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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잠 17:1-7
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2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
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4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6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7 지나친 말을 하는 것도 미련한 자에게 합당하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
잠 17:1-7 / [분별이 없는 아이는] 산해진미 차려 놓고 서로 미워하느니, 밥 한 그릇이라도 나눠 먹으며 서로 아끼는 것이 훨씬 더 낫다. 2) 지혜로운 종은 주인집 난봉꾼 아들을 잘 다스려 그 아들들과 함께 유산을 물려받는다. 3) 도가니가 은을 풀무가 금을 뜨거운 불로 녹여 내듯, 여호와께서는 사람을 담금질하신다. 4) 못된 짓만 꾸미려 드는 자들은 남 거꾸러뜨리자는 말에 귀가 번쩍 띄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자는 남 해치우자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5) 가난하게 사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자는 그를 지으신 분을 욕되게 하는 자이다. 남 잘못되어 고통스러워 하는 것 보고 즐거워하는 자는 천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6) 많은 자손들을 둔 노인들 그 어찌 자랑스럽고 흐뭇하지 않으랴! 부모 모시고 사는 자식들 그 어찌 영광스럽지 않으랴! 7) 멍청한 사람하는 말을 사리에 맞다고 따를 사람이 있을까? 고매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하는 말을 거짓이라고 여길 사람이 있을까?
본 장은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의인의 지혜가 구체적인 삶 가운데 어떻게 실천되어져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1-3) 지혜는 연단을 통해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연단(고난)을 통해 이 세상을 향하던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욥 23:10; 벧전 1:7; 신 8:2, 3, 16). 하나님의 연단은 우리의 불신앙을 제거하는 과정입니다. 연단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자신의 실상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은 연단 속에서도 은혜를 베푸시고 마침내 ‘나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게 하십니다. 연단은 하나님의 선물에 만족하는 사람이 하나님 자체로 만족하는 삶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러한 연단을 통해 지혜자는 참된 행복이 돈, 명예, 권력에 있지 않고 화목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또한 주어진 환경과 상황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지혜를 구하며 환경과 상황을 이겨냅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4-5) 하나님의 지혜가 없는 자는 악을 좋아하며 즐겨 행하게 됩니다. ‘악을 행하는 자’와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험담을 즐겨 들을 뿐 아니라 들은 말을 쉽게 타인에게 전달하여 타인과 공동체 전체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을 무시합니다. 하나님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인생을 창조하셨으며 주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며 조롱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갚아 주십니다(잠 19:17). 하나님은 타인의 가난과 멸시 당함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도리어 즐기는 자들에게 긍휼 없는 심판으로 갚으실 것입니다(약 2:1-13).
미련한 자(6-7) ‘손자’는 문자적으로 ‘아들들의 아들들’이란 뜻으로 ‘후손’이라는 넓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자식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기업입니다. 지혜로운 자식은 부모의 면류관이지만 미련한 자식은 부모의 근심과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부모에게 뿐 아니라 스스로 미련함을 모르고 주제 넘는 말을 하고 타인을 가르치려 합니다. 미련한 자의 말도 이해받기 힘든데 신실하고 진실하다고 인정받은 자가 거짓말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까?
적용: 연단의 풀무불 속에서 깨달았던 하나님의 뜻과 그로 얻게된 신앙의 유익을 나누어봅시다.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터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탄의 공격은 사람의 사고와 의식의 영역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생각뿐 아니라 기억까지 혼란스럽게 합니다. 하나님이 금지하신 나무의 열매에 손을 댄 인간은 생전 처음으로 상처와 아픔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상처와 아픔은 쓴 뿌리로 굳어졌고 모든 인류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진리의 왜곡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 설 교 >
화목케 하는 생활
잠 17:1-14 / 박조준 목사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리라.” 화목케 하는 생활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시편 133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하였어요. 형제가 서로 화목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요! 우리 기독교는 말하자면 화해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우리로 화평케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먼저는 좌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된 우리 인간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케 하였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누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하였고, 에베소서 2장 10절에는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여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 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고 또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 함께 잠언에 서로 화목하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친 성경 구절을 읽어보십시다.
잠언 10장 12절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베드로 전서 4장 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하면서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하였습니다.
잠언 15장 16절에서 18절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이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느니라”
잠언 17장 9절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잠언 17장 4절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잠언 18장 6절에서 8절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여기 남의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남의 좋은 점을 말하는 것입니까? 남의 흉을 말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어떠세요? 남의 칭찬이 듣기 좋습니까? 흉보는 것이 듣기 좋습니까? 사람이 타락한 이래로 남의 말의 대부분은 흉보는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남의 흉을 보고 헐뜯는 이야기는 별식(別食)과 같아서 구가 기웃해서 흥미있게 듣습니다. 듣기만 합니까? 또는 만나는 사람마다 선전합니다.
전도를 하라면 평생 못하는 사람도 남의 흉을 말하라면 열을 냅니다. 그것도 그대로나 하나요? 눈사람과 같이 하나씩 하나씩 붙는 것이 나중에 가서는 엉뚱한 이야기로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니 이런 억이 돌고 돌다 본인에게 들리면 그 말을 듣는 본인의 마음이 또 평안하겠습니까? 그러니 자연히 불화하게 되지요. 남의 말 될 수 있는대로 그것도 칭찬이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잠언 20장 3절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잠언 25장 8절에서 10절 “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수욕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
잠언 26장 17절 “길로 지나다가 자기에게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 귀를 잡은 자와 같으니라” 같은 장 20절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그 다음 절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 22절 말씀은 아까 읽은 18장 8절과 같은 말씀이에요.
그저 한마디로 말하면 서로 화평하게 살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서로 사랑하며 화평하게 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탄에게 꾀임을 받아 범죄한 이래 사랑 대신 미움이, 화목 대신 싸움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다음에 인간적으로 최초의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아담과 두 아들 가인과 아벨 사이에 벌어진 골육 상전이었습니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인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뭐라고 대답한지 아십니까? 아주 반항적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서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형식적인 제사를 드렸고 다른 한 사람은 중심의 제사, 믿음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기서 인류는 신과 불신의 두 갈래로 나뉘어졌습니다. 신령과 진심의 하나님이시며 사람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믿음이 없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기의 불신앙을 반성하는 대신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기보다 의로운 동생 아벨을 미워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그를 쳐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아우는 사랑과 협력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사랑 대신 미움으로 아우를 대한 것입니다. 사랑의 보금자리 마음속에 간직할 아우를 미워한 나머지 쳐죽여 들판에 눕혀 두었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에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잡니까?” 유명한 마페트 번역에는 “내가 내 아우의 목자입니까?”로 했어요. 옛날에는 목자는 업신여기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이때 가인은 아우의 직업을 천시하고 아직도 자기의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그러면 나도 아벨처럼 목자란 말입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이런 못난 아우를 환영하시는 하나님께 반항조로 나왔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있었습니다. 그 마지막 부분에 재미있는 대화가 있습니다. 멀리 아버지를 떠나가서 허랑 방탕하다가 다 죽게 되어 거지처럼 되어서 그대로 아버지께로 돌아온 아들이 너무 귀여워서 그렇게 좋아하시는 아버지에게 그 형이 불평을 하면서 “이(당신의) 아들이 돌아오매...” 하였습니다. 즉 그는 자기의 아우를 아우라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버지의 답변은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았으며...” 하면서 ‘내 아들’이라 하지 않고 ‘네 동생’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큰 아들은 형제 의식을 잃었고 아버지는 그것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위로 하나님과 화평하며 옆으로는 이웃과 화목하게 하는 종교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5장 19절에는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들의 죄를 저희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예수님 말씀 중에도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뜻을 받아서 에베소 4장 1절에 “너희가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라” 하였습니다. 로마서 12장 18절에도 “할 수만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에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고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서로 화평한 가운데 화목하며 살 수 있습니까? 먼저 화평을 가지려면 자신이 하나님과의 화평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근심과 염려, 번민과 내적인 투쟁이 있는 사람이 자연히 다른 사람과 화목하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에 보면 악한 사람의 다음은 마치 바닷물이 요동해서 솟구쳐 올라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악인의 마음에는 안정이 없고 평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사회나 단체에서 말썽을 부리는 사람은 가만히 보면 그 자신의 마음에 평화가 없어서 그럽니다. 학교 선생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학교에서 소위 문제 학생은 가만히 보면 가정의 부모와의 관계 또는 부모가 서로 화평하지 못한 가정의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맺은 사람은 사람 사이에도 화평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끼리 화목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의 말씀처럼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합니다. 욕을 욕으로 갚지 아니합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착하게 합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화평한 일을 좇습니다. 원수를 사랑합니다. 주릴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웁니다. 저 사람이 내게 어떻게 하든지 상관하지 아니하고 나로서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화평의 생활을 하고 화평의 성품을 가지고 화목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화목한 가운데 살 수 있습니까? 우리가 힘 쓸 일이 무엇입니까? 소극적으로 싸움 붙이지 않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대개의 싸움이 어디서 생깁니까? 이 말에서 나옵니다. 말을 안할 수도 없고 하는데는 조심해야 합니다. 아까 읽은 잠언에 ‘말쟁이가 있으면 다툼이 그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속담에 “불붙는 집에 키질한다”는 말이 있는데 화목 하려는 사람은 그렇게 아니합니다. 어떤 사람은 보통 때 평안한 때는 가만 있다가도 무슨 분쟁이 생기면 갑자기 분주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하던 심방도 하고 안하던 지방 순회도 합니다. ‘조무래기 한 놈이 한강물 흐린다’는 말과 같습니다. 화목하기 위해서 힘쓰는 사람은 분쟁을 가져오지 않기 위해서 조심합니다. 화평한 가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 조심합니다. 화평한 교회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서로가 조심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힘 쓸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써 성령이 하나되게 하여 주신 화평의 매인 줄을 끊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를 끊지 아니하려고 애씁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나 국제간에도 언제나 화평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시간을 냅니다. 