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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의 일대기에 김좌진 장군의 서자 ¶ 1918~1972 그러나 야인시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심영을 고자로 만든 것을 1순위로 떠올린다 일제강점기 시절 종로 일대에서 일본 야쿠자의 침입에 맞서 대항했던 민족적인 주먹패라고 많이 알려져 있으나 단순히 자신의 구역을 지켰을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광복 이후 좌익에 투신해 전위에 서나 곧 조선공산당을 탈퇴한 후 곧바로 극우익으로 전향하여 좌익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시작한다. 이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김두한 자신은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부친 김좌진 장군이 좌익계열에게 암살당한 사실을 그 때 알았기 때문이라고 남기고 있다. 하지만 김두한이 아버지가 공산당원의 총탄에 스러졌다는 사실 때문에 반공으로 돌아서게 됐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김좌진은 사망 당시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 경향으로 기운 활동가였으며 김두한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조모에 따르면 그는 개성에 있을 때 동네 아이들이 “네 아버지는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 고 물으면 “청국에 있는데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사회주의자이다. 나도 열 네 살만 되면 아버지를 따라가서 훌륭한 사람이 될 것” 이라고 대답하곤 했다고 한다. 러시아혁명의 여파가 밀려오던 당시 사회주의는 민족해방에 우호적인 사상이었다. 심지어 그는 아버지가 공산당에 의해 죽게 된 사실을 해방이 된 뒤 극우단체인 백의사 인물들이 일제 기밀문서를 통해 캐낸 사실을 전해 주어서 알게 되었다고 하나 이미 김좌진 장군이 죽었을 때 그 사실은 신문을 통해 다 보도되었다. 오히려 그는 해방 직후 잠시 좌익에 몸담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엔 진보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가 해방 정국에서 벌인 우익활동은 아버지와는 관계가 없고 그저 주먹 세계의 시류에 따랐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승만 정권에서도 그 포지션을 유지하여 무력을 동반한 우익정치단체 대한청년단에서 활동했으며 노동운동에도 개입하기도 했다. 이 당시의 활동에 대해서는 사리사욕에 앞선 정치깡패, 과도한 극우반공감정으로 인한 탄압배, 애국심으로 인한 결단 등등 의견이 매우 분분하다. 어쨌건 공통된 의견으로는 사람 때려잡는 일에는 기가 막혔으며 상대 진영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를 각색한 픽션 장군의 아들이 나온 이후, 영화화가 대박을 쳐서 김두한을 소재로 한 2차 창작물이 적지 않았다. 90년대 중반에 나온 야화시리즈 (도쿄 야화 제외)가 이 김두한을 소재로 한 게임이며, 2002년에 나온 그 유명한 야인시대도 김두한을 소재로한 드라마. 1.1 김좌진 장군의 친자 논란 ¶ '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고 실제 김두한 본인도 말을 했으나, 이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예를 들어 김두한은 청산리 대첩 때 자신이 7살이라고 했고, 11살 되던 해에 아버지 김좌진이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청산리 대첩은 1920년에 있었고, 김좌진은 1930년에 죽었으므로 그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말이 이상하다. 그래서 김좌진 장군의 아들설을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김두한의 유족에게 유전자 감식으로 진위를 가리자고 제안했으나 유족 측에서 거절했다. 사실, 가족들과 떨어져 해외에서 돌아가셔서인지 김좌진 장군의 자식들에 대해선 논란이 여러 번 나왔다(...). 결론적으로는,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맞다. 자세한 정황증거는 아래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고, 이러한 의혹이 생기는 이유는 김두한 본인의 회고록이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했던 이야기 등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거짓들이 덧붙 여졌기 때문에 진실마저 신빙성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 [1] 김두한의 자기미화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지면상 그의 출생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만 서술한다. 