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7년말, 바흐는 바이마르를 떠나 작센 지방의 소도시 쾨텐으로 옮겨가, 그 곳 궁정악단의 악장이 되었다. 이 때 쾨텐의 궁정악단에는 수석(首蓆) 바이올리니스트 시피스 외에 궁정악사의 자격을 가진 첼로의 명수 아벨이 있었다. 바흐는 이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기악곡의 걸작들을 썼던 바, 오늘날 남아있는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전 6곡과 [무반주 첼로조곡] 전 6곡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바흐의 [무반주 첼로조곡]은 쾨텐의 궁정 첼리스트였던 아벨을 위하여 작곡된 것이지만, 그보다는 당시까지 독주악기로 크게 각광을 받지 못하고 있던 첼로의 적극적인 연주기법 개발을 위해, 즉 첼로라는 악기의 교법을 위해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명곡은 바흐가 죽은 뒤 무려 200년 가량이나 묻혀 있어서 전혀 연주되지 않고 있었다. 이 곡이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이상으로 어려운 기교를 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 6번처럼 현재의 첼로로서 연주하기는 매우 곤란한 고음역(高音域)으로 씌어진 곡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이 명곡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현대 최고의 첼리스트였던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의 덕택이다.
카잘스는 12세 때부터 모든 악기를 다룰 수 있을 만큼 비범한 재능을 보여준 천재였었다. 그러나 카잘스가 특히 좋아했던 악기는 첼로였기 때문에, 당시 유명한 첼리스트였던 마드리드의 호세 가르시아에게 특별히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카잘스는 곧 마드리드에 있는 왕립 음악원에 입학하여 첼로를 정식으로 익히는 한편, 실내악에 대한 연구도 체계적으로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겨우 13세때의 일이다.
카잘스는 13세가 되면서부터 첼로주법의 결함을 깨닫고 새로운 기법을 연구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카잘스는 바르셀로나의 헌 책방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버려져 있는 악보뭉치 하나를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무한한 감동을 가지고 듣고 있는 [무반주 첼로조곡]의 악보였던 것이다. 카잘스의 나이 겨우 13세 때 발견된 이 악보뭉치야말로 근대 음악 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 때부터 카잘스는 이 악보를 꾸준히 연구하여 12년간에 걸친 고심끝에 전6곡을 완전한 형태로 연주하는데 성공했다. 실로 200년 동안이나 묻혀 있던 보석의 찬란한 빛이 어둠을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카잘스와 이 모음곡은 하나의 동류항이 되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가 이 모음곡을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연주한 것은 1909년 그의 나이 23세 때였고, 처음으로 녹음을 단행한 것은 나이 60이 되어서였다. 그 이후 지금까지 이 곡은 모든 첼리스트들이 도전해야 할 처음이자 마지막 한계점이요 궁극의 목표이기도 했다. 이 모음곡을 가리켜 [첼로의 성서]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는 결코 과장된 표현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