 시인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주는 인생의 진리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과연 성경을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는가?
그러나 죄인들은 인간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능력이 있다. 뭐든지 원하는대로 다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바벨탑을 쌓는다. 그리고 인간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신앙인들 중에도 있다. 마태복음 5:20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무슨 말씀인가?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굉장하게 여겼다. 그것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의 대단한 지식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천국에 들어갈 사람으로 두 사람을 꼽는다면 누구일까? 할 때에 “천국에 갈 두 사람은 서기관과 바리새인 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성경의 지식이 뛰어난 사람들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마5:20에서 예수님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다’ 라고 하신다.
주님이 `결단코`라고 하는 강한 용어를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연계해서 사용하신 경우는 딱 두 번이다.
한 번은 이 본문이고, 다른 하나는 "너희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갈 것이다." 하는 말씀이다. 천국의 주인이시오, 생명과 죽음을 좌우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결단코`라는 말을 쓰신다.
이 말은 헬라어로 우메(oume)다.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안 된다는 뜻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뜨끔하지 않는가? 어떤 성경학자가 이 본문을 가지고 한 말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대단히 무서운 말씀인데 이 말씀을 왜 하셨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서 "기독교는 절대로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했기 때문에, 예수만 믿으면 그만 이라는 식으로 적당하게 신앙생활하고, 적당하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세상을 살아도 되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주님이 가르쳐 주셨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다.
그렇다. 기독교는 절대 쉬운 종교가 아니다. 천국에 결단코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못 들어갑니다. 누가 들어갈 수 있는가?
서기관들이 내세우는 의보다도 더 나은 의를 가진 사람, 바리새인들이 자랑하는 의보다도 훨씬 더 나은 의를 가진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여기서 `더 낫다` 하는 말은 원래 물이 둑을 넘어서 넘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가 둑이라고 한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의는 그 둑을 훨씬 넘는 물과 같은 의라야만 하기 때문에 비교가 안 될 만큼 우위에 속하는 의를 소유해야만 된다는 이야기이다. 여러분, 자신 있는가?
우리 자신에게 한번 냉정하게 물어봅시다. 나는 천국 들어갈 수 있다고 안심할 수 있는가? 나는 주님이 요구하시는 그 의가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가? 중요한 질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 서기관보다도 더 나은 의가 무언가를 분명히 파악하고 나에게 이 의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성경의 지식이 뛰어난 서기관과 바
리새인은 왜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말인가?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는 무엇인가? 믿음의 의이다.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선한 것도 없습니다. 나에게는 자랑할만한 어떤 공로도 없습니다. 오직 나는 하나님만 믿겠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하나님만 붙들겠습니다.` 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다. 은근히 `세상에서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나는 그래도 양심적이다.`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믿는 체 해도 진짜믿음을 갖기가 어렵다. 믿음은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겠다는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배척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죽게 했다. 이들은 성경의 지식 때문에 교만해 졌다. 하나님까지 심판을 할 정도 이다. 이들이 성전에 가서 기도했으나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높이는 교만을 드러 내고 있다. 겸손이 없다. "하나님, 나는 토색하지 않습니다. 나는 간음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그렇게 악하게 살지 아니한 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안식일을 철저히 지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일년에 한 번씩 금식하라고 하셨지만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나는 십일조를 꼬박꼬박 냅니다." 이와 같이 자기 자랑을 해 댔다.
사람들은 `야, 저 분이야말로 천국에 들어가겠구나.` 하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그들은 들어갈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주님이 단정하신다.
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처럼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는가?
믿음의 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있는 어떤 의를 자랑하면 하나님이 받아 주시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착각을 해도 한참 한 것이다.
로마서 3장 20절 이하에 보면 그들이 절대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이유가 나온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서기관들이 성경에 정통했는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좔좔 외우면서 다녔다. 그러나 율법을 알면 알수록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악하다는 것을 발견해야 했다. 그렇게 되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율법을 연구하는 그들이, 율법을 그렇게도 들먹거리는 그들이 자신의 악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 앞에 이런이런 일을 하기 때문에 선하다고 생각한 것은 율법을 거꾸로 본 것임을 드러내준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만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천국에 못 들어온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한두 번이 아니라 네다섯 번을 반복해서 주님이 그들을 책망한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이 위선자들이여` 하는 말이다. 그들은 말과 행동이 너무나 일치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는 거룩한 체 하면서 보이는 것들은 이것저것 지키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율법에 중요하다고 명시하신 본질, 즉 그 정신은 싹 쓸어내 버렸다. 그 정신이 무엇인가? 의와 인과 신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십일조는 잘 하고, 안식일은 잘 지키는구나. 그러나 사람들 보기에 꼭 해야 할 것은 다 하면서 진짜 중요한 인을 버렸구나. 의를 버렸구나. 신을 버렸구나.` 예수님이 이처럼 책망하신 것은 사실이었다. 의라는 것은 공의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의는 정직한 것은 정직한 것이라고, 불의한 것은 불의한 것이라고 바르게 말하는 것이고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공정하게 판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했는가? 남들 보기에는 거룩하게 기도한답시고 질질 끌며 오랜 시간 기도를 하면서 남이 안 보는 곳에서는 과부와 같이 힘없는 사람은 깔아 뭉개며 그 재산을 착취하고, 힘있는 사람은 나쁜 짓을 해도 옳다고 인정을 해 주는 짓들을 하나님 보기에 살금살금 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책망을 하신 것이다. 공의를 버린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죄이다. 이처럼 그들은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될 나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의지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믿음을 버린 것이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까지 하지 않으셨는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들은 내가 보니 하루살이는 뱉어내고 약대는 삼키는 위선자들이다." 하루살이같이 금방 삼킬 수 있는 조그마한 고기들은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낙타가 얼마나 큰가? 그게 목으로 넘어가는가? 그러므로 그걸 뱉어내야 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거꾸로 하고 있었다. 하루살이 같이 사소한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은 하나하나 들고서 사람들 앞에 자랑도 하고 남을 비판하기도 한다. "왜 안식일 지키지 않았는가? 왜 십일조를 내지 않는가? 왜 금식은 하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공의와 자비와 믿음같이 너무나 중요한 것은 마치 낙타를 삼키듯이 꿀꺽꿀꺽 삼키는 것이다. 순종을 하지 않는 그들의 생활 모습이었다.