어디서나 화평을 말합니다. 화평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면 끝으로 이렇게 화목하기 위해서 힘쓰면 어떤 축복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누구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요? 사람에게요? 혹시 사람들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사람에게는 손해를 받을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님 말씀은 이렇게 화목하게 지내려고 힘쓰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아, 너는 과연 내 아들이다”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 얼마나 귀합니까?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다.” 우리도 화목하기 위해서 힘쓰면 하나님께로부터 이와 같은 축복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20세기는 어떤 이의 말대로 기독교 역사상으로 볼 때 평화 운동의 세기입니다. 16세기에서 17세기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신교의 진리를 분명히 새롭게 제시하였습니다. 18세기에서 19세기는 세계 선교 운동의 세기로 온 천하에 가서 땅 끝까지 말씀을 전파하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특별히 힘쓴 세기입니다. 20세기는 어떤 세기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는 다 주안에서 하나가 되었은즉 어떻게 하든지 믿는 사람과 믿는 교회들이 서로 연합하고 하나가 되어 화평한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가 서로 다툴 때 아브라함이 그러지 말자고 하면서 무슨 말했는지 압니까? “이 땅에는 가나안 사람과 부리스 사람이 있어. 유대 사람만은 아니다. 우리가 다투면 가나안 사람과 부리스 사람이 우리를 멸시할거야. 그러니 우리 서로 다투지 마세”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서로 화목하게 살아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마는 그 중에 중요한 것 하나는 이 땅에는 가나안 사람 같은 공산당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에는 신학자도 필요하고 여러 사람이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제일 필요한 인물이 누굽니까? 제가 보기에도 화목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 이런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가정이 화목하고 교회가 평안하고, 사회가 화평하고, 나라가 화평해야겠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사랑을 구하는 자
잠언 17:1-9
본문 1절을 봅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다투어도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육이 집에 가득하다는 것은 구약적인 배경으로 봐야 합니다. 구약에서 제사를 드리고 나면 제물을 제사장에게 돌려드리는 것이 있고 제사 드리는 가족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제육이 가득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도 다투는 것보다 제사를 드릴 제물이 없을 정도로 가난해도 화목한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4~8절입니다.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6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7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8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
엘가나는 아내가 두 사람입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고 브닌나는 자식이 있습니다. 엘가나가 온 가족과 함께 실로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나서 제물의 분깃을 나누어 먹습니다. 그런데 한나를 더 사랑하여 분깃의 갑절을 주니 브닌나가 한나를 격분시킵니다. 그러니 제사를 드리고 나서 제물을 나누어 먹는 자리가 불화의 자리가 됩니다. 이것은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의 상태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엘리와 그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있는 시대에 제사장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때에 한나는 기도하여 자녀를 얻어 하나님께 바칩니다. 자식 있는 자로 인하여 핍박받는 자식 없는 여인에게서 나온 사무엘이 결국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불화하면서 살아갑니까? 가정불화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가난함 때문에 불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탐심으로 인하여 불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봐도 오늘 이 시대만큼 부요한 적이 없습니다. 나라의 경제규모가 세계 10위에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행복지수를 세계의 58위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인 방글라데시가 행복지수는 높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목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물질로는 인간의 욕망을 결코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목하려면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3:23~25절입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예수님의 피로써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자라면 자신과 하나님사이에 화목이 일어났기에 같은 은혜를 입은 자라면 화목하게 됩니다. 이러한 화목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1서 4:9~11절입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이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을 받은 자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고 합니다. 화목에 대하여 사무엘서를 보았습니다만 사무엘이 한나의 서원에 따라 성전에 바쳐지지만 레위지파가 아니라 에브라임지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사무엘에게 임함으로 엘리의 두 아들들은 언약궤를 메고 나갔지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여호와를 섬기는 사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슬기로운 자의 모습입니다. 물론 이런 슬기라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임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의 모습은 엘리와 홉니와 비느하스가 같은 자가 됩니다. 다음 주에 미련한 자에 대하여 봅니다.
3절입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십니다. 은이나 금을 연단하는 것은 불을 통과합니다. 수천도의 온도에서 은이나 금이 들어있는 광석이 녹아서 은과 금이 남아집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누가 무엇으로 연단을 하시는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음을 아시기에 우리를 연단시키시는데 그 연단이 말씀으로 인한 연단입니다. 이러한 연단을 통하여 자신을 살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살리는 것입니다. 요셉의 발이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이 쇠사슬에 매인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 까지 그의 말씀이 단련하였다고 합니다(시105:18~19). 여호와의 연단은 고난이지만 이 고난을 통하여 자신과 이웃을 살리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합니다. 악을 행하고 거짓말 하는 자는 사악하고 악한 말을 잘 듣습니다. 그런데 사악하고 악한 입술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드러나면 누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이리가 양의 가죽을 입고 오듯이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고 옵니다. 그러므로 사악하고 악한 말은 보암직한 모습으로 옵니다. 종교적으로는 신비하고 거룩한 모습으로도 옵니다. 자기 귀를 즐겁게 하려고 사욕을 쫓을 스승을 찾는 자들에게 그들을 가장 만족시켜줄만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복음을 말한다고 하면서 복음적이지 않은 내용들을 비판합니다. 저도 그렇게 많이 합니다. 그러다 보면 복음이 좋은 것보다 복음으로 복음 아닌 것을 비판하는 재미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그러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여 쫓아낸 것은 잘하였지만 그러다 보니 처음 사랑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말을 듣기 좋아합니까?
요한복음 8:43~47절입니다.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시는데도 사람들이 진리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들이 그 아비 마귀의 지배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세상의 자랑이 될 만한 것으로 미혹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시는데도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악한 자에 속한 자는 진리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주의하라고 한 것입니다(고후11:4). 말은 복음, 예수, 영이라고 말은 하지만 다른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분별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분별이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각색된 말이 아닙니다.
본문 5절입니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라고 합니다. 거룩한 처소에 계시는 하나님은 고아와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관이라고 합니다(시68:5). 그러므로 시편에서 고아 과부 나그네는 자기 힘이 없기에 하나님만 의지하는 경건한 자를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자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난한 자들이 재앙을 받는 것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주께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6절입니다.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라고 합니다. 여기서 손자나 자식은 히브리어로 ‘벤’이라는 같은 단어입니다. 노인과 아버지는 다른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단어이지만 문맥에 따라 손자가 되고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대로 보면 손자가 없는 노인은 면류관도 없고 아버지가 없는 고아는 영화로움도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말씀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유대인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을 아주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유대인인 바울사도는 예수님을 만난 후로 결혼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문자적인 것이라면 결혼을 하지 않으면 자식도 손자도 없게 되는데 이들에게 무엇이 면류관이며 영화가 되겠습니까? 바울사도는 복음을 전하여 복음을 받은 자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합니다(고전4:17,딤전1:8,딤후1:2).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바울은 아들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빌4:1). 그러므로 복음으로 낳은 형제들이 자신의 아들이며 기쁨이며 면류관이라고 합니다. 혈육의 관계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7절입니다. 지나친 말을 하는 것도 미련한 자에게 합당하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고 합니다. 미련한 자가 거만하게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는 말을 하는 것이 합당치 않는데 하물며 존귀한 자에게 거짓말이 합당하겠느냐고 합니다. 거짓말에 대하여서는 앞에서 요한복음을 통하여 찾아보았습니다. 거짓의 아비가 마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존귀에 처한 것처럼 보이더라고 그가 거짓말을 한다면 결코 존귀한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 것은 그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 나옵니다. 우리는 어떤 말이 나옵니까?
에베소서 4:29~32절입니다.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의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야 할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제 전주에 두 번째 다녀왔습니다. 복음을 들은 어떤 분은 다닐 교회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목사가 사기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처음 보는 사람인데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소개하면서 눈물부터 흘리는 것입니다. 극심한 고난 중에 욥기를 들으면서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힘듦을 견뎌낼 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8절입니다.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비꼬는 말인지 잘 분별이 안 됩니다. 이럴 때는 성경전체를 통하여 뇌물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신10:17). 재판관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뇌물을 받지 말라고 합니다. 뇌물은 지혜자의 눈으로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한다고 합니다(신16:19).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할 것이며 모든 백성은 아멘 하라고 합니다(신27:25). 이런 말씀에 비추어보면 이 말씀은 뇌물을 받는 것을 비웃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라고 합니다. 오늘 설교제목은 여기서 정하였습니다만 오늘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허물이 드러났습니까? 덮어졌습니까? 드러나는 내용도 있었지만 허물이 덮어지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로마서 3장과 요한 일서의 내용은 우리의 죄와 허물이 예수님의 피로 가려지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말씀들을 보면 나의 허물들이 또 드러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지, 가난한 자를 조롱하지는 않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이런 말씀들을 보면 우리의 허물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허물이 말씀으로 드러날수록 성도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덮어주는 이야기가 어디서 최초로 나옵니까?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자신이 벌거벗음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린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왜 찾아오십니까? 혼내고 책망하려고 찾아오십니까? 가죽옷으로 가려주시기 위하여 오십니까? 우리가 우리를 가리고 덮는 것으로는 결코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덮어주셔야 하십니다. 이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노아언약입니다. 노아와 그 가족이 하나님의 은혜로 덮어주심을 은혜를 입어서 방주를 만들고 홍수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술 취하여 벌거벗고 자는 것을 함은 덮어주지 않고 조롱하였지만 셈과 야벳은 뒷걸음으로 들어가서 아버지를 덮어주었습니다. 노아가 깨고 나서 이 일을 알고 함을 저주한 것은 하나님의 덮어주심을 은혜를 모르는 것이 저주라는 말입니다.