아래는 김두한이 회고록에 서술한 출생과정이다. 각종 소설이나 드라마 등에서도 이 이야기를 정설인듯 다루고 있지만 이 부분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1930년 1월,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하자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등의 국내언론은 이를 크게 보도했고 유족의 동정에 대해서도 관심을 집중했다. 곧이어 조선일보 개성특파원 최문우씨가 바로 이 김두한의 거처가 시외 모처가 아니라 개성이라는 것을 알아내 취재를 해서 1930년 3월 17일부터 2회에 걸쳐 신문에 연재했다. 그의 기사에는 김두한의 어머니 김계월과 김두한의 어린시절 사진까지 실려 있어 신빙성에서 나무랄 것이 없다. 그가 3월 12일 김두한의 집을 찾아갔을 때 김두한은 “아침밥을 먹고 나가 아직 도라오지 안코(...) 어둠컴컴한 방에 두한의 외조모만 병으로 누어 잇섯슬 ”이었다고 한다. 진실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김계월의 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김상회라는 사람으로 명문 집안이었으나 구한말 격변하는 시대에 몰락한 양반이었다. 집안이 파산할 지경에 이르자 결국 김계월은 15세 때 서울의 다동권번(茶洞券番)이라는 기생집에 팔려 가게 되었다. 연도를 계산해보면 1916년 즈음이다. 바로 김좌진이 서울에서 활동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때 기생집에서 김좌진과 김계월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두 사람은 이후 3년 동안 동거했으나 김좌진은 1918년 홀연 만주로 떠나버리고 김계월은 서울에 홀로 남게 되었다. 김두한은 회고록에서 “떠나는 아버지를 붙들고 어머니께서 태아가 있음을 고하자, 아버지는 아들을 나으면 두한이라 하고 딸을 나으면 두옥이라 부르라 하시면서 홀연히 집을 떠나셨다고 후일 어머니가 말해주셨다” 고 하는데 이는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먼저 펴낸 회고록에서는 이후의 어머니와 할머니에 대해 자신이 일곱 살 때 “예비검속됐다”거나 “투옥됐다”고 말하고 그 이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리고 이후에 나온 육성증언에서는 “여덟 살 때 두 분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최문우 기자가 개성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열두 살로 할머니와 함께 있었다. 여기에는 김두한이 감추고 싶은 가족의 내력이 있었다. 남편을 홀로 떠나보낸 김계월은 살아갈 방도가 막막했다. 그래서 결국 노모와 아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어 김좌진을 찾아갔다. 김두한이 자신이 여섯 살 때 만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났다는 것은 그래서 사실이다. 다만 어슴푸레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것이었고 그래서 그가 말하는 연도가 죄다 실제와 틀리게 된 것일 터이다. 그러나 노모의 건강이 악화돼 다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대략 1926년 즈음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서울의 인사동에 거처를 정하였으나 역시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김계월은 다시 기생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어쨌든 안동 김씨 가문의 첩으로서 올바른 처신이 아니라는 주위의 만류로 그만두고 친지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연명했다. 그러나 이도 오래 버틸 일은 아니었고 결국 친지들이 없는 개성으로 가서 기생을 하기로 작정하고 개성으로 온 것이다. 아마도 개성에서의 기생생활도 만만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김계월은 다른 기생 두 명을 데리고 요리업을 하기 위해 함흥으로 떠나버렸다. 최문우 기자가 찾아갔을 때 김두한이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김계월은 함흥에 있다가 다시 더 북쪽의 흥원으로 갔고 아마도 이후 소식이 끊긴 것으로 보인다. 김두한은 서울에 살 때 잠시 교동보통학교를 다닌 적이 있을 뿐 개성으로 옮긴 이후엔 학교를 가지 못했고 그나마 어머니와의 연락이 끊긴 뒤로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이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집을 나와 서울로 와서 청계천 장차구다리 밑에서 거지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두한이 개성 출신의 천애 고아라는 얘기는 이렇게 해서 나왔다. 