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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 16:25-33
25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26 고되게 일하는 자는 식욕으로 말미암아 애쓰나니 이는 그의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
27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 같은 것이 있느니라
28 패역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29 강포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좋지 아니한 길로 인도하느니라
30 눈짓을 하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입술을 닫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
31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33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잠 16:26-33 / 모름지기 사람은 배고파야 일하게 마련.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27) 나쁜 것들은 못된 짓 벌이려고 혈안이 되어 그 입에서 뜨거운 불을 토한다. 28)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다툼만 일으키고 험담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친한 벗 사이라도 이간질한다. 29) 고약한 인간은 이웃을 꾀어 좋지 않은 길로 이끈다. 30) 중상모략을 일삼는 자는 거짓을 궁리하고 험담하기 좋아하는 자는 못된 짓만 꾸민다. 31) 오래 살아 센 머리는 영광스런 월계관이니, 올바르게 살아야 칭송을 받는다. 32) 쉽사리 화내지 않는 이는 용사보다 더 낫고,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리는 이는 성을 빼앗는 장군보다 더 낫다. 33) 제비는 사람이 뽑아도 그 일을 결정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
사망의 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도 있습니다. 인간의 기준과 판단으로는 알 수 없는 길이 있습니다. 보는 것이 전부 옳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바르나(25-30) 사람은 참으로 유한한 존재입니다. 한계가 뚜렷한 존재입니다.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다고 하거나 바른 것을 바르지 않다고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객관적인 사실 보다는 주관적인 느낌에 의존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바른 길이라고 해서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윤리적 도덕적으로 바르지만 영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볼 때는 사망의 길을 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의 관점이나 시선보다 하나님의 관점과 시선으로 바라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곳에 살기 위하여, 그리고 좋은 것을 먹기 위하여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불량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파괴하고 불사르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게 됩니다. 다툼을 일으키거나 이간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29절에 나오는 ‘강포한 사람’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지 않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웃을 꾀어 사망의 길을 가게 합니다. 옳은 것을 알면서도 못 본 체합니다(눈을 감는 자).
백발의 길을 걷는 사람(31-33)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백발’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늙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고 쉽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마음을 다스리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또한 이런 사람은 어떤 결과에 대하여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33절에서 보듯이 무엇인가를 얻거나 결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적용: 화를 내는 것이 옳은 것 같지만 그것이 맹렬한 불과 같아서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한 경험이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화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한 설교자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도대체 지옥은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그 설교자는 그 사람에게 아주 적절한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지옥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 없이 계속 걸어가다가 당신의 인생 맨 끝에 도달하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그 모든 결과는 심판받는 것뿐입니다.
< 설 교 >
마음을 낮추고 말씀에 주의하자
잠 16:16-25 / 김근중 목사
오늘은 우리 온교회가 지키는 성서주일입니다, 여러분도 성서주일을 맞히여 성경을 많아 읽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또한 주님의 음성을 들을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음성에 귀을 기울여볼줄 아는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느 영성학자들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방해되는 두 가지 환경이 있다고 지적을 해줍니다. 첫째는 너무 바쁘다는 것입니다. 너무 바쁘고 서두르는 이와 같은 환경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너무 산만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 우리의 감정, 우리의 삶의 환경이 너무 산만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다시 말하면, 안정성이 없고 집중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안정감이 있는 것은 아주 귀한 은혜입니다. 집중력을 가지는 것도 대단히 좋은 자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안정성을 잃어버리고 집중력을 잃어버리고 모두가 바쁘고 산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우리의 갈등이 깊어져 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대구에서 고속철도를 타고 서울을 가는데, 그날은 아주 피곤한 날이었습니다. 대구가 광역도시 이다 보니까 터미널에 그넓은 터미널 대합실도 아주 좁게 보여지는데 어느 시골아저씨 한 분이 귀가 좀 안 들리는지 대합실 TV의 볼륨을 자꾸 높여가지고 너무 시끄러웠습니다. 그 대합실이 왜 비좁은지 보니까 절반 이상을 식당에 임대를 내주고 큰 매점도 들어서 있어서 아주 좁았습니다. 식당이라는 곳이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사람들이 식사하면서 술도 먹고 시끄럽습니다. 그 대합실에 앉아서 차를 기다리면서 쉬려고 하는데 소란해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철도를 탔는데 그날따라 유독 철도안에 핸드폰을 가지고 전화 거는 사람이 몇 명 있었습니다. 승객이 20명이면 핸드폰이 20개입니다. 저녁차니까 좀 쉬면서 가야 되는데 핸드폰 벨이 심심하면 울립니다. 벨소리는 그나마 괜찮습니다. 전화 받는 사람의 말소리는 아주 듣기 힘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열차나 버스여행을 하실 때 핸드폰 관리를 잘 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특히 전화를 걸 때 상대방이 들어도 거부반응이 안 일어나도록 조용하고 세련된 목소리로 전화를 하세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전화합니다. “무슨 소리! 월말까지 갚아야 돼!” 자기는 의식도 안 하고 고함을 지릅니다. 거래 관계로 이야기 하다가 화가 나니까 그런 식으로 막 합니다. 아무튼 삼천리 반도가 조용한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우리가 귀담아 들을만한 구절이 나옵니다. 19-20절에 보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마음을 낮추는 자와 함께 하는 것이 교만한 자와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마음을 낮추는 이것과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이것이 다 연관성을 가집니다. 마음을 낮추어야 하나님의 음성이 바로 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마음이 교만한 자에게 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을 낮추어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 말씀에 주의한다는 말은 말씀을 행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마음은 낮추고 행함은 높여야 됩니다. 우리는 마음을 높이면 안 됩니다. 마음을 낮추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함은 숨어서 하면 안 됩니다. 순종은 드러나게 하십시오. 순종은 크게 하십시오. 마음은 될 수 있는 대로 하향 지향적이 되어야 됩니다. 겸손 지향적으로 가야 됩니다. 우리는 은혜 받을수록 겸손해 지고 고난이 와도 겸손해 지는 겸손 지향적으로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마음을 낮추라고 합니다. 기도를 할 때도 마음을 낮출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성경을 펼쳐 읽을 때도 우리가 마음을 낮추고 이 말씀을 대하면 하나님 음성이 들립니다. 말씀을 듣는 이 시간에 우리의 마음이 낮추어 질 때 하나님이 내 영에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릴 줄 믿습니다. 마음은 우리에게 이토록 중요한 기능을 가지게 합니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보면 한 때 이 어른이 관상학을 공부했습니다. 그것도 아버지가 ‘관상을 보는 사람은 굶어죽지 않는다’고 농담으로 하신 말씀인데, 하도 못살던 시대에 태어난 어른이기 때문에 관상은 한번 해볼만 하겠구나 싶어 공부를 했는데 상당한 식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는 거울을 펴놓고 자기 관상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험한 관상입니다. 온갖 액운을 타고난 관상입니다. ‘아 이게 아닌데 내가 이런 험한 관상을 타고 나 가지고 무슨 남의 관상을 본단 말인가’ 그래서 접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 김구 선생이 위기를 당할 때마다 관상학에 있는 글귀 하나를 좌우명으로 새겼다고 합니다. “관상은 신상보다는 좋지 못하고, 신상은 심상보다는 좋지 못하다.”라는 말입니다. 관상은 얼굴을 말합니다. 얼굴이 잘나고 아름다운 것은 신체가 건강하고 잘난 것보다 못하고, 신체가 잘나고 건강한 것보다 마음이 건강하고 잘난 것이 낫다는 표현입니다. 결국 이 관상학의 초점도 마음입니다. 관상 한번 보고 낙심하지 마세요. 마음만 고쳐먹으면 얼굴 관상하고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관상보고 길조라고 너무 방심하며 살지 마세요. 마음관리를 잘못하면 아무리 그럴듯하게 생겨도 소용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아주 나쁜 약점이 있습니다. 성공하고 배우고 가지면 교만해집니다. 이게 약점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실패하고 우리에게 어려움이 오면 그만 좌절하고 실망합니다. 이게 우리 마음이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첫째; 교만을 극복하라
교만은 성경이 죄로 규정합니다. 낙심도 성경은 죄로 규정합니다. 우리는 교만하지도 말고 절망하지도 말기 바랍니다. 사울왕은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왕입니다. 그러나 이 왕은 교만해졌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의 충고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일등공신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와서 충고하는 그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을 대항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솔로몬의 기도 중에 한 가지를 보면,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이 백성을 판단하게 하옵소서.”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지혜로운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영어표현에 ‘hearing heart’ 즉 말씀을 듣는 마음입니다. 말씀을 듣는 마음이 지혜로운 마음입니다. 말씀이 들리는 마음이 겸손한 마음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두 남녀는 정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잉태가 일어났습니다. 위기입니다. 요셉은 파혼을 결심합니다. 그때 천사가 현몽하여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 말아라. 그에게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천사가 일러준 말을 요셉은 들었습니다. 마리아도 놀랐을 때 하나님이 일러 주십니다. “두려워 말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 두 남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천사가 와서 일러주니까 들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순종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걸로 끝난 게 아니라 그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모험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것과 이 말씀에 행하는 것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낮추면 하나님 음성은 들립니다. 그러나 이 들려진 말씀을 삼가 순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마음을 낮추어야 되는가 하면, 마음을 낮추어서 하나님 음성을 들어야 하나님이 의도하는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이 교만한 상태에서 음성이 들리면 내 자의적으로 해석합니다. 내 욕심을 이루는 일에 말씀을 적용합니다. 비일비재한 실수들입니다.
둘째; 섬김의 삶
스탠리 팜은 크리스찬 사업가입니다. 이 분은 기도하는 사업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기도 가운데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나의 가장 좋은 것을 드리며, 한 평생 내 사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주여, 최선의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팜에게 들려왔습니다. 마음속에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팜아 너는 평생 종업원으로 일해라.” 처음에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그 말씀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나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의 뜻은 너는 평생 종업원 의식으로 일하고 나를 주인으로 섬기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회장이지만 한 평생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종업원 의식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다 들립니다만, 이 하나님의 음성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게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은 마음이 낮아진 자라야 깨닫는 것입니다. 마음이 높아진 사람은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낮춘다는 것은 회개의 자세입니다.
절망도 교만입니다. 절망하는 사람이 겸손해 보일 수 있습니다. 좌절감에 빠진 사람은 남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좌절감에 빠진 사람은 이야기 잘 안 합니다. 겉으로 보면 아주 겸손해 보입니다. 그러나 절망과 겸손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겸손을 요구하지 교만이나 절망을 요구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교만과 절망은 다 죄악입니다. 겸손만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는 이 말씀은 운명론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선을 이루는구나.’ 이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을 이루게 역사하시려면 내가 낮아져야 됩니다. 내 마음을 낮추고 기다려야 됩니다. 내 마음을 낮추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까지 기도하고 인내하고 기다릴 때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선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셋쨰; 주를 닮아 가라
현실의 고통을 못마땅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를 억압하는 현실의 고통. 지금 우리가 힘든 현실의 고통을 너무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음을 낮추는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고통 중에 우리가 마음을 낮출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고통은 새로운 은사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낮은 마음은 우리에게 많은 마음을 줍니다. 마음을 낮출 때 겸손해 집니다. 마음을 낮출 때 깨끗해집니다. 마음을 높이면 추해집니다. 그리고 마음을 낮추면 더 높은 곳을 하나님이 보게 해 주십니다. 우리 스스로 아무리 높은 곳을 보려 해도 아무리 발돋움을 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낮추면 성령께서 내가 알지 못하던 영의 세계를 보게 해 주시고, 하늘의 것을 보게 해 주시고, 먼데 있는 것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덕군자가 되기 위해서 마음을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말씀에 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에 주의하기 위해서 이 말씀에 행하기 위해서 우리가 마음을 낮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주님이 마태복음 11장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빌립보서 2장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이로서 영광을 비우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뜻을 붙잡았습니다. 왜 내가 이 땅에 메시아로 왔는가? 그것을 늘 붙잡았습니다. 낮아진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낮아지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 나는 광야의 소리라.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 세례요한은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아가 보였습니다. 세례요한이 자기를 높였다면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메시아로 숭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내 뒤에 오는 그 분이 메시아시다. 그분이 오시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분이 천국이니라. 세례요한이 자기를 낮추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드러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낮추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구원의 역사가 성취된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생활의 비법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쁘고 산만해도 우리가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진실로 연말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지금 세상과 우리 환경은 너무 요란합니다. 세속의 소리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제 DMB시대가 열렸습니다. 너무 몰두하면 안 됩니다. 너무 세상소리에 심취하면 하나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세상 소리를 삼가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절제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을 낮추고 삼가 말씀에 행하는 이 축복 안에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백발과 면류관
잠 16:31 / 김동호 목사
얼마 전에 태국을 다녀왔습니다. 태국을 다녀오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태국은 아직도 왕이 있는 나라였는데 백성들이 왕을 존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왕의 생일이 되면 온 나라가 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나라를 단장한답니다. 그리고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답니다. 마치 성탄절 분위기 같답니다.
