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흔히 그려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지식인과 교수 세계를 신랄하게 파헤친 소설 3부작으로 알려진 영국 작가 겸 비평가 데이비드 로지가 새해 첫 날 89세를 일기로 저하늘로 떠났다고 BBC가 3일 전했다. 부커상 후보로 지명된 코믹 캠퍼스 소설 '교수들'(Small World : An Academic Romance, 1984, 공진호 옮김 마음산책)과 'Nice Work'(1988)로 유명한데 두 작품 모두 문학과 교수, 상아탑 생활을 신랄하게 풍자하며 저자 가 직접 TV 드라마로 각색해 인기를 끌었다. 두 작품과 출세작인 'Changing Places'(1975)를 묶어 캠퍼스 3부작으로 불린다.
출판사 하빌 세커는 고인이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잠들었다고 밝혔다. 출판사는 한 자녀가 "데이비드 로지란 아버지 밑에서 자란다는 것은 재미있었다"며 "버밍엄 대학 동료들과 전 세계 작가들이 버밍엄에 있는 우리 집을 찾아줬다. 저녁 식탁에서의 대화는 늘 생기 있었으며 데이비드가 논쟁 거리로 올라온 어떤 것을 찾는다고 참고가 되는 책을 갖추는 반면 우리 어머니 메리는 제 할 몫을 다하셨다"고 돌아봤다.
출판사는 "이미 고전이 된 재주 넘치고 전설적인 작품들은 물론 비평에서도 고인이 문단 문화에 끼친 기여는 엄청나다"고 밝혔다. 에이전트인 조니 겔러는 성명을 통해 "고인은 아주 친절하고 겸손하며 재미있는 사람이어서 난 그와 작업할 수 있어서, 또 그의 위트를 즐기는 기쁨을 누리고 최근 책을 내며 친구가 될 수 있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운이 좋았다고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나아가 고인을 "사회에 대한 코멘터리, 죽음에 대한 명상과 큰 소리로 웃으며 하는 관찰로 위대한 영어 희극 작가의 팡테온에 가치있는 공헌을 보탰다"며 "진짜 신사"였다고 돌아봤다.
1935년 런던에서 태어난 고인은 전쟁 이후 소박한 가톨릭 가정에서의 성장기가 초기 작품에 자연스럽게 투영됐다. 첫 소설 'The Picturegoer'(1960)』는 런던 남부에 사는 가톨릭 가족과 하숙생들의 관심을 받는 딸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 번째 소설 'Ginger, You’re Barmy' (1962)』는 자신의 군 복무 경험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희극 소설인 'The British Museum is Falling Down'(1965)』는 가난한 가톨릭 대학원생이 박물관 열람실에서 논문을 쓰는 이야기를 담았다. 'Out of Shelter'(1970)』는 1940년 나치의 영국 대공습을 겪는 어린이가 피난처에서 구출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 뒤 'Changing Places'로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5년 뒤 젊은 가톨릭 신도들이 바티칸의 피임 정책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그린 'How Far Can You Go?'로 휫브레드 올해의책 상을 받았다.
2018년 영국 일간 더타임스 인터뷰를 통해 고인은 부커상 수상 불발에 대해 "아마도 우리 세대의 가장 두드러진 작가가 수상하지 못한" 경우일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문학 편집인 로비 밀렌은 "그가 좌절된 야망, 엉망진창인 관계, 성적인 실망의 큰 솔기를 채굴해 뛰어난 사회 코미디를 빚어냈다"고 적었다.
같은 신문의 로라 프리먼은 "그의 고삐 풀린 소설들은 회전목마(whirligig) 정신으로 쓰여졌다. 예를 들어 문단 회의 도중 복도에서의 끔찍한 일, 신원이 오용된 일, 야한 쌍둥이들, 놓친 비행기, 엉망이 된 계획 등"이라고 말했다.
BBC 2채널에서 1989년 드라마로 옮겨진 'Nice Work'에 프라임타임 시간대에 처음 시청자들에게 들린 단어 가운데 하나가 "클리토리스(clitoris, 음핵)"이었음을 프리먼은 지적했다.고인은 두 번째 회고록 'Writer's Luck'에서 이런 움직임을 "내 자랑거리(a feather in my cap)"로 여겼다고 털어놓았다.
로지가 집필한 '소설의 기교'는 헨리 제임스, 버지니아 울프, 제임스 조이스를 포함한 폭넓은 작가들을 망라해 고전이 된 문학적 기법들에 대한 영향력 있는 에세이 모음집이다. 고인의 다른 책들로는 'Therapy'와 'Deaf Sentence', 'A Man of Parts' 등이 있으며 그는 문학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1998년 대영제국 커맨더 훈장(CBE)를 수여받았다. 그 다음해에는 프랑스 예술 및 문학 훈장을 받았다.
2015년 헤이 페스티벌 연설을 통해 그는 아이디어가 고갈돼 이제는 넌픽션을 쓰는 데 매달리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나처럼 일찍 시작한 작가들은 아마도 40대와 50대에 정점에 이르러 그 뒤로 나오는 책들은 한결 힘겨운 싸움이 돼 쓰는 데 오래 걸리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