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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묵호읍의 연혁
강릉대도호부는 1457년(세조 3) 진이 설치되면서 삼척, 양양의 2개 도호부와 4군·2현을 총괄하게 되었다. 이때 옥계면과 옛 묵호읍인 망상현(望祥縣)이 설치되었다. 강릉대도호부 내의 망상현은 1648년(인조 26) 망상리로 개칭되었다가 1705년(숙종 31) 다시 망상면으로 고쳐졌다.
근대에 들어 고종 32년(1895년) 전국이 23개 부로 개편될 때 강릉대도호부는 강릉부로 개편되었다가 이듬해 강릉군으로 바뀌었다. 조선총독부령 제111호 '부군의 명칭 위치 관할구역 개정'에 의거 1914년 4월 1일 시행(강원도)된 면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개정 이전 강릉군 망상면 12개 리[일리(一里), 노봉리, 초구리, 괴란리, 만우리, 발한리, 심곡리, 동호리, 부곡리, 묵호진리, 어달리, 대진리]에서 동호리가 발한리에 통합되고, 노봉리와 일리가 망상리에 통합되면서 10개 리로 개편되었다. 1942년 10월 1일 망상면이 묵호읍으로 개편되었다.
1955년 강릉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강릉군은 명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79년 12월 28일 동해시 설치에 관한 법률(제3188호) 공포에 따라 명주군 묵호읍과 삼척군 북평읍을 통합하여 1980년 4월 1일 동해시가 탄생되었다.
2. 묵호읍의 자연환경
묵호읍의 면적은 약 38㎢이며, 동쪽은 동해 바다와 접해 있으며, 최서단은 만우동과 예전 북평읍에 속했던 비천동의 경계 지점으로서, 매봉산(607m)과 형제봉(482m) 사이의 중간 지점인 해발 532m의 능선이 된다. 최남단은 초록봉(531m)이며, 최북단은 동해고속국도 상행선 동해휴게소 바로 위 지점이 된다. 형제봉 부근의 계곡(모유천, 母乳泉)에서 발원한 지류는 괴란동과 만우동을 관통하여 마상천(馬上川)으로 합류하는데 이는 망상동 일대에 규모는 작으나 기름진 충적지인 마상평에 벼농사에 필요한 농업용수의 공급원이 되고 있다. 묵호읍의 최북단 해안에 형성된 망상해수욕장은 모래사장이 넓을 뿐만 아니라, 동해안 대부분의 해수욕장과는 달리 경사가 완만하여 해수욕장으로서의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묵호읍의 기후는 백두대간 줄기와 쿠로시오 난류의 영향을 받는 연안 해류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연중 온난한 기후 분포를 보이며, 『시 개청 이전 동해 통계 자료집(1965~1980)』에 따르면 묵호읍의 연평균기온은 섭씨 12도 내외이고, 연간 강우량은 1,350mm 내외이다. 천기일 수는 맑은 날씨가 연평균 약 120일, 눈 오는 날이 연평균 약 20일이고, 나머지는 흐리고 비 오는 날 등이다. 묵호읍의 월별 평균 풍속은 약 3m/s이며, 월별로 11월, 12월, 1월, 2월, 3월, 4월은 풍속이 강한 편이고, 특히 봄철인 4월에 강한 돌풍이 발생하기도 한다. 강풍의 주 방향은 남서, 서남서, 남남서이다. 또한, 산악지대 고산지의 기후적 영향을 받아 갑작스럽게 일교차가 크거나, 기상변화로 인하여 집중호우, 폭설 등이 내려 재해적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5. 역대 망상면장(1919년~1942년)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직원록』에 따르면 망상면이 1942년 10월 1일 묵호읍으로 승격되기 전 1919년부터 1942년까지 역대 망상면장은 다음과 같다.
1. 정광묵(鄭光黙): 관직: 망상면장, 재임기간: 1919년~1931년.
2. 한창우(韓昌愚): 관직: 망상면장, 재임기간: 1932년~1941년 2월 6일.
3. 김재기(金在璣): 관직: 망상면장, 재임기간: 1941년 2월 7일~1942년 9월.
