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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4월 30일
미국 ABC방송 ‘나이트 라인’, 이라크전서
전사한 미군병사 500여명 추모 호명
미국 ABC방송은 이라크전 종전선언일
(5월 1일)을 하루 앞두고 지난달 30일 밤
앵커 테드 코펠이 진행하는 ‘나이트라인
(Nightline)’에서 작년 3월 이라크 전쟁
시작 후 숨진 700여명의 사진과 함께 이름
을 호명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30일 ‘전사자들의 얼굴
(Faces of Fallen)’이라는 제목으로 A17
면에서 A19면까지 3개면을 할애, 3월13
일 이후 이라크에서 숨진 병사 151명의
사진과 이름, 소속, 사망경위 등을 크게 보
도했다. USA투데이도 이날 ‘전쟁의 얼굴
(The Face of War)’이라는 제목의 커버스
토리에서 4월 전사한 병사 119명의 사진과
신상정보를 1~2면에 그들이 숨진 순서대
로 게재했다.
반면, 미 국방부는 유가족들의 사생활 보
호를 명분으로 더 이상 이 같은 사진들을
공개하지 말 것을 지시했으며, 쿠웨이트
에서 비행기에 실리는 관들을 찍은 사진이
시애틀 타임스에 게재된 뒤 이 사진을 찍은
국방부 계약업체 ‘메이택’항공의 두 직원을
해고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백악
관도 국방부의 조치를 환영했다.
▶2015년 ‘스탠드 바이 미’ 가수 벤 E. 킹 별세
한국인의 대표적인 애창 팝송 ‘스탠드 바이 미(Stand by Me)’를 부른 미국의 흑인 R&B(리듬 앤드 블루스) 가수 벤 E. 킹(Ben E. King·77·사진)이 30일 별세했다. 본명이 벤저민 얼 넬슨인 그는 스무 살 때 흑인 보컬 그룹 ‘파이브 크라운스’의 멤버로 가수로 데뷔했다. 호소력 짙고 우수 어린 보컬로 주목받은 그는 이후 그룹 ‘드리프터스’의 리드 보컬로 활약하며 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특히 1961년 발표한 ‘스탠드 바이 미’는 애절한 가사와 멜로디로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꾸준히 애창되는 노래다. 발표 당시 빌보드 정상에 오른 이 노래는 1986년 고(故) 리버 피닉스가 주연한 동명의 성장 영화의 주제곡으로 쓰이면서 25년 만에 다시 영국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르는 진기록도 세웠다. 미국의 대중문화지 롤링스톤은 1999년 발표한 ‘시간을 초월한 명곡 500선’에서 이 노래를 122위에 올렸다.
비틀스의 멤버였던 존 레논을 비롯해 수많은 동료·후배 가수들이 400여 차례 ‘스탠드 바이 미’를 리메이크해왔고, 미 의회도서관은 킹의 원곡에 대해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하며 미국 국가기록물로 등재했다. 킹은 노년기에 접어든 뒤에도 앨범을 발표하고 또 미국과 유럽 등에서 꾸준히 무대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대표곡 이름을 딴 ‘스탠드 바이 미 재단’을 설립해 자선 사업도 벌였다.
▶2015년 프랑스 미쉐린,
프랑수아 미슐랭 전 회장 89세로 타계
▶2010년 상하이 엑스포 개막식
2010년 4월 30일 오후 8시 10분(현지시각) 상하이(上海) 엑스포가 전야제를 겸한 개막식을 갖고 5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184일간 이어지는 대장정에 돌입했다.
이번 엑스포는 전 세계 189개국과 57개 국제기구가 참가해 159년 세계박람회(EXPO) 역사상 최대규모다. 개막식에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 시진핑(習近平) 부주석, 리커창(李克强) 부총리 등 중국 최고 지도부가 대거 참석했으며 이명박 대통령과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등 전 세계 20개국 정상을 포함한 400여명의 각국 지도급 인사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더 나은 도시, 더 나은 삶(Better City Better Life)'을 주제로 한 이번 상하이엑스포에서는 아이에게 음료수를 내주는 가정부 로봇, 태양열을 이용해 자동으로 냉난방이 되는 탄소제로주택, 스스로 주차하는 자동차 등이 선보였다.
