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지리적 위치에 있어서 우호선린의 관계를 유지하면 어느 나라보다도 사이좋게 지낸 수 있는 이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과 고려를 구백번 이상 침범하여 노략질을 한 최악의 족속이다. 임진 정유 왜란이나 일제 강점기의 엄청난 도륙과 수탈을 생각하면 화산과 원전이 터지고 끓는 용암으로 덮이고 지진과 거대한 해일이 닥쳐 깊이 가라앉아도 몹시 섭섭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들을 그토록 날뛰도록 만든 것도 절반은 우리의 책임이다. 구백번이 아니고 아홉번만 침략하여도, 아니 두 번만 쳐들어 와도 습관성 도벽이라 규정하고 강력하고 철저히 대응하였으면 다시는 더 그러하지 못하였을 것을 내내 방치한 잘못이 더 크다.
그 와중에도 대학자 큰 정치인들이 서로 붕당을 만들어 선왕의 제사를 몇 년상으로 하여야 하는 사소한 문제로 다투어 서로 죽이고 귀양 보내며 국력과 세월을 허송했다. 여자들도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치마를 왼쪽으로 또는 오른쪽으로 돌려 입으며 싸움을 거들었다.
일본과는 영국과 프랑스 정도의 비등한 국력을 유지했더라면 싸우다가 친해지다가 하며 경쟁적 발전으로 상호간에 유익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근세사에서 세력이 지나치게 기울어지면서 더욱 멀어졌다. 요사이 일부 일본 아줌마들이 몇몇 한류연예인들에게 관심을 보이지만 그것도 한때의 광기일 뿐 조금만 지나면 사그라질 일시적 현상이다.
나는 51만원을 아끼려고 미국행 직항편을 타지 않고 일본을 거쳐 가는 항공편을 이용하였다가 이번 대지진의 소동에 휘말렸다.
11일 6시 나리타에 도착예정인 비행기가 착륙 40분 전에 빙글 돌더니 난데없이 삿포로로 돌아가서 내렸다. 큰 지진과 해일이 있었고 사람이 많이 죽고 나리타가 폐쇄되었다고 한다.
공항에 머물면서 인근의 하네다로 날아갈지 여부를 타진하던 항공사가 마침내 하루 머무르기로 결정하고 승객들에게 호텔을 제공한 게 밤 한시가 넘어서였다.

TV를 켜보니 12개 방송사 모두가 정규방송과 광고를 모두 중단한 채 대지진 속보를 보내고 있었다. 사망 실종자 집계가 1000-1100-1300으로 늘어나더니 얼마가지 않아 1700으로 바뀌었다. 나는 한 4~5000명은 되리라 생각했는데 귀국해서 보니 4만에 이를지도 모른다고 한다. 생생한 피해사진들이 계속 올라왔고 세계적 권위의 지진, 해일, 원자력 전문가, 학자들이 나와서 저마다 각종 도표와 참고자료를 제시하며 상세설명을 하고 있었다.
시차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이리저리 옮겨가며 방송을 보다가 나는 화면에서 “패닉(빠니끄)”이라는 표현을 보고 화들짝 잠이 깨어 일어나 앉아 충전 중이던 사진기를 들어 화면을 촬영했다.

지진 패닉이라면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대규모의 무차별 조선인학살사건을 들 수 있는데 일본 어디서도 그것을 반성하거나 사죄하는 목소리는 듣기 어렵다. 확인된 것만도 6000여명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낯선 이들에게 15원 50전(주고엔 고짓센)이라 말하라고 시켜보고는 발음이 어설프면 바로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또 그런 짓을 정당화라도 시키려는 듯이 패닉이 당연한 수순이라는 내용의 해설을 해대는 최고 전문가란 자들의 저의는 충분히 의심스럽고 경멸해 마땅하다.