모세 언약에서는 언약궤 안에 들어있는 세 가지 물건이 다 하나님을 배반한 증거물들입니다. 돌 판은 금송아지 숭배로 인하여 깨어지고 두 번째 만들어진 돌 판입니다. 만나 항아리는 이틀 분 거두어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이틀 분 거두어 와서는 썩어버린 것과 안식일에 거두러 가지 말라고 했는데 거두러 간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하나님의 권위부여를 대적한 증거물입니다. 이러한 배반의 증거물들을 언약궤 뚜껑으로 덮고 그 위에 어린 양의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궤 뚜껑의 이름이 속죄소이며 시은좌입니다. 이것이 덮어줌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구하는 자는 허물을 덮어주지만 허물을 자꾸 들추어내는 것은 친구사이를 이간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질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사탄은 대적하는 자이며 참소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완벽하게 덮어주시는데 이것을 부족한 것으로 말하고 속이는 것이 사탄의 이간질입니다. 사탄의 이간질이 참으로 교묘하게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일한 것도 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거래하게 만들어 결국 나의 이름과 나의 가치를 높이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사탄의 이간질입니다.
로마서 13:11~14절입니다.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허물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가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입은 무화과 나뭇잎의 옷, 자기 행위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면 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형제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그 피로 이루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26~29절입니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러한 사랑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이런 사랑이 우리에게도 흘러넘치게 하여 주옵소서!
가정들아, 화목하자
잠 17:1-2, 살전 5:4 / 이성희 목사
하나님이 이 땅에 주신 하늘나라를 닮은 작은 천국은 세 곳이 있습니다. 마음과 가정과 교회입니다. 원래 사람의 마음은 한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하늘나라를 닮았습니다. 가정도 하늘나라를 닮았습니다. 가정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대신하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그리고 교회도 그렇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훼손되기 전에 모습은 하늘나라를 닮은 것들이었는데 사람들이 타락하면서 하늘나라의 모습을 상실하고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정은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형제자매가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은혜가 있고, 감사가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가정의 창조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우주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창조의 마지막에 남자를 만드시고 남자를 통하여 여자를 만드셔서 남자와 여자가 가정이 되게 하셨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최후의 피조물입니다.
가정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부부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아야 좋은 가정입니다. 성경적 원리대로 이루어져야 하나님의 가정입니다. 가정의 성경적 원리는 첫째, 하나님이 주인인 가정입니다. 가부장적 제도에서는 남편이 주인이라고 합니다. 모계 사회에서는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정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둘째, 가정의 모든 이치가 성경적 원리에 따라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가정의 모습을 가정은 갖추어 나갈 때 좋은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성경적 인간관계를 이루는 가정이 성경적 가정입니다.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이하하고 서로 도움이 되는 인간관계를 이루어야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넷째, 성경적 가정은 서로가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잘 지키고 본분을 지켜 열심히 일하는 것이 가정의 원리입니다. 좋은 가정은 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정원과 가정은 가꿀수록 아름답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은 정원을 가꾸듯이 해야 합니다. 가꾸면 가꾸는 만큼 아름다워집니다. 가꾸지 않으면 지저분하고 빨리 시들고 벌래도 생깁니다. 중국 격언에는 “평화로운 가정은 행복이 제 발로 찾아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을 평화롭게 가꾸면 행복은 절로 찾아오는 법입니다.
가정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학교랍니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는 곳이 가정입니다. 인간관계를 배우고, 삶의 도리를 배우고, 생활의 지혜를 배웁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정을 통해 습득해 나갑니다. 그러므로 좋은 가정은 좋은 인격과 지혜를 배우는 학교입니다.
가정은 교회입니다. 초대교회는 모두가 가정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6:19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4:15에는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빌레몬서 1:2에는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합니다. 그 외의 모든 교회들이 가정이었습니다. 우리의 가정들이 작은 연동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옛말에 보면 “자식이 효도하면 양친이 즐거워하고, 가정이 화목하면 만사가 이루어진다(子孝雙親樂 家和萬事成)”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것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고 파괴되면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또 옛말에는 조상이 덕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후손에게 경사가 따른다는 뜻의 ‘적덕지가 필유여경’(積德之家必有餘慶)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혹은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고도 합니다. 인간의 역사와 인륜의 근본은 가정입니다.
이 시대는 가정들이 병들고 파괴되고 있습니다. 가정에 상처가 많고, 결손가정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문제나 사회의 온갖 병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정의 파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은총의 선물인 가정이 병들고 있습니다. 가정을 잘 보존하고 치유해야 할 사명은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지엄하신 분부이십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가정을 대치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시편 128:1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고 합니다. 3-4절에는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라고 합니다. 가정의 풍성함과 윤택함을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며 화목한 가정입니다.
페스탈로치는 “가정의 화목은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기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가정은 화목해야 합니다. 화목한 가정이 참 가정입니다. 화목이라는 말은 가정에 어울리는 말입니다. ‘화목하게 하다’는 말의 헬라어는 ‘상태를 되돌려 놓는다’는 뜻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것은 뜯어진 것을 다시 꿰매는 것입니다. 반항하는 마음을 되돌리는 것입니다. 싸늘히 식은 열정에 불을 지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가정들이 화목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회복되는 가정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을 통하여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화목한 가정은 물질 때문에 다투지 않습니다.
잠언 17:1에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가정은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물질에 의하여 좌우되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 15:17에는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같은 뜻의 말씀입니다. 요즘에는 말을 좀 바꿔야 합니다. 광우병이니 조류독감이니 해서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나 닭을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채소를 먹으며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바꿔야 할 판입니다.
화목한 가정은 물질을 초월하게 해야 합니다. 물질을 초월한다는 말은 가정은 물질 보다 정신과 사랑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질이 사랑의 근거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주 드문 일이지만 신문에 보면 혼수 문제로 다툼이 벌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혼수하고 삽니까, 사람하고 삽니까? 혼수가 행복의 척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물질 분배를 잘 해야 합니다. 특히 자녀들에게 유산을 잘 분배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세상 떠나고 유산문제로 자녀들이 쪼개지고 싸우는 것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물질이 아니라 더 좋은 유산을 많이 물려줘야 합니다. 신앙과 정신적 유산을 물려줘야 합니다. 빌 게이츠는 세계 최고의 부자입니다. 그의 재산은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54조원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일년 예산의 삼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아들에게 1,000만 달러만을 준다고 합니다. 54조원의 재산 가운데 아들에게는 100억 원만 준다는 말입니다. 100억 원도 우리 입장에서는 적은 돈은 아니지만 54조원에 비해보면 돈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도 유산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는 듯합니다. 더 좋은 유산을 남겨주었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는 “부모가 나의 마음에 남겨 주었던 것을 나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부모로부터 좋은 것을 물려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물려받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을 좀 물려받은 사람은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신앙, 좋은 인격, 좋은 정신, 좋은 성품을 물려받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 전체의 기록 가운데 약 6분의 1이 돈과 그 위험에 대한 경고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재물이 항상 인간의 올무가 되고, 인간에게 경계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는 예수님 곁의 무리 중의 한 사람에 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14절에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이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 하니라”.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형제들의 유산 다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고려 공민왕 때의 ‘형제투금’(兄弟投金) 이야기가 있습니다.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형제가 금덩어리 둘을 주워 하나씩을 나누었습니다. 배를 타고 건너가다가 갑자기 동생이 그 금을 강물에 던집니다. 깜짝 놀란 형이 왜 금을 물에 던지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동생은 금을 가지고보니 형만 없었으면 금 두덩어리가 다 내 것이 될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던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형도 자기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하면서 금을 강물에 던졌다는 얘기입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는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잘 아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형제가 있었는데 형은 자녀가 많았고 동생은 가난했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형은 가난한 동생의 창고에 곡식 단을 몰래 옮겨줍니다. 동생은 자녀가 많은 형의 창고에 옮겨줍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옮겨줬음에도 불구하고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제가 서로 곡식 단을 어깨에 메고 가다 달빛 아래서 서로 만납니다. 서로의 창고가 똑같이 채워져 있는 것을 안 형제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통곡의 벽’은 바로 형제가 만나서 울었던 그 자리라고 합니다. 이 두 이야기들은 모두 실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옛날이야기지만 지금도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어떤 이는 해외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남편이 현지에서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인은 아직도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아들과 함께 현지에 가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해서 한국에 와서 장례를 치렀답니다. 그런데 시동생이 둘이 있는데 동생들은 혼자 된 형수를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재산과 보상금을 조금이라도 뜯어가겠다고 눈을 부릅뜨고 있답니다. 이것이 부인에게는 남편 세상 떠난 것보다 더 큰 상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부의 사랑보다 돈이 앞서고, 형제 우애보다 돈이 앞서는 사회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화목이란 기대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시간이 되어 미문으로 들어가다가 한 앉은뱅이 걸인을 만납니다. 걸인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을 좀 얻기 위하여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돈을 기대하지 말라. 더 큰 것을 기대하라”고 말합니다. 우리 자녀에게도 돈을 주지 말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스스로 일어납니다. 그들이 승리합니다. 형제간에 화목합니다. 요즘에는 은과 금은 있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있는 것은 돈밖에 없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시작됩니다.
칼 메닝거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환자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도대체 그 많은 재산으로 무엇을 할 생각입니까?” “걱정할 일 밖에 안 남았지요.” “재산에 대하여 걱정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오, 재산을 누군가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두려워요”. 편하게 죽는 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재산이 적게 만드는 것입니다. 유산을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돌고래 이야기를 보면 아주 감동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돌고래의 집단사망 원인은 궁지에 빠진 몇 마리의 동료들을 저버리지 못해 무리 전체가 죽음을 택한 결과라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돌고래보다 못한 삶을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물질보다 사랑으로 뭉친 화목한 가정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화목한 가정은 다스림을 받을 줄 압니다.