몇 번의 군부 구태타가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것은 왕이랍니다. 왕이 그 구태타를 인정하면 성공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것이랍니다. 온 국민이 왕을 신뢰하고 존경하고 있기 때문에 왕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태국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데모를 하다가도 왕이 ‘그만하면 됐다. 이제 그만 해라’라고 한 마디만 하면 그날로 데모와 파업이 그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태국은 아직 국민소득이 그렇게 높은 나라는 아니지만 나라가 전반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높다고 합니다. 저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태국이 참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겠습니다만 저는 폭력이 가장 싫습니다. 물리적인 폭력도 물론 싫습니다만 가장 싫어하는 폭력은 인격적인 폭력입니다. 지위와 힘을 이용하여 상대방은 강압적으로 몰아붙이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저는 가장 싫습니다. 그런 일을 당할 경우 저는 언제나 반발합니다. 그것 때문에 많은 손해와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경우에도 반발하곤 했습니다. 저는 공부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의 공부는 너무 강압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부가 늘 재미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공부를 별로 잘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원엘 가서 공부가 재미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학원에서의 공부방식이 저하고 맞았습니다. 내가 알아서 공부하고, 일방적인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하고, 그것을 발표하며 교수와 동료들과의 토론을 통하여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이 저는 좋았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공부를 시켰다면 나도 공부를 잘 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생각을 그 때 참 많이 했었습니다.
저는 제가 납득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일을 높은 지위에 있다고, 어른이라고, 부모라고 무조건 명령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나이 먹는 것을 가장 좋아하고 기다리며 살았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내가 어른이 되면 무조건 어른이라고 나에게 명령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내가 어느 정도 높은 자리에 있게 된 것이 너무 좋습니다. 나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이 없어서 참 좋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저는 우리나라에서 반듯하게 자라기 어려운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공부하나 빼놓고 다른 면에서 크게 문제없이 제법 성공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제가 어른들을 잘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희 부모는 저를 강압적으로 키우지 않으셨습니다. 저의 인격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인간적인 욕심을 가지고 저를 무리하게 훈련시키고 교육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저희 부모님에게는 없으셨습니다. 때문에 저는 제 또래의 다른 친구들 보다 아주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이만큼이라도 되고 창조적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은 전적으로 부모님들이 저를 강압적으로 양육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저도 할 수 있는 대로 제 아이들을 제 마음대로 키우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였습니다. 아이들의 인격과 의사를 존중하고 아이의 동의를 얻어 무슨 일이든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저와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가 부모라고 무조건 강요하고 명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만일 제가 그렇게 아이들을 키웠다면 우리 아이들은 그 어느 아이들보다 많이 반발했을 것입니다.
제가 영락교회에서 동안교회로 임지를 옮기려고 했을 때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제 큰 아이가 저를 따라 동안교회로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아버지가 목사지 자기가 목사냐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자기와는 한번도 의논한 일이 없고 자기의 의견과 형편은 물어도 보지 않고 아버지가 동안교회의 목사로 가니 너는 잔소리 말고 무조건 동안교회를 다녀야 한다는 것에 자기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제 생각으로는 담임목사 아들이 아버지가 시무하는 교회에 나오지 않고 다른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잘 용납이 되지 않았었습니다. 때문에 큰 아이의 그와 같은 고집에 자연스럽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그냥 아버지라는 권위 아닌 권위를 내세워 아이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저는 아이의 의견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 의견을 존중해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동안교회로 임지를 옮겼지만 제 큰 아이는 여전히 영락교회 중등부를 다녔습니다. 제가 주일 날 동안교회로 가는 길에 아이를 영락교회까지 데려다 주곤 하였습니다. 일년 후 큰 아이는 영락교회 중등부를 졸업하고 스스로 동안교회로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평생에 잘한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고방식 때문에 지금까지 아이들과 사이가 별로 나쁘지 않게 잘 지내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목회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제 나름대로의 목회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전도사와 부목사 시절 저의 인격을 존중해 주신 목사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당신의 목회를 저에게 강요하지 않으시고, 제 나름대로의 목회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장을 열어 주셨습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요구하시고 시키시는 일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대개 당연한 일들이었고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제가 알아서 일을 하고 목회를 할 수 있도록 시간과 기회를 주셨는데, 저와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목회를 하였기 때문에 저는 저와 함께 일하는 사역자들도 그렇게 목회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 보면 그와 같은 식의 목회를 기회로 잘 활용하는 목회자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늘 그것이 아쉽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와 사회는 아직도 시키지 않으면, 간섭하지 않으면, 명령하지 않으면, 스스로 알아서 창조적으로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생각처럼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유를 창조와 자기 계발의 기회로 삼지 못하고 오히려 시간을 낭비하고 퇴보의 기회로 삼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만난 최고의 축복으로서의 어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명령하셔도 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명령 받기를 싫어하는 저도 하나님에게 만큼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 중에 하나는 ‘무조건’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제가 유일하게 예외적으로 ‘무조건’을 인정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제가 스스로 이해하고 납득하기 전에는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예외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나에게 그렇게 행동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명령하시기보다 설득하시고, 내가 이해하고 납득할 때까지 기다려 주시고, 내가 동의하고 문을 열어 드릴 때까지 문 밖에서 나를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미신적인 종교에서의 신은 운명과 팔자로 인간을 구속하며 함부로 인간에게 명령을 합니다. 집을 사서 이사 하나를 하려고 해도, 어느 날 가라, 어느 방향으로 가라 명령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네가 스스로 생각해서 자유롭게 결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네가 어디고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만 말씀하십니다.
저는 하나님이 너무 좋습니다. 하나님은 신이신데 피조물인 우리 인간의 인격을 존중해 주시고 창조하실 때부터 우리 인간에게 자유와 기회를 주셔서 스스로의 인생을 창조적으로 살 수 있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 저는 너무 좋습니다.
저는 봉건주의가 싫습니다. 저는 민주주의가 좋습니다. 내일부터 바른 교회 아카데미가 시작됩니다. 바른 교회 아카데미를 통하여 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도 지금 세상에서 가장 봉건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교회를 보다 민주적인 방향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군사정권 때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독재에 항거하여 싸웠던 민주투사들이 좋습니다. 저는 왜 그렇게 민주를 좋아하는 제가 나라가 민주주의가 아니고 독재였는데 그것에 항거하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 교회 일만 하고 있었는지, 왜 그와 같은 일에 대하여 항거하지 못했었는지가 참 이해가 안 됩니다. 저는 철이 좀 늦게 드는 편인 것 같습니다. 아주 많이 늦게 드는 편인 것 같습니다. 민주투사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군부독재가 무너지고 나라가 많이 민주화 된 지금에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저는 군부독재에 맞서서 민주주의 부르짖으며 싸운 분들에 대한 컴플랙스가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그와 같은 민주투사들을 속으로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우리나라 정부가 386 세대 민주투사들을 중심으로 판을 짜고 국정을 운영해 나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저는 조금씩 그와 같은 기대가 무너지면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민주투사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민주투사들에 대한 제 불안의 내용은 민주투사들이 정작 민주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비민주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때는 생명을 걸고 그것을 저지하고 막던 사람이 막상 자기가 국정의 주체가 되었을 때에는 자기가 비판하던 사람들과 똑같이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고 공격하고 탄압하고 무리하게 국정을 자기 스타일과 생각대로, 색깔대로만 이끌어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남의 눈 속에 있는 독재의 티는 보면서도 막상 자기 눈 속에 있는 독재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구태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독재자들이나 민주항쟁을 통하여 정권을 잡은 민주투사들이나 비민주적이고 봉건주의적인 방법으로 국정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똑같은 것이 아닌가하는 깊은 회의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무총리가 해외순방 중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특정 언론 두 곳을 아주 강한 톤으로 비난하여(그것은 비판 이라기보다는 비난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나라를 더 시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총리의 그와 같은 발언과 태도가 국가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총리가 비난한 두 언론에 대하여 여당의 대표가 같은 발언을 하였습니다. 저는 정당의 대표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문제를 놓고도, 같은 언론을 놓고도 이 정당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저 정당은 저렇게 이야기를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좀 복잡한 것 같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 같아 보여도, 저는 획일적인 안정보다는 민주적인 갈등이 훨씬 더 건강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당과 정부는 다릅니다. 정당에서 정부가 나오지만 일단 정부가 되면 정당을 초월해야 합니다. 모든 정당을 품어야만 합니다. 정부가 여당에서 나왔다고 무조건 여당의 색깔만 고집한다면 나라는 깊은 혼란에 빠지게 되고 말 겁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문제가 저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나라가 되려면 각기 다른 입장과 색깔로 문제를 야기하는 정당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수습하고 조정하여 보다 나은 의견과 정책을 만들어내는 유능한 정부가 있어야만 합니다.
저는 정부와 정당이 하나가 되어 일사분란하게 같은 목소리를 내는 나라가 싫습니다. 저는 그래서 봉건주의와 군부독재가 싫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부가 moderator가 되지 못하고 정당 중에 하나 같이 되어 갈등을 수습하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을 더 부추키는 나라도 싫습니다. 북한 정권의 문제는 전자에 있고, 우리 현재 남한 정부의 문제는 후자에 있습니다. 둘은 전혀 다른 것 같으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둘 다 다 민주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총리는 투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총리는 어른이 되어야만 합니다. 봉건적인 어른이 아닌 민주적인 어른(moderator)이 되어야만 합니다. 저는 그 동안 봉건적인 어른이 싫어서 어른의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동안 보수우익 정권의 어른들이 봉건적인 어른 노릇을 잘 못하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현 정권이 그와 같은 봉건주의적인 세력을 무너트린 것에 대하여 동의하고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현 정권이 잘못된 어른을 부정하고 무너트린 것은 좋으나 저들이 막상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어른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불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너트려야 할 것은 잘못된 의미의 ‘어른’이지, ‘어른’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의미의 어른은 있을 때 문제가 되고, 바른 의미의 어른은 없을 때 문제가 됩니다. 우리나라의 문제는 전에는 전자에 있었고, 요즘은 후자에 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다른 아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 빼놓지 않고 한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스승(어른)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른과 스승이 없는 아이는 절대로 좋은 아이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스승과 어른을 만나는 것보다 아이에게 축복된 일은 많지 않습니다.
존경할만한 어른과 스승이 없는 나라는 절대로 좋은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잘못된 어른과 그 어른의 잘못된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지 무조건 어른과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까지 함께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어른과 그 어른의 잘못된 권위를 부정하다가 무조건 좋은 의미의 어른과 바른 의미의 권위를 부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른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스승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요즘도 저의 10년 후와 20년 후를 늘 생각합니다. 저의 10년 후가 지금보다 더 좋기를 희망하고, 저의 20년 후가 저의 10년 후 보다 더 아름답기를 소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이 저의 전성기인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보다 내일, 내일 보다 모래가 더 좋은 삶을 욕심내며 살고 있습니다.
제가 10년 후, 20년 후를 바라보며 욕심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것 하나 밖에 큰 욕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훌륭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민주적인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갈등과 다툼과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moderator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선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발(나이든 어른)이 영화의 면류관(존경받는 어른)이 된다는 것처럼 복된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의로운 길에서만 얻는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의로운 길’이라는 말이 말은 쉽지만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큰 교회의 목사는 혹 노력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냥 이름만 알려진 유명한 목사는 혹 노력하면 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노년을 그냥 편하게만 지내자면 그것도 혹 노력하면 별로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틀림없이 후회하게 될 겁니다. 틀림없이 불행하게 될 겁니다. 틀림없이 외롭게 될 겁니다. 틀림없이 옛날의 전성기만 녹음기처럼 이야기하며 젊은이들에게 짐이 될 겁니다. 저는 제가 그렇게 살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진정한 어른이 되는 부모가 되고 싶습니다. 집안의 모든 문제와 갈등을 통합하고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실력 있는 어른(moderator)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욕심을 내어 기도하여 교회와 교계 그리고 세상의 어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의로운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렵다고 하여도, 꼭 그 길만 고집하여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나의 백발로 영화의 면류관을 삼고 싶습니다.