역대 엑스포는 에디슨의 백열등과 벨의 전화기를 비롯해 자동차와 비행기, TV 등 인류의 생활을 한 단계 발전시킨 발명품이 공개되는 무대 역할을 해왔다. 에펠탑과 페리스 휠(ferris wheel·대관람차), 과일맛 껌, 캐러멜 콘 등도 엑스포를 통해 첫선을 보였다.
한국은 이번 엑스포에서 한류(韓流)문화를 실감할 수 있는 다양한 공연과 수준 높은 IT기술을 선보였다. 한국관은 외관부터 한글 자모의 기하학적 특성을 표현한 한글픽셀(pixel·TV나 컴퓨터 화면의 화상을 구성하는 최소단위)로 구성돼 있다. 각 픽셀에는 발광다이오드(LED)가 설치돼 야간이면 한글 자모가 화려한 빛을 발한다. 내부 전시공간은 멀티 터치 스크린과 터치 모니터 등을 이용해 한국의 자연과 문화, 음식, 기술 등을 재미있게 체험할 수 있도록 꾸몄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검찰 소환 조사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검찰청 청사를 빠져 나오고 있다.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이 2009년 4월 30일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사상 세 번째로 재임 중 저지른 비리 혐의와 관련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박연차 게이트를 수사 중인 대검 중수부(검사장 이인규)는 이날 오후 노 전 대통령을 소환, 재임 중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사업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600만달러의 뇌물을 받은 혐의(특가법상 뇌물수수) 등에 대해 심야까지 강도 높은 조사를 벌였다.
노 전 대통령은 출두한 지 약 13시간만인 1일 새벽 2시 10분쯤 검찰 조사를 받은 소감을 묻자 미소를 띤 얼굴로 "최선을 다해서 받았습니다"라고 답한 뒤, 사저(私邸)가 있는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로 돌아갔다.
앞서 노 전 대통령은 30일 오전 8시쯤 청와대 경호실이 지원한 버스 편으로 봉하 마을을 출발해서, 5시간여 만인 오후 1시 19분 서울 서초동 대검청사에 도착했다.
전직 대통령의 검찰 출두는 1995년 11월과 12월 노태우(盧泰愚)·전두환(全斗煥) 두 전직 대통령이 비자금 수천억원씩을 조성한 혐의 등으로 조사를 받은 이후 13년여 만이다.
노 전 대통령은 대검으로 출발하기 직전 취재진을 향해 "국민 여러분께 면목이 없다. 실망시켜서 죄송하다"는 내용의 짤막한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2004년 한국학 전문 출판사
‘일조각’ 설립자 한만년씨 별세
▶2002년 20대 여성 5명을 납치·살해한
2인조 강도 검거
▶1998년 호소카와 전 일본총리 정계은퇴 선언
▶1996년 세계적 물리학자 조순탁 교수 별세
▶1996년 주한미군으로부터 AFKN채널 환수
▶1994년 북한 여만철씨 가족 귀순
▶1994년 이영덕 제27대 국무총리 취임
▶1992년 한국-탄자니아 국교 수립
▶1989년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왕의 미망인 이방자 여사 별세
1963년 봄 이방자 여사의 정원에서 촬영한 사진.
▶1983년 `외교관 등 국제적 보호인물에 대한
범죄 및 처벌에 관한 협약` 국회에서 동의
▶1982년 유엔해양법회의, 국제해양법조
약 채택.(영해 12해리, 경제수역 200해리)
▶1979년 한일의원 안보협의회 발족
▶1978년 12해리 영해법 공포, 발효.
대한해협은 3해리로 규정
▶1976년 매달 말일을 반상회날로 지정
행정단위의 최하위 조직인 반을 구성하는 가구 대표자가 매월 정기적으로 갖는 모임. 흔히 우리가 말하는 반상회란 주로 아파트 등 다세대 주택에 거주하는 주민들간 친목을 도모하고 공동의 안건에 대해 토론하기 위한 주기적 모임을 말한다.