로마서 3장 21절, 22절에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나온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은 것이라.` 그러면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것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의다. 하나님이 이것을 보여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눈 앞에 두고도 믿지 않았다.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전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히 들어갈 수 없는 불행한 자가 되어버렸다.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목표는 인간의 약함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좋은 것을 얻는 것이다. 과연 여러분은 성경을 통해 좋은 것을 얻는 자가 되고 있는가? 이것은 성경을 대하는 자세에서 나올 수가 있다.
오늘 성경은 삼가 주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다.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가?
간단하게 4가지 방법을 말씀을 드리겠다.
1. 성경을 보는 시간을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게 하라.
우리는 편지를 받으면 그 편지를 보낸 분을 생각하게 된다. 편지로 보낸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편지이기에 당연히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게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큰 복이다.
야곱을 보라. 고향을 떠나 타향, 객지에서 천신만고 끝에 금의환향을 한다. 그런데 고향에는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동생 야곱에게 적대심을 갖고 기다린다. 과거에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것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재산과 가족... 아내가 넷이요, 자녀가 열둘을 형에게 보내서 그 마음을 돌려 보려고 하지만 안된다. 그러자 야곱은 실망을 한다. 그리고 혼자 남는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자신을 곤경에서 구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 앞에 선다. 아니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신다. 그리고 밤새 야곱과 씨름을 한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 것을 알게 되자 붙잡고 복을 달라고 한다. “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 하겠나이다” 그 결과 복을 받는다. 야곱은 그 장소를 브니엘이라고 한다. ‘브니엘은 하나님을 대면했다’ 는 뜻이다. 그리고 에서를 만나자 하나님은 에서의 마음을 돌이키셔서 야곱을 만나 용서하고 화해하게 하신다. 문제는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해결하셔야 해결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이 만남 속에서 우리는 야곱처럼 ‘하나님 이 말씀에서 내게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그저 한낱 책을 대하듯 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을 하나님을 만나듯 대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이 주어질 것이다.
뉴잉글랜드 선장이 이끄는 배 한 척이 인도로 가는 도중 어떤 말레이시아 상인을 태우게 되었다. 이 상인은 굉장한 부자였는데 어느 날 선장에게 성경을 몇 권 갖고 있으면 나누어 달라고 부탁했다. 선장은 이교도의 갑작스러운 부탁에 깜짝 놀라서 이렇게 물었다. "아니 당신은 무엇에 쓰려고 영어성경을 달라고 하십니까? 당신은 그것을 읽을 수 없을 텐데요?" 선장의 말에 말레이시아 상인은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갖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성경을 필요로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나와 거래를 원하는 영국인이나 또는 당신 나라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 성경을 그가 다니는 길에 남모르게 놓아두고 그가 어떻게 하는가를 지켜본답니다. 만일 그가 성경에 대해 관심을 갖고 주의 깊게 읽으면 나는 그가 나를 속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가 성경을 아무런 관심도 없이 대하고 함부로 집어던지거나, 또는 성경에 대해 불경스러운 말을 하게 되면 나는 결코 그와 더 이상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그는 결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간됨을 판단할 수 있다. 당신은 과연 성경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게 하라 그것이 복이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를 가지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요 역사의 주인이시다. 이 하나님께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내가 하나님께 설득을 당해야지 내가 하나님을
설득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면서 하나님앞에 일천 번제를 드린다. 그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무엇을 줄고 하신다. 이 때 솔로몬은 “하나님, 제게 지혜를 주세요” 라고 한다. 이 지혜를 달라는 말에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지혜뿐아니라 부귀와 영화의 복도 주신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하나님께 달라고 했던 지혜는 무엇인가? 이 지혜는 히브리 말로 ‘메부쉐 미르’ 이다 이 말의 뜻은 듣는 마음이다. 이해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이 지혜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말을 기뻐하신 것이다.
그래서 본문 16절에도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
본문 18-9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하자. 그리고 성경을 대하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그 음성을 듣자. 그러면
그 어떤 재물을 갖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3. 성령으로 해석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어느 젊은 신자가 성경을 체계적으로 잘 읽을 생각을 하지 않고 매일 아침 성경을 되는대로 펼쳐서 맨
처음에 눈에 띄이는 성경구절을 하나님이 그날에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기로 작정을 했다.