저와 함께 그와 같은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신앙생활을 해 나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다스려야 삶을 다스릴 수 있다
잠 16장 32절 / 조용기 목사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16:32)
할렐루야~
얼마전만 하더라도 미국에 가면 한국의 고아들을 한사람씩 맡아서 기르자는 광고와 선전이 있었는데 어쩌다가 우리 한국이 이렇게 복을 받아 제3세계 어린 아이들을 돌보자는 필림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게 되었는지 내가 저 비디오를 보면서 아에 눈물이 나려고 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이 짧은 시간 동안에 우리 나라에 이와같은 큰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까지 우리가 거지였는데 이제는 부자가 되고 거지가 된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한번 따라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예수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쁘고 즐겁습니다. 평안합니다. 건강합니다. 만사형통합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서론>
“마음을 다스려야 삶을 다스릴 수 있다” 이 제목으로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정신적인 고통과 육체적 아픔, 생활의 슬픔 등 헤아릴 수 없는 불행의 쓰나미가 항상 다가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고난을 이겨내고 행복하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삶은 한번의 기회밖에 없습니다. 그 한번의 기회에 울고 탄식하고 부정적으로 살아도 일생을 살고 모든 운명과 환경을 극복하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도 일생을 사는 것입니다. 환경은 언제나 똑같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 못하고 사는 사람은 슬프게 살고 극복하고 사는 사람은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경을 다스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될까요? 환경을 다스리기 전에 우리 마음을 다스려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면 환경을 다스리는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32절처럼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성을 빼앗는 것이 쉽습니까? 성을 지키고 있는 군대들이 안에서 끊임없이 저항을 하는데 성 빼앗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그러나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성을 빼앗는 자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면 그 마음에 다스리는 능력이 나아가서 성을 무너뜨리고 마는 것입니다. 성을 빼앗으려고 하기 전에 마음을 다스리면 성이 무너진다는 말은 우리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환경과 운명의 성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잠언서 4장 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생명의 근원을 찾아 동서남북으로 방황하지 말고 내 마음에 바로 생명의 근원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다스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잠언 25장 28절에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으면 도둑놈들이 마음대로 들락날락하고 약탈꾼들이 와서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면 바로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충신이자 학자였던 김시습은 그가 쓴「매월당집」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산속에서 독사에게 물렸어요. 보통 그 독사에 물리면 그대로 죽는데 이 사람은 산에서 일하다가 모르는 사이에 독사에 물렸기 때문에 그저 나무에 긁힌줄 알고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산에서 내려왔는데 산 밑에 있는 땅꾼이 이 사람을 보더니만 “이보게 상처 한번 봅시다.” 보더니 “이것 독사가 물은 상처인데? 이 독사에 물린 사람은 백발백중 죽는 것인데 어떻게 살아있노?” 그러니까 그 사람이 “아이구...” 하더니만 주저앉더니만 그대로 죽어 버렸어요. 여태까지 독사에 물린 줄 모르고 있을 때는 끄덕 없었는데 독사에 물린 줄 알고 이제는 죽었다고 마음에 받아들이니까 죽었다 말이에요. 이것 제가 말한 것이 아니고 유명한 김시습 학자가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마음먹기에 따라 독사에게 물려도 괜찮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어떤 마음과 생각을 가졌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움을 이기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을 다스려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정리정돈되면 환경이 따라서 정리정돈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환경을 아무리 애를 쓰고 힘을 쓰고 정리정돈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은 그대로 내버려 놓고 우리 집을 다스려야 되겠다. 직장을 다스려야 되겠다. 환경을 다스려야 되겠다고 노력을 하고 애를 쓰는데 안되잖아요. 마음이 안다스려지는데 됩니까? 성경에는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리라”했는데 매고 푸는 것이 어디서 합니까? 마음에서 매고 푸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매고 푸는 데로 하늘은 그에 따라서 역사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키고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을 다스리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본론>
1. 마음을 청소하고 정리하라
여러분, 집안을 다스리려면 집안을 청소하고 정리해야 되는 것처럼 마음을 청소하고 다스려야 되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미움, 분노, 시기, 질투, 교만, 탐욕 같은 쓰레기더미를 씻어내고 양심에 고통스런 죄책을 다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야 마음을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고 마음이 완전히 불완전하게 흩어져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데 다스려집니까?
마가복음 7장 21절로 23절에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 속에는 쓰레기더미가 있습니다. 너나 할것없이 우리 가슴을 활짝 펴고 들여다 보면 쓰레기더미가 다 있어요. 남에게만 쓰레기더미가 있다고 손가락질하지 말 것은 내 속에 쓰레기더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청산해야 돼요. 쓰레기더미를 어떻게 청산합니까? 우리가 회개를 통해서 청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면 깨끗하게 해주세요. 입으로 그냥 고백해서 고백이 잘 안되거든 종이를 가지고 죄를 하나, 둘 적으십시오. 적어서 그 죄 항목을 읽고 난 다음에 주님 앞에서 쫙 쫙 찢어서 쓰레기통에 집어 넣으세요. 그리고 마음 속에 죄 다 청산했다. 그러면 더 확신이 마음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절로 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세상 사람이 알지 못하는 샘물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물질적으로 넘쳐나는 물로써 때는 씻지만 마음은 못 씻는데 우리는 마음을 씻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갈보리산에 매달려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통해서 흘리신 피를 믿고 받아들이므로 우리 죄가 다 용서함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더러운 죄만 자복할 뿐 아니라 부정적인 생각을 정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시기, 분노, 우울한 마음, 살고 싶지 않은 부정적인 생각, 이런 생각을 다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나는 행복하다. 나는 기쁘다. 나는 즐겁다. 나는 평안하다. 나는 만사형통하다. 이 말을 하라는 이유는 부정적인 생각을 쫓아내는 방법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저보고 그런 질문을 해요. 행복하지도 않은데 왜 자꾸 행복하다고 그럽니까?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행복 안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하라.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데 뭐라고 행복하다고 말할 필요 없지 않느냐. 행복 안하니까 그것을 쫓아내기 위해서 나는 행복하다. 안기쁘니까 슬프니까 나는 기쁘다. 평안하지 못하니까 나는 평안하다. 건강 안하니까 내가 건강하다. 그래서 부정적인 것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을 그냥 두고는 마음이 정리정돈이 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5절로 6절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을 따라서 여러 가지 부정적 생각이 마음을 꽉 점령하고 있을 때 우리는 영의 생각을 쫓아서 예수님 이름으로 긍정적인 시인을 하므로 이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마음을 새롭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낡은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분별할 수 없어요. 마음이 맑아져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을 정리해서 마음을 깨끗이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리처드 칼슨은 심리학자로 오랜 기간 동안 심리치료 상담을 한 유명한 의사가 있는데 그가 이러한 일을 하게 된 것은, 아주 친했던 친구의 죽음을 보고 마음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 친구와 그는 열심히 인생을 살겠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는 늦게 누우며 손실을 아끼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결혼 날짜를 잡아 놓고 결혼 하기 전에 덜컥 죽어 버렸어요. 거기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누우며 그렇게 수고의 떡을 먹고 물을 마시며 고생했는데 순식간에 죽어버리고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 인생은 쉬지 않고 고생을 하며 노력만 한다고 사는 것이 아니구나.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 되겠다.” 그래서 그는 사는 방식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빨리빨리 대신에 삶의 속도를 늦추고 여유를 가지면서 오히려 예전보다 더 생산적이고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 말을 들으니까 동양 사람, 한국 사람, 일본 사람, 중국 사람, 몽고인 이 중에 한국 사람을 어떻게 골라 내느냐. 그러면 가만히 보고 무엇이든지 빨리빨리 빨리빨리 하거든 한국 사람인줄 알라고... 한국 사람은 무엇이든지 빨리합니다. 밥도 빨리 먹어요. 일도 빨리하고 걸음도 빨리 걷고... 한국 사람끼리 있을 때는 몰라요. 다 빨리하니까 누가 빠른지 모르는데 외국 사람하고 살아보면 확실히 외국 사람은 슬로우에요. 그런데 빨리 한다고 반드시 일이 잘되는 것이 아니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활에 여유를 가져라. 이 말은 제가 제일 먼저 들어야할 사람입니다. 성격이 빨리빨리가 되어서 어제도 우리 성도들하고 밥을 먹는데 우리 권사님이 나를 탁 치면서 좀 천천히 잡수세요. 뭘 그리 급하게 먹습니까? 그러면서 내가 보니까 자기도 급하게 막 먹고 있으면서 날 보고서... 급하게 먹는 것 위장병만 생기지 좋은 일이 아니구나. 여러분 제가 설교하기 전에 강단에 여기 앉아있는데 어찌 졸음이 오는지 애를 먹었어요. 지금 졸음이 오는 것을 물리치고 나왔는데 왜냐, 아침 5시에 출근할 필요가 없는데... 아침 새벽 2시, 3시에 일어나서 다 옷 갈아입고 4시 반이면 출근해 가지고서 5시에 도착하니까 내 주위에 있는 비서실 직원들도 다 고생 죽도록 하고 눈을 부비고 와 있지. 그렇게 해서 한평생을 살아왔습니다. 목회할 때는 새벽기도하기 위해서 반드시 5시에 교회 나와야 되고 이제는 목회 그만두고 천천히 쉴만 한데도 불구하고 못쉬는 것이 성격인데 그런다고 일이 다 잘되느냐. 천천히 7시에 일어나는 사람이나 5시에 일어난 나나 별차이가 없어요. 그러니 여러분은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인생을 사십시오. 우리가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애쓰고 힘쓰고 빨리빨리 해야 되는줄 아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마음을 정리정돈 하고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살아도 마음 속이 행복하면 환경이 행복한 환경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먼저 버려야 할 사소한 생각으로는, 불행하다는 마음과 마음의 고통, 슬픔, 상처 등 주로 부정적인 것들을 다 재껴야 돼요. 화, 불안, 분노, 비난 등 부정적인 감정들도 지금 당장 버리고 망설이고, 걱정하고, 불신하고, 갈등하고, 조급증, 적대감 등의 행동을 버릴 때 마음이 그런 것으로부터 해방되면 행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 가운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쓰레기더미를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내고 우리 마음을 십자가 구속의 은혜로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아까 비디오에 보니까 몽고에 있는 애들이 그 쓰레기더미 속에서 살고 쓰레기를 뒤지고 그것으로써 하루에 5천원 벌어서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는게 아니에요. 완전히 동물과 같이 살아요. 그런 속에서 행복하다고 볼 수 없어요. 우리는 그 쓰레기더미 속에서 살지 않는데 바깥은 좋은 집에서 잘 정돈된 가구를 갖다 놓고 살지만 마음이 그런 쓰레기통이 되어 있습니다. 이 마음이 쓰레기통이 되어 있으니까 바깥이 아무리 좋아도 행복하지 않아요. 우리가 마음을 정리정돈하기 위해서 항상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고 보혈로 씻고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내어 쫓아야 돼요. 나는 행복하다. 나는 기쁘다. 나는 즐겁다. 울면서라도 나는 평안하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잘된다. 형통하다. 그렇게 하면은 그 생각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서 반대적인 생각을 밀어내 주는 것이니까 마음에 그런 생각을 통해서 우리가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마음이 정리정돈 되어서 기도해야 힘있게 기도가 상달되지 마음이 아주 쓰레기더미 같이 혼잡하게 되있는 상태에서 기도해서는 기도응답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마음 속에 기뻐하고 경배하며 즐거움으로 꽉 들어찬 마음을 가지고 살면 마음을 다스릴 수가 있어요. 여러분 음악가 중에 제일 유명한 음악가 여러분 기억나는 분이 누굽니까? 베토벤. 이 베토벤은 젊었을 때 예수를 안믿었습니다. 그는 인기와 명예를 가지고 있고 수많은 청중 앞에서 박수 갈채를 받고 했지만 그 마음에 공허를 이길 수가 없어요. 마음이 허무하고 연주를 하고 혼자 집에 돌아가면 마음에 슬픔이 꽉 들어찼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마음 속에 들어오자 그 인생이 완전히 달라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마음에 공허가 사라지고 슬픔이 사라지고 기쁨이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교향곡 9번으로 그 4악장 일부가 찬송가 64장이 들어 있습니다. 그가 은혜 받은 후, 예수님 안에서 누린 기쁨을 그린 것이 바로 찬송가 64장 “기뻐하며 경배하세” 이 찬송을 교향곡에 넣은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 가운데 늘 새로운 영감을 얻어 많은 불후의 작품을 남길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함께 베토벤이 작곡한 찬송가 64장을 한번 불러볼까요?