잠언 17:2입니다.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 이 말씀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인의 아들이 종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고대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된 집안에서는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종이 다스리고 꾸짖는다는 말입니다. 꾸짖을 수 있고 꾸지람을 듣는 집안은 정말 잘 된 집안입니다.
좋은 가정에서 성장하고, 인격이 된 사람이며, 큰 인물은 아래 사람의 말도 경청하고 마음에 받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범죄한 다음에 선지자 나단이 와서 자신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나단은 “당신이 한 마리 양을 가진 주인의 양을 빼앗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나단의 그 말에 “내가 범죄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의 위대성이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아마 그렇지 못한 왕이었으면 나단을 단칼에 목을 벨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도들 가운데 으뜸인 위대한 사도입니다. 그는 자기의 까마득한 후배와 같은 바울이 책망했을 때 그 책망을 달게 듣습니다. 갈라디아서 2:11에 보면 바울이 이방인과 함께 외식하는 베드로를 면전에서 책망합니다. 이 때 베드로는 얼마든지 바울에게 대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에 그 때 바울과 베드로가 다투었다면 초대교회는 크게 분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 아래 사람과 같은 바울의 말을 수용했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서로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들을 줄 알고 다스림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와 자녀 서로가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때로는 부모가 자녀의 말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자녀의 말을 수용하고, 자녀의 요구를 응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좋고 화목한 가정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실 때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갈비뼈를 뽑아 만드셨습니까? 다리뼈를 가지고 만드셨다면 하와가 아담을 밟는 습성이 생길 것입니다. 팔뼈를 가지고 만드셨다면 매일 삿대질하며 살 것입니다. 머리뼈를 가지고 만드셨다면 하와가 아담의 훈장 노릇을 할 것입니다. 턱뼈를 가지고 만드셨다면 말이 많아 싸움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어깨뼈를 가지고 거들먹거릴 것입니다. 목뼈를 가지고 만드셨다면 교만할 것입니다. 갈비뼈는 팔 밑에 있으니 보호의 뜻입니다. 심장에서 가까우니 사랑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와를 잘 보호하고 사랑하라고 갈비뼈를 가지고 만드셨답니다. 부부는 서로 보호하고, 서로 감독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 서로 사랑하라고 지어주신 짝입니다. 모든 가족 관계가 여기서 출발합니다.
탈무드에는 “행복에서 불행으로 가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불행에서 행복으로 가는 것은 영원한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서로에 대한 관심과 존경심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방심과 태만은 일순간에 불행을 몰고 옵니다. “우주와 전 세계를 소홀히 할지언정 서로에 대해서는 소홀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족 서로에게 관심과 사랑, 조언과 충고가 화목한 가정을 만듭니다. 가족은 서로가 사랑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들은 상대방을 비난하는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가족 간에 서로 상대방의 약점을 발견하면 비난의 화살을 쏩니다. 이 화살은 백발백중 상대방의 가슴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깁니다. 흔히 부부간에도 결혼한 지 몇 달 만에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고 합니다. 서로가 힘겨루기를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다스림 받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서로가 존경하므로 상대방의 충고를 수용하는 자세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쁜 마음으로 아래에 서는 자세가 사랑입니다. 사랑은 지배하거나 군림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배하고 군림하면 이미 사랑도 아니고 가정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직접 세우신 제도는 교회와 가정뿐입니다. 가정은 이 땅에서 맛볼 수 있는 유일한 천국의 모형입니다. 가정은 소우주이며 작은 왕국입니다. 가정에서 남편은 왕이며 아내는 왕비입니다. 자녀는 왕자이며 공주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여왕이 많습니다. 남편은 공(公)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최근에는 왕국이 깨지고 분쟁이 심합니다. 차라리 왕국이 아니라 공화국으로 하자고 할지 모릅니다. 가족 모두가 평등만 주장합니다. 자녀들도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어느 가정에 심방을 하여 가정 예배를 드립니다. 가정에 가보니 시어머니와 며느리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 가정은 간절하게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가정입니다. 그런데 요즘 며느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기보다 자기의 일이 중요합니다. 특히 커리어 우먼들은 아기보다 일이 훨씬 더 중합니다. 목사님께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를 열심히 하시는데 며느리는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물론 ‘아멘’도 안 합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목사님의 기도 한 마디 한 마디에 큰 소리도 ‘아멘, 아멘’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며느리는 아기를 못 낳았는데 시어머니가 또 아들을 낳았대요.
결혼하거든 아기도 낳으세요. 아기를 낳는 것은 가정의 특권입니다. 가정의 축복입니다. 가정의 대를 이어가는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중요한 일입니다. 아기를 낳은 것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대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의 대리자입니다.
화목한 가정은 서로가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적 다스림은 지배가 아니라 오히려 섬기는 일입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조심하고 배려하고 절제하는 것도 중요한 가족의 의무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쌍방의 충고를 감사히 받고, 부모는 자녀의 충고를 기꺼이 받는 것이 화목한 가정이 되는 비결입니다.
결 론
영국 왕 에드워드는 여덟 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당시의 규례는 부모의 동의 없이 결혼하려면 18살이 되어야 했습니다. 승정원은 에드워드 왕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여자를 지배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보다 어렵기 때문입니다. 폐하!” 여자를 다스리는 것은 정말 어려워요. 탈무드에는 여자를 울리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은 만일에 남자가 장가를 들었으면 군대도 보내지 말고 일 년 동안은 그 아내를 즐겁게 해주라고 합니다(신 24:5). 결혼과 가정의 중요성을 곳곳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편 127:1에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참된 행복은 우리의 가정에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가정을 하나님이 세워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셔야 합니다.
우리 모든 가정들이 성경적 가정관을 가지고 화목하고 좋은 가정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화목한 추석
잠 17:1 / 김흥규 목사
오늘은 주일이면서 추석 명절입니다. 많은 분들이 고향에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줄로 압니다. 또한 인천이 고향이라서 우리 교회에 방문하신 가족 분들도 환영합니다. 추석하면 참 좋은 명절인데 스트레스를 받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남성들은 대개 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여성들은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습니다.
남자들은 고향에 갈 때 가족 친지 친구들에게 자신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고급 승용차에 멋진 선물을 잔뜩 싣고 금의환향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런데 형편이 그렇지 못할 때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옆집에 아무개는 서울에 올라가서 크게 성공했다더라.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왔다더라." 비교할 때 자존심도 상하고 기도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의 경우 가사노동에 대한 부담이 큰 것 같습니다. 온 가족들이 다 모일 때 음식준비하고 뒤치다꺼리하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맏며느리의 경우 스트레스가 더 심하겠지요. 시댁도 챙겨야 하고 친정도 챙겨야 하니 살림이 넉넉지 않을 때에는 걱정이 큽니다. 게다가 주부들은 오랜만에 만난 시부모님과 남편이 죽이 맞아 자기 험담을 할 때 기분이 크게 상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주부들에게 명절 때 기분을 망치게 하는 동서나 형님을 묻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추석 보너스가 얼마며 연봉이 얼마냐고 물으면서 은근히 자기 자랑할 때가 제일 얄밉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아무 것도 모른다며 계속 실수만 하는 동서가 2위, 일은 하나도 안하고 시부모님께 애교와 응석만 부릴 때가 3위를 차지했습니다. 음식 조금만 하자하고 일도 별로 하지 않더니만 집에 갈 때 남은 음식 다 싸 달라고 할 때가 4위였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부모님이 제일 힘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식들이 효자라서 그래도 명절에 찾아주기만 해도 감사한데 아예 코빼기도 안 보이는 자식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1년에 한 번, 객지에 나간 자식들과 손주들을 손꼽아 기다리는데 오지 않습니다. 얼마나 애간장이 탈까요. 막상 자식들이 오기는 왔지만 뭔가 사업도 안 풀리는 것 같고 행색도 초라해 보일 때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요. 오랜만에 온 가족들이 다 모였지만 연휴가 끝나고 뿔뿔이 흩어질 때 또 부모님이 겪는 외로움도 만만치 않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즈음의 젊은 며느리들은 다 일을 하기 때문에 아이를 일찍 낳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마음은 다급하지요. 한 번은 목사님이 심방을 했는데 시어머니가 손자 보기를 잔뜩 기대하는 가정의 시머어니와 며느리였습니다. 목사님이 이 집에 아들을 허락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며느리는 일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의 기도가 달갑지 않았습니다. 아멘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연방 "아멘 아멘" 하면서 손자 보기를 기도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가정에 아들을 주셨는데 며느리가 낳은 것이 아니라 시어머니가 또 아들을 낳았답니다.