6. 초대 묵호읍장(1942년)
1942년 10월 1일 강릉군 망상면이 묵호읍으로 승격되면서 초대 묵호읍 읍장이 된 분은 마지막 망상면장이었던 김산재기(金山在璣, 창씨개명 전 이름: 김재기) 씨였다. 1942년 10월 15일 매일신보에 묵호읍 읍장 임명에 관한 기사가 보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묵호읍 초대읍장 김산재기(金山在璣)
기보(旣報)한 바와 같이 동해안 수산 개발의 계토항(昋吐港)으로서 모든 시설의 비약적 정비를 보이고 있는 약진 묵호가 지난 1일로 읍제 실시를 보게 되자 역사적 새 출발을 한 大墨湖(대묵호) 건설에 초대읍장이 2만 주민의 시청(視聽)을 끌어오던바 지난 5일부로 일반 주민에 신망이 자자(藉藉)한 金山在璣(前面長) 씨가 임명되었다.
7. 묵호읍의 민선 읍장‧읍의원
제1대 읍‧면장 선거는 1952년 4월 25일 시행된 읍‧면 선거에 의해 구성된 읍‧면의회에서 간선제로 선출되었다. 당시 간선제 묵호읍장은 민병걸이었고, 묵호 읍의회 의장은 서정국, 부의장은 민병호였다. 제2대 읍‧면장 선거는 1956년 8월 8일에 시행되었는데 묵호읍에서는 민병걸이 5,549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제3대 읍‧면장 선거는 1960년 12월 26일에 시행되었는데 묵호읍에서는 김일규가 4,883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강원지방 선거총람』에 따른 읍의원 선거를 보면, 제1대 읍의원 선거는 1952년 4월 25일 강릉, 주문진, 묵호읍에서 시행되었는데 묵호읍 읍의회 의원 정수는 15명이었다. 묵호읍의회 의원 당선자만 살펴보면, 서정국, 한상우, 최재번, 권형식, 김일규, 이학래, 정원갑, 김부하, 최병호(한국사 DB 『대한민국 직원록』에는 민병호로 기록되어 있음.), 김태화, 한광우, 최여집, 김진철, 김진수, 김남산 등 15인이었다.
제2대 읍의원 선거는 1956년 8월 8일 명주군 주문진읍과 묵호읍에서 시행되었는데 읍의원 정수는 각각 13명이었다. 묵호읍에서는 최찬집, 장수봉, 신태호, 김상회, 조순원, 장정원, 최일규, 박봉석, 홍원욱, 정길조, 김시현, 정연담, 김진철이 당선되었다. 제3대 읍의원 선거는 1960년 12월 26일에 시행되었다. 읍의회 의원 정수는 각각 13명이었고, 선거구는 주문진 5개, 묵호 4개였다. 묵호읍에서는 신흥선, 나승선, 장수봉, 정덕규, 고광을, 이영한, 홍순욱, 김승담, 김부하, 조순원, 임정우, 정흔모, 김진황이 당선되었다.
이후 5‧16 군사 정변으로 중단된 지방자치는 1991년 부활하였으나, 이는 임명제 단체장 체제가 존속하는 상황에서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1995년 시행 전국 동시 지방선거(제1회)를 통해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는 새로운 출발을 맞게 되었다.
左: 민선 제2대 묵호읍장, 사회주임 송별 기념(1960, 6, 2), 출처: 강동수, 右: 민선 제3대 묵호읍장 취임식 (1961, 1, 5), 출처: <사진으로 보는 동해시>
左: 민선 제2대 묵호읍장, 사회주임 송별 기념(1960, 6, 2), 출처: 강동수, 右: 민선 제3대 묵호읍장 취임식 (1961, 1, 5), 출처: <사진으로 보는 동해시>
9. 묵호경비부(조선해안경비대 묵호기지)
1946년 8월 22일부터 1974년 1월 28일까지 강원도 묵호읍 구(舊) 삼척철도주식회사 건물 일부에 설치됐던 조선해안경비대 묵호기지(현 발한동 관사 일대)가 현재 동해시에 있는 해군 제1함대사령부의 모태다.
제1함대사령부 연혁
1946.8.22: 묵호기지 초대 사령관으로 정긍모 부위(중위, 제3대 해군참모총장) 취임.
1949.6.01:조선해안경비대 묵호기지가 묵호경비부로 승격.
1971.7.01:묵호경비부 해상경비사령부 승격.
1971.8.01: 해상경비사령부 제1해역경비사령부 개칭.
1973.7.01: 제1해역경비사령부 제1해역사령부 개칭.
1986.2.01: 제1해역사령부 제1함대사령부 승격.