♬ 기뻐하며 경배하세 영광의 주 하나님 / 주 앞에서 우리 마음 피어나는 꽃 같아
죄와 슬픔 사라지고 의심 구름 걷히니 / 변함없는 기쁨의 주 밝은 빛을 주시네 ♬
여러분 다 베토벤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마음에 예수님이 들어오자 주께서 마음에 주신 변화가 얼마나 큰지 그것을 음악으로 표시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쁨과 행복 가운데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십자가 구속의 은혜로 가득 채워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보혈로 씻고 하나님 은혜로 마음에 가득 채우면 어떠한 환경에도 행복과 기쁨을 갖고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앞에서 얻은 기쁨은 세상으로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마음을 다스리면 행복이 환경에도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2. 희망찬 꿈을 그리고 바라보라
둘째로, 희망찬 꿈을 그려보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꿈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적은 꿈, 큰 꿈, 살아있는 사람은 다 마음에 꿈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망찬 꿈을 갖고 살아야지 꿈이 언제나 비관적이고 절망적이면 절대 행복하지 않아요. 비관적인 꿈을 가진 사람들이 요사이 자살을 많이하지 않습니까? 대학생들도 대학교수도 자살을 하거든요. 그러면 희망찬 꿈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느냐.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고 희망찬 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절망을 십자가에서 청산해 주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희망찬 꿈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 꿈은 왔다갔다 왔다갔다 변화무쌍 합니다. 큰 돈을 벌겠다고 애를 써서 돈을 벌고 난 다음 대개 건강 잃어버리고 환경이 어려워지면 순식간에 돈 다 날라가 버리고 빈손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우리가 실망하지 않는 것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꿈은 희망차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 쳐다보고 용서와 의의 꿈을 언제나 꿀 수 있고 거룩하고 성령충만한 꿈을 꿀 수 있고 치료받고 건강한 꿈을 꿀 수가 있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얻을 꿈을 꿀 수 있고 부활 영생 천국의 꿈을 꿀 수가 있습니다. 꿈은 꿈이니까요. 그래서 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꿈을 꾸고 나아가면 그 꿈이 여러분을 그 세계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것은 오해하지 마십시오. 꿈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 꿈이 여러분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을 갖는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성경에 말한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나아가면 그 꿈이 우리를 예수께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전의 죄악된 삶, 부패한 삶, 병든 삶, 패배와 실패, 낭패, 가난, 저주의 삶. 죽음의 고통의 삶이 다 사라지고 새로운 삶,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노력하고 힘쓰고 애쓰고 되는 것이 아니라 꿈이 여러분을 그 세계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믿으면 성령이 오셔서 그 꿈대로 여러분을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은즉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 대신에 복된 모습을 예수님 안에서 바라보십시오. 환경을 바라보고 나는 가난하다. 못산다. 빈손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것을 마음 속에 상상하고 바라보면 그대로 끌려가고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십자가를 쳐다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가난과 저주를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디에서 그런 말씀을 얻을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말씀을 얻을 수 있고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부요하게 되는 꿈을 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꿈을 꾸면 꿈이 여러분을 그 세계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죄와 마귀와 고통의 종 대신에 자유로운 삶을 얻게 되는 여러분 모습을 꿈꿀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께서 죄와 마귀와 고통에서 여러분을 해방시켜 주시고 자유를 주신 모습을 꿈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꿈꾸면 그대로 이끌어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쳤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고치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영혼을 고치고 마음을 고치고 육체를 고치고 생활을 고치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가 치료받고 고침받고 변화받는 모습을 상상하면 성령께서 그 길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과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되어요. 자꾸 못살고 안되고 죽는 것을 생각하면 꿈이 여러분을 못살고 안되고 죽는 것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을 꿈꾸고 심신의 병 대신 건강한 삶을 꿈꾸고 하나님이 복된 삶을 마음 속에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편 103편 1절로 5절과 같은 우리가 됩니다.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런 꿈을 꾸라구요. 저가 내 모든 죄를 다 사해 주시고 내 병을 다 고쳐 주시고 내 생명을 파멸에서 건져 주시고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해주신다. 이 성경말씀을 읽고 이 말씀을 꿈꾸고 감사하면 그러한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91편을 외우면 굉장히 좋아요.
“야훼는 나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그 깃으로 너를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거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그 다음에 놀랍지 않아요? “너는 밤의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하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 인이 네 곁에서, 만 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말씀을 읽고 외우고 꿈꾸면 그 말씀이 여러분을 이끌어 갑니다. 매일 이 말씀을 읽고 꿈꾸는 것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성경 말씀 가운데 극히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시편 23편입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것을 읽고 외우면서 꿈을 꾼다 말입니다 머릿속에... 그냥 입술에 발린 말로 말하지 말고 내가 꿈을 꾸어요. 내가 푸른 초장에 누워서 만사형통하는 꿈을 꿔요. 내가 쉴만한 물가에 나가서 마음에 휴식을 갖는 평안을 느껴요. 주님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면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이 넘쳐나서 행복하게 되고 기뻐 즐거워하는 나를 상상해야 돼요. 크고 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집에서 늘 당하잖아요. 집에서 가정문제, 생활문제, 사업문제로 사업에 어려운 문제를 당해도 나 안망한다. 안망하는 나를 상상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함께 계셔서 지팡이로 이끌어 주시고 막대기로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 상상을 해요. 꿈을 꾸어 보아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상상하고 꿈꿀 수 있는 재료가 바로 하나님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상상하고 꿈꿀 재료가 없어요. 그러므로 상상하고 꿈을 꿀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말씀에 약속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읽고 상상하고 꿈꾸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갭니다. 말씀이 여러분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꿈이 없는 사람은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해요. 그러나 아무리 둔한 사람도 꿈이 있으면 지혜와 지식과 총명이 개발되어서 큰 일을 하게 되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항상 꿈을 잃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늘 가까이 하시고 말씀을 읽고 상상하고 꿈꾸십시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면 그 마음을 다스린 대로 환경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환경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다스린 마음에 정리된 그것이 환경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 밖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3. 믿음을 활용하라
셋째로, 우리는 믿음을 활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했는데 세상 사람들은 믿을 데가 없잖아요. 지위, 명예, 권세, 돈 이런 것을 믿지 하나님을 못믿는 것은 하나님 모르니까. 그러나 극히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믿을 데가 없기 때문에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바로와 온 군대가 그들을 다 잡으러 나왔는데 홍해수가에 와서 올데 갈데가 없습니다. 군대도 없고 무장도 안되고 바로왕의 군대를 대항할 수도 없습니다. 다 잡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을 했습니까? 모세를 따라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었습니다. 너희는 오늘날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 오늘 내가 본 애굽 군대를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싸워서 홍해수가 갈라졌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적인 일이 일어날 것이면 하나님 믿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 감각적으로나 경험 등으로나 이성적으로나 지적으로 가능한 것을 믿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지요. 불가능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믿는다고 기도할 때는 반드시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적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기적이 일어나야 돼요. 내가 영적으로 믿으면 영적인 변화의 기적이 일어나야 되고 육신적으로 믿으면 육신적인 치료가 기적적으로 일어나야 되고 생활적으로 믿으면 생활에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은총이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은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데 무엇을 믿을까요? 그렇게 하는 사람 많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백화점처럼 많아요.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 레마가 되어서 감동을 주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해요.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가 간증 하나를 들었는데 심장과 폐와 위장에 달려있는 근육이 살아있어야 심장이 뛰고 폐가 숨을 쉬고 모든 기관이 움직이는데 여기에 움직이게 하는 칼슘이 반이나 줄어서 죽게 되었어요. 그래서 의사들도 다 수술도 못하고 손쓸수 없는 희귀병으로 오래 못산다고 했는데 교회 나와서 기도하고 난 다음에 마음 속에 성령께서 레마를 주셨어요. 안 죽는다. 너 재산 반을 주님께 드려라. 황당한 일 아닌 것입니까? 그래서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서 내가 교회에 재산 반을 헌납하겠습니다. 그런데 과부인데 아들 둘이가 있어요. 목사님은 뭐라고 생각했느냐면 아, 자기가 죽으면 아들 키워달라고 미리 떠맡기는구나. 그래서 목사님은 그것을 아주 싫어했답니다. 왜냐하면 재산 반을 가지고도 아들을 한평생 어떻게 돌봐줍니까? 그런데 아이 안받으렵니다. 그냥 집에 가지고 계세요. 기어코 내가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그래서 재산 반을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또 성령께서 마음 속에 말하기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기적이 일어났다. 별로 신앙이 깊은 여자도 아닌데 하나님께 그 레마를 받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하니까 병원에서 검사해 보고 의사가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면서 뭘 먹었느냐고 그래서 교회 나가서 기도했다고 하니까 아주 정상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데 그 병이 가짜로 나은 것이 아니라 그 병이 낫고 지금 7년이 지났는데 그 7년 전보다 지금이 더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 아닙니까?
잠언 4장 20절로 22절에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말씀이 마음 속에 들어오면 그것이 생명이 되고 온 몸에 건강이 되는 것입니다. 너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이루리라. 우리는 정말로 튼튼한 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믿어지면 기도하면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것은 기적을 기대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내가 믿는다는 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보고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하고 담대할 수가 있지요.
창세기 13장 14절로 15절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지금 내 땅이 아닌데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바라보고 마음에 내것이라고 믿고 선언하면 너에게 주겠다. 그런데 가나안 땅 동서남북 땅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다 하나님이 다 주신 것입니다. 바라보라. 여러분은 뭘 바라봅니까? 건강을 바라봅니까? 계속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믿으십시오.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십시오. 바라보고 믿고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입으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고 시인하면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본다. 인간적으로 바랄 수 없는데 여러분은 바라고 믿어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러므로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달은 금번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나아질 수 있는 것은 여러분 마음속에 바라보는 법칙을 따라 바라보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음에 바라보고 믿으면 여러분 운명과 환경이 믿음을 따라 변화되는 것입니다. 자꾸 내 팔자가 나쁘다. 내 환경이 나쁘다. 시대가 나쁘다.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그 모든 것은 마음을 다스리면 자동적으로 여러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난 다음에 다스린 마음으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명령하면 큰 변화의 역사가 여러분 환경에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20절로 22절에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마음으로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아직 안 나았습니다. 혈루병으로 피를 철철 흘리며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예수님의 옷가에 손만대면 낫는다고 바라보고 믿었는데 손을 대자마자 나아버렸습니다. “예수께서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보십시오. 먼저 믿음이 있고 그 다음 구원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서 담대하게 행하십시오. 용기를 잃어버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에 바라보고 믿고 행하면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9절에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야훼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예수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있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분이 여러분과 같이 계시므로 여러분 마음 속에 예수님을 바라보고 강하고 담대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제일 나쁜 것이 두려움인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놀라면 주님은 여러분을 도와줄 수 없고 사탄이 여러분에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려움과 놀라움은 사탄을 청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욥이 패가망신하고 온 전신이 동양성 문둥병에 걸려서 기왓장으로 긁으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내 무서워하는 것이 내 몸에 왔고 내 두려워하는 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욥이 잘 나갈 때 마음 속에 잘못된 것을 바라보았다 말입니다. 마음 속에 자기가 패가망신하고 문둥병이 걸릴 것을 꿈꾸었다 말입니다. 그것이 두려움과 공포가 되어 있었는데 그대로 이루어졌어요.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긍정적인 일이 생기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부정적인 것이 생기기 때문에 부정적인 것은 당장 회개하고 쫓아내 버리고 긍정적인 것은 마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마음에 꿈꾸고 믿고 시인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5절에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4. 말로써 마음을 다스려라
네 번째, 말로써 마음을 다스려야 되는 것입니다.
꿈과 믿음을 말로써 시인하면 꿈과 믿음이 마음을 점령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이 제일 중요한 것은 말을 통해서 생각하고 말을 통해서 바라보고 말을 통해서 믿고 말을 통해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말에 대해서 깊이 생각 안하는데 말이 여러분을 붙잡고서 좌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는 것이 가만히 있으면 그 믿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 믿습니다. 말로 하면 믿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꿈도 마음 속에 가만히 혼자서 어떻게 꿈꿉니까? 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무슨 꿈을 꾸느냐.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말을 하면 그 꿈이 선명해진다 말입니다. 말을 하는 것이라구요. 가만히 있으면 무엇인지 모르지만 나는 백화점에 가서 봄옷을 사 입겠습니다. 멋있는 봄옷을 사 입겠습니다. 말을 해보십시오. 그 꿈이 마음에 아주 확실하게 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자꾸 말로써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기쁘고 즐겁습니다 하면 마음 속에 꿈이 행복한 꿈과 즐거운 꿈이 마음 속에 그려져요. 말을 안하면 안돼요.
잠언서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힘 있지요. 혀가 힘이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그냥 말이 공중으로 날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혀가 그 열매를 맺어서 여러분 잡숫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2절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말이 온 몸을 굴레 씌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이라는 자체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 모릅니다. 말을 통해서 믿음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돼요. 내가 어느 교회에 방문을 했는데 목사님이 나를 보고서 “목사님 창문을 열어 보십시오.” 그래서 “왜?” “저기에 뭐가 보입니까?” 봄꽃이 확 피어 있는 것이 보여요. “왠 꽃이 저렇게 피었나?” 그랬더니 “목사님 온다고해서 내가 시장에서 가서 꽃나무를 사가지고 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심었는데 어떻다 말입니까?” “꽃나무를 심고나니까 어디에서 왔는지 나비들이 이렇게 많이 날라와서 꽃의 향기를 맡는데 나비는 내가 안 사왔습니다.” 꽃을 갖다 심어 놓으니까 나비들이 날라왔어요. 그래서 탁 마음 속으로 무릎을 쳤습니다. 왜냐하면 마음 속에 여러분이 긍정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꿈과 긍정적인 믿음과 긍정적인 말을 해서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놓으면 성령이 날라와요. 분위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쓰레기통을 갖다 놓으면 쥐가 와요. 쥐가 오지 말라고 해도 쓰레기통을 갖다 놓으면 쥐가 오고 벌레들이 와요. 그러나 꽃을 갖다 놓으면 나비와 벌들이 와요. 마음에 어떠한 분위기를 만드느냐에 따라서 환경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여러분께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으면 좋은 일이 한없이 생겨나요. 그런데 이 마음의 분위기를 잘 만드는데 가장 공로를 세우는 것이 말입니다.