추석은 모처럼 일가친척이 다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나누는 참 좋은 명절입니다. 이런 좋은 명절에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고 다툼이 더 심하다면 없느니만 못할 것입니다. 이번 추석은 즐겁고 감사한 추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소원했던 식구들이 친밀해지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석 때 시댁이나 처가댁에 갈 때마다 부부싸움을 일으키는 말이 있지요. "당신 부모만 부모야." 왜 당신 친부모 형제만 챙기냐는, 그런 불평일 것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아무래도 자기 피붙이에 대해서 더 애착이 가겠지요. 그러나 이번 추석에는 이런 일로 인하여 얼굴 붉히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며느리가 시댁과 소원한 관계였다면 친정 부모님처럼 친밀한 관계로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사위가 처가댁 식구들과 서먹서먹한 관계였다면 이번 명절을 계기로 더 가까워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번 추석은 무엇보다도 화목한 추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새번역 성경은 오늘 봉독한 잠 17: 1절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잠 15: 17절에도 나옵니다. "서로 사랑하며 채소를 먹고 사는 것이, 서로 미워하며 기름진 쇠고기를 먹고 사는 것보다 낫다." 무조건 옳은 말씀들이지요. 그런데 17: 1절의 '진수성찬'이라는 말을 개역 개정판은 '제육'이라고 했습니다. 풍성하게 차려 놓은 제사음식을 말하는 것이지요. 오늘 추석에 온 가족들이 모여 아무리 푸짐한 음식을 차려놓는다고 할지라도 서로 얼굴 붉히고 다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비록 상 위에 차린 음식이 변변치 못하다고 할지라도 식구들끼리 화목하면 이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김치 몇 조각을 얹어놓은 식탁이라고 할지라도 가족들끼리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살진 소를 먹고 미워하며 사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오늘 이 아름다운 명절 추석에 우리 가정이 화목한 가정이 되길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 마디를 많이 하는 절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 세 마디만 잘하면 이번 추석은 틀림없이 즐겁고 화목한 추석이 될 것입니다.
첫째로,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해보세요.
제가 볼 때 뭔가 미안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있다는 표시입니다. 목사인 제가 교인인 여러분을 사랑할 때에도 뭔가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감정부터 생깁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에도 마찬가지이지요. 괜히 나 같은 사람한테 시집와서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한 감정이 생깁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른 신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뼈골이 휠 정도로 일하는 남편을 볼 때마다 뭔가 애틋하고 미안한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백년해로하던 부부가 한 날 한 시에 함께 세상을 떠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남편이 남은 아내에게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여보, 미안해. 나부터 먼저 가서." 남은 아내가 먼저 떠나는 남편에게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역시 "여보, 미안해요. 함께 가지 못해서요." "미안해요." 부부간에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이지요.
자녀들이 부모님을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를 낳으시고 기르시느라고 그토록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그 은공을 만분지일도 갚지 못해 죄송합니다." "더 잘해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이런 감정이 생길 때 사랑이 싹 트고 화목해질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이지요. 제 딸이 이번 학기 동안 한국에 나와서 저희와 함께 있습니다. 옛날 같으면 늦잠 자고 그러면 꾸중도 하고 그럴 텐데 뭔가 자꾸만 미안한 생각부터 들어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동안 엄마 아빠 없이 미국에서 홀로 고생했을 생각을 하면 애틋한 마음이 들곤 하지요. 딸은 그렇다 치고 아들 녀석은 명절인데 한국에 오지도 못하고 혼자 어떻게 지내나, 슬프고도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이렇게 잘 먹고 잘 입고 사는데, 홀로 외롭지는 않은지 생각할수록 미안합니다. 오랜만에 여윈 모습을 볼 때면 다 부모 잘못 때문에 저렇게 되었다는 자책이 들곤 하지요.
그렇습니다. 미안한 느낌, 이거야 말로 사랑의 첫 출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길을 갈 때에도 누군가 가벼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말 한 마디만 해주어도 화가 다 풀리고 기꺼운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마음이 불편해서 얼굴이 어두운 분들은 이렇게 말해보세요. "공사 중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 말은 "공사가 끝나면 다시 제 본 얼굴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잠시만 참아주세요." 라는 말이지요. "미안합니다." 그 쉬운 말을 하지 못해서 얼굴 붉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할 수 있으면 이번 추석은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많이 써보세요. 여러분의 가정이 훨씬 더 화목한 가정이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해보세요.
아주 작은 일도 고마워할 줄 아는 마음, 참 소중한 마음입니다. 이번 추석에는 서로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해보세요.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고맙습니다." 인사해보세요. 부모 입장에서 자식이 무탈하게 잘 자라준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자식들은 낳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꼭 해보세요.
자식들이 부모님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어머니에 대한 오해입니다. "우리 엄마는 엄마의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첫사랑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의 몸은 절대 아프지 않는 아주 특별한 몸인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드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특별히 좋아하시는 음식이 하나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항상 짧은 파마머리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얼굴이 고와지고 몸매가 날씬해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모든 것을 좋게 받아들이고 아무 불만도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우리가 전화를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언제까지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오해도 있지요. "우리 아버지는 단 하루라도 쉬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웃는 걸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시집가는 것을 보고 마냥 기뻐만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배가 빨리 불러와 좋은 음식 앞에서 먼저 일어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양복 입고 넥타이 매는 것을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안주머니에는 항상 돈이 얼마쯤은 들어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좋아하시는 운동도 취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리 깊고 험한 길을 걸어가도 조금도 두려워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눈에는 눈물이 한 방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객지로 떠나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다 오해입니다. 엄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감정이 있습니다. 슬픔과 외로움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절대로 슈퍼 맨 슈퍼 우먼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이 상처받은 인간일 뿐입니다. 사람은 자기도 자식을 낳아보고 길러보면 그제야 부모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낳으시고 길러주시고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신 부모님께 감사합시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감사합시다. 그리할 때 우리 가정이 화목해질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해보세요.
며칠 전 인터넷 신문을 보았더니 세계 최초로 한국의 동해에서 참돌고래의 장례의식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되었다고 합니다. 죽어가는 한 마리의 돌고래를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보려고 서너 마리의 동료들이 그 돌고래를 에워싸고 수면 위로 밀어 올렸습니다. 그러나 동료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돌고래가 죽어서 물속으로 가라앉으면서 장례식은 끝났습니다. 참돌고래에게도 이타적인 행위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말 못하는 미물의 세계에도 동료애가 있다는 말이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말은 사랑입니다. 사랑보다 더 좋은 말은 없습니다. 사랑만 있으면 가난해도 좋습니다. 조금 못 살아도 좋습니다. 소설 '태백산맥'과 '아리랑' 등을 쓴 조정래 씨가 자기 가정에 대해서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살다가 서울 달동네로 올라와 정말 지긋지긋한 가난을 겪었습니다. 사람들은 현재 성공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조정래 씨만 알기에 그가 그렇게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나 하고 다들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조정래 씨는 자신의 소설을 비롯해서 모든 인생의 뿌리에는 가난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를 키운 것은 가난이었고 가난이 그의 힘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조정래 씨는 적어도 가난한 이야기를 쓸 때에는 거의 파지를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난이 자신의 삶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이지요. 조정래 씨 가족은 찢어질 듯이 가난했지만 사랑과 정이 있었습니다. 동기간에 우애가 있었습니다. 가난했지만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가정보다도 화목하고 건실한 가정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조정래 씨는 그 흔한 주색잡기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문단에서 건실한 사람으로서 평판이 높습니다. 본인만 그런 것이 아니고 4남4녀 8남매가 주색잡기로 속을 썩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정래 씨의 아버지는 네 며느리들에게 자식 교육 잘 시킨 분으로 높이 떠받들어지고 있답니다. 가난이 이 형제자매들을 건실한 사람들로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이번 추석에는 온 가족들이 서로 "사랑합니다." 하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있으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요일 4: 18절은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부모가 자식을 꾸짖을 때에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부부가 다툴 때에도 사랑 안에서 해야 합니다. 사랑만 있으면 가정은 화목해질 수 있습니다. 모든 두려움과 불화가 사라집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서로 "사랑합니다." 하고 인사하십시오.
오늘 이 좋은 추석 명절에 여러분의 가정이 화목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주안에서 화목한 가정
잠 17장 01절 / 유영설목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활짝 핀 꽃, 아기의 웃음소리,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중 두 가지는 가정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입니다.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소망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가정이 불완전하면 어떤 일도 잘 해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온갖 산해진미를 먹는다고 해도 가정에 평화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음을 말씀한 것입니다. ‘제육이 가득한 집’은 제물을 말합니다. 제사음식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감사제나 화목제물을 드리고 난후 제물로 사용되었던 음식을 가족들끼리 나누어 먹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진수성찬을 먹더라도 화목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주 안에서 화목한 가정의 원칙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1. 건강한 부부관계
성경에 화목하고 이상적인 부부관계를 나타내는 표현들이 여러 곳 있습니다. “아담이 이르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창 2:23) 한나의 남편 엘가나도 “내가 당신에게 열 명의 아들보다 나은 남편이 아니냐?”(삼상 1:8)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부부관계 속에 있는 가정은 화목한 가정입니다. 반대로 이질감을 느끼고, 신뢰를 할 수 없으며, 부부간에 대화가 단절되었다면 성경의 아름다운 부부관계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이 아름답고 성숙하며 존귀합니다(시 128:3). 결실한 포도나무란 외적인 아름다움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역할과 도리에서 성실하고 성숙함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을 주님께 하듯 하라.’(엡 5:22)고 했고,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고 말씀했습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산물입니다. 아내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부관계가 건강하지 못하면 사업과 직장에 문제가 생깁니다. 자녀들의 성격형성에 문제가 되고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됩니다. 부부간의 불화를 보고 자란 자녀들은 건강한 부부관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부부갈등은 대물림되고 학습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어느 누구도 가정을 소홀히 하고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위로가 있고 치유가 있는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모와 자녀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있어 두 가지 원칙이 세워져야 합니다. 첫째는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합니다(출 20:12, 신 5:16, 엡 6:1). 둘째는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엡 6:4). 사람이면 당연히 지켜야 하나 실제로는 쉽지 않아서 다윗에게 압살롬같은 자식이 나왔습니다. 부모공경과 순종이 안 되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잘되라고 훈계하는 것을 듣지 않고 오히려 부모를 해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재물 때문에 부모를 해치기도 합니다. 부모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이며(신 5:16), 주 안에 있는 자들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엡 6:1). “공경하다”(카베드)는 말은 본래 “무겁다”는 뜻인데, 부모를 무게 있게 대하라는 뜻입니다. 즉 부모의 말씀을 존중하고 기억하고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이며,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순종”은 부모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따르는 것입니다. 부모의 말씀을 거역할 때 부모는 마음이 아프고, 삶 자체가 힘들어집니다. D. L 무디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다 잃더라도 나는 불행하지 않다. 그러나 자식에게 존경심을 잃으면 나는 불행할 것이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은 “존경심”을 나타내는 방법입니다. 부모 공경과 순종의 원리가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하지만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엡 6:4).
