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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의 순교는 평양 복음화의 초석이 되다
아내의 죽음, 한국선교에 관심 두다
‘한반도에 새겨진 십자가의 길: 한국교회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 50인’(KIATS /한국고등신학연구원/김재현 지음)에 따르면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는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활약했던 그의 중국식 이름은 탁마사(托馬斯) 또는 최난헌(崔蘭軒)이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토마스는 1840년 영국 웨일즈의 라야다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59년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서 대학과정(B.A.)과 신학 과정을 마치고 4년 후인 1863년 목사 안수를 받고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그해 7월 21일 폴메이스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토마스가 그의 부인 캐럴라인(Caroline Godfrery)과 함께 중국(청)의 상해에 도착한 때는 한창 무서운 추위가 몰아치던 1863년 12월이다.
중국에서 상해를 거점으로 막 선교를 시작하려는 그때 중국에 도착한 지 4개월여 만에 그의 아내가 숨졌다. 상해에 도착한 토마스는 그곳 기후가 아내한테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한구(漢口)의 기후가 어떤지 살피러 나갔다가 아내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
‘한국기독교회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박용규 지음)에 따르면 1864년 4월 5일 자로 런던선교회에 보낸 그의 첫 편지는 선교보고서가 아닌 아내의 사망 보고서가 됐다.
이에 토마스는 그의 아내의 죽음으로 큰 상처를 받아 방황했다.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선교하러 왔는데...”
토마스는 선교사역이 난관에 부딪힘에 따라 선교사직을 그만두었다. 당시 중국에 와있던 현지 런던선교회 총무 무아헤드와 의견이 맞지 않아 마찰이 생기자 선교사직을 사임한 것. 이에 중국 산동성 지푸의 청국 해상세관에서 통역으로 일했다.
토마스가 한국선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스코틀랜드성서공회에 소속으로 일하던 중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목선을 타고 산동성 지푸에 온 두 명의 조선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면서부터다. 이들과 먼저 접촉한 사람은 윌리엄슨이다.
토마스 선교사 순교 기념교회
조선 선교 향한 뜨거운 마음이 일다
조선 땅에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말을 들은 토마스는 조선 선교를 향한 뜨거운 불이 그의 마음에 일어났다.
‘한반도에 새겨진 십자가의 길’에 따르면 토마스는 1865년 9월 13일부터 12월까지 황해도 일대에서 한국선교를 모색한 게 첫 번째 조선 방문이다.
황해도 장연군 자라리(백령도로 추정)에 도착한 토마스는 3개월간 어학훈련을 하면서 조선과 조선 사람을 처음으로 대면한 것으로 알려졌다. 토마스는 황해도 연안에서 두 달 반 동안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한편 가지고 온 성경을 섬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가 1866년 1월 12일 자로 그의 부친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그곳 한인들은 목이 잘릴 위험을 무릅쓰고 토마스가 주는 성경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기독교회사’에 따르면 두 달 반의 시간은 단순한 체류가 아니라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기간인데, 그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했다.
조선어를 익힌 토마스는 수도권 선교를 꿈꾸다가 자신이 타고 가던 배가 파선하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건져 만주를 거쳐 북경으로 돌아갔다. 북경대학 학장 서리로 일하며 한국선교를모색하던 토마스는 1866년 1월 한국에서 온 동지사(冬至使) 일행을 만났다. 이때 토마스와 개화파의 거장 박규수와의 만남도 이루어졌다. 이 만남은 토마스의 평양행을 더욱 사모하도록 만들었다.
제너럴 셔먼호와 토마스의 조선 입국
1866년 병인년 박해 속에서도 토마스는 조선에 대한 선교의 열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두 번째 방문은 죽음으로 끝났다. 조선에 대한 선교열에 불타던 토마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토마스가 탄 배가 8월 16일 평안남도 용강의 주영포에 도착했다. 토마스는 귀츨라프가 로드 암허스트 상선을 타고 입국했던 것처럼, 토마스도 미국인 프레스톤의 소유인 상선 ‘순양함’ 제너럴 셔먼(the General Sherman)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했다. 조선에서 반포하기 위해 몇 권의 중국어 성경을 가지고 통역 겸 안내자로 이 배에 함께했다.
그러나 적지 않은 무장을 한 미국 상선의 교역 요구에 평양감사 박규수는 응할 수 없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의 엄포와 얼마 전에 있었던 병인년의 가톨릭 박해 때문이다.