묵호경비부는 6·25 전쟁 직전까지 부산의 제2 정대 소속 소해정 14척이 묵호~주문진 간을 경비함과 동시에 강릉~묵호에 이르는 각 해안에 해상감시 초소를 설치하고 해상감시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창설 4년 만에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 당일 우리 해군이 치른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승전인 옥계해전이 동해에서 벌어졌으며, 묵호경비부의 전투 상황은 해군 옥계지구 전적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0. 강릉경찰서 묵호지서(망상주재소)
일제강점기 망상면의 치안은 강릉읍 내에 설치되었던 주문진, 연곡, 사천, 정동, 성산, 왕산, 고단, 구정, 성덕, 강동, 옥계, 망상 등 12개소 주재소 중에서 망상주재소가 담당하였다. 생활상태조사, 강릉군에 기록된 경찰정원 및 인원 현황(1930년 6월 1일 현재)에 따르면 망상주재소의 정원은 일본인 순사부장 1인, 일본인 외근순사 1인, 조선인 외근순사 1인 등 합계 3인이었으나, 현원(現員)은 일본인 순사부장 1인, 조선인 외근순사 2인이 근무하였다. 1942년 10월 1일에 망상면이 묵호읍으로 승격되고 해방을 맞이하면서 1945년 10월 21일에 국립 경찰 창설과 동시에 강릉경찰서가 용강동에서 개서하였다. 그 당시 묵호읍에는 1945년 10월 21일 신설된 강릉경찰서 묵호지서만이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인구 유입의 증가로 인한 치안 및 각종 사회문제를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1977년 10월 1일에 명주군 묵호읍에 진리지서를, 1978년 10월 1일에 부곡지서를 신설하여 묵호읍에는 3개의 지서가 묵호읍의 민원업무 처리, 기초질서 단속 등 생활 안전 활동, 수사 활동, 경비교통 활동 등의 주요 활동을 수행하였다.
11. 강릉구재판소(江陵區裁判所, 망상지역 관할)
1907년 12월 26일 재판소구성법 개정에 따라 재판소를 구재판소(區裁判所), 지방재판소, 공소원(控訴院), 대심원 등 4단계로 하였으며, 구재판소는 판사가 단독으로 재판을 하게 하였으며 각 재판소에 검사국을 두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개편에 따라 강릉군에 속해있던 망상지역은 강릉군, 양양군, 간성군의 3개 지역을 관할하는 경성지방재판소 강릉구재판소에서 업무가 처리되었고, 삼척군에 속해있던 북평지역은 울진구재판소에서 재판업무를 관할하였다. 1909년 11월 1일 통감부 재판소 설치법에 의거 경성지방재판소 춘천지부 강릉구재판소가 되었다가 1910년 6월 4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으로 개명되었다.
강릉구재판소, 출처: 『사진으로 보는 강릉‧명주 풍물집』
강릉구재판소, 출처: 『사진으로 보는 강릉‧명주 풍물집』
1945년 10월 11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원은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으로 춘천지법의 관할 하에 소속되게 되었고 1947년 1월 1일부로 춘천지방심리원 강릉지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1948년 6월 1일에는 미군정법령 제192호에 의해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동년 8월 1일에는 합의부지원으로 승격되었다. 1949년 9월 26일 법원조직법을 법률 제51호로 제정하였으나 이 법은 미군정법령 제192호를 승계한 것으로서 그 후 수차례 개정이 있었으나 그 골격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2. 묵호우편취급소(묵호전신전화취급소)
묵호우체국(동해우체국)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1937년 3월 1일: 강릉군 망상면 발한리에 묵호우편취급소 설치.
1938년 3월 6일: 묵호우편취급소 폐지로 묵호우편소가 사무 승계.
1938년 11월 26일: 체신국에서 시내전화 75대를 가설하여 묵호우편소에서 전화 교환 업무 개시.
1941년 2월 1일: 묵호우편국으로 개칭.
1981년 10월 26일: 묵호우체국으로 국명 변경.