3. 형제와 형제관계
한 부모아래서 자란 형제들이 대개 약 20세 정도까지만 생활하면 그 후에는 학교, 직장, 결혼 등으로 서로 헤어져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년이 되고 가정을 꾸리게 되면 형제라도 목적이 있어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형제와 형제간의 좋은 관계를 오래 동안 맺어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형제가 부모 밑에서 자라는 동안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부모가 형제자매 관계를 유지하는 끈이 됩니다. 부모 때문에 형제가 서로 만나게 됩니다. 부모를 뵙기 위해 찾아와서 형제들끼리도 만나게 됩니다. 부모의 기일도 사실 따지고 보면 혈육이라는 관계를 확인하는 모임입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형제와 형제간에 이해관계(물질)가 얽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야곱과 에서를 보십시오(창 27:30-45). 야곱은 형의 장자 권과 아버지의 축복 권을 가로챘습니다. 이해관계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야곱입니다. 에서는 동생이 빼앗아간 자신의 권리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결국 형제간에 갈등이 너무 커 부모아래서 함께 생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도망자가 되어야 했고 에서는 마음속에 야곱에 대한 미움과 분노의 상처가 가득했습니다. 에서는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할 쯤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들의 관계에서 분열하는 이삭의 가정을 봅니다. 그뿐만 아니라 에서는 야곱의 이름을 비난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지켜주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갚아준다’는 뜻입니다. 분노한 에서는 야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도망자가 된 야곱이 편했나요? 그도 힘들었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상처’였습니다. 부모곁을 떠난 야곱은 다시 에서를 만나는데 20년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부모를 만났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화목한 하나님의 집
잠 17:1 / 이성희 목사
한류를 이끌었던 ‘욘사마’ 배용준이 오래전 도쿄 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열성 일본 아줌마 팬들이 욘사마를 보려고 왔다가 서로 밀쳐 넘어져서 여럿이 다쳤습니다. 욘사마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방문하여 일일이 위로하고 병원비 일체를 부담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일본의 어느 신문기자가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었는데 욘사마는 “내 사랑하는 가족이니까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일본 팬들은 더욱 열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 유행하던 말이 “그녀는 다쳐서 좋겠다”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족에게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가정에서 사랑받지 못하던 중년들이 욘사마에게 열광하게 만든 것입니다. 사람이 가정에서 사랑받지 못하면 어디에서도 사랑받을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 ‘리터루족’을 아십니까? 결혼하여 독립가정을 이루고 있다가 부모님의 집으로 다시 돌아와 부모의 품에 안기는 자녀를 말합니다. 이런 ‘리터루족’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리터루’란 return과 kangaroo라는 단어를 합성한 말입니다. 최근의 전세 값 폭등으로 인한 주택문제와 육아문제가 ‘리터루족’을 양산했습니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육아도 증가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250만 가구 이상이 황혼육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다시 부모의 집으로 돌아와 두 가정이 결합하므로 새로운 가족 간의 갈등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이런 현상이 대가족제도가 복원되는 신호탄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동시에 나홀로 가구도 급증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나홀로 가구가 222만이나 됩니다. 현재 여성가구주는 265만으로 전체 가구 수의 28%나 됩니다. 그래서 ‘가부장’(家父長)시대가 막을 내리고 ‘가모장’(家母長)시대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우리의 기존의 가정의 형태가 변하고 있고, 전통적인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가정의 변화는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의 ‘화목’과 ‘평안’이 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화목한 가정이 사라진다는 것은 가정의 위기입니다. 가정들이 성경대로 산다면 화목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해혼식’(解婚式)이란 예식이 있습니다. 결혼이 혼인관계를 묶어주는 예식이라면 해혼은 혼인 관계를 풀어주는 예식입니다. 해혼은 불화로 갈라서는 이혼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부부가 자식들을 다 키우고 열심히 살다가 서로 각자가 원하는 대로 사는 방식입니다. 인도에서는 오래 전부터 해혼 문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37살에 아내에게 해혼을 제안하였답니다. 아내는 고민 끝에 동의하였고 간디는 해혼 뒤에 고행의 길을 갔습니다. 우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희한한 결혼 문화도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최근 ‘졸혼’(卒婚, 소쓰콘)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2004년에 ‘소쓰콘을 권함’이란 책을 쓴 스기야마 유미코는 졸혼을 정의하기를 ‘기존의 결혼 형태를 졸업하고 자기에게 맞는 새 라이프스타일로 바꾸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참 좋은 결혼이라면 졸혼은 절대로 안 할 것입니다. 이 모두가 정상적인 결혼관은 아닙니다.
얼마 전 총회 일로 광양에 갔다가 이순신대교에 가 보았습니다. 이 다리는 현수교인데 교각의 높이가 세계최고이고, 교각과 교각 사이의 너비가 세계 3위라고 합니다. 다리의 주 케이블은 지름이 5.35mm인 가는 철사 줄 12,800가닥으로 아름드리로 만들었습니다. 작은 철사들이 모여 굵은 케이블을 만들었는데 그래야 굵은 한 줄 보다 강하다고 합니다.
결혼의 결(結)자는 실 사(絲)자와 순조로울 길(吉)자가 조합된 단어입니다. 결혼이란 부부를 단단히 묶어 놓아야 안심이 된다는 뜻입니다. 요즘에는 느슨하게 묶어 놓아서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혼(婚)자는 여자 여(女)자와 저녁 혼(昏)자가 조합된 단어입니다. 고대사회에 여자를 어둠 속에서 맞아들이던 습속을 반영하였습니다. 결혼은 서로 잘 묶여 있어야 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말입니다.
사이몬이란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부를 하나로 묶어 두는 줄은 굵은 동아줄도 쇠사슬도 아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 꿰매 온 수백 가닥의 가느다란 실이다.” 우리 모두가 가정의 책임을 잘 합시다. 부부가 잘 묶여 있습시다. 그리하여 온 가족이 우리 가정을 화목한 하나님의 가정으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첫째, 화목은 재산의 유무 때문이 아닙니다.
잠언 17:1 상반절에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어도 화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족이 여럿인데 어떻게 한 조각으로 화목할 수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여러 조각이 있어도 화목하지 못한 가정도 많습니다. 더구나 너무 조각이 많아서 화목하지 못한 가정이 많습니다.
화목은 재산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재산은 삶의 도구인데 삶의 목적으로 변하면 화목은 멀어집니다. 많은 가정이 화목하지 못한 것은 재산을 삶의 목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는 것이 목적이 될 때 재산은 다툼을 일으키게 됩니다.
물질은 우리에게 우선의 필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물질세계를 먼저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이 먼저이고, 물질이 나중이었습니다. 정신세계가 먼저이고, 물질세계가 나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질을 거부하지는 않으셨지만 물질 중심의 부자를 책망하셨습니다. 물질 중심의 부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돈은 필요한 것이지 사랑할 대상은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6:10에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3:5에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3:3에는 감독의 자격을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디모데후서 3:2에는 마지막 때의 징조를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라고 합니다. 가정의 화목이 깨지는 이유는 가족,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돈은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돈이 많으면 화목이 깨집니다. 돈 많은 집안, 재벌가의 후손들을 보면 끊임없이 재산분쟁이 일어납니다. ‘재산분쟁’ 혹은 ‘형제의 난’ 등은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분쟁은 끝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형제의 난’이란 말도 생소한 말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재벌가인 삼성, 현대, 롯데, 두산, 금호, 효성 이 모든 가문에서 ‘형제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조선왕조에 빈번한 왕권 찬탈 전이었던 ‘형제의 난’과 별로 다르지 않은 난리입니다. 총수의 자리, 재산의 분배 등이 ‘형제의 난’의 주 원인입니다.
이런 재물로 인한 분쟁은 최근의 일이 아닙니다. 성경시대에도 이미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 조카 롯과 함께 떠났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아브라함과 롯의 종들 사이에서 분쟁이 생겼습니다. 그 분쟁을 성경은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고 합니다. 재물이 많아지니까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먼저 거주지를 택하게 하였고,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택한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도 오랜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야곱도 에서도 엄청난 부자가 되어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에게 재물을 주려고 했지만 에서가 자신의 재물도 많으니 받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 무리 중 한 사람이 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친척이나 형제 사이에 재산분쟁은 예나 지금이나 아주 빈번한 일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 문제로 충돌하여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인 이후로 형제 사이의 충돌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쌍둥이는 한 배에서 나온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까운 형제인 동시에 가장 치열한 경쟁자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들은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부터 한 치 양보도 없는 경쟁자였고, 태어날 때도 동생이 발목을 잡고 태어났고, 평생을 다투며 살았습니다.