반상회라는 이름의 주민 조직이 처음 생긴 것은 1917년 일제가 조선인을 통제하기 위한 기구로서였다. 반상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배급을 주지않거나 요시찰 대상이 되었으며 특히 일제 말기에 절정에 달했는데 이때는 애국반을 만들어서 사상통제, 내핍을 강요, 배급제 통제, 군인 징병 등의 각종 역할을 맡았는데 이러다보니 조선인들이 반상회에 대한 인식이 초창부터 좋을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반상회라는 조직 자체는 광복 후에도 일단은 존속되었는데 사찰요소는 사라졌고 주로 친목도모의 역할이 강해졌다. 그러나 이승만과 박정희가 통제목적으로 아예 안 써먹은 것은 아니라서 반공정신 고양이나 불법 선거운동을 벌일때 열심히 써먹었다.(...).
이렇게 지역별로 자체적으로 반상회를 열었던것이 유신체제 확립이후로 그 성격이 강해져서 1976년 정례 반상회의 날(매월 25일)을 정하면서부터 전국단위로 반상회가 열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로 반상회는 쇠퇴했다가 전두환이 평범하고, 이 특히 저녁 시간대에 TV를 통해 반상회 회의를 생중계했다. 그러나 이 당시 반상회는 민원해결이나 친목도모 등 순기능이 없지는 않았지만 여당 정책 홍보 등 관제 성격이 강한데다가 반상회가 이런저런 소문을 퍼트리는데 진원지 역할을 하고, 반상회 참석을 강제하는 경우도 한둘은 아니기도 했다. 그리하여 1987년 6월 항쟁 이후로 쇠퇴기로 접어들어 참석률이 급속히 떨어졌고 문민정부 들어서 정부 차원이 아닌 지역 반장들이 알아서 열도록 법을 변경했으며 1995년에 지방자치제가 도입됨에 따라 반상회를 폐지한 지자체가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유명무실해진 지역이 한둘이 아니고 반상회가 열리더라도 핵가족화, 맞벌이 부부의 증가 등으로 아예 사이버 반상회로 대체한 곳도 적지 않다. 반면에 반상회가 활발한 곳에서도 부동산 투기를 부채질하는 일이 발생하여 문제점이 되기도 했다.
▶1975년 사이공 함락. 월남 패망
해방군을 맞이하는 사이공.
1975년 4월 30일 아침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군이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을 3개 방면으로부터 진공해
들어가자 오전 10시30분 남베트남 대통령 두옹 반 민이 무조건항복을 결정, TV를 통해 정부군 병사에게 전투 중지를 명령했다. 오후 12시30분(한국시간 1시30분) 해방전선기가 대통령 관저에 게양되므로써 30년에 걸친 베트남 전쟁의 종결을 고했다.
전년까지 일진일퇴했던 전쟁 상황은 해가 바뀌면서 상황이 돌변, 해방군의 공격 강도가 높아졌다.
3월 29일 최대의 군사거점 도시인 다낭의 함락을 비롯해 캄란 등 대도시가 속속 함락됐다. 4월에 접어들어 정부군의 영역은 사이공으로부터 반경 100km 이내로 한정되었고, 계속된 해방전선의 적극 공세로 사이공은 무질서와 혼란에 빠졌다. 4월 17일에는 인접국인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이 해방군 세력에 넘어갔다.
4월 28일 사이공 시민의 기대를 받고 등장한 두옹 반 민 신임 대통령은 취임연설에서 즉각 정전, 평화교섭 즉시 재개 등을 제창했지만 해방세력은 공항과 사이공 폭격으로 대답했다. 29일 미국 대사관은 폐쇄되었고 직원들은 헬리콥터로 탈출했다. 베트남전에 종지부를 찍은 미 국방부는 이 전쟁에서 미군 사망자수는 약 6만명이고 전비는 약1390억달러라고 발표했다.
사이공 함락
베트남전 종전 직전. 미군 병사 크리스는 사이공의 한 클럽에서 가족이 몰살당한 킴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사이공 탈출의 아비규환. 크리스는 귀국하고, 남은 킴은 크리스의 아들을 낳아 키우며 그가 돌아올 날만 기다린다.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미군 병사와 베트남 여인의 사랑을 노래한 뮤지컬 ‘미스 사이공’.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희망과 좌절에 멜로 요소까지 가미한 이 뮤지컬은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2000년까지 근 10년간 600만명의 관객을 사로잡았다.
