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웰의 자유와 윤석열의 자유 / 강수돌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연설문에는 유독 ‘자유’나 ‘자유민주주의’가 많이 등장한다. 그 정도는 아니어도 동일한 맥락에서 ‘공산’, ‘전체주의’ 같은 말도 잦다. 실제로, 한 언론사에서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문 23개를 분석해 단어별 빈도를 살핀 결과, 자유(71회), 자유민주주의(44회), 국가(36회), 세계·정부·평화(28회), 경제(27회), 북한(25회), 보편적 가치(24회), 공산(12회), 전체주의(8회), 공산전체주의(7회) 등으로 나타났다. 반면, ‘통합’은 총 4회 언급되었다. ‘통상적인’ 대통령의 언어 문법과 사뭇 다르다.
물론, 여기서 염두에 둘 것은, 모든 단어는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맥락과 흐름이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일례로, 자유나 자유민주주의는 전체주의나 감시주의, 특권주의와 대립하는 맥락에서는 매우 정당하고 고귀하다. 반면, 이것이 시장의 자유나 자본증식을 추구하는 민주주의(?)를 의미할 때는 오히려 인간적 자유나 생태계 조화를 해치는 결과를 부르기 쉽다.
파시즘뿐 아니라 영국의 제국주의에도 저항한 오웰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한 평생 파시즘이나 공산전체주의에 대항해 정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일관되게 싸운 조지 오웰(1903~1950)을 떠올린다. 물론, 그가 파시즘이나 공산전체주의에 저항했다고 해서 그를 자본이나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는 시스템을 옹호했다고 보면 오판이다. 세상은 결코 흑백논리식 이분법의 시각으로 설명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발상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지극히 위험하고 해롭다.
오히려 그는 파시즘이나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 이전에 ‘조국(祖國)’인 영국이 제국주의 시스템을 구축, 인도나 아프리카 등 온 세상을 한갓 시장이나 원료, 노동력 공급지로 여기고 맘대로 억압, 수탈, 파괴하는 것에 대해 근원적 저항감을 드러냈다. 그가 (식민지 인도의 대농장주인 조부나 인도에서 식민지 공무원을 한 부친에 이어) 청년기에 ‘제국 경찰’ 신분으로 버마(미얀마)에 머문 5년의 경험이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특히 오웰은 1936년부터 시작된 스페인 내전에 “인간다운 삶”을 위해 참전한 경험(반파쇼 저항군)까지 있다. 그 경험을 기록한 에세이에서 그는 “파시스트 병사 하나가 바지춤을 추스르며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쏠 수가 없었다. 그는 나 자신과 다를 바 없는 같은 인간이었기에, 그런 사람을 쏘고 싶지는 않았다”고 했다. 결코 중립이 없는 전쟁 상황이지만, 그가 추구한 것은 파시즘과의 싸움이었지 인간과의 싸움이 아니었다! 이 깊은 성찰이 곧 오웰의 자유 개념을 형성한다.
오웰의 자유 개념이 좀 더 노골화한 것은 <카탈루냐 찬가> 속의 반파쇼 민병대(의용군)의 분위기였다. 오웰은 특히 노동자 민병대에서 이상적인 자유 사회를 체험했다. 지휘관과 사병은 역할 분담이 다를 뿐, 모든 점에서 평등하고 자유로웠다. 일례로, 사병이 사단장에게 “담배 한 대 달라”고 할 정도였다. 월급이나 대우에도 차이가 없고 체벌도 없었다. 상명하달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규율을 정하며 체계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자유와 평등을 억압하면서도 ‘혁명’을 말하는 ‘이중사고’
한 걸음 더 나가 오웰은 ‘혁명’ 이후의 사회에서조차 자유와 평등이 억압당할 수 있음을 <동물농장>이나 <1984>에서 실감나게 묘사했다. <동물농장>은, 존스라는 인간에게 착취당하던 ‘장원농장’ 동물들이 지도급 돼지들(나폴레옹, 스노볼, 스퀼러)의 지휘 아래 혁명을 일으켜, 인간을 내쫓고 새 세상인 ‘동물농장’을 건설한 얘기다. 기본 이념은 ‘모든 동물이 평등한’ 이상촌이었는데, 7가지 계율(두 발로 걸으면 적, 네 발이나 날개 동물은 친구, 옷, 침대, 술, 살생 금지, 모든 동물은 평등)로 표현됐다. 즉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는 철학 아래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회였다. 그러나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는 말처럼, ‘동물농장’에서도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이상주의자 스노볼이 제거된다. 권력주의자 나폴레옹 아래 갈수록 자유는 억압되고 공포 분위기가 조성된다. 초창기 구호도 퇴색하고 빈부 격차도 커진다. ‘동물농장’이 과거 ‘장원농장’의 오류를 반복하는 셈! 지도부는 이제 인간 흉내를 낸다. 구호 역시,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더 좋다”로 둔갑했고, “모든 동물들은 평등하다”를 넘어 “어떤 동물들은 더 평등하다”로 바뀐다. 오웰은 이런 식으로 자유와 평등을 억압하면서도 겉으로는 ‘혁명입네’ 하는 그 모든 위선들, 즉 ‘이중사고’에 대해 온몸으로 저항했다.
역시 압권은 <1984>이다. 이는 동물농장이 이룩한 혁명 세상을 다시 인간 사회(오세아니아) 안에서 세밀히 비춘다. 이 혁명 세상은 한마디로 ‘감시사회’다. 권력과 정보를 독점한 당과 ‘빅 브라더’가 온 사회를 지배한다. 그 지배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우선, 당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억제코자 중요한 단어들을 금기시한다. 단어 사전에서 아예 예민한 단어는 빼버리는 식이다. 일례로, 나쁜, 탁월한, 훌륭한 등의 단어 대신 ‘좋은(good)’이란 말 하나를 변주해 모두 표현(ungood, plusgood, doubleplusgood)하는 식!