지난 해 우리나라에서는 쌍둥이 출생률이 사상 최고였습니다. 신생아의 6.6%가 쌍둥이였습니다. 특히 시험관 아기의 41%가 쌍둥이였습니다. 여성의 초산 연령이 높아지면서 쌍둥이 출산의 확률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형과 동생 사이를 보면 동생이 태어나면서 형의 시기심이 발동합니다. 소변을 잘 가리던 형이 동생이 태어나면서 소변을 못 가리게 됩니다. 동생만 예뻐하는 것처럼 느끼는 형이 부모의 관심을 끌기 위한 심리적 동작입니다. 형제는 언제나 이런 갈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특히 재산 문제에 대해서는 경쟁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언 30:8에는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재산이 너무 많으면 갈등, 분쟁, 싸움이 이어지고, 재산이 너무 없으면 불평, 원망, 도둑질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은 필요한 만큼 적당히 가지고, 가진 것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너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합니다. 형제우애는 믿음의 진보로 가능한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형제간의 우애가 가능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2에는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에는 이성만 형제의 ‘효제비’가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대흥호장 이성만과 이순 형제의 우애를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 형은 어머니의 묘소를 관리하고, 동생은 아버지의 묘소를 관리하였습니다. 3년의 복제를 다 마치고 아침에는 동생이 형의 집에, 저녁에는 형이 아우의 집에 들렀다고 합니다. 한 가지 음식만 생겨도 형제가 만나지 않으면 안 먹을 정도로 형제의 우애는 극진했습니다. 1497년 연산군 3년에 왕은 후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게 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기념비를 건립해 주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을 잘 아실 것입니다. ‘스룹바벨 벽’이라 불리는 이 성벽은 유대인들이 와서 소원을 적은 종이를 벽에 꽂으며 기도하는 곳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곳은 형제가 서로 볏단을 밤중에 옮기다가 만난 곳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곳을 ‘엘 마브카’(우는 장소)라고 부릅니다. 형과 아우가 서로를 배려하여 볏단을 옮기다가 중간에서 만났다는 의 좋은 형제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옛 계명은 구약이 말하는 ‘텔리온법’(lex Telionis)인 ‘동해상해법’을 말하며, 새 계명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내 계명’은 용서하고 사랑하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형제가 서로 사랑할 것을 권하시며 형제가 아닌 다른 사람과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둘째, 다투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잠언 17:1 하반절에는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제육이 가득하고도 다툰다는 것은 제육이 가득하면 다툴 일이 더 많다는 뜻입니다. 화목하지 못하면 산해진미가 아무 맛이 없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싸우면서 먹으면 아무 맛도 없습니다. 우리 옛말에는 ‘시장이 반찬이다’란 말이 있지만 사실은 사랑이 반찬입니다.
맛은 크게 말하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화학적 맛으로 신맛, 짠맛, 단맛, 쓴맛 등을 구분하는 맛입니다. 둘째는 물리적 맛인데 식감의 맛을 말하며 달달한 맛, 아삭아삭한 맛 등입니다. 셋째는 사회적 맛인데 어떤 환경에서 먹느냐, 누구하고 먹느냐 라는 대상에 관한 것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 맛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맛은 사회적 맛이라고 합니다.
제육이란 희생제물을 말하며 유대인의 감사제와 화목제를 암시합니다. 제사를 드린 제물의 일부는 불사르고 나머지를 가족끼리 화목하게 나누어 먹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제물을 나누는 식사가 호화로운 식사가 되기도 했답니다. 서로 많이 먹겠다고 탐하고 다투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합니다. 탐식하는 자는 음식의 참 맛을 모르는 법입니다.
잠언 15:17에는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채소는 싸고 나쁜 음식, 고기는 비싸고 좋은 음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꼭 비싸고 호화로운 식사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먹는 싸고 소박한 음식이 최고의 음식입니다.
“콩 한쪽도 나누어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가만히 보면 옳은 말이 아닙니다. 현대인에게는 “콩 한쪽 이니까 나누어먹는다”는 말이 맞습니다. 콩 한 쪽이 아니라 콩 한 자루이면 나누어 먹지 않습니다. 콩밭이라면 나누어 가지겠습니까?
옛날 산골에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아내와 아이와 함께 밭일을 하다가 비둘기 한 마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농부는 배가 고프던 참에 모닥불을 피워 비둘기를 구웠습니다. 굽고 보니 나누어 먹기에 너무 작았습니다. 농부는 “한울님, 비둘기의 양이 너무 작아 나누기가 힘듭니다. 이 작은 것을 식구들과 함께 나누어 먹어야 합니까, 아니면 내가 힘든 일을 하고 있으니 혼자 먹어야 합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가족들에게는 “한울님이 나 혼자 먹으라네” 하면서 혼자 먹어버렸습니다. 어린 아들은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줄까 해서 기다리다가 울면서 집으로 뛰어 가버렸습니다. 화가 난 아내가 집에 들어와 떡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아버지는 주지 마”하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밭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좋아하는 떡이 있었습니다. 농부는 아들에게 “한 입만 먹자”라고 했지만 아이는 “안 돼요”라고 돌아앉았습니다. 농부는 떡을 먹고 싶지만 말을 못하겠고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칠성님, 남편과 나누어 먹어야 합니까, 아니면 아들과 둘이서만 먹어야 합니까?”하더니 “칠성님이 비둘기 고기 조금도 안 줬으니 둘이서 먹으라네”하더니 둘이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조목조목 남편을 타일렀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콩 한 쪽도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도마와 칼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내와 아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보았더니 콩을 세 조각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콩 하나를 세 조각으로 나누어 먹고 알콩달콩 잘 살았다고 합니다.
온갖 진미가 가득한 식탁이라고 하더라도 화목하지 못하면 콩 한 쪽 보다 못합니다. 사랑으로 먹는 음식이 다투는 진미보다 장수식품이며 가장 맛있는 음식입니다.
가족은 음식을 가지고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저도 어릴 때 동생과 음식 때문에 다툰 적이 더러 있습니다. 그 때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돼지새끼처럼 싸운다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먹는 것 가지고 다툴 일이 우리 때만큼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때는 먹을 것이 귀한 때이므로 제법 다투며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창세기 45:24에는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요셉이 곡식을 구하러 애급에 온 형들에게 자신을 밝히고, 아버지와 식구들을 데리고 오게 하였습니다. 형들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자기들끼리 요셉을 판데 대하여 서로 원망하고 다툴까봐 요셉은 다투지 말라고 권합니다. 요셉의 관용과 신앙적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10에는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합니다. 믿음의 가정은 모두에게 항상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가정은 모름지기 다툼이 없고, 사랑이 넘치고, 배려하고, 양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넘쳐야 합니다.
사회비평가 존 러스킨은 “인류 역사는 세계의 역사가 아니라 가정의 역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회의 기초는 가정입니다. 가정을 보면 인간사를 알 수 있습니다. 가정이 잘 돼야 인간의 역사가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정은 국가의 근본 세포를 형성한다”고 하였습니다. 사회질서가 파괴되고, 윤리가 무너지고, 범죄가 극성을 부리게 될 때는 반드시 이미 가정이 파괴된 것을 의미합니다.
바비 샌더스는 ‘돌고래에게 배운다’라는 책에서 돌고래의 무리가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을 때마다 맨 바깥에 수컷들, 그 안쪽에 암컷들, 그리고 한 가운데에 어린 돌고래가 열을 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원리대로 살면 이렇게 삽니다. 돌고래도 아는 것을 범죄한 사람은 알지 못하고 창조원리를 등지고 살아갑니다.
결 론
1883년 2월 검은 말의 행렬이 하나의 관을 싣고 워싱턴 DC를 행진하였습니다. 관을 실은 마차가 시청 앞을 지나갈 때 수천 명의 인파가 길가에서 돌아온 시체에 조의를 표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체는 존 하워드 페인(Payne)의 주검입니다. 그는 1852년 4월 알제리에서 사망하여 31년 만에 시체로 고국에 돌아온 것입니다. 대통령, 국무위원, 상하원의원 그리고 많은 국민들이 조의를 표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 사람에게 조의를 표하고 있었습니까? 바로 그는 ‘즐거운 나의 집’이란 노래의 작사자였습니다. 그가 지은 노랫말에 헨리 비숍이 작곡하여 1823년 오페라 ‘Clari, Maid of Milan’에서 처음 이 노래가 불러졌습니다. 이 노래는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그리고 영어권에서 가장 널리 불러지는 노래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작사라고도 합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내 집 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 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내 집 뿐이리.” 이 노래가 인류 역사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불리는 것은 가정의 고귀함 때문입니다. 가정은 인간의 유일한 안식처입니다. 행복의 요람입니다. 우리 모든 가정들이 지상의 천국 같은 이런 가정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단련된 마음
잠 17:1-5 / 김기석 목사
∙모진 세상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우리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상한 영혼의 제사를 드리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치유해 주시기를 빕니다. 시간 속을 바장이며 사는 동안 우리는 이런저런 내상을 입으며 삽니다. 여유작작餘裕綽綽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도 차마 남에게 드러내지 못하는 아픔과 그늘이 있습니다. 그 아픔과 그늘을 자기 성숙의 계기로 승화시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을 바늘로 만들어 주위 사람들을 콕콕 찌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내 생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고 생각할 때 원망의 마음이 찾아듭니다. 사회를 원망할 수도 있고, 특정한 집단을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원망을 풀 곳이 없을 때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합니다. 가족들이 그 원망받이가 되는 경우가 제법 많습니다. 가정家庭은 ‘집 가‘ 자와 ‘뜰 정’ 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뜰은 여백입니다. 뜰이 사라졌기 때문일까요? 가정을 족쇄처럼 여기는 이들이 꽤 많습니다.
코로나19로 학생들이 격주로 등교하면서 가정마다 비상이 걸렸습니다. 서로 생활의 리듬을 침해할 소지가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서로 배려하며 조화를 이루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가정도 제법 많은 것 같습니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 우애가 돈독해질 것 같지만, 오히려 감정적으로 얽혀들어 피차 상처를 입고 또 입힙니다. 집에서는 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한 역할을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족들이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자기 기대에 어긋나는 반응이 돌아오면 짜증을 냅니다. 그건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에게도 누군가 자기를 토닥거려주기를 바라는 ‘어린아이‘가 숨어 있는 법입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자기를 우선시하는 마음을 내려놓지 않는 한 갈등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가족일수록 섬세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나오는 ‘아이들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의 아이라고 해서 그대들의 아이는 아닌 것.