아메리칸 드림으로 가는 문으로 상징되던 사이공이 1975년 오늘, 아무 저항없이 함락됐다. 탱크와 중포의 지원을 받은 북베트남 13개 사단이 8주간의 작전 끝에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함락시켰다. 이에 앞서 남베트남의 티우 대통령이 사임하고 타이완으로 도망쳤고, 그의 뒤를 이은 두옹반민 정부는 무조건항복을 선언했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던 남베트남 정부의 운명은 미군철수 이후 이미 결정됐다. 미국은 1973년 1월 북베트남과 파리평화조약을 조인하고 두달 뒤 미군을 철수시켰다. 한국군도 마찬가지였다. 파리평화조약에서 미국은 “북베트남이 조약을 위반할 경우 신속하고 강력한 보복에 나선다”고 공언했지만 이미 구두선에 불과했다.
1974년 12월 북베트남이 미국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서 남베트남의 푸억 롱성을 공격했다. 파리평화조약 위반인데도 미국은 “적극 개입하는 상황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청신호를 계기로 북베트남군의 작전은 바로 개시됐다.
사이공 함락 전후 남베트남의 군인, 경찰 가족 등의 대탈출이 이어졌다. ‘보트 피플’의 시작이었다. 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과 북베트남은 이듬해에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났다.
▶1974년 서울 공항동서 사병이 총기난동. 9명 피살
▶1973년 닉슨, 워터게이트 사건
책임을 물어 보좌관과 법률고문 해임
닉슨대통령의 측근이 닉슨의 재선을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본부에 침입하여 도청장치를 하려 했던 사건이 드러남에 따라 닉슨대통령은 1973년 4월 30일 홀드먼, 에릭먼드 두 보좌관, 딘 법률고문, 크라인딘스트 사법장관을 사임하게 했다.
미국 최대의 정치스탠들로 이 사건 관련자 제임스 머코드 등 7명이 체포되고 이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던 중 미첼 재선위원장, 홀드먼 보좌관 등 닉슨의 측근도 관련되었다는 사실과 백악관의 은폐조작 이전부터 행해진 정적에 대한 불법적 정보활동 등이 밝혀졌다.
닉슨대통령은 1973년 4월 홀드먼, 에릭먼드 두 보좌관, 딘 법률고문, 크라인딘스트 사법장관을 사임하게 하고 자신을 사건을 전혀 몰랐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딘은 그 해 6월 25일 상원조사위원회의 공청회에서 닉슨 대통령도 사건의 은폐공작을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닉슨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녹음테이프와 속기록을 공표했으나 손을 댄 흔적이 발견됨으로써 의혹만 더하게 했다. 게다가 이 사건을 밝히기 위해 임명된 특별검사의 해임, 불성실한 납세신고 등으로 국민의 불신감이 깊어지자 하원 사법위원회는 대통령의 탄핵을 가결했다. 궁지에 몰린 닉슨은 1974년 8월 자발적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1966년 한국-멕시코, 문화협정 조인
▶1959년 경향신문 폐간
1959년 4월 30일 폐간을 알리는
경향신문 속보판 앞에 몰려든 시민들.
정부는 당시 가장 격렬한 야당지였던 `경향신문`에 대해 미군정법령 88호를 적용해 1959년 4월 30일에 폐간명령을 내렸다. 그 표면상의 이유는 1. 1959년 1월11일자 사설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에서 스코필드 박사와 이기붕 국회의장간의 면담사실 날조, 2. 2월4일자 단평 `여적`이 폭력을 선동했고, 3. 2월15일자 홍천 모사단장의 휘발유 부정처분 기사가 허위사실이고, 4. 4월3일자에 보도된 간첩 하모의 체포기사가 공범자의 도주를 도왔으며 5. 4월15일자 이승만 대통령 회견기사 `보안법개정도 반대`가 허위보도라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폐간의 실제적인 이유는 `경향신문`이 1956년 정-부통령선거, 장면부통령 저격사건, 보안법파동 등을 보도하면서 노골적인 대정부 비판기사를 게재해온데다, 경향신문이 카톨릭재단으로 민주당의 장면 부통령을 적극 후원했기 때문이었다.