로마서 10장 8절로 10절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아무리 마음에 믿어도 말 안하면 구원에 이르지 않아요. 처음 믿는 사람 일어나서 기도를 따라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일어났지요. 그러나 내 말을 따라해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말이 그렇게 중요해요. 마음의 긍정적인 분위기 속에 하나님께 집중적으로 기도하면 기도가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정적인데서 아무리 기도해봤자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지 못해요. 공중 권세잡은 마귀에게 막히고 말아요. 마음에 긍정적인 분위기가 되어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주님이 살아계신다. 나를 도와주신다. 주님이 이루어 주실 아름다운 꿈을 꾸고 믿음으로 주님께 주여 하고 부르고 기도하면 기가 막히게 응답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설교 듣고 난 다음 마지막에 우리 주여 세 번 부르고 기도할 때 그때가 응답받는 시간인 것입니다. 마음에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니까. 환경이 만들어졌으니까 기도가 하늘에 능력있게 상달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우리가 마음의 생각이 평강으로 꽉 들어차서 기도하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이 얼마나 인생을 차이를 두는지 미국 가톨릭대학의 클리프 노타리우스 교수가 부부 문제를 연구했습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백 년 해로를 한 부부나 파경을 맞은 부부가 살면서 부부싸움 하는 것은 별 차이가 없대요. 백년을 해로해서 인정있게 사는 부부나 싸워서 헤어지는 부부나 보면 싸우는 횟수가 별로 다르지 않고 싸움도 똑같이 부부간에 싸운다는 것입니다. 인정있다고 안싸우는 부부는 없어요. 아무리 내 입에 네밥, 네 입에 내 밥을 먹어도 싸워요. 한 어머니, 아버지 뱃속에서 나온 형제들도 싸우는데 남남끼리 모이는데 안싸울 턱이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싸워도 곧 화해하고 이혼까지 안가는데 다른 부부는 싸워서 파경에 이르러 이혼까지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가만히 이 대학교수가 조사를 해보니까 말에 있더랍니다. 말... 그런데 싸워도 곧 화해가 되고 파경에 이르지 않는 부부는 싸워도 자기 마음에 입은 상처를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할퀴지 않아요. 내가 섭섭하다. 기분이 나쁘다. 내가 괴롭다. 내가 고통스럽다. 자기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당신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잖아! 나를 섭섭하게 만들었잖아! 당신 때문에 내가 못살아! 그러면 전부 책임을 남편이나 아내에게 덮어 씌우기 때문에 뭐 어떠고 어때? 반발이 생기는데 나는 섭섭해요. 나는 고통스러워요. 나는 괴로워요. 그러면 상대방을 원망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세요? 괴로워하지 마세요. 섭섭하게 여기지 마세요. 싸워도 부드럽게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별하는 부부는 싸울 때 남에게 싹 할퀴는 것입니다. 상처를 줘요. 꼭 말을 해도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해요. 너 때문에 밥맛없어. 옷은 뭐 그렇게 입어? 어휴 꼬락서니 보니 참... 내가 눈이 뒤집어졌지 내가 저런 사람하고 결혼하게... 이것 상대방에게 굉장히 상처를 주지 않습니까? 다윗에게 상처를 준 미갈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법궤를 매고 오는데 너무 즐거워서 춤을 추다가 바지가 내려가서 본전이 다 드러났어요. 그것도 모르고 그냥 바지가 다 내려갔는데도 막 법궤 앞에서 춤을 추고 다윗성으로 돌아오니까 그 아내 미갈이 창문을 내려다보더니만 쯧쯧쯧 저게 왕이라고... 그래서 다윗이 백성들을 보내고 난 다음 집안 식구들을 축복하기 위해서 들어오니까 아따 오늘 참 당신 영화롭기 짝이 없더군요. 일국의 왕이 바지가 내려가고 본전이 나타나도록 춤을 추고 뛰고 구르고 참 눈꼴이 사나워서 못보겠다. 말을 잘못했어요. 다윗이 화가 났습니다. 오냐, 그래? 네 아버지를 사울을 하나님이 죽이고 그 나라를 빼앗아서 내게 주신 것이 너무나 고마워서 춤췄다 어쩔래? 상처 입은 말 아닙니까? 그래서 그 이후로는 다윗이 미갈하고 같이 생활을 안했습니다. 평생에 자식이 없이 외롭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말이라는 것이 여러분 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도 집에 가서 오늘부터 싸우거든 절대로 상처 입을 말 하지 마세요. 안되거든 내가 보는 눈이 나빠서 당신이 옷을 입었는데 잘입었는지 못입었는지 모르겠구나. 그러면 그 부인이 내가 옷을 잘못 입었나? 요새 입맛이 없어서 음식이 잘 안먹어진다. 그렇게 말 안하고 솜씨가 왜 이 꼬라지냐? 먹을 수가 없다. 먹을 수가 없어. 그렇게 말하면 얼마나 상처를 입습니까? 내가 입맛이 없다고 하면 부인이 내가 솜씨가 없으니까 열심히 잘 음식을 만들어야겠다. 그런 생각 날것 아닙니까? 그러나 욕을 하면 맛없게 만들어서 주고 말아요.
내가 변화받으면 내 변화 때문에 상대가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부인이 변화되니까 남편이 변화되고 남편이 변화되니까 부인이 변화되고 상승작용을 해서 좋은 가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 말을 잘 사용하면 가정도 행복하고 생활도 행복해 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분위기를 마음에 유지시키며 늘 긍정적인 분위기 속에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능력의 말씀으로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 드리겠습니다.
자신을 잘 다스리는 지혜
잠 16:32-33 / 박인걸 목사(수주중앙교회)
런던 올림픽이 우리나라의 여름 더위만큼이나 뜨겁습니다. 한국은 오늘 까지 금메달 9개, 은메달 2개, 동메달 5개 종합 3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선전하는 우리 선수들을 전 국민이 뜨겁게 응원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속상한 일은 심판들의 오심으로 몇 명의 선수들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수영에 박태환, 펜싱에 신아람, 유도에 조준호가 메달을 놓쳤습니다. 올림픽은 국가의 명예와 위상과 관계가 있지만 개인에게는 일생의 운명과 관련 된 중요한 경기입니다. 심판의 오심은 자국민의 기분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선수 당사자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입니다. 특히 신아람 선수가 많이 울었는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람은 한 번 감정이 상하면 정상으로 돌아오는데 사람마다 편차가 심합니다. 감정을 빨리 추스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년 몇 십 년, 평생 동안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박태환 선수는 그래도 빨리 마음을 추스르고 400미터 결승에서 은메달을 땄고, 200미터 경기에서도 은메달을 땄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없었으면 금메달을 땄을 것입니다. 사람은 억울하다고 생각 될 때 감정 조절이 힘든 것입니다.
잠언서는 솔로몬 임금의 경계와 훈계를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잠언’이라는 국어사전적 의미는“가르쳐 훈계하다.”라는 뜻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탁월한 지혜로 그 백성들을 가르쳐 훈계하는 책을 낸 것입니다. 이것이 잠언서입니다. 하지만 잠언서는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인생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쳐 훈계하시고자 하는 책입니다. 잠언서의 주제는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지혜가 총 망라되어 있습니다. ① 인간과 하나님, ② 지혜에 대하여, ③ 어리석음에 대하여, ④ 게으름에 대하여, ⑤ 벗과 이웃에 대하여, ⑥ 말과 혀에 대하여, ⑦ 가족에 대하여, ⑧ 일에 대하여, ⑨ 생명과 죽음에 대하여 기록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윤리적 관점과 종교적 관점, 철학적 관점에서 조명되었으며, 신학적 가치와 문화적 배경, 특히 잠언과 그리스도와는 깊은 연관성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생명을 얻는 진리를 우리들에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16장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주권(16:1), 전지(2), 예정(3,9,33), 공의(4) 거룩(6), 사랑(7),과 같이 하나님의 속성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 부터는 인간들의 삶의 다양한 영역과 관련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관(16), 삶의 자세(17), 신앙적 자세(20), 언어생활(21, 22, 24), 인생의 결국(31)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읽어 보면 주제가 없이 난삽하고, 뒤죽박죽 기록된 것 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연구해 보면 솔로몬이 짜임새 있게 훈계의 목적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기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분문에“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고 했고, 1절에서는“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잠16:1)고 했습니다. 결국 내 마음은 내가 다스려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자가 인격이 빛나고 삶에 성공하며, 이런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고, 사회적으로 지도자가 될 수 있으며, 특히 믿음이 깊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자신을 잘 다스리는 지혜는 무엇일까요?
(1) 생각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잠16:17-18)
“악을 떠나는 것은”(17)“교만과 거만”(18) 모두 사람들 안에서 작용하는 좋지 않은 생각들입니다. 어떤 집에 가보면 집안을 분통처럼 아름답게 가꾸어 놓고 사는 가정이 있고, 어떤 집은 방문해 보면 발 들여 놓을 틈도 없이 지저분하게 해 놓고 사는 가정도 있습니다. 대게는 여성이 정리 정돈을 잘 하고, 남자는 늘어놓기를 잘 합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남자도 정리 정돈을 잘 하는 사람이 있고, 여자가 남자보다 더 늘어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집뿐만 아니라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을 정리 정돈을 잘 하면서 차분하게 살아가며, 인간관계도 매끈하고, 깨끗하게 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있는가하면, 아주 복잡하게 좌충우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을 잘 다스릴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좋은 생각, 나쁜 생각, 긍정적 생각, 부정적 생각, 적극적 생각, 소극적 생각, 창조적인 생각, 진취적인 생각, 등등의 수많은 생각들을 하면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생각이 있고 비정상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면 자신과 공동체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데 비정상적인 생각을 갖게 될 때 문제가 됩니다.
성경에서 가장 경계하는 생각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인간은 보편적 가치와 상식에 맞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의 가치관과 성경적 사상을 기초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것들을 무시하고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유혹하는 뱀 앞에서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다스리지 못하여 그만 죄를 범하였습니다.(창3:6) 아브라함과 사라가 늙어도 아들이 없자 자기들 중심적인 생각으로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이스마엘 입니다.(창16:16) 그 일이 아브라함의 가정의 불행은 물론 이스라엘 역사에 불행 가져왔고, 인류역사가 오늘날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으로 나뉘어 영적, 물리적, 문화적, 경제적, 군사적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생활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가진 자들에 의하여 결국 광에서 죽는 불행을 가져왔습니다.(민14:23)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가나안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는 사사시대와 왕정시대, 그리고 신약시대로 이어졌고, 지금도 교회 안에 자기중심적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결과 자신과 타인을 불행하게 합니다.
성경에서 자기중심적 생각을 가졌던 대표적인 사람 하나를 뽑는다면 아마도 아람 장군 나만 일 것입니다. 그는 본국에서 유명한 장수였으나 문둥이었습니다. 사마리아에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 왔습니다. 잔뜩 기대하고 왔으나 엘리사는 그림자도 비추지 않고 종아 나와서 “요단강에 가서 씻으래요.”라는 말만 던지고 들어가자 화가 치밀어 하는 말이 “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왕하5:11)하면서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가 말한 ‘내 생각’은 자기중심적 생각입니다. 자기중심적 생각은 ①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② 자신의 삶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사람들입니다. ③ 자신의 판단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건 인본주의입니다.
참 신앙은 내 생각을 죽이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내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8:7) 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성령님의 생각을 따라 선교의 방향도 바꾸었고,(행16:6-11)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기 싫어 밤새도록 통곡하며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생각에 굴복하고(눅22:42)다음날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신앙이란 결국 내 생각을 하나님의 뜻에 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주님이 자신의 생각을 잘 다스려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셨기 때문입니다.“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오늘 내 안에서 불쑥불쑥 일어나는 생각을 말씀과 성령을 잘 다스리길 축원합니다.
또 자신을 다스리는 지혜는 무엇입니까?
(2)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잠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32) 여기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감정을 잘 다스림을 말합니다. 감정이란? “어떤 현상이나 일에 대하여 일어나는 마음이나 느끼는 기분”을 말합니다. 그런 말이 있지요?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는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란 뜻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작용하지만 놀랍게도 감정이 가장 크게 작용합니다. 들어보실래요.
① 잘 한다고 해야 사람은 더 잘 합니다. 기대가 태도와 행동을 바꿉니다. 교사의 기대가 성적을 좌우합니다. 가짜약도 치료효과를 가져옵니다.
② 사람은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칭찬의 효과가 달라집니다. 어린 아이도 연세든 어른도 칭찬하면 모두 좋아합니다.
③ 의심하면 수상해 보이고, 미워하면 미운 짓만 합니다. 의심은 의심을 낳고 믿음은 신뢰를 부릅니다. 믿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자신을 미워하는 자를 미워합니다. 미워하면 미운 짓만 합니다. 곱게 보면 결국 이쁜 짓을 합니다.