자발적 순종이 완성하는 “자유는 곧 예속”의 전체주의
다음으로, 현재의 당이 늘 옳음을 보이기 위해 과거의 기록(기억)을 조작, 수정한다. 이 일은 주인공인 윈스턴이 행하는 직무로, <동물농장>에선 돼지 지도부 중 참모인 스퀼러가 했던 일이다. 기록도, 책도, 그림도, 심지어 거리 이름까지 바뀌었다. 끝으로, 당은 무지한 대중이 각성하지 못하도록 늘 전쟁 상태를 유지한다. 전쟁은 지배층에게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데, 그간 축적된 사회적 잉여를 전쟁이나 무기로 소모해버림으로써 노동대중이 더 나은 삶을 요구할 근거가 되는 물적 토대 자체를 없애버리는 ‘공식적’ 수단이다.
그러나 혁명 당시와 달리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깊이 느낀 윈스턴은 진정으로 이런 세상을 바꾸고 싶다. 비슷한 입장을 가진 줄리아와 우연히 만나 은밀한 사랑도 나누고 친밀한 관계 속에 세상 변화를 함께 꿈꾼다. 그러나 전방위 감시장치인 텔레스크린이 없는 골동품 가게 2층을 밀회 장소로 쓰던 윈스턴과 줄리아는 갑자기 사상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알고 보니, 평소의 냉소적 태도에 자기들 편이라 굳게 믿었던 오브라이언이 사상경찰의 우두머리였던 것!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에게 말한다. “우리는 수동적 복종이나 폭력적 굴복에 만족하지 않아. 우리가 원하는 건 자발적 순종이야. (…) 우리에게 저항하는 자를 우리가 죽이진 않아. 우리는 그를 개조하고 그 내면을 장악해 다시 만들지. (…) 그렇게 그를 우리 편으로 만드는데, 그저 외관상이 아니라 그가 진심으로, 마음과 영혼을 다해 충성하게 하는 거라고.”
그리하여 숱한 고문과 치욕, 극단적 공포를 겪은 윈스턴은 마침내 포기하고 만다. 그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자기 신념을 버렸을 뿐 아니라 줄리아에 대한 사랑마저 배신한다. 그 대가로 그는 안락한 삶을 얻는 대신 내면은 공허해진다. 그는 끝내, 사상경찰 오브라이언의 의도대로, “빅 브라더를 (순종을 넘어) 사랑”하게 됐다. 이로써 “전쟁이 곧 평화, 자유는 곧 예속, 무지는 곧 힘”이라던 전체주의 구호가 마침내 완성된다. 여기서, 작가 오웰이 일관되게 추구한 자유는 영혼의 자유, 내면의 자유다.
‘이중사고’의 달인 윤석열의 자유는 ‘빅 브라더’의 자유
반면, 윤석열 대통령이 수시로 강조하는 자유는 오웰이 비판한 자유, 즉 표리부동의 자유, 엘리트의 자유, ‘빅 브라더’의 자유에 가깝다. 윤석열의 자유는 비교적 일관되게 반공주의, 자본주의, 시장주의를 추구한다. 그러나 이는 사람의 자유, 정신의 자유가 아닌, 자본의 자유, 권력의 자유라는 냄새를 풍긴다. 그는 이를 ‘자유민주주의’라고 아름답게 표현한다. 오웰이 언어에 대한 포장과 과장을 지극히 혐오한 반면, 윤석열은 언어에 대한 포장 기술이 매우 뛰어난 편이다. 오웰이 (거짓을 진짜처럼 믿고, 자유를 말하면서도 자유를 억압하는) ‘이중사고’를 맹렬히 비판한 반면, 윤석열은 ‘이중사고’의 달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오웰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속에서 발견되는 부자유, 불평등을 가혹하리만치 비판했다고 해서 마치 그가 자본주의나 반공주의를 정당화한 것처럼 착각해선 안 된다. 오웰의 시각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를 막론, 그 어떤 부자유나 불평등도 위선이라 보는 입장이었다. 요컨대, 그가 진실로 추구한 것은 그 어떤 이념에도 구애받지 않는, (사물, 생물, 사람과의) 자유롭고 친밀한 관계였다.
오웰이 최후의 작품인 <1984>를 집필하기 전에 쓴 ‘두꺼비에 대한 단상’은 그런 태도를 잘 증언한다. “나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나무와 물고기, 나비, 그리고 두꺼비에게 느꼈던 사랑을 간직함으로써 조금 더 평화롭고 즐거운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반면에) 철과 콘크리트를 제외한 그 무엇에도 감탄하면 안 된다는 교리가 설파된다면 인간이 남아도는 에너지를 배출할 출구는 오직 증오와 지도자 숭배밖에 남지 않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인간다운 삶을 온 사회에 구현함으로써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리더들은 바로 이런 오웰의 메시지를 진지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특히, 민주‧진보 진영의 비판에 대해 수시로 “거짓 선동과 날조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이라며 증오감만 물씬 발산하는 (‘콘크리트 공화국’ 대한민국의) 윤석열 대통령과 그 주변인들은 ‘지도자 숭배’ 놀이는 그만하고, 세계적 작가 조지 오웰의 작품들을 자유롭게 읽고 깊이 성찰하기 바란다. 물론 이는 다른 정당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별로 기대할 순 없겠지만….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전 마을이장
입력 2023.10.19. 17:45 수정 2023.10.21.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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