정부의 이러한 탄압에 맞서 경향신문은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등 끈질긴 법정투쟁을 벌인결과, 폐간된지 361일 만인 1960년 4월27일자 조간부터 복간됐다.
▶1957년 2차대전 한인전범 동경서 전원 석방
▶1951년 국회, 국민방위군과 국토방위대 해체를 결의
▶1950년 국립극장,
개관 기념으로 연극 `원술랑` 공연
1950년 4월 30일, 유치진이 쓰고 허석이 연출한 연극 ‘원술랑’이 국립극장 개관기념작으로 처음 무대에 올려졌다. 무대는 국립극장으로 새로이 단장한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의사당). 좌석수만도 1997석에 달하는 당시로서는 초대형 극장이었다. 배우들은 국립극장 무대에 선다는 감격으로 목이 메었고 관객들도 1주일 동안 5만명이나 다녀가 문화에 대한 갈증을 해소했다. 6월 초의 2회공연에 이어 3회를 준비하던 중 6·25 발발로 중단됐다.
국립극단 창단공연 '원술랑' 포스터.
중앙국립극장이 아시아 최초로 개관한 것은 공연 하루 전인 4월 29일. 유치진이 초대 극장장을 맡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단인 ‘극협’과 1950년 1월에 창설된 ‘신협’을 전속극단으로 두고 초창기 극장을 꾸려갔다. 이해랑·김동원·백성희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창단 멤버였다.
개관 2개월도 안 돼 6·25가 발발하는 바람에 부산을 거쳐 대구 문화극장에 새 둥지를 틀었다가 1957년 6월에 서울의 명동 시공관으로 옮겨 명동시대를 열었다. 1973년 10월에 서울 장충동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48년 미주기구헌장(보고타 헌장) 조인
▶1948년 서구 5개국 군사회담
▶1947년 항 장티푸스 백신을 개발한
영국의 세균학자 라이트 사망
▶1946년 군사영어학교 폐교
▶1945년 히틀러 자살
아돌프 히틀러(독일어: Adolf Hitler)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
브라우나 우암인에서 출생~)와 부인 에바 브라운(Eva Anna Paula Braun 1912년 2월 6일 독일 뮌헨 에서 출생~)
나치 독일 베를린 총통 엄폐호 집무실에서 동반 자살.
나치스의 지도자이며 인류역사상 가장 끔직한 전쟁을 유발시킨 아돌프 히틀러가 1945년 4월 30일 패전이 분명해지자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이틀 전에 결혼한 그의 애인 에바 브라운도 그 옆에서 음독자살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가 세운 독일 제3제국도 인류에 고통 만을 남겨둔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난 히틀러는 10대에 부모를 여의고 빈으로 나가 그림을 그렸지만 이내 자신이 그림에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예술가의 길을 포기했다. 1차 대전에 병사로 참가, 독일 군인의 최고 영예인 철십자상을 받았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1919년 나치스당에 입당했고 1921년 7월에는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나치스당 당수로 선출됐다.
1923년 이른바 `맥주홀 폭동`이라 불리는 무장봉기를 뮌헨에서 일으켰으나 실패해 체포돼 옥중에서 자신의 궤변을 담은 `나의 투쟁` 1부를 집필했다. 1932년 독일 총선에서 나치스당이 제1당으로 부상하자 이듬해인 1933년 독일 수상에 취임했다. 점차 권력을 강화해 나간 히틀러는 1934년 총통에 선출됐고 1938년에는 전군 통수권을 장악했다. 이 모든 과정이 민주주의 절차를 거쳐 이루어졌다. 대중을 선동하는 히틀러 앞에서는 민주주의도 무기력했다.
오스트리아 합병을 시작으로 인류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그의 광적인 세계 제패의 꿈은 급기야 1941년 소련과의 전쟁을 통해 후퇴할 수 없는 파멸의 길로 들어섰다.