제너럴 셔먼호가 상선이기는 하지만, 그 배가 현대식 무기로 중무장하고 있었기에 외국과의 교류가 금지된 조선인들이 볼 때 그것은 순수 무역선이 아니었다. 입국의 목적이 통상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은 황주목사는 외국과의 무역은 국법으로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돌아갈 것을 요구했으나 셔먼호는 듣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죽음으로 끝난 토마스의 조선 여행
미국 상선의 무력시위와 난폭해진 주민들 사이에서 제너럴 셔먼호는 결국 주민들의 공격을 받았다.
‘한반도에 새겨진 십자기의 길’에 따르면 1866년 미국 상선의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백령도에 도착한 토마스는 주민들에게 한문성경을 보급하고, 강서 보산 강변 양각도라는 작은 섬에서 수명의 한국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때 그의 나이가 27세다.
양각도 모래 위에 좌초된 셔먼호는 돌을 던지고 활과 화승포를 쏘며 공격하는 군졸과 관민들을 더 이상으로 당할 수 없었다. 셔먼호는 주민들에 의해 불길에 휩싸였다. 셔먼호가 불길에 휩싸이면서 토마스 목사, 프레스톤, 중국인 서기, 조능봉 등 4인을 제외하고 배에 타고 있던 전원이 죽었다. 배에 남아 있던 토마스 선교사도 지니고 있던 1권의 한문 성경을 가지고 뭍을 향해 헤엄쳐 나왔다.
토마스가 자기를 죽이려는 병졸 박춘권에게 성경 한 권을 건네주려 했으나 거부하는 바람에 전해주지 못했다.
토마스는 두 번의 방문에 채 몇 개월도 조선에 머물지 못하고 그의 삶을 마감했다. 그는 마지막 죽음 앞에서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누어주면서 죽음을 맞았다.
한국교회의 씨앗이 된 토마스의 죽음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토마스를 죽인 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박춘권은 평양 장대현교회의 처음 신자 중 한 명이 됐다. 토마스를 죽인 후 박춘권은 집으로 가는 길에 성경을 주워 돌아가 읽고 예수를 믿은 후 안주교회 영수가 됐다.
그의 가족들은 평양지역에서 신앙의 명문가를 이뤘다. 그의 조카 이영태도 후에 주님을 영접하고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한국어 성서번역의 주역인 레이놀즈(Wiliam D. Reynolds) 이눌서를 도와 성경번역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국기독교회사’에 따르면 토마스의 순교는 평양 복음화의 초석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제너럴 셔먼호가 파괴된 현장의 목격자 중에는 12세 소년 최치량이 있었다. 그는 토마스가 주었던 성경 세 권을 가져왔으나 그 책을 지니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박영식에게 주었다.
‘한반도에 새겨진 십자기의 길’에 따르면 박영식은 성경의 낱장들을 떼어 그의 방에 발랐는데, 최치량은 기독교인이 된 후 그 집에 가서 벽에 붙은 성경을 보았다고 한다. 이후에 박영식의 집터에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세워졌다. 성경을 뜯어 벽지로 바른 이 집이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된 것. 비록 토마스가 조선인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그가 남긴 성경은 조선인을 살리는 생명이 됐고,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셔먼호에 승선했던 토마스 일행이 순교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주재 미국 공사는 와츄셋호(Wachusett)를 한국에 파견해 셔먼호의 행방을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비교적 어른 시기부터 토마스를 기념하는 일들을 해왔다. 아울러 토마스 목사 기념예배당에 있던 자리에 2009년 남북 화해와 화합의 상징인 평양과학기술대학이 건립됐다.
토마스의 순교는 한국교회의 보이지 않는 이정표가 됐다. 그의 순교적 신앙은 후대의 수많은 선교사들의 모델이 됐고, 그의 순교 정신은 한국교회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내려왔다.
그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물을 마시는 이들마다 예수를 믿었고,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정도로 한국교회의 거룩한 도성이 됐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자 도전
‘한국기독교회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저자 박용규 교수에 따르면 한국에 파송된 개척 선교사들은 물론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토마스를 순교자로 이해했다. 이것은 오랫동안 한국교회의 전통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부터 여기에 대한 도전이 강하기 일기 시작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이 제국주의 침략과 연관됐다는 이유를 들어 순교로 기록돼서는 안 된다는 비판적인 흐름이 대두됐다.
이런 가운데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주최로 2016년 9월 5일 총신대학교에서 열린 ‘토마스 선교사 순교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는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자임을 강조했다.
이 심포지엄에서 발제자로 나선 박명수 교수는 “개신교 순교자의 첫 번째 이름이 바로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