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고의 검객이라고 불리는 미야모도 무사시...
그만큼 일본내에서 대중적으로도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는 전설적인 검객입니다.
예전에 일본에서 컴퓨터로 여러가지 기록에 의거,자료를 종합해서 결론을 낸것에 의하면
무사시의 단수는 3단정도 라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반면 주변환경을 잘 이용하고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기술은 최고라고 하네요.
물론 컴퓨터에 의해 결론난것이니만큼 신빙성에는 좀 의문이 갑니다만...
무니사이가 교토에 올라갔을때 당시 교토에서는 요시오카 나오마사가
<후구와 제일의 검법자>라고 불리워지고 있었는데
그래서 장군인 요시아키가 요시오카와 무니사이가 승부를 겨루어 보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첫판은 요시오카가 이기고 둘째,셋째판은 무니사이가 이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군 요시아키는 무니사이의 검술을 칭찬하여
<일하무쌍 병술자>라는 호를 수여하였고,
무니사이도 스스로 그렇게 부르며 다녔다고 합니다.
무사시로써는 뛰어난 무예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셈이지요.
그런데 미야모도 무사시의 전기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것이 없다고 합니다.
<오륜서>도 무사시의 생애에 대해서는 충분히 쓰여진것이 아니고,
<이천기> <단치봉균필기> <격검총담>등이 무사시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어느것이든 무사시 사후 100년쯤 지나서 쓰여진 것입니다.
무사시가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된것은 1604년 봄, 그의 나이 21세때 교토에서
요시오카 일족을 무찌른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먼저 <후구와 제일의 병법가>라고 불리우는 요시오카류의 당주
요시오카 나오쓰나(일명 기요주로)와 교토 근교에 있는 렌다이 들판에서 승패를 겨루어
상대를 혼절시켰으나, 사전 약속대로 목숨은 끊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시오카 문하생들에 의해 문짝에 실려 돌아온 나오쓰나는 그후 회복하기는 했으나
칼을 버리고 삭발,출가하였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나오쓰나의 동생 요시오카 나오시게(일명 덴시치로)가
역시 교외에서 무사시에게 도전했으나
그도 무사시에게 목도를 빼앗기고 그것으로 맞아 절명하고 말았습니다.
정정당당한 결투로는 무사시를 이길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교토의 무인 명문가로써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는지
요시오카의 문하생 수백명이 활,창 등으로 무장하여 무사시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사시는 사전에 눈치채고 상처를 입지않은 자가 거의 없을정도로
철저히 격퇴시켰으며,
나오쓰나의 아들 마다시치로 마저 베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유명한 <일승사 솔밭의 결투>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시오카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요시오카 전>은 대조적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책은 여러가지 의문이나 오류이 있어서 사료로서 믿기 어려운데,
요시오카 가문의 역사에 관해서는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책입니다.
이책에 의하면
마쓰다이라 성주의 주선에 의해 무사시와 요시오카의 형제중 나오쓰나와 먼저 대결을 했는데
격전끝에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무사시는 나오쓰나의 목검에 미간이 스쳐 피가 난 상태였는데
반면 무사시의 검도 나오쓰나의 이마를 스쳤기 때문에
무승부라는 얘기가 나돌았다고 합니다.
무승부라는 말에 화가난 나오쓰나가 재대결을 요구하자
무사시는 거절하고 동생 이번엔 나오시게와 대결하겠다고 했고
나오시게가 약속장소에 나갔지만 무사시는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천기>의 기록에 요시오카 일족에 큰 패배를 안겨서
그후 일족이 몰락의 길을 걷는다고 나오는것과
대조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기록과 정황을 살펴보면 무사시가 승리한것이 사실같은데,
그렇다고 그후 요시오카 일족이 몰락의 길을 걷지도 않습니다.
어쨌든 요시오카 가문과의 대결은 실제로 있었던듯 합니다.
무사시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바로 사사키 고지로 입니다.