▶1939년 미국 최초의 TV 방송 시작
뉴욕 세계박람회장에서 미국 최초로 실시된
텔레비젼 중계 모습,
1939년 4월 30일 미국 뉴욕 퀸스 지역에서 세계 박람회가 시작됐다. `내일의 세계 건설`이라는 주제로 열린 뉴욕 박람회는 60개국에서 1300개의 기업이 참가했다. 이날 개막식을 보기 위해 모여든 수십만 명의 군중은 단상에 라디오 방송용 마이크 사이로 낯선 기계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국 라디오 방송공사(RCA) 자회사인 NBC의 뉴욕 박람회 개막식 중계는 미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으로 기록된다.
이날 낮 12시30분 박람회장을 보여주면서 시작된 텔레비전 방송은 오후 3시 공식 개막행사 종료와 동시에 끝났다. 방송용 카메라가 담은 모습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있는 NBC의 송신기에 유선으로 전달됐다.
그러나 미국이 텔레비전 방송을 처음으로 시작한 나라는 아니었다. 대서양 건너 영국에서는 1936년 8월 BBC가 하루 두시간씩 정규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본격적으로 현대 문명의 최대 주역 중 하나로 만든 것은 역시 20세기의 주역 미국이었다. `지구촌`이라는 말을 처음 탄생시킨 것은 다름 아닌 텔레비전의 힘이었다.
▶1931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완공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건축계의 아이콘이자 20세기 공학이 이루어 낸 업적
40년 이상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자리를 지켜 왔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미국의 국보이다. 슈리브, 램 앤드 하먼이라는 건축회사가 설계를 맡았는데, 설계도는 단 2주일이라는 시간 내에 제작되었다.
이 무렵 뉴욕에서는 세계 최고 높이의 건물을 세우려는 경쟁이 치열했으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크라이슬러 빌딩이 이 영예를 차지하고 있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972년 세계무역센터의 북쪽 탑 건물에 '가장 높은 건물'이라는 왕관을 빼앗기기까지 이 자리를 유지했다. 2001년 9월 11일 이후로 102층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다시 뉴욕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되었으며, 미국 전체에서는 시어스 타워 다음으로 두 번째 높은 건물이 되었다. 건물이 개관한 1931년 5월 1일은 대공황 시기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건물 내의 사무 공간 대부분은 임대되지 못하고 텅 빈 상태였다. 건물에 '엠프티 스테이트 빌딩'이라는 별명이 붙을 지경이었다.
86층의 전망대는 개관 즉시 사람들을 끌어 처음에는 임대료보다 더욱 많은 수익을 내게 되었지만, 건설에 막대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손익 분기점을 넘어서기까지 거의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원래의 계획은 시선을 끄는 우아한 아르데코 형식의 첨탑을 비행선 계류탑으로 삼고, 꼭대기 층에 착륙한 승객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86층까지 내려와 체크인하도록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첨탑은 그 대신 뉴욕에 있는 대부분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이 사용하는 방송 안테나 구실을 하게 되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여전히 미국에서 가장 독특하고 유명한 건물 중 하나로 남아 있으며, 모더니스트 아르데코 디자인을 보여 주는 최상의 예 중 하나이다. 밤이 되면 색깔 있는 투광 조명이 건물 꼭대기를 환히 밝히며(색깔은 계절과 특별한 행사에 따라 다양하게 변한다), 건물이 주는 시각적인 효과는 밤에도 낮과 마찬가지로 휘황찬란하다.
"이 건물은 수정처럼 투명하고 늘씬하며, 파르테논 신전이 그러했듯 영광을 내보이기 위하여 건축되었다."
건축사(史)가이자 비평가, 빈센트 스컬리
▶1917년 만주 군벌 장작림독립 선언
1883년 프랑스 화가 마네 사망
[피리 부는 소년 The Fifer] 1867년
[제비꽃 다발을 든 베르트 모리조 Berthe Morisot with a Bunch of Violets] 1872년
▶1789년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 취임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선조 피란
https://youtu.be/smL5IaMMnTA
https://imnews.imbc.com/replay/2004/nwdesk/article/1955921_30775.html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솦트리종려나무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