1987년 1월 22일: 동해우체국 개국
묵호세관_ 사진 강동수
묵호세관_ 사진 강동수
13. 묵호세관
1946년 4월 27일 미군정청 당시 묵호세관으로 출발해 1947년 8월 25일에 재무부 소속으로 묵호세관을 설치하고 소속기관으로 주문진감시서를 두었다. 1952년 8월 13일 묵호세관을 부산본부세관 소속 묵호출장소로 개편하였다, 1957년 1월 25일 묵호출장소를 서울본부세관 소속으로 이관하고 속초감시서를 설치하였고, 1961년 10월 2일 묵호출장소를 묵호세관으로 승격하고 주문진감시서를 폐쇄하였다. 1978년 7월 15일 묵호세관 속초감시서를 폐쇄하였고, 1980년 6월 14일 묵호세관을 동해세관으로 개칭하면서 묵호세관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14. 묵호해항검역소
1946년 2월에 미군정청 묵호검역주재소가 설치되었으며, 1949년 12월 10일 대통령 제230호 해공군(海空軍) 검역소 직제 공포(公布)에 따라 보건부 소속으로 묵호해항검역소가 발족했다. 1955년 2월 17일에 보건사회부 소속으로 변경되고, 1960년 8월 12일에 국립묵호해항검역소로 개편되었다. 1966년 1월 7일에 국립묵호검역소로 개편되고, 1980년 7월 3일에 국립동해검역소로 개편되었다.
15. 묵호소방대
1946년 강원도에서는 「군정법령」 제66호 및 강원도소방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1946년 12월 15일 춘천, 강릉, 삼척, 주문진, 영월, 북평 등 6개 지역에 소방서를 설치하여 지역 소방업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는데 이때부터 강원도에 소방서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50년 5월 27일 대통령령 제361호 「시·도 소방서의 명칭, 위치 및 관할구역에 관한 건」에 의거 강릉, 삼척, 주문진, 영월, 북평소방서 등 5개 소방서가 폐지되었으며, 이후 강원도 영동지역에는 소방서가 전무하였으나, 영동지역의 소방수요 증가와 소방 사각지대 해소 차원에서 1966년 12월 22일 강릉시 명주동 32번지에 강릉시 일원을 관할하는 강릉소방서를 개서하게 되었다.
1970년 12월 31일 법률 제2249호 「소방법」 개정 시 소방업무에 대한 책임을 시장, 군수로 하였으나 시, 군의 재정 여건 및 소방조직의 특성상 이를 시행할 수 없어 부칙에 규정을 두어 유보하여 오던 중 민방위와 소방행정을 통합하는 민방위본부의 설치를 계기로 「시·군의 직제에 관한 규칙」을 개정하였는데 이 규칙에 의해 춘천, 원주, 강릉, 속초 등 4개 시에는 민방위과에 소방계를 두어 소방서와 공조 체제를 갖추었고, 군(郡)에는 민방위과 민방위계에서, 읍, 면에서는 총무계에서 소방업무를 관장하였다.
한편, 묵호소방대와 관련된 1950년 5월 9일 연합신문에 실린 ‘묵호소방대 표창’ 기사 내용으로 보아 묵호소방대는 6․25 전쟁 이전에 이미 소방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묵호소방대는 지난 2일 10시 동대(同隊) 전정(앞뜰)에서 관민 다수 참석리에 대기(隊旗) 수여식 및 표창장 수여식이 있었는데 표창장은 묵호소방대 및 다음 두 사람에게 수여되었다 한다.
- 도지사 표창: 묵호소방대
- 감찰국장 표창: 부대장(副隊長) 최문선, 제3 분대장 최석집
16. 묵호번영회
1934년 3월 묵호항의 비약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묵호번영회가 조직되고 초대 회장에 망상면장을 역임하고 있는 한창우 씨를 추대하였으며, 부산일보에 실린 묵호번영회 조직과 활동 사항에 대한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강릉군 묵호항에서는 이번에 관민(官民)과 유지(有志)가 하나가 되어 번영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망상면장 한창우 씨를 추대하였고, 이를 계기로 석탄반출항 및 우편소 유치 운동을 시작하였다. 우선 첫째로 도회(道會)에 출석 중인 다나까(田中), 최(崔) 두 사람의 강릉 선출 도의원을 통하여 도지사를 시작으로 기타 요로(要路)에 삼척탄 반출항을 묵호항으로 결정해 주길 바라는 뜻을 한창우 번영회장과 기타 유지의 이름으로 진정하였다.