④ 처지가 같으면 친해집니다. 동변상련, 동우상구, 경상지조, 상수이비, 뇌하지수, 인북구류 라고 했습니다. 끼리끼리 놉니다. 끼리끼리가 좋습니다. 좋아하면 닮아갑니다. 다른 점도 호감이 갑니다. 처지가 같은 사람끼리는 욕구보상이 됩니다.
⑤ 첫 인상이 좋아야 점수를 땁니다. 첫 인상이 나쁘면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쉽게 바꾸기 힘듭니다.
⑥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픕니다. 남의 집이 넓으면 내 집이 좁아집니다. 너의 불행은 나의 행복입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 때문입니다.
⑦ 낯선 사람과는 떨어져 앉으려 합니다. 인간은 자기만의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좋아 할수록 가까워집니다. 친해지려면 거리를 좁혀야 합니다.
⑧ 강한 자 편에 서고 싶어 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대세를 따르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짜가 라도 유명 메이커가 좋기 때문입니다. 자긍심이 약할수록 권위에 약합니다.
⑨ 비가 오면 어떤 사람이 생각납니다. 심수봉의 노래입니다. 무드가 사랑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조건반사라고 하는데 자극을 주면 반응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물소리를 들으면 오줌이 마려운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⑩ 핸들만 잡으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흥분하면 보이는 게 없습니다. 상대를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심리학에서 ‘비인간화 효과’라고 하는데 공격성이 강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화를 참지 않습니다.
⑪ 놀 때는 시간이 빨리 가는데 지겨울 때는 시간이 가지 않습니다. 생체에도 시계가 있습니다. 생리학적 시계라고 합니다. 체온이 올라가면 시간이 느려집니다. 초행길이 더 멀게 느껴집니다. 돌아 올 때는 가깝게 느껴집니다. 야간에 더 과속합니다. 모두 심리적인 요인입니다.
⑫ 멍석 깔아 놓으면 하던 짓도 안 합니다. 훔친 사과가 맛이 있습니다. 금기에 대한 매력입니다. 따라 다니는 사람은 싫고, 싫다는 사람이 좋습니다.“비싸서 못 살 텐데요”약 올리기 작전입니다.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안 먹는 아이는 굶기면 됩니다. 청개구리 심리를 이용하여 정신병도 고칩니다.
⑬ 무술 영화를 보면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폭력물을 보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싸우는 것을 보면 싸우고 싶어집니다. 사람 따라 그 효과도 물론 다릅니다. 폭력물은 모방 폭력을 가져옵니다. 성폭력범 들은 포르노 광들입니다.
⑭ 남의 떡이 커 보입니다. 남의 짐은 가벼워 보입니다. 놓친 고기가 커 보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욕심이 많고, 시기심이 많고, 자긍심이 약하고, 주도적인 삶을 살지 못합니다.
⑮ 못다 이룬 사랑은 이름답다고 합니다. 미완성의 미학이 있습니다. 해피 앤딩 보다 비극이 더 감동적입니다. 추억은 모두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 모였다 하면 남을 헐뜯게 됩니다. 험담하면 서로 친해집니다. 남을 비방하면서 자신의 자존심을 높입니다. 가장 안전한 공격은 입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습니다. 신생아도 미인을 알아봅니다. 매력적인 사람은 성격도 좋아 보입니다. 잘 생긴 사람과 함께 있어야 내 주가가 올라갑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 감정의 변화입니다.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기분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감정을 잘 다스리는 것이 지혜입니다. 감정은 인간의 심리학입니다.
특별히 이 여름에 우리는 분노를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분노는 물리적인 장애물이나 자존심에 손상이 올 때 느껴지는 감정이며 공격 행동을 유발 시키는 감정입니다. 베드로가 분노를 조절을 잘 못하여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자칫하면 큰 폭력이 일어날 번했는데 예수께서 말고의 귀를 고쳐주심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에베소 4장 26-27에 보면“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분노를 통하여 우리인격, 가정, 교회, 사회를 파괴하여 국가와 국가 간에 전쟁을 야기합니다. 말씀과 진리에 서있어야 하며 성령 충만할 때 나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다스리는 지혜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3) 언어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잠16:23, 24, 28, 30)
“입과 입술”(23) “선한 말”(24) “말쟁이”(28)“입술을 닫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30) 잠언서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라고 했습니다. 말에는 힘 있습니다. 혀가 힘이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 그냥 말이 공중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혀의 열매를 내가 먹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2절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거성들은 언어를 생명처럼 귀하게 여겼습니다. ① 언어는 생명과 같습니다.“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잠18:21) ② 언어는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12명의 정탐꾼의 방향을 결정한 것은 언어였습니다. 열 명은 광야로 가서 멸망을 당했습니다. 두 명은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배의 작은 키에 따라 배의 방향이 결정됩니다.(약3:4-5) ③ 언어는 미래를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3) 우리 인간의 뇌는 언어에 따라 98%가 움직인다고 학자들은 이야기 합니다. ④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를 따라 행하십니다. 민수기 14장 28절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말속에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대로 응답하겠다고 하십니다.
영적 사람들은 자신의 앞길을 막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피합니다. 하나님이 싫어 하는 언어가 있습니다. ① 비방하는 언어를 싫어합니다. 민수기12장1-2절에“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친구를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를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② 악평하는 언어를 싫어합니다. 민13:32-33절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악평은 좋은 것을 악하다고 평가하는 입니다. 악평하는 사람은 과장합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 좋아하지 않은 것은 무조건 악평합니다. 명의 정탐꾼은 하나님이 엄연히 주시겠다고 했는데 그 땅을 악평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악평하면 안 됩니다. ③ 원망하는 언어를 싫어합니다. 민수기 14:2절에“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급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 에서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했습니다. 언어는 부메랑의 효과가 있습니다. 오래 살려면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배움으로 새 역사를 창조 합니다. ① 할 수 있다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민 13:30-31절에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갈렙은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키고 올라가서 치자“고 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② 할 수 있다는 확신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막 11:23) 사람들은 인격과 지식이전에 확신을 보고 따라옵니다. ③ 해야만 한다는 헌신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곧 올라가서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④ 좋은 점을 찾아 감사하는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언어를 바꾸면 우리의 운명이 바뀝니다. 우리는 세 가지를 다스려야 합니다. 생각, 감정, 언어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실 때 가능합니다. 한 주간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신을 잘 다스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상한 감정을 치유하라(I): '분노'
잠 16:32-32 / 김흥규 목사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명상하는 절기입니다. 이번 사순절은 단순히 주님의 고난을 명상하는 것으로서 그칠 일이 아니라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는 절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의 중한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처절한 고난을 대신 져주셨을 때 우리의 모든 상처가 치료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사 53: 4-5은 말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앙금처럼 남아있는 성처들을 깨끗이 치료받아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저는 사순절 기간 동안 「상한 감정을 치유하라」는 제목으로 ‘분노,’‘우울증,’‘열등감,’‘죄책감,’‘고독’에 대하여 차례로 설교하고자 합니다.
Heal Your Wounded Heart (I): 'Anger'
한국 신학대학에서 목회상담학을 가르치시는 교수님 중에 정태기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이 분의 간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정목사님이 나이 37세에 자기 마음의 상처를 고치기 전까지 세상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 두 개 있었습니다. 첫째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고 또 하나는 '재봉틀'이었습니다. 자신감이 없어서 사람들을 무서워했고, 또 사람들 앞에 서기만 하면 다리가 사정없이 떨렸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들이었습니다. 정목사님은 미국에 유학와서 공부하시다가 37세 되던 해, 치유 그룹에 들어가 자신의 상처에 대한 원인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엄청난 상처를 받고 자랐습니다. 아버지보다 세 살 더 많은 친어머니가 계셨지만 제법 돈이 있었던 아버지는 열 여섯 살이나 어린 젊은 여자를 작은 부인으로 맞았습니다. 그래서 본 부인에게서 4남매를 낳고, 작은 부인에게서 5남매를 낳았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다정할 리가 없습니다. 언제나 자식들에게 폭군으로서 군림했습니다. 그래서 정목사님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캄캄할 때까지 함께 놀 친구도 없는데 집밖에서 마을을 빙빙 돌았다고 합니다. 어머니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니까 일에만 파묻혀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어두운 가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고 자라나다 보니까 자연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성격이 삐뚤어지게 되었습니다.
상처가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니까 이유 없는 분노와 불안, 짜증이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로 마음 깊은 곳에 분노가 쌓이게 되자 화풀이의 대상으로 만만한 사람을 골라서 골탕을 먹이게 됩니다. 정목사님 댁에 일하러 오는 아주머니의 아들을 이유 없이 못살게 군것입니다. 부모님께 분풀이를 하려다 보니까 도저히 무서워서 못하고, 그 대신 애꿎고 죄없는, 그리고 아무 힘도 없는 아이를 무조건 괴롭혔던 것입니다. 정목사님의 간증에 따르면, 자기 속이 아주 분노로 들끓어 오를 때면 그 파출부 아주머니의 아들을 빈 항아리에 들어가게 하고 뚜껑을 닫아서 그 안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화풀이를 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정목사님이 가진 병적인 분노의 희생자는 집에서 키우던 얼룩소였습니다. 형이 맡은 소는 살이 잘 찌는데 정목사님이 기른 소는 바짝 바짝 말라가고 고삐만 잡으면 안절부절을 못했습니다. 화가 날 때마다 얼룩소를 때리고 못살게 구니까 소 역시 히스테리 신경증에 걸릴 정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목사님이 이와 같은 분노를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치유하지 못했을 때 대인관계는 물론이고 부부관계가 원만할 리가 없습니다. 이 분은 37세 때까지 인생을 늘 우울하게 비관적으로 살아오다가 6개월 동안의 치유 그룹 공동체에 들어가서 마침내 이 상처를 고치게 되었습니다.
오늘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맞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두고두고 괴롭히는 분노의 감정을 먼저 치유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분노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는 조그만 화를 내는 것에서부터 격노하는데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분노의 감정을 느끼며 삽니다. 한국 사람들은 다른 민족에 비해서 유달리 분노가 많은 편입니다. 아마 오 천년 역사 동안 너무 많은 시련을 겪다 보니까 어떤 한(恨, unresolved anger)이 우리 속에 맺혀 있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 분노가 있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사실 우리가 분노를 잘 조절하기만 하면 분노는 우리의 발전을 위하여 굉장히 큰 자극과 창조적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분노를 잘못 다스려 폭발해 버릴 경우 상대방은 물론이고 공동체와 자기 자신까지 겉잡을 수 없이 파괴시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분노는 마치 '성냥개비' 하나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냥개비를 잘 관리해서 적절한 불을 만들어 쓸 때,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고 음식도 만들 수 있고 기계를 돌릴 수도 있게 해줍니다.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냥개비 하나가 부적절하게 쓰여져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게 될 때 집안 살림은 물론이고 온 동네, 온 세상을 다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만큼 무섭습니다.
또한 정목사님의 얘기에서와 같이 자기를 정말 화나게 한 사람에게 분풀이하기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 속담에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분풀이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애꿎은 사람들이 우리의 분노의 희생물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주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분노할 수 있다. 이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자기를 화나게 만든 바로 그 사람에게, 자기를 화나게 만든 것과 똑같은 정도로, 적시에, 올바른 목적을 가지고, 올바른 방법으로 분을 내는 일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쉬운 일도 아니다."(Anybody can become angry. That is easy. But to be angry with the right person and to the right degree and at the right time and for the right purpose and in the right way--that is not within everybody's power and is not easy.)
오늘 여러분 모두는 분노의 감정을 잘 통제하고 치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분노의 감정을 치유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차분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제일 먼저 분노의 원인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이유를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노의 원인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분노에 대한 정의부터 짚어봐야 할 것입니다. 영어 사전에 보면 다음과 같이 정의가 내려져 있습니다. "분노란 진짜로 잘못된 것 혹은 오해로 잘못된 것에 의해서 생겨나는 아주 불쾌한 감정을 말한다."(Anger is a strong feeling of displeasure aroused by a real or a supposed wrong.) 이와 같이 분노는 적어도 자기 자신이 볼 때에 잘못된 일에 의하여 마음에 상처를 받아 생기는 불쾌하고 불만족스러운 감정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분노를 느끼게 됩니까? 무엇이 우리를 화나게 만듭니까? 오래 전 미국의 어떤 연구원이 한 그룹의 대학생들에게 일주일 동안 그들을 화나게 만든 것을 적어 오도록 한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른 사람에게 야단을 맞았다든지, 일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든지, 돈을 잃어버렸다든지, 다른 사람의 차가 자기 차를 들이받았다든지, 아니면 원치 않는 시간에 누가 잠을 깨웠다든지 할 때, 분노를 느꼈다고 대답했습니다. 약 80% 이상의 응답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행동 때문에 분노의 감정을 느꼈다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분노는 대인관계에서 자기를 정당하게 표현할 수 없고, 특히 누군가가 자신의 자존심에 흠집을 내게 될 때 주로 생겨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에 분노를 경험하게 됩니다. 먼저 불의한 일을 당할 때 분노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하고 있는 현장을 목도하고 대노(大怒)해서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린 적이 있습니다(출 32: 19). 모세가 왜 이렇게 까지 화가 났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의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온유하기만 하셨던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 성전을 쑥밭으로 만드셨습니까? 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내시면서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까? 그들이 불의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성전 장사꾼들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마 21: 13).
