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린 슬픔 / 신용목
닫히지 않는
문,
언젠가 모텔에 가서 보았지, 투명해서 닫아도 닫히지 않는 욕실의 그
문, 알몸이 후회처럼 비치는
문, 집이 있어서
빌려주는 집도 있는 거라면
빌려주는 잠도 있는 거라면, 빌려주는 슬픔도 있어서
창 너머
달
알겠네, 세상의 동전들이 왜 하나같이 둥근 것인지
세상의 저녁이 왜
지폐처럼, 한 장씩 지울 수 없는 얼굴을 새겨놓는지
버릴 수 없는지
여기는 갯벌이 있고, 갯벌에 박힌 배가 있고
물이 들면
저만치서 달이 건너옵니다. 나는 모텔 욕실에 걸린 수건 한 장을 들고 나와,
출렁이는 달에 손을 담가
배를 놓아주고
젖은 손을 닦습니다. 배가 풀어놓은 흰 그늘을 적셔 갑니다. 바다를 빌려 갑니다. 얼굴을
동전처럼 던져놓고
모텔로 돌아와
달처럼 수건을 걸어놓습니다.
.......................................................................................................................
이 세상에는 돈이 없어서 전세방 하나 빌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집이 없어서 맨몸으로 젖은 땅을 기어 다니는 민달팽이도 있다. 우리는 우런 것들을 통해서 무엇을 빌리거나 어디에 세 든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주위를 살펴보면 남의 것을 빌리지 않고 살아가는 존재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가 사는 집이나 우리가 거처하는 지구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잠시 빌려 쓰는 공간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니고 있는 몸 역시 신이 이 세상에서 잠시 우리에게 대여해준 육신의 거처일 뿐이다.
신용목 시인의 시 「빌린 슬픔」은 빌려주는 집이 있듯이 빌려주는 슬픔도 있을 것이라는 참신한 발상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언젠가 모텔에서 본 “투명해서 닫아도 닫히지 않는”, “알몸이 후회처럼 비치는” 투명한 욕실 문을 보면서 ‘빌린 슬픔’을 상상한다. 이 시 전반부의 핵심 키워드인‘ 닫아도 닫히지 않는 문’과 ‘빌린 슬픔’을 연관 지어서 시적 상황을 추리해보면, 화자에게는 아마도 자신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닫을 수 없는 후회처럼 비치는 알몸의 기억, 즉 지금은 만날 수 없지만 도저히 쉽게 지워지지 않는 어떤 사랑의 기억이 있었을 것이다. 화자는 그 기억 속 사랑의 대상을 창 너머 둥근 달과 연관 지어서 “알겠네, 세상의 동전들이 왜 하나같이 둥근 것인지// 세상의 저녁이 왜/ 지폐처럼, 한 장씩 지울 수 없는 얼굴을 새겨놓는지// 버릴 수 없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화자는 모텔 밖 가까운 갯벌로 나가 갯벌에 박혀있는 배를 보면서 물이 들어올 때 저만치 건너오는 물에 비친 달그림자를 욕실 수건에 적셔서 오래 갯벌에 묶여있던 배를 풀어주는 의식을 거행한다. 여기서 달과 달그림자는 화자가 한 때 사랑했던 잊을 수 없는 여인의 은유로 볼 수 있고, 오래 갯벌에 박혀있던 배는 그 여인을 잊지 못해서 아주 떠나보내지 못했던 화자 자신의 은유로 읽을 수 있다. 여기서 화자가 수건에 적셔서 모텔로 가져가는“배가 풀어놓은 흰 그늘”은 화자 자신이 비로소 놓아준 사랑하는 사람을 상징하는 달 그늘이다. 화자는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던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바다에 “동전처럼 던져놓고”모텔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시는 마지막 구절에 반전이 있다. 화자가 “모텔로 돌아와// 달처럼 수건을 걸어놓”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겪었던 화자의 슬픔이, 달과 배 사이에서 잠시‘빌린 슬픔’으로는 쉽게 해소될 수 없는 뿌리 깊은 슬픔임을 알게 된다.
- 계간 <시인시대> 2024년 여름호
박남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