김두한은 이런 자신의 불우한 가족사를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항일투사였듯이 어머니와 할머니까지 항일투사의 대열에 올리기 위해 일제의 탄압을 받은 것처럼 말을 지어냈다. 이렇게 김두한의 거짓말은 자신의 출생과 성장과정에서 어두운 부분은 삭제하고 자신을 영웅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의 회고록과 육성증언은 바로 그런 거짓말들로 가득 차 있다. 김두한 같은 이름을 가진 대한민국 강동구의 제3대 구청장, 관악구의 제10대 구청장에 대해서는 김두한 (공무원)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김두한(金斗漢, 1918년 5월 15일~1972년 11월 21일)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건달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신 안동이며 호는 의송(義松), 별칭은 잇폰(일본어: いっぽん 입폰[*])이다. 일제 강점기 말 18세 약관으로 경성의 유력한 건달패의 우두머리로 군림하였으며, 일설에는 민족말살정책에 거부하는 등 일본 제국에 저항하였다고[2] 알려져 있다. 해방 후, 미군정기에서는 잠시 조선공산당 산하의 조선청년전위대 대장으로 있었으나, 이내 탈퇴하고 우익으로 전향하여 반탁운동 등 좌우대립에서 반공투쟁을 하였다. 한국전쟁에는 대한 학도의용군 등 전선에 참전하였고 노동운동에도 투신하여 노동운동가로서도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 제3대 국회 · 대한민국 제6대 국회 등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였다. 6대 국회의원에 당선 직후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한국 비료 주식회사가 사카린을 밀수하자 국회에서 삼성 이병철과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며 국무위원 등에게 오물을 투척하였다. 경기도 수원 신민당 후보로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깃불 관련 발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반공법으로 옥고를 치렀고 이후에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해 오다, 1972년 11월 19일에 갑자기 쓰러져 의식불명이 되었다가 11월 21일 오전 9시 5분에 사망하였다. 목차 [숨기기] 1 생애 1.1 생애 초기 1.1.1 출생과 유년 1.1.2 청년 시절 1.2 해방 정국 활동 1.2.1 광복 직후 1.2.2 체포와 석방 1.3 대한민국 초기 1.3.1 제1공화국 1.3.2 한국 전쟁 1.3.3 정치활동 1.3.4 제2공화국 시절 1.4 제3공화국 1.4.1 한독당 내란음모사건 1.4.2 국회 오물 투척 사건 1.5 말년 2 역대 선거 결과 3 학력 4 약력 5 평가 5.1 긍정적 평가 5.2 비판적 평가 6 가족 관계 7 김두한의 수하 8 김두한을 연기한 배우들 8.1 드라마 8.2 영화 9 문화 속 김두한 9.1 소설 9.2 만화 9.3 음반 9.4 게임 10 같이 보기 11 각주 12 바깥 고리 1 생애[편집 | 원본 편집]1.1 생애 초기[편집 | 원본 편집]1.1.1 출생과 유년[편집 | 원본 편집] 김좌진의 피살 이후 아들 김두한 등 유가족이 유린당하며 풍전등화 참상에 대한1932년 12월 23일자 중앙일보 1918년 5월 15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김좌진의 아들로 출생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부자가 실제로 얼굴을 맞댄 것은1924년 7세 때 외조모와 함께 만주에 가서 만난 것이 전부이다. 일설에는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아니다라는 의심을 가지고 친자여부에 대한 확인을 거치기 위하여 김좌진장군의 후손들과 김을동측과의 유전자 검사를 진행할려고 했으나, 김을동쪽에서 거부하였다는 악의적 음해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김좌진장군의 후손을 자처하던 조선족 여인 위연홍은 김을동 측에서 유전자검사를 요구하자 사라져버렸고 가짜로 밝혀졌다. 다음 링크의 김좌진장군의 모친과 부인, 며느리와 손녀가 함께 한 일가족 사진으로 가족임을 확인 가능하며 사진의 손녀는 김두한의 딸인 김을동이다. “기미년에 군정사 창립, 군사운동의 기초, 기미년 만주로 망명한 동지와 악수, 놀라운 소식을 전하던 운동의 기초, 長逝한 김좌진 일생(4)”. 중외일보. 1930년 2월 18일.[3] 외조모와 함께 만주에서 부친 김좌진과 상봉했으나 당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 이후 일제의 간도 참변, 그리고 자유시 참변으로 민족진영과 공산 진영 간에 대립[4] 등으로 경성으로 다시 오게 되었다. 교동공립보통학교에 잠시 다녔으나 조선총독부에 의해 김좌진의 가족으로서 불령선인으로 지목되는 한편 집안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제대로 다니지 못하였고, 개성에서 살다 1930년 10세 때 혼자 경성에 왔으나 거지들에게 잡혀 수표교 아래에서 살아가다가, 원씨 성의 한 노인을 만나 17세까지 성장하였다. "왜놈의 공부는 할 필요가 없다. 