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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Images/멀티비츠/나비뉴스 |
"어허, 저런"
잠실구장 원정경기. 노장 해태 선수 한 명이 혀를 끌끌 찼다. 친한 동료 선수의 안부를 묻기 위해 LG 라커룸에 잠시 들렀더니 새카만 신참 선수가 훈련 종료후 짬뽕 한 그릇을 시켜 맛있게 먹고 있는 것 아닌가. 뜨겁고 매웠는지 김을 후후 불어가며 후루룩 쩝쩝. 찝찔한 표정을 짓고 이 고참은 혼잣 말로 뇌까렸다. "LG 참 대단하네. 저런 꼬마들이 떡 하니 중국 음식도 시켜먹고 말이지!"
십 수년 전 풍경이다. 짬뽕. 자장면과 함께 대표적인 이 중국음식은 해태-KIA 선수들에게 좀 색다른 의미였다. 고참들만 시켜먹을 수 있고, 당연히 베테랑 선수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다.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지만 한국 프로야구 라커룸에서 단무지와 함께 벌건 국물에 담겨 나오는 이 면류의 음식은 럭셔리 식품이었던 셈.
'그런데 LG는 아무나 먹다니, 이래도 되는거야?' 8개구단 선수단 분위기가 크게 달라 LG의 비교적 자율적인 풍경에 해태 한 고참은 도저히 심정적으로 납득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해태 4번 타자 출신인 한대화 삼성 수석 코치는 "OB에서 해태로 트레이드 된뒤 짬뽕을 먹기 시작했던 시점이 언제였더라. 아마 몇 년 있다가 중국집에 전화를 할 수 있었죠 .. 바로 그런 모양새를 취하기엔 아무래도 눈치가 보였죠, 뭐"
이런 LG도 수년전 제동이 걸렸던 때가 있다. 당시 LG로 오게 된 모 여자 트레이너가 선수단에게 짬뽕 금지령을 제안한 것. 영양학 박사 출신인 그녀로선 아무래도 선수들이 운동을 하는데 있어 밀가루 음식이 좋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당시 가장 극렬하게 반대했던 선수는 예상대로 '야생마' 이상훈 .. 한동한 짬뽕 금지령은 선수단에게 큰 불편을 안겨줬었다고 한다. 이후 트레이너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어느 정도 해빙 무드가 된듯 했으나 올해 김재박 감독 부임 이후 다시 이런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요즘 LG는 덕아웃 옆 간이 뷔페를 차려 훈련뒤 음식을 먹던 관행이 없어지고 대신 숙소에서 끼니를 해결한 뒤 구장으로 이동한다.
메이저리그에서 대표적으로 금지되는 음식은 역시 정크푸드의 대명사, 햄버거다. 마이너리거나 먹는 음식으로 여겨진다. 볼티모어 트리플A 출전을 노리고 지난해 메이저리그의 대표적인 투수 클리닉인 톰 하우스의 NPA(national pitcher's association)에서 클리닉을 지도 받았던 손혁(전 프로야구 두산 투수)은 "햄버거를 정말 먹고 싶으면 한 달에 딱 한번만 먹어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다. NPA에선 물도 브랜드 두개를 딱 골라 지정해 줬는데 미네랄이 가장 많이 함유된 물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 4월 탬파베이의 2년차 유망주들이 집단 바이러스 증세에 시달리자 조 매든 감독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마이너리그 시절 먹던 햄버거와 초코바를 충분히 먹지 못해서 그런 모양"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초코바가 등산하는 이들에게 귀중한 열량식임에는 틀림 없지만 적어도 야구 선수들에겐 함부로 먹어서 안될 음식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음식 또한 상황에 따라 최고급으로 바뀔 때가 있다. 1999년 김병현이 애리조나 입단 첫해 목 근육통으로 마이너리그로 잠시 내려갔을때 라커룸 풍경이 사뭇 놀라웠다. 빅리그서 부상 치료를 위해 애리조나 투산으로 온 김병현이 라커 룸서 간단하지만 고열량의 음식을 먹고 있는 반면, 루키 리그 선수들에겐 이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클럽하우스의 요리 음식과 비교해보면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루키 선수들에게는 그저 새끼줄에 매달려 있는 조기에 불과 했다. 김병현은 "루키 선수들은 자판기에서 음료수나 간단한 초코바 등을 먹어야 합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더욱 그런 것 같다. 음식에도 급이 있고 훈련에도 퀄리티가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받아들이는 사람 몫이 아닐까 라는 것. 십수년전 해태 라커의 짬뽕은 고참들의 노련한 플레이에 윤활유 역할을 하는 일종의 멋진 코스 요리 이상이었고, 마이너에서 뛰는 루키에게 고열량의 초코바 하나는 매일 자신이 훈련 한계치를 초과한뒤 자신에게 건네는 훈장 같은 것 아니었을까.
웰빙 시대, 과잉 영양 시대.
양준혁이 미군부대서 스테이크를 먹고 체력을 유지한다는 2007년에
한대화 수석이 눈치 보며 먹던 짬뽕이 생각나는 것도 그래서다. 철저한 웨이트 트레이닝과 마운드 분업화가 이뤄지는 2007년에 호기롭게
선동열-
정삼흠이 술먹고 다음날 완투쇼를 펼치던 시절이 생각나는 것도 그래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