그 다음에 사람들은 자기가 계획했거나 기대했던 일들이 좌절될 때 분노합니다. 자기가 꼭 가고 싶었던 대학에 못 들어가게 될 때, 승진 심사에서 누락 될 때 사람들은 분노를 느낍니다. 캐나다 브리티쉬 콜럼비아의 빅토리아라는 곳에 사는 게리 프리들(Gary Priddle)은 다른 사람의 개를 골프채로 마구 때려 중상을 입힌 죄로 재판에 기소된 적이 있습니다. 프리들은 자기가 차를 몰고 가는데 바로 앞에 가던 픽업 트럭이 오리 떼들이 지나가도록 멈추어 서서 기다리자 화가 났던 것입니다. 이 픽업 트럭이 자기를 빨리 못 나아가도록 막았다고 화가 난 나머지 이 차 뒤에 태워 둔 개를 골프채로 마구 때려 상처를 입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기가 의도했던 일들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분을 품게 됩니다.
또한 인간은 거절당하거나, 제지를 받거나,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를 받을 때, 혹은 부당하게 비난받거나, 자존심에 상처를 받게 될 때 분노를 느낍니다. 창 4장에 보면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인이 왜 아벨을 쳐죽였습니까? 자기가 드린 제사는 하나님께 받아드려지지 않았는데 동생인 아벨의 제사는 열납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형인 자기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거부하셨고, 자기 동생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다고 할 때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자신의 제사가 거절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가인은 안색이 변하여 크게 분노했던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분노를 잘못 처리하여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불명예를 떠 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노를 느낄 때 "도대체 나는 왜 이런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가?" 그 원인을 잘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마음의 병은 원인만 제대로 알면 대부분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분노의 원인, 분노의 이유를 바로 알 때 우리는 분노를 바르게 통제하고 바르게 해소할 수 있습니다.
<이제 분노의 원인을 알았으면 분노를 바르게 처리하는 방법을 알아야만 합니다.> 여러분, 분노에는 사실상 크게 두 가지 종류의 분노가 있습니다. 거룩한 분노와 죄에 찬 분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분노와 세상적인 분노가 있습니다. 그러면 거룩한 분노를 죄에 찬 분노로부터 구별시켜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분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거룩한 분노, 즉 하나님의 분노는 언제나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기 위한 분노입니다. 불의한 세상, 죄에 가득찬 세상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맞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도 분노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분노가 죄에 찬 분노가 되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그리고 우리와 이웃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분노가 되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분노가 거룩한 분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의 분노가 거룩한 분노가 되려면 죄에 항거하는 분노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은 순전히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죄와 싸울 때 그 분노는 거룩한 분노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거룩한 분노는 언제나 하나님에 의하여 통제됩니다. 인간의 육정이나 기분, 혹은 마귀에 의해서 조종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주권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또한 거룩한 분노는 우리의 이기적 만족을 구하지 않고 이웃과 공동체의 건덕을 세우게 합니다. 내가 분노를 발해서 일시적으로 내 기분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만일 공동체와 이웃에 상처를 준다면 결코 거룩한 분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거의 날마다 생길 수 있는 분노의 감정을 슬기롭게 처리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대개 분노의 감정이 생길 때 네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내 마음속에 생긴 분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억누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분노가 생길 때 더욱 일에 몰두하거나, 아니면 TV나 소설책 등에 탐닉함으로서 문제를 회피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분노가 내부에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숨기면서 분노를 참을 수도 있습니다. 이 때 분노를 안으로 삭이다 보면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게 됩니다. 그 결과 가벼운 두통에서부터 위궤양, 불면증, 우울증 등으로 고생하게 됩니다. 셋째로, 파괴적인 방법이든, 그렇지 않은 방법이든지 간에 분노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대부분 분노와 상관없는, 죄없는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직장 상사로부터 꾸지람을 받았을 때 괜히 그 분노를 직장에서 폭발시키면 해고를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저녁 때 집에 돌아와 아내나 자식들에게 분풀이를 하게 됩니다. 아니면 돌부리를 걷어 찰 수도 있습니다. 넷째로, 분노의 느낌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솔직하게 털어놓고 해결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네 번째 방법으로 분노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면 더 구체적으로 우리는 분노의 감정을 어떻게 신앙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요? 제일 먼저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분노의 감정을 느낄 때 성령은 우리에게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그래서 화나는 상황에 대한 반응을 더디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뭐라고 했습니까?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또 잠 14: 29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다"고 했습니다. 또한 약 1: 19-20에서 말씀합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성내기를 더디할 수 있습니까?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만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져서 절제의 고삐로 분노의 감정을 꽉 묶을 때 더디 성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겸손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나있다는 사실을 겸손하고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분노의 원인을 다른 사람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지 말고 내 탓으로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분노했을 때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잠 15: 1에서 말씀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대부분 분노가 걷잡을 없을 정도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과격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가 났을 때 더욱 냉정해져야 하고 우리의 혀를 잘 조절해야 합니다. 특히 화가 났을 때 만일 내가 이 화를 폭발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대부분 우리는 화가 났을 때 욕설을 퍼붓거나 기물을 파괴하는 방법 등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의 진노를 결코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혹 일시적으로 위로를 줄지 모르나 더 엄청나고 끔찍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심을 믿고 좀 억울하고 속상한 일을 만나도 잘 인내하고 용서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롬 12: 19에서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분노의 감정이 들끓을 때마다 우리는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맺는 말: 여러분, 분노는 결코 죄된 것만은 아닙니다. 불의와 죄에 대하여 분노할지 모른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룩한 분노보다 죄에 찬 분노의 감정을 가지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순절 기간 동안 먼저 우리에게 분노를 가져다 준 원인이 무엇인가 깊이 명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의 모든 상처를 내놓을 때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은 거의 다 최악의 경우만을 찾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비판적이고, 부정적이고, 적대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화가 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되어야만 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분노의 감정을 치유 받아야만 합니다. 여러분, 모든 분노의 상한 감정을 십자가의 능력으로 치유 받으십시오! 아멘.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 26).
성령강림 이전의 과제
잠 16장 33절 / 이성희 목사
어버이 주일입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수고에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버이주일은 세속력에 따른 주일입니다. 세속력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올해는 세속력이 아닌 교회력에 따라 설교하려고 합니다. 교회력으로 다음 주일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강림주일 이전 주일로서 성령강림 이전의 과제에 대해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성령강림 이전에 있었던 일들은 성령강림에 필요한 조건들이었습니다. 이런 성령강림 이전의 과제는 지금도 성령강림에 필요한 조건들입니다.
“준비하는 시간은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다”는 말이 있습니다. 준비는 그 자체로 중요합니다. 성령강림의 준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준비 그 자체가 성령강림에 중요한 요건입니다. 성령강림의 준비는 하나님 편의 준비가 있고, 인간 편의 준비가 있습니다. 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에 성령께서는 강림하십니다. 성령님은 절대로 준비 없이 오시지 않습니다. 만약에 준비 없이 온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어쩌면 준비 없이 오는 것은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준비 없이 오는 것은 비극입니다.
옛날에 임금이 행차할 때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겠습니까? 미리 사신을 보내고, 가지고 갈 예물을 준비하였을 것입니다. 길을 잘 고르게 한 다음에 드디어 어가가 행차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도 마찬가지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선지자를 통하여 이 땅에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소위 중간기라고 하는 400년 동안은 하나님의 소리가 끊어진 기간입니다. 그런데 그 때 바라던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입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모든 것을 다 준비시키시고 드디어 성자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이제 성자의 시대를 마감하고 성령의 시대를 여십니다. 그 준비가 무엇입니까? 성령님도 준비 없이는 절대로 오시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준비를 시작하는 최상의 시점은 끝이다”라고 하였는데 성령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시간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끝입니다.
존 맥스웰은 “준비보다 더 큰 용기는 없으며, 두려움보다 더 큰 적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학생이 준비되면 선생은 자연히 나타납니다. 준비되면 일은 자연히 시작됩니다. 모든 일의 이치가 다 그렇습니다.
흔히 시대를 구분할 때 ‘성부시대’, ‘성자시대’, ‘성령시대’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성부시대였고, 예수님이 세상에 계신 동안은 성자시대였고, 이제 성령의 시대를 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성부시대나 성자시대나 성령시대가 다 삼위 중의 한 위가 홀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는 삼위 하나님의 시대입니다.
이제 성자시대를 마감하고 성령시대를 여는 극적인 순간입니다. 새로운 장을 여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도 이 준비를 하면서 성령의 오심을, 성령 강림을 맞이하고 체험하는 성도,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강림하시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준비했습니까?
첫째, 예수님이 승천하신 일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과 교대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이 있기 전에는 성령 강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는 요한복음 16:7에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이 승천하셔야 유익이 있다고 합니다. 웬 유익입니까? 예수님의 승천은 하늘과 땅에 동시에 유익이 있습니다. 하늘은 성부와 성자가 다시 만남으로 유익합니다. 땅은 그리스도의 육적인 활동이 끝나고 성령님을 통하여 영적이며 우주적인 활동으로 확대되기에 유익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이미 예언되었습니다. 요한복음 7:39에는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합니다.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가 무슨 말입니까? 아직 승천하지 않으셨으므로 영광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승천은 영광입니다. 승천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제 모든 지상의 사역을 끝내고 다시 하늘로 영광의 귀환을 하십니다. 얼마나 영광입니까?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하시던 이때의 고통이 다 물러나고 이제는 부활하셔서 지상의 사명을 다 끝내시고 귀환하십니다. 승천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영광입니다.
여러분, 군대에서 제대할 때의 기분을 아십니까? 군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기쁨이 있습니다. 제대 후에 딱히 할 일이 없어도 제대는 좋습니다. 모든 의무를 마치고 다시 돌아오는 기쁨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것이 영광이지요? 우리의 돌아가는 것이 어떨 것 같습니까? 우리의 귀향이 어떨 것 같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돌아가는 것도 이렇게 영광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15장에 보시면 예수님이 떠나시면 오실 보혜사에 대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4:16),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14:26),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15:26)라고 합니다. 16장까지 하면 성경에는 “보혜사”란 말이 4번 나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셔야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셔서 도우시고, 대신 말씀하시고, 이런 일들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음 일을 위해 승천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성령님의 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악한 농부의 비유’를 보시면 주인은 멀리 가 있습니다.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맡기고 수확을 얻기 위하여 종을 보냅니다. 그들이 종을 죽이자 다시 아들을 보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인이 와서 심판을 받습니다.
달란트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멀리 다른 나라에 갑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옵니다.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은 예수님 자신을 비유한 것입니다. 주인이신 예수님은 잠시 자리를 비우고 가셨다가 다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셔야 제자들이 일어섭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던 그들입니다.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안타까워하시며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마음을 조리고만 있을 예수님이 아닙니다. 두고 가셔야 그들이 자기 힘으로 일어납니다. 그들이 자립하고 그들에게 홀로서기를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은 가셔야 합니다.
독수리가 둥지에서 자라던 새끼를 억지로 떼어 날려 보내는 것을 아십니까? 독수리가 둥지를 만들 때는 밑에는 딱딱한 가지를 두고 가시와 같은 것들로 바닥을 한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풀이나 깃털 같은 것으로 포근하게 만듭니다. 새끼들이 조금 자라게 되면 어미는 털을 치웁니다. 새끼의 몸은 가시에 찔리고 결국 참다못해 둥지 밖으로 뛰쳐나온답니다. 개들도 그렇습디다. 강아지들이 조금 크면 젓을 안주고 되레 으르릉대며 냉정하게 쫓습니다. 이제 혼자 살게 하려고 하는 동물들의 본능입니다. 모든 동물들, 특히 포유동물들이 다 그렇게 새끼를 양육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은 아직도 미숙한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자신에게서 떼놓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제야 예수님을 잘 따를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예수님은 이제야말로 그들을 떠나보내야 할 때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사역은 끝나고, 성령님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제자들은 성령강림을 체험하고 성령님과 함께 홀로서기를 하게 두시고 예수님은 승천하신 것입니다.
둘째, 맛디아를 세우신 일입니다.
성령강림 이전의 두 번째 과제는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12제자의 수는 11제자가 되었고 예수님이 계획하신 수에는 빈 자리가 생겼습니다. 사람을 세우신 일은 예수님의 사역에 중요한 일입니다.