어느 날 아침 조심스럽게 성경을 펼치니 그의 눈에 들어온 첫번 구절은,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27:5) 였음으로 이 말씀이 그날에 자기를 위하여 주시는 말씀으로는 여길 수가 없음으로 다시 한번 펼치기로 하고 두번째 펼치니 이번에는,"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는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는 불안한 나머지 다시 한번 펼치기로 하고 다시 펴니 이번에는,"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
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요13:27) 였다. 그는 다시는 제 멋대로 성경을 보지 않기로 작정하고 회개의 기도를 하였다
청교도들의 신앙원칙은 ‘주님을 조용히 기다리자’ 는 것이다.( 웨이팅 더 로드 )
성경을 보는대로, 듣는대로 해석을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자의적 판단이 되기 때문이다. 설
교를 자의적으로 듣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오해를 하고 의심을 하는 경우는 참으로 설교자를 황당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듣기는 속히 하되 말은 천천히 하라는 말처럼 해석은 늦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판단이 온전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보라 그는 약혼녀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당장에 일을 벌이지 않는다. 성경은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면서 조용히 기다렸다고 한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지...’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천사의 방문을 받고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귀한 사람이다.
성경을 보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그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의 가르쳐주시는 성령의 깨우치심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복이 있다.
죠지 뮬러 목사님은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라. 성령보다 앞서지 말라. 기도보다 앞서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깨우쳐 주시는 것을 중요시했다.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성령이 감동케 하시는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되라. 이런 의미에서 큐티를 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복이 된다.
4. 성경의 말씀대로 순종을 하라
하나님의 말씀의 결론은 그대로 순종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사용하지 않으면 결과가 없듯이 말씀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는 없는 것이다.
우연히 비누장수가 목사와 나란히 지하철을 타고 가게 되었다. 비누장수가 슬쩍 목사를 비꼬며 말했다. “하나님을 믿고 전하는 당신네들은 매일 선과 진실을 가르치지만 세상을 보십시오 거짓과 악과 미움뿐입니다.”
마침 그때 걸인이 누추한 차림으로 구걸을 하고 있었다. 목사님은 말했다. “아니, 저 사람의 옷은 왜 저렇게 더럽소? 비누가 있을텐데..” “그야 비누는 있지만 사용을 하지 않아서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이지요”
순종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약속된 복을 받게 되는 법이다.
미국 시카고에서 기독교회의가 열린 적이 있다. 이 때의 회의의 주제는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사흘 동안 회의를 하는데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에서 온 학자들만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니까.. 핍박이 심해서 성경에 관심이 없는가? 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사회자가 묻기를 “당신들은 왜 사흘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소감이나 한마디 하십시오”
소련 공산치하에서 신앙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이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이다. “당신들은 참 편한 말들을 합니다. 당신들이 이런 주제로 회의를 사흘동안이나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살아 보십시오. 그러면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즉시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열변을 토하던 많은 학자들은 숙연해 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성경의 권위와 영광과 말씀의 능력을 알게 될 것이다.
토레이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다.“성경에 많은 번역이 있는데,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번역이 있다면 그것은 내 삶으로 성경을 번역을 하는 것이다”
말씀대로 살고자하면 우리는 세상의 온갖 역경 속에서도 승리할 수가 있다. 말씀과 삶이 일치가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복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란다. 순종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복을 얻는다 라고 했다. 듣지 않으면 저주이다. 왜 듣지 않는가? 글렌 힐슨(Glann Hinson)이라고 하는 현대 영성학자는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가까이 귀담아 듣지 못하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가 너무 바쁘다는 것이다. ‘일 자체에 몰두하고 성과주의에 빠져서 그저 성공에만 급하고 성공이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못한다. 의미도 깊이도 없이 그저 뛰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고 뛰는 것이 아니고 뛰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열심히 뛰고 바쁜데 왜 바쁜지도 모르겠고 이 바쁨의 결과가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너무 산만하다고 했다. 많은 볼거리가 있고 많은 들을 거리가 있다. 요즘에 우리는 많이 보고 듣고 산다. 여름에 휴가 가는 사람들을 보니까 강릉까지 두시간 십오분이면 가는 것을 요새 여덟시간, 열시간을 간다고 한다. 열시간이 얼마나 힘든가? 텔레비전에 해운대가 나오는 것을 보니 목욕탕이 아니고 죽탕이다. 물은 하나도 안보이고 사람만 보인다. 도대체 그래야 되나?
“이 사람들이 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네”라고 했더니 제 말을 들은 사람이 제게 말하길 “목사님,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 재미에 가는 겁니다.” 시끄러운 재미에 가는 것이란다. "와글와글 해야지. 쓸쓸하면 사람들이 가겠습니까?" 그것도 또 말이 된다.
요새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들어야 한다.
제가 제일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주 산천 경치가 좋은 유원지에 좀 조용했으면 좋으련만 거기다 대고 식당에서 스피커를 틀어놓고 흘러간 노래를 크게 들려대는데 참 유감스러웠다. 시장님께 전화를 좀 걸든지 해 보아야지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좀 조용한 곳을 찾아왔는데 서울 시내보다도 더 복잡하고 더 시끄러웠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 한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아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보아야 된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만나야 된다. 겪고 싶지 않은 일도 겪어야 된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면서 우리들의 마음이 산만해졌다. 깊은 명상도 깊은 생각도 없다.