곧 독립하니 그때 공부하라."는 원 노인의 뜻에 따라 학교는 다니지 않고 운동에만 전념하였다.[5][6] 1.1.2 청년 시절[편집 | 원본 편집] 1944년, 반도의용정신대를 이끌던 시절, 앞쪽 맨 왼쪽이 김두한. 이후 원 노인마저 죽자 김두한은 서울에서 조직 폭력배들을 때려눕히며 1935년 나이 18세에 우미관을 장악하였다.[7] 또한 개인적으로 1930년 후반 배우 김승호, 동양극장 극단에 소개하고 곤경에 처한 권투선수 정복수, 레슬링 선수 황병관을 도와주기도 했다.[8] 태평양 전쟁이후 1942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인 강제 징용으로 징용장이 발부되었는데, 이때 그는 조선 총독부와 협상하여 경성특별지원청년단(반도 의용정신대)을 조직하였다. 한편, 1944년 전주 이씨이재희와 혼인하였다.[6] 1.2 해방 정국 활동[편집 | 원본 편집]1.2.1 광복 직후[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해방 이후 김두한은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참여하여 일본군 무기고를 점령하거나 치안에 힘을 기울이며 활약하였다. 그러나 곧 한국의 군정기로 인해 건국준비위원회 등 단체들이 해체되자 죽마고우이기도 한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자이던 정진영, 만담가 신불출, 박헌영과의 인연으로 조선 공산당의 전위대장을 역임했으며, 인민군 남조선 사령관 (소장)로 임명하겠다는 제의도 있었다고 한다.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갑동에 의하면 김두한이 전위대장으로 역임 한 이후 민족진영에서는 조선 공산당에 대해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9] 이후 임시정부 계열 비밀결사인 백의사, 그리고 이규갑, 장덕수 등에게 부친 김좌진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김두한은 조선 공산당을 탈퇴하고 우익으로 전향하였다.[10][11] 그 뒤 김구, 이승만, 김규식 명예회장, 유진산 회장, 그리고 김두한을 감찰부장 겸 별동대 총대장으로 하여 대한민청이 조직되었는데, 김두한은 대한민청의실질적 지도자로서 반탁운동 등 좌우대립에서 우익의 선봉장 역할을 하면서 산정호수 김일성 별장습격, 박헌영 납치미수, 국군준비대 습격, 학병동맹 습격,전평 본부습격, 심영, 신불출 습격, 9월 총파업 등에 활약하였고,[12] 김원봉 습격, 좌우합작 방해 (여운형 협박 벼랑에서 낙하사건, 김규식 협박) 등에도 관여하였다. 좌우합작 방해 이후 경교장에서 김구의 격려와 충고 이후에는 임시정부계열 인물들과 대립이 없었다고 한다.[13]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갑동에 의하면 미군정과 경찰에 잡히면 안심했고 별동대에 잡히면 죽는다며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9] 1.2.2 체포와 석방[편집 | 원본 편집] 김두한은 좌우대립 과정에서 5회 피습당했다고 하며 이후 계속해서 좌우대립에서 우익의 선봉장으로서 활약하였으며 청년단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훗날반민특위의 체포대상이었던 박흥식 등 친일파 자본가들 집에 습격하기도 했다고 하며 1원도 사사로운 곳에 쓰지 않았다는 근거로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자신의 집을 저당과 이승만의 친필 휘호를 보여주며 영수증을 썼다고 한다. 1947년 대한민청 사건 등으로 미군정 의해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3심 판관이 사퇴제출하는 등 재판 과정에서도 좌우간에 대립이 극심하였고, 1948년 3월 21일 김구는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14] 1948년 3월 24일 지청천, 이범석등이 존 하지에게 진정하는 등 그의 구명운동을 벌였다.[15] 1.3 대한민국 초기[편집 | 원본 편집]1.3.1 제1공화국[편집 | 원본 편집] 1948년 대한청년단의 감찰국장 겸 건설국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노동운동가로서도 활동했으며 이승만에게서 국민방위군 사령관 등 요직제의가 왔으나 독재노선에 들어선 자유당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이 제의를 난색 하여 거절하였다. 