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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5:6>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이제 하나님 손에 있는 두루마리의 인봉을 떼시고 그 내용을 나타내실 유일한 분인 예수님을 어제 읽은 5절 말씀에서는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고 표현했고, 오늘 본문 6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요.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이 말씀처럼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아 보이는 어린 양이라고 비유합니다.
지난 1장 13절에서 16절까지 예수님에 대해 표현된 구절을 한번 보지요.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이렇게 강렬하고 막강하고 권세 있는 표현에 비하면 오늘 본문에서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너무 왜소해 보이지 않으시나요? 어쩔 수 없이 양으로 표현한다면 어린 양이 아니라 완전히 성숙하고 힘도 셀 것 같은 어른 숫양이라고 표현하면 안되었을까요?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죄와 사망의 형벌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제물되신 예수님을 표현하는 말이지요. 어린 양은 흠없고 순결한 제물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만왕의 왕이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참된 생명을 위해서는 기꺼이 어린 양이 되어주신 것이지요. 본문에서도 환난과 위험 속에서 고통당하고 두려워하는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담긴 두루마리를 펼쳐서 앞으로 되어질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려주시는 섬김의 일을 하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라는 최고의 위치와 어린 양이라는 가장 낮은 위치를 자유롭게 드나드시지요.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대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라면 만왕의 왕으로 하늘의 영광 보좌에도 계실 수 있고, 또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는 자리에도 내려가실 수 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직분 없는 평신도나 서리집사로 있다가 죽으면 믿음에 실패한 걸까요?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로 있다가 죽으면 믿음에 성공한 걸까요? 그래서 실패한 자에게는 천국에서도 천막집 같은 허술한 곳에 배정되고 성공한 자에게는 궁궐 같은 곳에 배정될까요? 사람에게는 만왕의 왕과 어린 양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커보이겠지만 하나님께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으신 하나님이신데 하나님 앞에서 왕이라는 권력이 무슨 의미가 있고, 천민이라는 낮은 신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목사라는 직책이 무슨 의미가 있고, 평신도라는 명칭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기도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뜻 앞에서는 하늘의 영광이나 십자가에서의 처참한 죽음이나 결국에는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뜻이 담긴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왕관보다 하나님 앞에서는 훨씬 더 가치가 있지요.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그 최고의 영광의 자리에서도 본문에서처럼 여전히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 양 같은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이 땅에서 고난과 박해를 겪으면서 두려움과 눈물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에게 힘과 용기와 끝까지 인내하면서 하늘 나라 영광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여전히 섬김의 일을 행하고 계심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지요. 우리는 이런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좁은 시야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지, 그 좁은 시야에서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깊이 회개해야 할 게 참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어린 양 예수님이시지만 약해보이기만 하지 않지요. 6절 후반부에 보면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예수님에게는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다고 표현합니다. 물론 실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다 비유이고 상징이지요. 일곱이라는 숫자는 계속 반복되는 말처럼 완전함을 상징하는 완전수입니다. 뿔이라는 것은 권위 위엄 권세를 상징하지요. 예수님에게는 완전한 위엄과 권위와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눈은 완전한 통찰력, 모든 것을 꿰뚫어보시고 정확하게 보시는 예수님의 완전하신 안목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일곱 눈은 6절 마지막에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말하지요. 곧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예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의 겉모습과 우리의 외부적인 환경 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과 세상 속에 숨겨진 모든 비밀들을 다 드려다 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 대해 배우기를 중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많이 알고 배운 것 같아도, 또 인생을 오래 살아서 인생의 도를 많이 깨우친 것 같아도 예수님 앞에서는 아직도 인생의 초보자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겸손히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 뿐 아니라 예수님의 안목,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 예수님의 삶의 태도까지 잘 배워서 그리스도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