이제 인간 궁극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돼있는데 조용하게 이 모든 관계를 끊고 하나님과 만날 수 있으려면 어떠해야 할 것 같은가? 미안하지만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는 안 된다. 엄청난 사건을 만나기 전에는 제 정신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냥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고 시끄럽게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보니까 기도하는 시간이 없다. 물어보았더니 딱 세 번 기도한다고 합니다. 식사할 때.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기회가 없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되겠는가? 영혼이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혼에 병이 생기고 마음에 병이 생긴다. 이기심이 있고 자기 우상화가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짜증이 나고 교만해진다. 낙심도 절망도 다 교만에서 온다. 끝없는 욕심의 노예가 되어 모두가 피해자다. 비참하다. 큰 전쟁을 치른 다음에 오는 패잔병의 모습이다.
이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역사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양심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들을 길이 없다. 너무 바쁘고 너무 시끄럽다.
여러분,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 들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심판이다. 기도할 때 성경 볼 때 설교를 들을 때, 나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는다면 이미 현재적으로 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현재 어디로 가고 있느냐 말이다. 여러분, 멸망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실패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을 즐기고 있다.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고 했다. 교만하면 멸망한다. 그런데 멸망은 싫지만 교만은 즐기고 있다. 여러분이 이번 월드컵이라는 큰 행사 속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가?
가장 크게 배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는 것입니다. 오만한 사람은 다 망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교만을 즐기면 어떻게 되겠는가? 멸망을 자초하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 마음의 성향이 어디로 기울어지고 있는가? 점점 겸손해지고 있는가? 아니면 점점 교만해지고 있는가?
구약성경에서 사울왕을 보자.
사울왕이 겸손할 때,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고 높여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 그렇지만 그가 교만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내가 너를 버리노라”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잊지 말자. 사울왕은 전쟁에 성공했다. 승전했다. 싸움에서 이겼다. 전쟁에는 이겼는데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실패했다. 교만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념비를 세웠다.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셨다. 그런가 하면 은사를 모독하였다. 제사는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다. 그 외에 누구도 할 수 없다. 왕이라고 하더라도 왕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무엘 대신 자신이 제사를 드렸다. 교만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모독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신다. 그 뿐인가.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닌다. 가만히 상상해 보라.
다윗은 자신의 사위이고 게다가 충성된 신하이다. 그런데 그 다윗을 죽이겠다고 쫓아다니는 이 늙은 사울을 생각해보라.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한심한가? 무엇에 씌웠다. 악령에 씌워서 이렇게 행동을 하다가 결국엔 죽었다.
얼마나 비참한가? 이런 말이 있다. ‘작은 성공이 미래를 망친다.’ 그는 전쟁에 이겼다. 차라리 패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전쟁에 이겼다는 것 때문에 아주 망가지고 말았다. 교만해지면서 그와 그 가문, 그 족벌이 다 망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이야기입니까? 문자 그대로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하자.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인정하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지혜가 여기에 함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못 알아보는 것, 그것이 교만이다. 교만한 사람을 사랑할 줄도 모르고 사랑 받을 줄도 모른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것이 바로 교만이다, 여러분, 자신을 마음을 한 번 진단해 보라. 겸손 지향적인가? 교만 지향적인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지지는 않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점점 성숙하면서 겸손해지고 있는가? 이것만을 잊지 말라. 사탄은 나를 교만하게 만든다. 그래서 절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령은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그래서 감사하게 만든다. 성령이 나와 함께 할 때에 나의 마음이 낮아지고 겸손해진다. 동시에 조용하게 주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다. 그 마음에 주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리고 그 마음이 말씀에 순종하는 순간, 더욱더 크게 크게 말씀의 역사가 우리 영혼 안에 우리 실제 생활 속에 크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자.