이후 이승만 정부에 의해 암살표적, 김구의 암살 시기인 1949년 6월 17일 국가보안법 등으로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16][17] 1.3.2 한국 전쟁[편집 | 원본 편집]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김두한은 과거 별동대의 대원으로 추정되는 4명에게 극적으로 배를 구해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17][18][19] 이후 인민군과 전투를 벌이며[20] 계속 남하하여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그의 회고록에는 그 당시에 부산에 피난해 있던 고위층이나 사회 유력인사들의 행태에 큰 실망을 느끼고 그들을 응징했다고 하는 부분이 보인다. 1.3.3 정치활동[편집 | 원본 편집] 1954년 5월 20일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당선후 사사오입 개헌 파동 무렵의 이야기하고 있는 민관식, 이철승, 김두한 1956년 7월 27일, (앞) 김두한, (뒤) 조병옥 비롯해 야당의원들 이정재 사단의 국회에 난입 김두한 의원 협박사건에 대한 동아일보 1956년 2월 16일자 1954년 서울 정동 배재학당에서 열린 여야 국회의원 친선 야구경기를 마치고 선수들이 기념사진, 왼쪽은 민관식, 오른쪽 첫 번째는 김두한, 두 번째는 김영삼 김두한은 1954년 5월 20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종로구 을구 4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에서 이승만의 종신제를 위한 무소속 의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김두한은 이승만 정부를 비판한 혐의로 선거법 위반과 부하 김관철에게 충고하며 공포탄을 쏜 것이 원인이 되어 김관철 살해미수로 구속되었는데, 자유당 입당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자유당 의원총회에서 이승만 종신제 추진 핵심인물에 한 명이었던 장경근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21] 1954년 7월 16일에 판잣집철거에 관한 청원에 참여하였다.[22] 이승만 3선 개헌한 때는 개헌한 공고 서명을 거부하였고 국회에서 1954년 11월 27일 비밀투표를 한 결과, 재적의원 203명, 참석의원 202명 중, 찬성이 135표, 반대가 60표, 기권이 7표로 1표 차로 부결을 선포했으나, 자유당은 사사오입 개헌을 일으켰다. 이후 반 자유당의원들은 제명조치되어 탈당하였고 김두한은 무소속으로 활동하였다.[23] 1956년 1월 진보당추진위원회에 조직부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부흥주택대지 2중 매매 혐의로 시경에 내사받았고 진보당을 탈퇴하였고 노농당으로 옮겼다.[24][25] 이승만 정부에 대한 비판하였고 이정재에게 국회 휴게실에서 권총으로 협박을 당했으나[26] 이정재를 호통쳤다고 한다.[27] 야당은 테러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조사위원회를 결성하려고 했으나 당사자 김두한은 야당의 결성을 반대하였다.1956년 7월 27일 지방선거 입후보 방해에 대한 야당 국회의원들이 거리시위를 한 7.27 데모사건에서 김종원 치안국장의 지휘하에 거리시위를 진압하는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였다.[28][29] 시가행진 이후 김두한 등 야당 의원 15명은 이기붕 의장 사직권고결의안을 제출하였다.[30] 계속해서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였고[31] 1956년 10월 5일 이승만을 민족반역자라고 비판하여 국가원수모독죄로 의원징계 받았다.[32] 1956년 10월 13일 배재학원 운동장에서 열린 제1차 여야 민의원 친선 야구대회에 참가하였다.[33] 1957년 5월 25일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야당 시국강연회에서 경호총책임자를 맡았다.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3대 국회 당시 한국불교태고종, 대한불교조계종 대립에서 비구승을 옹호하여 종로구에 대처승의 본부를 두고 있던 종교 인사들에게 탄압을 받았으며 또 당시 민주당 바람 영향 등으로 대한민국 제4대 국회 종로구에서 노농당 후보, 대한민국 제5대 국회 충남 홍성에서 무소속, 6대 국회 종로구에서 무소속 등 연이어 낙선하였다. 이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병옥 선거운동에 참여하였고 전국고학생연맹 등 고학생들을 지원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하며 신기범[34], 이찬오[35][36] 등 학생들과 교류하였다. 4.19혁명 이후 남산의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였다.[37] 1.3.4 제2공화국 시절[편집 | 원본 편집] 1960년 8월 장면이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자 그가 친일파였다는 소문이 다시 확산되었다. 8월 19일 국회에서 장면의 총리 지명동의안 표결이 있기 전 김두한은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나타나 장면의 친일경력을 문제삼았다. 김두한은 장면에게 역사적인 귀한 표를 던져서는 안된다는 내용과 장면의 창씨개명을 적은 문건을 뿌리고[38][39], 장면을 국무총리로 뽑는다면 의사당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외쳤다 옮긴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