17. 묵호어업조합(망상면 어업조합)
1924년 11월 10일에 대진어촌계와 어달어촌계가 결성한 망상면 어업조합이 설립되었고, 1924년 11월 15일 조선총독부 관보 허가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명칭 : 망상면 어업조합
- 구역 : 강원도 강릉군 망상면
- 소재지 : 강원도 강릉군 망상면 묵호진리
- 허가연월일 : 대정 13년(1924년) 11월 10일
이후 1929년 3월 31일 묵호어업조합으로 개편되었으며, 1955년 당시 강릉군에는 주문진읍 주문리의 주문진 어업조합, 현남면 인구리의 인구 어업조합, 강릉읍 견소동에 강릉 어업조합, 묵호읍 묵호진리의 묵호 어업조합 등 네 개의 조합이 있었다. 1961년 6월 8일에 해무청의 수산 단체 정비 통합 요강에 따라 강릉군의 수산조합은 주문진어업조합, 강릉어업조합, 묵호어업조합으로 통폐합되었다. 1962년 1월 20일에는 수산업 협동조합법이 공포되면서 1962년 3월 30일에 수산업 협동조합 부칙 제2조에 의거 묵호어업조합이 해산되고 묵호어업협동조합이 설립되었다. 이때 기존 대진어촌계와 어달어촌계 외에 천곡어촌계가 편입되면서 3개의 어촌계가 묵호어업협동조합에 포함되었다. 1976년 12월 31일에는 8차 수협법 개정으로 어업협동조합에서 수산업 협동조합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묵호어업협동조합도 묵호수산업 협동조합으로 변경되었다. 1980년 동해시 개청과 함께 동해시수산업 협동조합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 삼척철도국(삼척운수국)
일제강점기 삼척철도주식회사의 재산이 미군정을 거쳐 정부로 귀속되면서 교통부에서는 삼척철도(철암선)와 묵호항의 해운을 관할하는 삼척운수국을 1949년 3월 16일에 신설하고 동년 4월 1일에 묵호철도회관에서 개국식을 거행하였으며, 초대 국장은 신의식(申義湜)이었다. 그 당시 교통부 산하에는 서울, 부산, 대전, 안동, 순천 등 5개 지방 철도국이 있었는데 이것은 총독부 철도국의 지방철도사무소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삼척운수국은 삼척 공업지대의 물자 수송과 더불어 삼척탄전지대에서 생산되는 석탄을 삼척철도를 이용하여 묵호항으로 수송할 전담 운수 기구의 필요성에 의해 설치되었다.
이후 삼척운수국은 1955년 2월 17일 교통부 직제 개정 공포에 따라 삼척철도국 개편으로 6대 지방 철도국의 일원이 되었다. 1961년 10월 2일 교통부 직제 및 철도국 직제 개정 공포에 따라 삼척철도국과 안동철도국을 병합하여 영주철도국으로 개칭 발족하였다.
묵호항 삼척철도 시운전, 사진_ 강동수
묵호항 삼척철도 시운전, 사진_ 강동수
19. 묵호항역과 묵호역
현재의 묵호항역은 1940년 8월 1일 삼척철도에서 도계역~묵호역 간 운수업을 개시하면서 철암선(철암역~묵호역 간 60.5㎞, 현 영동선)이 처음 개통할 때만 해도 묵호역이라는 이름으로 영업하였다. 그러나 약 20년의 기간이 지나면서 영동선이 강릉역까지 연장될 때 지나치게 바다와 가까워 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과 묵호항역 역세권이 발달했다는 것 등으로 인해 묵호역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원래의 묵호역은 묵호항역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묵호항역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승강장도 모두 철거하고 선로만 9개 있는 화물역으로 전환되었다.
묵호항역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1961년 5월 5일: 1940년 묵호역(현 묵호항역)이 처음 영업을 개시할 때는 여객 업무도 같이 보았지만, 1961년 5월 5일 북평~옥계 구간 개통으로 인해 여객 및 소수화물 취급을 중지하고 화물업무만 전담. 현 묵호역 영업 개시.
∙1968년 12월 30일: 북평선을 통해 수송된 시멘트를 묵호항을 통하여 운송하기 위해 북평역(현 동해역)~묵호항역을 연결하는 묵호항선 5.1㎞ 복선 개통. (1968년 1월 4일 착공, 공사비 93,714,000원 투입).
∙1970년 1월 1일: 묵호항역~묵호역 간 연결선을 개통.
∙1971년 9월 30일: 부두 업무를 홍익회(現 코레일유통)에 이관. 보통 하역작업은 항운노동조합이 용역을 독점하나 묵호항역의 하역용역은 현재 코레일유통이 독점하고 있다. 이는 1940년대 당시 국철 사설 부두였던 묵호항의 하역용역을 홍익회(당시 강생회, 康生會)에 불하한 것이 그 연원이다.