40일 금식기도 한 후에 제일먼저 찾아온 대상은 다름 아닌 마귀이다. 예수님이 기도를 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그 능력으로 돌로 떡이 되게 하라고 한다. 이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느니라” 라고 하시면서 마귀의 요청을 거절을 하시고 물리치신다.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이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여러분도 오늘 말씀을 듣고 나가는 즉시 마귀는 분명 시험을 할 것이다. 말씀보다 떡으로 살아야 한다고. 조심하라 말씀대로 사는 것은 인간은 약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 나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너무 복잡해서 너무나도 흔들리고 있어서 너무 바빠서 주의 음성을 가까이 듣지 못함을 용서하옵소서. 주여 어느 사이에 나도 모르게 교만해져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이웃에 대해서 불평하는, 자기 자신에 절망하는 사람이 된 것도 용서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사 이제 겸손 겸손하게 하시고 삼가 주의 음성을 잘 듣고 그 음성에 응답하며 사는 주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살아 갈 수 없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백성임을 항상 기억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지혜롭고 명철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잠시도 사탄의 노예가 되어 바벨탑을 쌓는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만을 믿고 승리하게 하옵소서. 이 땅의 백성들이 빵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승리하는 백성... 하나님의 복을 받아 감사하는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말씀에 주의하는 자
잠 16:16-33 / 박조준목사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오늘 저 녁 본문 중에서 20절 말씀을 중심해서 생각하고 기도하십시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말한 좋은 것은 물론 세상적 인 것, 보이는 것, 물질 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의 좋은 것은 하늘의 것, 보이지 않는 것, 영적인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육신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 세상적인 것보다는 하늘의 것을 언제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설교에서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 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골로새서 3장 1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 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고.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도 우리의 돌아 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 함이니라 하였습니다. 물론 성경은 세상의 것을 죄악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은 다 좋은 것입니 다.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앞세울 때 그것이 곧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좋은 것입니다.그러나 하늘의 것은 가장 좋은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표현대로 하면 최고의 선 입니다. 우리는 오늘 저녁도 이 최고의 선을 찾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신령한 축복을 사 모하여 나왔습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어요? 삼가 말씀에 주의하 는 자는 좋은 것을 얻는다 고 하였습니다. 여한 계시록에 보면 복이 있다 는 말씀이 일곱 번 나 오는데 그 첫 번째가 요한 계시록 1장 3절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마지막 장인 22장 7절에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 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누가복음 11장 2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이 성경을 보시는대로 예수님께서 귀한 말씀을 하실 때 그 말씀에 많은 감동 을 받고 있던 어떤 여인이 큰 소리로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다 할 때에 대 답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는 복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 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마리아 못지 않게 복이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 22장 31절에도 너희는 나의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요한복음 8장 51절에 보면 예수님께 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 히 보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요한 1서 2장 3절에서 6절에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 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 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 온전케 되었나 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 도 행할지니라 하였습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있는 사람에 대하여 말하면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 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후계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고 여러 가지 해야 할 과업을 앞에 놓고 주저하는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여호수아 1장 8절에 이 율법책을 네 입에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 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는 사람은 좋은 것 을 얻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에 보면 재미있는 말씀이 있어요.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 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 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에 갈라디아 지방에서 전도하고 있을 때입니다. 사도 바울이 마음 에는 아시아에 가서 전도하려고 하였으나 성령이 이를 허락지 않아서 비두니아로 가서 전도해 볼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노라고 하룻밤을 거 기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그 날밤 마게도냐인 하나가 나타나서 자기 지방에 와서 도와 달라고 하 는 환상을 보고, 생각했던 것을 변경해서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가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그리고 베뢰아 교회입니다. 그런데 같은 마게도냐 지방이면서도 성경에 두세 번 지명으로서밖에 기록되지 않은 이 베뢰아 는 무엇으로 유명했습니까? 한가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베뢰아 사람이 신사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방면으로 신사적이었습니까? 우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 고 하였습니다. 신사적이란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대로 교육받은 사람입니까? 예의바 른 사람입니까? 점잖은 사람입니까? 물론 그런 뜻도 전연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 신사 적이란 말은 영어로 noble 즉 고상하다, 바탕이 좋다는 뜻입니다. 베뢰아 사람의 마음은 그 바탕 이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굳게 닫힌 마음이 아니라 활짝 열린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길가와 같은 마음, 돌짝밭 같은 마음, 가시덤불 우거진 밭과 같은 마음이 아니라 옥토 같은 말씀 의 씨를 받아들이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바울과 실라가 전하는 복음 의 말씀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도를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열린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며칠 전에 부활 주일을 지켰습니다마는 예수님 당시 모든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을 이단시 하였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믿어 오고 배워 온 구약의 율법 과 예언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로 그들과 전연 다르게 해석하니 그것이 굉장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유대교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말하자면 종교 지도자들 이 큰 반발을 일으켜서 논란하고 종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왜요? 그들은 이미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 뿐 아니라 자기들만이 가 장 옳다고 하고 독선적인 생각이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만한 마음의 여 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의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그들의 신사성입니다. 