12사도는 무의미한 무작정의 수가 아닙니다. 예수님 편에서 계획되고 의미 있는 수입니다. 그래서 12를 만수라고 합니다. 꽉 찬 빈틈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18장에는 이스라엘 출애굽 공동체가 처음으로 사람을 세우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우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는 초대교회가 처음으로 교회의 직분자인 7집사를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구약과 신약 공통적으로 사람을 세우는 일은 공동체의 중대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도 사람을 세우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을 세웠느냐에 따라 공동체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흔히들 “인사가 만사다”라고 합니다. 인사는 정말 중요한 인간의 일입니다.
최인호씨의 소설 ‘상도’에는 이런 말들이 나옵니다.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윤이다.” “작은 장사는 이문을 남기기 위해서 하지만 큰 장사는 결국 사람을 남기기 위해서 한다.” “장사는 곧 사람이며 사람이 곧 장사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세요. 사람을 남기는 장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세상에 남겨 놓은 것은 사람뿐이었습니다. 남겨놓으신 사람들을 통하여 교회가 설립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셨습니다.
일은 항상 사람이 합니다. 어떤 고급차도 정비사가 없으면 가지고 있는 성능을 모두 발휘할 수 없습니다. 정비사는 차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훈련하시고, 사람을 이 땅에 남기시고, 사람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는 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최고 경영자, CEO는 두 가지를 장악하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 재정입니다. 사람과 돈 이 두 가지가 일을 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중요합니다. 경영을 하려면 이 두 가지를 장악해야 합니다.
한국인이 성공하려면 여섯 가지 ㄲ(쌍기역)으로 시작되는 단어의 조건을 지녀야 한다고 합니다. 바로 꿈, 끼, 깡, 꾀, 꼴 그리고 끈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세요. 이 모든 게 다 다르지만 다 같습니다.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포항제철을 글러벌 시대를 맞이하여 ‘포스코’라고 부릅니다. 포스코를 설립한 박태준씨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포스코의 발전설비가 95%의 공사가 진척되었을 때 심각한 결함이 발견되었습니다. 박태준씨는 이 설비를 아낌없이 폭파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포스코의 신용이 되었다고 합니다. 포스코에 가시면 곳곳에 구호들이 붙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기업은 사람이다”라는 구호가 있습니다. 또 “자원은 유한, 창의성은 무한”이라는 구호도 있습니다. 이것이 포스코가 성공한 기업정신이라고 봅니다. 사람을 중요하게 여길 줄 아는 기업이 성공합니다. 땅은 유한합니다. 하늘은 무한합니다. 물질은 유한합니다. 사람은 무한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고 사람을 세우는 일을 주력합니다.
사도의 자격은 21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요한의 세례부터 올리워 가신 날까지 함께 다니던 사람입니다. 둘째는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사람입니다. 삶을 증거하고, 부활을 증거할 사람입니다. 사람을 세워 빨리 증거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증거할 사람이 있어야 증거합니다. 증거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해야 담대히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이 둘 다가 교회를 설립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데 필수적인 일입니다.
디도서 1:5에는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잘 정리하고 내가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을 위하여 사람을 남겨둡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을 교회는 열심히 하였습니다.
결 론
함석헌 선생의 글 가운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만 리 길을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우리에게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 우리가 이런 사람입니까? 주님이 필요로 하시는 사람입니까? 주님의 수에 가입할 사람입니까? 우리가 들어가면 수가 꽉 채워지는 그런 사람입니까?
이런 사람이 되어 성령 강림을 준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결정은 주님께!
잠언 16:25~33 / 늘푸른교회
얼마 전에 신세대들이 사용하는 ‘답정너’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답은 정해졌으니 너는 그 답에 맞는 대답만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정해진 답에 대한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들은 이미 내가 신이 되어 있다는 반증이 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을 다 자신의 뜻대로 굴복시키겠다는 타락한 인간의지의 발산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33절 말씀을 보면 모든 일의 작정 또는 결정은 여호와께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의 결정과 하나님의 결정은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사람의 계획으로 결정하여 가는 길이 바르게 보일지라도 필경은 사망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결정이 진리가 아닙니다.
민주주의(民主主義)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기에 모든 권력도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국민의 다수가 원하면 그것이 진리이든 진리가 아니든 간에 결정합니다. 전제군주(專制君主)시대는 군주가 마음대로 행하는 정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상의 대다수의 나라가 민주주의정치를 합니다. 심지어 북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주인 된 세상에서 나오는 절대다수의 결정은 진리가 아니라도 진리로 여기며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신의 결정이 소수결정이라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테러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언제나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무엇이 정말로 바른 길입니까?
본문 25절부터 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바르게 보이는 길이라도 마침내 사망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는 무엇이 바른 길입니까? 제가 어려서 학교에서 배운 바른 길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 사람의 바른 길이라고 배웠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도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충효사상과 하나님의 영광이 충동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지금도 가지고 있는 바른 길이라는 것을 흔들어버리기 위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7:13~14절입니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 많습니까? 생명의 길로 가는 사람이 많습니까?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자신들이 멸망의 길로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길로 간다고 여깁니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가기 때문입니다.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는데 이것이 틀린 길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수가 모이는 곳에서는 자기들이 진리의 길이기에 이렇게 사람이 적다고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가치 판단에 따른 길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린 것입니다.
로마서 11:36절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골로새서 1:16~17절입니다.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제가 자주 인용하는 말씀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갑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에게서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모든 것들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모든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이루어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 틀렸고 예수님만이 바른 길로 가신 분이심을 믿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믿지 않고 행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됩니다.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다 옳은 길이라고 하여도 바른 길이 아닙니다.
본문 26절입니다. 고되게 일하는 자는 식욕으로 말미암아 애쓰나니 이는 그의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라고 합니다. 다른 번역으로 보면 허기진 배가 일하게 만들고 그 입이 사람을 몰아세운다고 합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입으로 무엇을 먹어야합니다. 이러한 욕구가 사람으로 하여금 일하게 만듭니다. 만약 사람이 배가 고프지 않다면 먹을 것을 위하여 일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식욕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네페쉬’입니다. 이 단어는 식욕으로 번역이 되었지만 다른 용례를 살펴보면 목구멍, 목, 욕구, 영혼, 생명, 사람으로 사용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갈망하는 인간을 말합니다. 인간이 갈망하기에 행동을 합니다만 그 갈망이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구약에서 ‘네페쉬’가 755회나 나옵니다만 잠언에서만 몇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잠언 7:23절에서는 음녀의 유혹에 끌려가는 소년이 새가 그물에 걸려들 듯이 그 생명(네페쉬)을 잃어버릴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적유혹의 갈망에 넘어가면 생명을 잃게 된다는 말입니다. 16:24절에서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그 마음(네페쉬)에 달다고 합니다. 19:8절에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그 영혼(네페쉬)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7:7절입니다.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여기서 ‘네페쉬’는 ‘배부른 자’입니다. 배가 부르면 꿀이라도 싫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채워지면 그 욕망하는 것도 싫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암몬이 배다른 누이동생 다말을 사모하여 상사병이 들었지만 자기 욕망을 채우고 나니 미워하는 마음이 처음 사모한 마음보다 더 미워하여 쫓아내버리는 것이 인간의 욕망과 충족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갈망들이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데 무엇을 위한 갈망이냐는 것입니다.
전도서 6:7절을 봅니다.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여기서 식욕이라는 말이 ‘네페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의 식욕을 위하여 열심히 수고하지만 그러나 그 수고로움이 자기의 입을 다 채울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갈망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기본적인 갈망과 욕구들인 식욕과 성욕과 수면욕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도 아무리 채워도 사실 만족이 없습니다. 이런 갈망만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이 갈망은 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만족은 오직 말씀이시면 만유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아모스 8:11~13절입니다. “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무엇에 대한 기근입니까?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이 없는 기근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을 얼마나 경험해 보았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못 살겠다는 그런 갈망이 일어나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갈망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성상 우리의 영원하지 않을 것에 대한 것들만 욕망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시며 우리는 다 멸망의 길로 가는 자들이기에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그 욕망의 길로 가게 버려두시지 않고 인생의 전복(顚覆)을 일으키셔서 생명의 말씀이 들리게 하십니다.
본문 27~30절입니다. 이 단락은 악인에 관한 내용입니다. 생명의 길을 가지 않고 자기 욕망에 끌려 사는 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불량한 자들이며, 패역한 자들이며, 강포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악을 꾀하고 그 입술에 맹렬한 불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합니다. 말쟁이란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자는 칭찬보다 흉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한 벗을 이간질 시킵니다. 이런 자들은 이웃을 꾀어 좋지 않은 길로 인도합니다. 눈짓을 하고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입술을 닫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필경이 사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이런 길로 가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이 악한 자들의 행태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켜보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의 이야기로 들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악인의 모습이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의 말로만 들린다면 그 사람은 아직 주께로 돌이킨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돌이켜 주신 자들은 이러한 악인의 모습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자들은 비로소 자신의 본성적인 갈망이 멸망의 길임을 알게 되기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의지하게 됩니다.
31절입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며 공의로운 길에서 얻는다고 합니다. 백발은 단지 머리색깔이 희다는 의미가 아니라 장수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수는 공의로운 길에서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의롭게 산 사람이 오히려 일찍 죽임 당하는 것이 성경의 기록입니다. 그러면 백발이 공의로운 길에서 얻는 영화의 면류관이라는 말씀은 성경의 일반적인 진술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롭게 살면 장수한다는 말씀이지만 나이가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리 백발이 되어도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백발이라는 나이의 유무보다 지혜의 유무가 중요합니다.
호세아 7:8~11절입니다. “8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9 이방인들이 그의 힘을 삼켰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무성할지라도 알지 못하는도다 10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11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 호세아가 전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여러 민족 가운데 혼합되었다고 합니다. 혼합된 것을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고 합니다. 전병(煎餠)을 뒤집지 않으면 밑은 타고 위는 생것이라서 도저히 먹을 수 없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백발이 되어도 여호와를 찾는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백발이 무성하면 나이가 많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여호와의 징계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이나 앗수를 의지하기에 지혜가 없다고 합니다. 백발이라고 해서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집이 더 세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유무가 영광의 면류관의 유무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32절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인간이 최초로 분노한 사건은 가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물을 받아주시고 자신의 것은 받아주시지 않으니 그것에 분노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것을 받아 주시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받아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용납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사를 통하여 믿음의 제사가 무엇인지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히브리서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이 분노로 인한 죄가 도사리고 있음을 가인에게 알려주셨지만 가인은 그 죄를 다르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자기 자신이 주님 앞에서 어떤 죄인인지 알게 되는 자들이 분노가 다스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말씀에 의하여 자신의 실상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자는 들었던 돌을 내려놓게 됩니다.
본문 33절입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아직도 제비뽑기를 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이 우림과 둠밈 이라는 판결법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는지 방법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어떤 일의 결정을 할 때에 제사장이 제비를 뽑는 방식이지만 그 결정은 하나님께서 한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27:21절입니다.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로써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따라 나가며 들어올 것이니라” 모세가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우면서 우림의 판결로서 여호와께 물으라고 합니다. 제사장이 우림과 둠밈을 사용하여 가부간에 결정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교부들의 성경주해에서 본문 33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제비는 옷 폭에 던져지지만 결정은 온전히 주님에게서만 나온다.” 여기서 옷 폭에 던져진다는 것은 아래까지 내려뜨려지는 옷을 입고 앉으면 한복의 치마폭과 같은 부분이 생기는데 그 위에 제비를 던졌다는 설명을 합니다. 곧 제사장들의 겉 옷 위에 우림과 둠밈을 사용하여 결정을 정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확대하면 어떤 계획과 뜻을 사람이 세우더라도 그 결정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잠언 19:21절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사람의 마음에 수많은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설 것입니다. 월요일 서울에 갔다가 화요일 내려왔습니다. 서울 시내가 얼마나 막히는지 내비게이션이 다른 길로 인도하여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오는 길에 하늘에 비행기가 오색 연기를 날리며 편대비행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녁에 뉴스를 보니 대통령이 참석한 행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작은 한 나라의 일도 무슨 일이 일어지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한 나라의 일보다 더 많은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우리 안에 일어납니다. 그러나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섭니다.
이사야 40:6~8절입니다.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외쳐야 할 내용이 이 말씀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며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한번 불어버리면 풀이 마르고 꽃이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백성이 실로 풀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풀이라는 말씀입니다.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듭니다. 우리도 다 이렇게 시들고 말라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의 수많은 계획과 뜻들이 무너져도 괜찮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 안에 세워지려면 우리의 뜻과 계획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결정은 주님이 하신다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일을 우리와 의논하지 않으시고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23~25절입니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ㄴ)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고 계획하였던 것들은 결코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원한 것은 썩어질 세상의 영광이었습니다. 내세를 생각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나의 영광이 영속되기를 원한 것이지 일찍 죽임 당한 어린 양의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명에 관한 모든 결정을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과 성령께서 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런 결정을 우리에게 맡기셨다면 우리는 다 멸망의 길로만 달려갈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결정을 주님께서 하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우리에게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