나는 10여 년 전에도 8월 중순에 히로시마 원폭에 대한 일본 방송의 편향편성에 분노한 적이 있었다. 한 젊고 예쁘장한 여류작가에 대한 르뽀 형식의 단편이었는데 그 여자의 어린 시절 사진이며 꿈 많던 일기장 필기도구 습작노트들을 나열하며 미국의 원폭만 아니었더라면 꽃피웠을 문학적 재능을 애잔한 목소리로 아쉬워하고 있었다. 마치 전쟁과 그 여자의 죽음의 책임이 전적으로 미국에 있다는 듯이. 이런 천하의 악질 지진아들 같으니! 종군 위안부로 끌려가서 죽은 수십만명의 중국과 한국 동남아의 젊은-어린 여자들이 쓴 일기는 몇 트럭은 될 것이다.
다음날도 비행기는 뜨지 못하고 종일 비행장에서 줄서서 기약 없이 기다리다가 밤늦게 간신히 나리타로 날아가서 다시 인근의 호텔에 묵었는데 바로 건물이 흔들리는 여진이 왔다. 처음 두 번은 지나치다가 시각과 진동의 모양을 적어보았다. 진동의 간격이나 종류나 지속시간이 달랐다. 11:35 ~~~(지진)경보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평생 만나는 지진의 양이나 정도의 몇곱절을 일본에서는 몇달이면 맛 볼 수 있다고 한다. 이토록 진절머리 나는 지진에 시달리다보면 머리가 이상해져서 칼 들고 이웃나라로 노략질을 다니게 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각자가 자신의 분야에서 일본인과 대등하거나 우월한 경쟁력을 가지면 일인들의 시각과 대접이 달라지고 다시는 침략을 당하는 일이 없을 텐데 우리는 지레 포기하고 거액을 들여 일본자동차나 일본 사진기를 구입해서 오히려 그들을 크게 도와준다.
나는 이번 일본 지진참사에 따로 성금을 낼 필요가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다. 우리는 그간 지나칠 정도로 일본을 이미 도와주었다. 거의 모든 전문용품들을 팔아주었고 여행가서 돈을 뿌려서 잘 사는 그들에게 부를 보태주었다. 지금 그들이 누리는 경제적 여유에 한국인들의 기여도가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으로는 그들이 그간의 엄청나고 수많은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굳이 일본으로 가서 구조 활동을 하거나 모금을 할 명분이 없다고 본다. 아직도 배가 고픈 듯 더 뜯어 먹으려고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그들을 밝은 낯으로 대하기 어렵다. 역사가 증명하듯 언젠가는 그들이 독도문제를 빌미삼아 전면전쟁을 선포할 가능성도 크다.
옥수수 밭을 다 파헤쳐 여름농사를 망친 흉포한 멧돼지를 쏘아 쓰러뜨렸을 때도 체증이 내려가는 시원함의 이면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는데 일본은 아니다. 멧돼지는 야생의 본능에 충실한 동물일 뿐이지만 일본인은 세계최고의 질서를 추구한다는 위선과 가식을 둘러쓴 가증스런 인격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번 자연재해로 많이 죽었다고 하지만 일본인들에게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우리 동족이 그보다 몇곱절 많은데도 한번도 사과 않고 “통석의 념 어쩌고”하는 왜왕의 빈정거림 말고는 뉘우침도 없는 것들을 동정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본다.
그래, 너그러운 나는 왜왕보다는 곱절로 통석의 념은 보낼 수 있다.
오늘 주한 일본대사가 외교차관을 찾아 “누구보다 빠른 한국 지원에 감명 받았다”고 했다 한다. “쉣”이다. 나는 밤새 일본 12개의 방송을 돌려가며 보았는데 밤에는 새로 찍은 화면이 없어 거의 한시간 간격으로 중복하여 재방송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었다. 그중 한국 구조대에 관한 언급은 단 한차례 4~5초 만에 지나갔고 내가 사진을 찍을 틈도 없었다. 3~4명이 서있는 장면만 잠깐 비쳤고 수색견은 나오지도 않았다. 미국팀의 수색견은 커다란 상자를 내리는 장면부터 자세하게 오래 비쳐졌다.
거짓말에 속아 일본인 그 아무도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한국구조대의 도착”에 일본 국민이 고마워 할 거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 사과도 뉘우침도 없는 그들은 인간과 악마의 상냥한 교잡변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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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악마의 교잡변종 일본을 어찌볼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