신사적이란 자기 독선에 빠져 마음 의 문을 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겸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큰 약속에 대하여 간절한 심정으로 기다리는 태도와 진리에 대하여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를 가리켜 신사적 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인 관념 때문에, 지식인들이 자기들의 뭐 좀 안다고 하는 것 때문에, 밖으로부터 오는 객관적인 진리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것을 종종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슨 일 이든지 자신의 도덕관이나 지식의 척도로써 모든 것을 판단하고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틀렸다 고 어리석은 이론이라고 아예 규정지어 버리고 맙니다. 이와 같이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참 진리가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이런 일은 비단 도덕 가나 지식인 뿐만이 아닙니다. 신앙적으로도 독선적인 생각에 있는 사람은 이런 잘못을 범하기가 쉽습니다. 아마 가장 심한 것이 사실은 신앙적인 면으로 독선적인 생각을 가져 마음의 문을 꼭 닫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거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전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 아닙니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 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 마음의 문을 여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좋은 것을 얻습니다. 그리고 베뢰아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태도가 진지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열려 있다고 해서 아무 것이나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간절하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날뛰는 소위 광신자들은 아니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삼가 말씀 에 주의하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그들 의 말이 구약의 예언과 부합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여기 상고한다 는 말은 깊이, 자세히, 광범위하게, 정확히 란 뜻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바 울과 실라의 전도한 말씀을 반격하기 위하여, 비판하기 위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믿기 위해 서, 믿지만 확신을 가지고 믿기 위해서 마음을 열고 진지하게, 자세하게, 깊이 성경을 날마다 상 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사적인 성도입니다. 저는 우리 한국 교인이 다 신사적인 교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 영락 교회 성도 여 러분, 신사적 교인 되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진리에 대한 태도가 진지해야겠습니 다. 그래서 금년 우리 교회의 생활 표어가 배우가 확신한 일에 거하자 고 한 것입니다. 왜 우리 한 국 교회가 선교 100주년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아직 자리가 안 잡히고 부동하는 교인들이 많고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고 있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는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서 이런다하면 여기에 오고 저기서 저런다하면 저리 로 가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진지하게 상고하고 말씀 위에 서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 달 마지막 주간에 가지려 하는 사경회의 목적도 거기에 있습니다. 흔히 쓰는 심령 대부흥회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피했습니 다.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나 자칫하면 말씀 중심보다 감정 흥분에 끝나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성경을 상고하므로 우리 심령의 참된 부흥을 도모해 보려고 합니다. 교회에서 금년부터는 성경 공부를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주일 성경공부반에도 많은 분이 참석하고, 청년들이 저녁마다 모여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 학원에도 많은 분이 성경을 배우고, 각 구역의 책임자가 성경을 배워서 각자의 구역에서 믿음의 식구들과 같이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연 구합시다. 그런데 혹 어떤 열심 있는 분들은 은혜를 사모해서 아무데나 따라 다니는 예가 있는 모양인데 이거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서 자라나는 어린애들 식욕인 생겨서 집에서 주는 음식만으로는 궁금해서 간식이 먹고 싶어서 길거리에서 파는 것 다른 학생들이 둘러서 있으니까 호기심도 나고 해서 여기저기서 막 먹다가는 위험한 병에 걸리기가 쉽습니다. 어느 다른 교회에 나가시는 분이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해요. 목사님, 목사님은 다른 은사 집회 에 교인들이 가는 것을 말리시는 모양인데 그럴 것 없어요. 아니 학교에 다니는 학생도 학교에서 공부하고 과외 수업하지 않아요. 우리도 말하자면 과외 수업 하는 거예요. 재미있는 말이에요.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은혜 받으시는 것 반대할 이유가 있습니까? 성경 배우라고 권하는 교회가 성경 배우겠다고 말릴 까닭이 있습니까? 그런데 바로 배우세요.
교회의 교역자의 지도를 받아서 건전한 데서 배우세요. 어떤 분은 교역자 몰래 슬슬 피해 다니는 모양인데 그러지 마세요. 본 교회의 교역자는 여러분의 심령의 신앙생활을 지도하기 위하여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하게 하려고 힘쓰면 힘썼지 손해 시키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역자를 신뢰하시고 지도를 받으시면 과히 틀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바로 잘 자라기를 원 하고 힘쓰고 있습니다. 말씀에 주의하는 생활하십시다. 어떻게 하면 말씀에 주의하며 상고할 수 있을까요? 몇 줄만 읽어도 졸리는데요.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이 신구약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어요? 예 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사랑하면 이 말씀을 간직하고 이 말씀 읽을 수밖에 없어요. 아직도 말씀의 재미를 모르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부족해 서 그래요. 여러분! 이 성경은 예수님의 사진입니다. 다른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 이 보아도 우리에겐 예수님이 신랑입니다. 다른 사람이 뭐래도 신랑을 사랑하는 신부야 신랑이 세상 남자 중에 최고가 아니겠어요? 그러니 그 사진을 짬짬이 아무리 바빠도 볼 것 아니겠어요? 이 성경은 주님의 편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에게서 온 편지를 아무리 바빠도 읽지 않는 아내가 있겠어요? 읽지 않으면 사랑이 떠난거죠. 시편에는 말씀이 꿀송이 같다고 했습 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에 주의하는 생활을 합시다. 아내가 남편의 편지를 밤이고 낮이고 시간 날 때마다 펴 읽으면 유혹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지 덮어두면 뜻하지 않게 유 혹을 받아 잘못된 길로 가게 됩니다. 시편 119편 9절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 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하였습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지혜와의 만남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잠16:23) / 양희천 목사
유태인들이 독일에 극심한 피해를 받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여행증명서를 갖고 있는 유태인과 갖고 있지 않은 유태인이 함께 길을 가다 독일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의 불심 검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가 골목길로 갔습니다. 게슈타포는 '증명서가 없는 자'로 판단하고 급히 쫓아가 증명서를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안주머니에서 증명서를 꺼내 보여 주었습니다. 증명서가 있는 사람이 오히려 달아남으로써 동료와 자신 모두가 살아난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14:20)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10:16)고 하 였습니다. 지혜에 관한 한 우리는 악으로부터라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지혜를 얻는 것은 은이나 금을 얻는 것보다 낫고 지혜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습니다.(잠3:13-24) 그리고 아랍 속담에 슬기로운 사람의 하루는 어리석은 자의 일생과 맞먹는다 고 했습니다. 삼손은 힘은 있었으나 지혜가 없어 패망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는 일은 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결코 비싸지 아니할 것입니다.(잠4:5-9)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지헤로운 사람입니까?
첫째,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입니다.(시111:10) 이 세상에 서 가장 어리석고 미련한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입니다.(시14:1)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모르고서 어디에서 행복과 기쁨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혹 찾더라도 일시적이요, 허무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이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잠1:7, 잠9:10)입니다.