20. 묵호항
『국역 동호승람』에 따르면 ‘1930년에 묵호진항(현 묵호항)은 망상면에 있으며, 북쪽으로 강릉읍과 80리, 남쪽으로 삼척읍과 40리이다. 기선 출입수 연간 210회, 기타 선박 출입수 연간 58회, 화물 수출 연간 5,308원, 수입 4,829원이다.’로 기록되어 있다. 묵호항은 본래 소규모의 어항이었으나 강원지방의 무연탄 반출항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기 위하여 1929년에 축항 공사가 시작되어 1931년 9월 27일에 축항(築港)이 완공되었고, 태백, 삼척지역에서 나오는 무연탄을 수탈하기 위하여 1939년 5월에 묵호항과 도계를 잇는 철도가 가설되고 일본으로의 반출이 늘어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1940년 8월 1일 철암선이 정식으로 개통되면서 묵호항 내에 철도가 부설되어 물자 수송이 쉬워졌으며, 1963년 영동선이 개통되면서 강릉까지 연결하는 철도가 부설되었다.
해방 이후 묵호항은 1945년 8월 15일부터 미군정청 교통국 묵호부두국이 관리를 시작하였다. 1946년 7월 30일 중앙신문에 따르면 미군정청에서 1946년 7월 12일부로 「외국무역규칙 제1호」를 공포하고, 8월 1일부터 외국무역을 위해 인천, 목포, 묵호, 부산, 군산 등 5개 항을 개항장으로 정하였다. 이때부터 묵호항이 개항장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47년 8월 25일 「과정법령(過政法令) 제149호 대외무역규칙 제7조」에서 인천, 군산, 묵호, 목포, 부산, 제주 및 김포 비행장이 개항장(開港場)으로 개정 지정되었다. 이후 묵호항은 1949년 2월 15일부터 교통부 삼척운수국 항무과, 1955년 12월 2일부터 해무청 묵호지방해무청, 1961년 10월 1일부터 교통부 묵호지방해운국이 관리하였다. 1962년 3월 공포된 「개항질서법시행령」에 따라 인천항, 군산항, 목포항, 여수항, 마산항, 부산항, 묵호항과 제주항이 내·외국의 선박이 상시 출입할 수 있는 개항으로 지정되었다. 묵호항은 1973년 5월 25일부터 교통부 부산항만관리청 묵호항만관리사무소, 1976년 3월 13일부터 항만청 묵호지방해운관리청, 1977년 12월 16일부터 묵호지방해운항만청이 관리하였다. 그리고 1980년 5월 6일부터 동해지방해운항만청 묵호출장소가 관리하였다. 현재는 해양수산부 동해지방해양수산청이 관리하고 있다.
묵호항은 1960년대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행으로 석탄과 시멘트의 반출항 및 어항으로서의 시설확장을 본격화하였다. 이 시기는 삼척의 시멘트와 양양의 철광석, 동해안의 수산물을 수출하는 항구로써 크게 발전하였고, 1976년 2월에 세계은행(IBRD) 차관자금으로 대규모 확장공사에 착수하여 석탄 하역 장비의 교체 및 신설, 기존 석탄 부두의 개수, 방파제 등을 보강하여 항구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1969년 10,000톤급 선박 접안 시설을 준공한 이후 1979년 산업기지개발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져 5만 톤 이상의 배가 접안할 수 있는 항구시설을 갖추었다.
묵호등대 점등(1968, 영화 미워도 다시한번)
묵호등대 점등(1968, 영화 미워도 다시한번)
21. 묵호등대
동문산에 있는 묵호등대는 유인등대(교통부 고시 제899호)로서 1963년 6월 8일에 최초 점등 되었으며, 현 묵호등대 등탑의 구조와 특징은 다음과 같다. 구조는 철근 콘크리트조이고, 등탑 높이는 26미터로 외형의 모습은 백색 원형이다. 특징은 내부 직경 3.5m의 3층 구조로서 내부 원형 구조를 따라 나선형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기초부(基礎部), 등탑부(燈塔部), 등록부(燈籠部)의 3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등탑부와 등록부 사이에 외부 난간을 설치하여 등탑의 유지보수 및 외부조망을 용이하게 하였다. 또한, 최상부에는 등명기(燈明機)를 보호하는 등롱을 설치하였고 그 아래 전망대를 설치하여 관람객들이 바다를 편하게 관람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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