사사키 고지로는 날아가는 제비를 떨어뜨린다는
<비검 제비치기>로 유명한 검객이라고 하는데
소설가 요시가와 에이지는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명작을 저술하였고
무라가미 겐소는 <사사키 고지로>를 저술하여
그 작품속에서 각기의 인물을 잘 묘사해 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무사시와 고지로의 이미지는 이러한 작품들에 의한 것인데
무사시의 저서 <오륜서>의 서문에는
무사시가 13세때 신당류의 기베에와 대결한이후 여러지방의 무예자들과
60여차례의 결투를 했고, 단 한번도 지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고지로의 이름은 없습니다.
사사키 고지로는 <이천기>가 중점을 두고 묘사한 검객인데,
고지로는 에치젠 정교사라는 사찰촌에서 태어나
소도의 명인이자 도미다류의 종가인 도미다 세이겡을 섬기면서
지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수업중에 세이겡은 1척 5촌의 짧은 칼을 쓰는데 고지로는 3척여의 긴칼을 쓰면서
달인이 되었고
하루는 세이겡의 동생과 대결해서 승리를 거두고
세이겡의 문하를 떠나 자신의 유파를 창시하여 간류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천기>에 기술되어 있는 호소가와 가문의 검법사범으로서 영입되기 전까지
고지로의 발자취입니다.
또 이책은 무사시와 대결할때의 고지로의 나이를 18살이라고 적고 있는데,
세이겡이 1558~1570년 사이에 활약했고,
그 동생이 1592년,혹은 1594년에 70세로 사망했다고 하므로
1612년에 18세라고 하는 고지로와는 연대적으로 맞지않는다고 할수 있습니다.
실제로 무사시와 고지로의 대결이 있었다면 고지로는 상당히 연로한 검술가 였을겁니다.
그렇다면 혈기왕성한 고지로를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후
분노를 일으켜 쓰러뜨렸다는 무사시의 모습은 좀 엉성하게 되는 셈이지요.
그리고 무사시를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도
검법사범,혹은 관직을 길을 찾아 에도에 온 무사시가 기량이 그렇게 출중했다면
왜 야규류나 일도류등 쟁쟁한 유파와 대결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곤 한다고 합니다.
1584년생으로 추정되는 무사시가 30세쯤 되는 1614년에 오사카의 겨울전투,
1615년엔 오사카 여름전투가 일어납니다.
무사시는 이 전투에서 도요토미 편에 가담하여 오사카성에 농성하였다,
혹은 도쿠가와 편에 가담하였다는 두가지 이야기가 있으나, 모두 확증이 없습니다.
단 한가지 확실한것은 무사시가 아무런 전공도 세우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어찌되었건 무사시는 그후 가능한 진검대결을 피하고
구도자의 마음으로 여행을 계속하게 됩니다.
어느날에 미다케 군베에등 세사람이 여행중인 무사시를 찾아와
점잖게 시합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무사시는 이를 받아들였고 시합을 했는데
군베에의 공격에 무사시가 수세에 몰리고
어느덧 더이상 물러설곳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군베에가 마지막 공격을 가하려고 무사시에게 검을 휘둘렀는데
순간 무사시의 검이 군베에의 귓전을 때렸다고 합니다.
무사시는 상대가 있는 힘을 다해 뛰어들어오는것을
역이용 하였다는 겁니다.
권투로 치면 카운터 펀치인 셈이지요.
무사시는 공격을 멈추고 피를 닦으라고 했답니다.
젊은날의 무사시 였다면 쓰러질때까지 공격을 했겠지만
그는 이미 검의 도를 탐구하는 구도자의 길을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지요.
군베에등 세사람은 자신들이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함을 알고
무사시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카시에 살 무렵 무사시는 두개의 검을 사용하는 이천일류를 개칭하였다고 합니다.
무사시에게는 미야모도 미키노스케,미야모도 이오리,다케무라 요에몽등
세사람의 양자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양자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오리 사다쓰구는
무사시 친형의 둘째 아들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후에는 봉록 4천석의 원로직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무사시 역시 여러차례 관직에 오를 기회가 있었는데
대우문제로 여러차례 좌절되다가
1640년 구마모도 번주에게 초청되어서
17명의 하인에 현미 3백석의 급여를 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영주의 명을 받아 1641년 <병법 35개조>를 저술하였고
2년후 그것을 증보한것이 그 유명한 <오륜서>라고 합니다.
<오륜서>는 그후 많은 무예자뿐 아니라
기업가,정치인등에게 필독서로 읽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