둘째, 지혜로운 사람은 죄와 악을 떠나는 사람입니다. 죄와 악은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보응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반드시 그 행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다윗 왕은 지은 죄를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으나, 세상사는 동안 그 죄로 인해 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악을 떠남이 명철이며(욥 28:28), 지혜로운 자는 악을 두려워합니다.(잠14:16)
셋째, 시간을 아끼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모든 일이 때가 있고, 기한이 있습니다. 기회를 놓친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5-16)
넷째,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입니다. 나의 나됨의 본질을 먼저 생각합 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먼저 나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누구냐를 바로 알고 자기 나이를 아는 것은 지혜 중의 지혜입니다.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 자기가 생애의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분명히 알 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다섯째, 한계와 분수를 알고 겸손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 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 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내게 주어진 능력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습니다. 남이 한다고 나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소유, 내게 주어진 지식, 내게 주어진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왕 헨리 4세 때의 일입니다.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했는데 부녀자들이 지나치게 사치했습니다. 사치풍조가 곧 망국지본(亡國之本)이라 생각한 왕은 부녀자들이 금붙이와 보석을 지니는 것을 금하기로 작정하고 금령을 내렸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모조리 잡아다가 벌을 줄 수도 없는 문제였습니다. 왕은 생각다 못해 지혜를 짜냈습니다. 새로운 법령을 발표했습니다. "모든 부녀자들이 금붙이와 보석을 지니는 것을 금한다. 단, 창녀에게만은 허락한다." 이러한 내용의 법령으로 인해 사치풍조가 깨끗이 일소되었다고 합니다. 자기 분수를 모르고 교만하고 사치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롬12:3, 고후10:13)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으니라"(잠 11:2)
여섯째, 지혜로운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입니다.(마7:24)
기생 라합은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약 2:25)
그러면 이번에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 앞에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 지식이나 학문, 돈등은 자신이 노력하고 공부하면 얻을 수 있으나 지혜는 주님께서 공급해 주셔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미국의 치즈왕 그래프드는 처음부터 막대한 자산을 갖고 사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차에 치즈를 싣고 다니며 팔던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치즈를 팔러 나가기 전 하나님께 꼭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때마다 '판매전략'에 대한 지혜가 생겨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수많은 트럭으로 치즈를 공급하는 '치즈왕'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래프드는 성공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면 지혜가 생겼고 그것을 실천했을 뿐입니다."
둘째, 지혜로운 사람과 사귀어야 합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부모를 잘 만나야 하고, 스승을 잘 만나야 하고,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훌륭한 지도자와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13:20)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찌니 그 행위를 본 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잠22:24)
셋째, 지혜의 보고인 성경을 매일 읽고 묵상하여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며(시119:105)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며(딤후3:15),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시1:1) 성경과 좋은 책을 가까이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주님을 영접하고 우리 주님과 함께 저 영원한 세계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며 영화로운 면류관을 다 쓸 수 있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좋은 것을 얻는 자
잠 16:16-20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실까 기뻐하시지 않을까? 당연히 복을 주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을주시기를 원하신다. 마태복음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항상 하나님에게서 좋은 것을 얻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좋은 것을 얻지 못한다.
왜인가?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시고 싶어도 주실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주실만한 믿음이 못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그 좋은 것을 받아 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군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께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그 사랑과 은혜를 갚기 위해서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쁨으로 그리고 온전한 믿음으로 섬기면 하나님께서 일군들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어떻게 좋은 것을 얻을까?
첫째, 지혜를 얻기를 힘쓰라. “16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 인생을 살면서 굳이 겪지 않아도 되는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가치관의 혼돈 때문이다. 즉 중요하지 않은 것을 얻기 위해 애쓰고 쫓아가면서 정작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은 우습게 여기고 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지혜는 금이나 은이나 진주보다 훨씬 귀하다. 지혜의 가치를 물질로 따질 수 없다. 3:14에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고 했고, 8:11에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무릇 원하는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고 했다. 지혜와 총명이 없으면 억만금을 가져도 그것을 누리지도 못하고 유지하지도 못한다. 지혜 없는 재물은 오히려 화가 되고 망하게 한다.
지혜란 무엇인가? 하늘의 지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요 신령한 지식이다. 재물로 얻는 기쁨은 유한하지만 지혜로 얻는 기쁨은 영원하다. 하늘의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의 택하신 자 외에는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은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지혜를 얻기 위해 힘쓰고 하나님께 그 지혜를 구하라. 마음이 깨끗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바르게 살기 원하는 사람에게 선한 지혜를 주신다.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지혜를 주신다.
둘째, 악을 떠나야 한다. “17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 죄를 짓지 않으려면 악을 피해가야 한다. 불의와 악에서 떠나야 죄를 짓지 않는다. 더러운 물에서 발을 빼고 나와야 더러워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와 악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 곳에 들어가 있으면서 나는 악에 빠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신앙의 교만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까지도 시험하고 유혹했다. 그렇다면 사탄의 유혹과 공격을 받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 힘으로 죄와 사탄의 공격과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악에서 떠나야 한다.
악을 떠나는 것이 정직한 사람이 가야 할 길이다. 그렇게 죄와 악을 떠날 때 영혼을 지키게 된다. 그래서 시편 1:1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했다.
어떻게 악을 떠날 수 있을까? 6절에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고 했다. 사람이 왜 악한 길에 빠지게 되고 또 거기서 떠나지 않게 되는가? 죄와 악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무엇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인지 무관심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는 믿음이 있으면 과감히 죄와 악을 떠나게 된다.
또 시편 1:2에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면 악을 떠날 수 있다. 무엇이 악한 길이고 무엇이 선한 길인지 분별하는 기준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배우고 익혀서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판단해서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한다.
또는 무엇이 죄와 악의 길인 줄 알면서도 나는 믿음이 좋아서 그런데 가도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교만 때문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악을 떠나지 않는다. 또는 욕심에 빠져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알면서도 따라간다. 그리고 유혹에 빠져서 뻔히 알면서도 악한 길을 따라가고 떠나지 못하고 발을 못 뺀다.
디모데후서 2:19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라고 햇다. 롯의 아내는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실 때에 미련을 두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면 지금 즉시 악한 길을 떠나라.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도 돌아서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지금 떠나라. 그것이 정직한 믿음의 사람의 가는 길이요 나의 영혼을 보전하고 지키는 축복의 길이다.
셋째, 교만을 버려야 한다. “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내용이 입술과 혀의 말에 대한 교훈이고 그 다음이 교만에 대한 교훈이다. 사람이 가장 넘어지기 쉽고 망하기 쉬운 길이 교만이고,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교만이기 때문이다.
11:2에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했다. 17:19에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고 했다. 18:12에도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했다.
교만이 무엇인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자신을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을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고 몰라본다고 불만하고 원망한다. 그래서 잘 싸우고 다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한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 있어도 절대로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만한 사람은 항상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가 있다. 남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잘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그를 끌어내리려고 애쓴다.
이 교만은 사실은 열등의식의 발로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긍지가 없기에 자기를 감추고 지키려고 사람들에게 교만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런 교만이 겉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는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지만 속으로 교만한 생각을 가지기도 한다. 자신에 대해 확신과 자긍심이 있으면 절대로 교만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교만에 빠지지 않고 교만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첫째로, 내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죄 많고 더러운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 이사야, 베드로를 보라.
둘째로,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하고 미련하고 허물이 많아도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사람들은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나를 알아주신다. 그러므로 일부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나를 내세우려고 교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믿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언제나 낮추고 겸손하게 살라.
셋째, 친구를 잘 선택해야 한다. “19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기 원한다면 교만한 사람은 멀리 하고 겸손한 사람과 가까이 해야 한다. 아무리 교만한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어도 절대로 그와 함께 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매튜 헨리의 주석에 보니까 “사람의 교만은 패망의 전조”라고 했다. 즉 사람이 망할 때가 되면 극도로 교만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심판하시고 징계하실 때가 되면 그가 자신을 극도로 높이고 뽐내고 무례하고 거만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을 멀리 하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다. 그래서 시편 1:1에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했다.
망할 사람인줄 알면서도 그와 함께 있는 것은 가장 미련한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교만한 자를 멀리 하고 겸손한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겸손한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교만한 사람을 멀리 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교만한 사람은 외롭게 된다. 교만한 사람끼리도 친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외롭게 된다. 나는 교만하지 않은가 자신을 돌아보라. 겉으로 겸손한 척 해도 내 안에 있는 교만을 하나님은 다 아신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자가 되라.
다섯째,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해야 한다. “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주의하다’는 말은 ‘심사숙고하다, 현명하게 행동하다, 신중하게 처리한다’는 뜻이다. “말씀에 주의한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그 뜻을 따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따라가기를 힘쓰는 것이 바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믿음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언제나 무슨 일을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무어라고 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며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영과 육에 복을 주신다.
그래서 시편 1:2에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한다”고 했고 그런 사람은 “시냇가의 심은 나무처럼 계절을 따라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그의 하는 일이 다 형통한다”고 했다.
사울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다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반면 다윗은 항상 하나님께 묻고 행동했기에 항상 승리했다. 그도 하나님께 묻지 않고 행동했을 때에는 실패하고 범죄했다. 잠언 13:13에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고 했다.
시편 119:67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 했고 71절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했다. 우리가 인생에서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로 말씀을 따라 사는 바른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시기도 한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65절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면 넘어지지 않는다. 그 말씀대로 가면 반드시 복을 받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계속 읽고 듣고 배워야 한다. 항상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 말씀을 따르고 순종할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잠언의 말씀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묻게 한다. 지혜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 의인과 악인을 비교해서 말씀한다. 사람의 행위를 말하지 않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 사람의 삶의 자세와 믿음의 태도가 중요하다. 그가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인가가 중요하다.
마태복음 7:17,18에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고 했다. 이것은 신앙생활의 원리를 말씀하는 것이다. 선한 일을 많이 하면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되어야 선한 일을 하는 것이다. 악한 사람이 일시적으로 위선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악한 것이 드러나게 된다.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이다.
예수를 믿으면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다. 삶의 자세, 자신과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세,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 하나님께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오래 믿고도 삶의 자세와 마음과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바로 믿었다고 할 수 없다. 복음은 능력이기 때문에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계속해서 달라지게 된다. 이 은혜를 구하라.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도 하나님에게서 좋은 것을 얻지 못한다면 얼마나 한심한가? 열심히 일한다고 하면서도 믿음의 준비가 안 되어서 주시는 복도 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주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열심히 섬기면서 또한 충성하는 일군에게 주시는 좋은 것을 받아 누리는 믿음이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