아이들이란 스스로 갈망하는 삶의 딸이며 아들인 것.
그대들을 거쳐 왔을 뿐 그대들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 그대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아이들이란 그대들의 소유는 아닌 것을.”
(칼릴 지브란, <예언자>, 강은교 번역, 문예출판사, 1979, 22쪽)
모든 생명은 독립적 주체입니다. 나를 통해 왔다고 해서 내 맘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저마다 스스로 갈망하는 ‘생명’의 아들 딸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들은 나의 꿈을 실현하거나, 나의 사회적 체면을 높여주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가정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에서도 존중받기 어렵습니다.
세상을 향해 ‘숨을 쉴 수 없어요’라는 메시지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난 조지 플로이드는 인류의 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못지않게 참혹한 일들이 이 땅에서 자꾸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는 이유로 여행 가방에 가두어 죽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어린 아이 버릇을 고친다고 뜨겁게 달구어진 플라이 팬에 손을 짓눌러 데게 만들기도 하고 쇠줄을 목에 감아놓기도 했습니다. 그 어린 생명에게 가해진 학대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람들의 심성이 왜 이렇게 모질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근본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욕망의 벌판에서 길을 잃고 떠돌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운 종
요즘은 좀 보기 어렵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편액이 집집마다 걸려 있었습니다. 집안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가정이야말로 받아들여짐을 경험하는 현장, 언제라도 자기답게 존재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표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17:1)고 가르칩니다. 바로 앞에서 그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잠16:32)고 했습니다. 이것이 수신修身에 관련된 가르침이라면 가족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제가齊家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마른 빵 한 조각은 최소한의 거친 음식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 음식을 먹으면서도 서로 측은히 여기고 고맙게 여기는 것이 호화로운 식탁 앞에서 다투는 가정보다 낫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진수성찬’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제배흐 zebach’는 기본적으로 ‘희생‘ 혹은 ‘의의 제사’, ‘감사의 제물’을 뜻합니다. 결국 종교행위는 열심히 하면서도 다투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화해자, 혹은 생명의 향기가 되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이 혹은 물질적 풍요로움이 정신적인 넉넉함으로 연결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마른 빵 한 조각이라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야말로 예배에 가까운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다음 구절을 볼까요?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일을 하는 주인집 아들을 다스리고, 그 집 자녀들과 함께 유산을 나누어 받는다."(2) ‘슬기롭다‘(사핼sakal)는 말은 ‘신중하다, 사려 깊다, 통찰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슬기로운 종은 일과 자기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할당량을 채우는 데 급급하지 않고, 일의 전모를 이해하고 거기에 맞는 역할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주인집 아들이 어리석어 제 역할을 못할 때 주인은 슬기로운 종에게도 유산을 나눠주어 재산의 소실을 막으려 했습니다. 적절한 예가 있습니다. 아브람은 아직 약속의 유업을 받지 못했을 때 다마스쿠스 사람 엘리에셀이 자기 상속인이라고 말합니다(창15:2).
부끄러운 일을 하는 주인집 아들이 예전에도 많았던 모양입니다. 풍요로움 속에 살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모두 누린 사람들 가운데는 공감의 능력이 좀 부족한 이들이 많습니다. 공감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은 타자를 이해하거나 배려할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갑질하는 사람들이 그 한 예입니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다 이기적인 데가 있습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으려는 습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설익은 사람일수록 목소리가 큽니다. 앙앙怏怏(불평·불만이 있어 마음이 시뜻함)거리는 이들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인격의 향내가 묻어나는 사람, 무르익은 사람을 만나야 우리 삶이 가지런해집니다. 그런데 살면서 경험하는 것이지만 그런 분들은 대개 고난의 시간을 잘 겪어낸 분들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지만 고난이 유익이 될 때가 있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자각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나의 지식이, 나의 입장이, 나의 세계관이, 나의 생각이 참된 인식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편견에 찬 것임을 알 때 성숙함이 시작됩니다.
∙삶의 연금술
다음 구절입니다.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신다.”(17:3) 어린 시절 시골에서 학교에 다닐 때 면사무소 근처에 있었던 대장간 앞을 서성거리곤 했습니다. 너무 낯설고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대장장이 아저씨가 풀무에 공기를 주입하면 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습을 경외심을 품고 바라보곤 했습니다. 불이 쉭쉭 소리를 내며 솟아오르던 그 모습과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합니다. 아저씨가 집게로 벌겋게 달아오른 쇠붙이를 꺼내 모루 위에 놓고 두들길 때 나는 그 리드미컬한 망치소리가 참 매혹적이었습니다. 아저씨의 팔뚝에 불끈 일어난 근육과 힘줄도 멋졌습니다. 쇠가 열이 식어 검게 바뀔 무렵 그 쇠를 물속에 푹 담그면 푸시식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피어오르던 광경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풀무불, 모루, 망치질, 물 속을 오가는 담금질 과정을 반복하면서 마침내 거칠던 쇳덩이는 칼이나 호미 괭이 따위의 도구로 바뀌었습니다. 어쩌면 삶에 꼭 필요한 것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얻어지는 것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시련과 고통의 풀무와 망치질, 그리고 절망의 심연을 거치면서 더 깊고 성숙한 심성을 얻습니다. 그러나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과 시련을 겪는다고 하여 사람들이 다 맑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거칠어지고, 다른 이들을 원망하면서 사는 이들도 많습니다. 고난이 닥쳐올 때 그것을 유익으로 바꾸는 일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을 연금술이라고 말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지향은 분명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고난을 생의 보화로 승화시킨 사람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롬5:3-4)
물론 바울이 말하는 환난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다가 겪는 환난을 말합니다. 누가는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이 공의회에 끌려가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위협과 함께 채찍질을 당하고 풀려났을 때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다”(행5:41).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단력된 인격을 낳는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일 겁니다. 그리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습니다.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앙앙불락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일생에 몇 번은 한계 상황 앞에 섭니다. 스스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일들이 느닷없이 닥쳐와 우리 삶을 뒤흔듭니다. 질병, 죽음의 위기, 실패, 무의미성의 자각, 허무 의식, 견딜 수 없는 슬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 찾아올 때 우리는 참 무력해집니다. 하지만 그런 인생의 위기는 우리 인생에서 정말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시급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놓치고 살았던 중요한 일들을 다시 붙들게 만듭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때로는 무겁게 여겨졌던 가족들이 더없이 고맙게 여겨지고, 어려운 시기에 내 곁에 다가오는 이들이 얼마나 귀한 이들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고난은 돈과 명예와 권세를 좇던 삶이 허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모든 고난이 유익한 것은 아니지만 고난을 유익하게 만든 사람들이 지혜자입니다.
∙악과 결별하는 용기
“악을 행하는 사람은 사악한 말에 솔깃하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중상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17:4). 어거스틴은 악은 선의 부재라고 말했습니다. 악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세상에는 정말 악인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말이 있습니다. 샤덴은 상처를 준다는 말이고 프로이데는 기쁨, 환희를 뜻합니다. 강상중 교수는 이 단어를 ‘타인의 불행은 꿀맛’이라고 옮깁니다. 우리 마음에는 이런 게 없습니까? 악에 사로잡힌 이들은 참된 말을 멀리합니다. 이런저런 음모론에 휘둘립니다. 자기들만이 세상의 이면을 다 보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 어리석은 믿음이 그들을 더욱 어리석게 만듭니다. 그런 태도는 결국 타인에 대한 의심, 조롱, 멸시, 폭력을 낳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어둠이 또 다른 어둠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잠언의 지혜자는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다. 남의 재앙을 기뻐하는 사람은 형벌을 면하지 못한다“(17:5). 누군가를 조롱한다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부인한다는 말입니다. 이웃 사랑의 기초는 선한 의지가 아니라, 이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이 마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 영혼의 전락이 시작됩니다. 우리 원양어선에서 일하는 이주어선원에 대한 노동 착취와 인권 침해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정말 속상합니다. 돈 때문에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마비되는 이 현실을 극복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 앞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사회 구석구석에서 그리스도의 향내를 풍겨야 합니다. 십자가 목걸이를 달고 다니고, 식사할 때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아끼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근본에 충실한 사람들이 등장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이 머무는 삶의 자리 한 구석이라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십시오. 여러분 주위에 따뜻하고 상쾌한 분위기를 만들고, 서로 아끼는 마음이 쉽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만드십시오. 바로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이들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한 주간 동안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말고,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다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머무십시오.
성령이후의 과제
잠 17:1-3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에게 마귀가 탐욕과 욕망 등 종교개혁자들이 범한 기나긴 죄의 목록들을 들고서 찾아왔습니다. 루터는 죄의 목록이 너무 짧다고 하면서 또 다른 죄들을 불러주었습니다. 마귀는 열심히 받아 적었습니다. 기록이 끝나자 루터는 마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젠 맨 아래에 이 말을 기록해 두라.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이 말을 듣고 마귀는 혼비백산했답니다. 용서는 용기를 가지게 합니다.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것이 용기를 더하게 합니다. 이런 용서의 용기가 사람을 새롭게 힘 있게 살게 합니다.
성령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화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둘이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오심으로 용서하시고 화해하시고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성령강림은 모든 것을 변화하게 만듭니다. 교회가 세워집니다. 능력이 있게 됩니다. 겁쟁이가 용감한 자가 되게 합니다. 제자들이 사람을 무서워했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제자들을 무서워하게 합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변화시킵니다.
성령강림은 문자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되게 하였습니다. 교회는 분해 된 시체가 아닙니다. 성령님의 강림으로 교회는 살아 있는 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성령강림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성령강림 이후의 과제가 있습니다. 성령강림은 그 이전에 인간편의 과제가 있었습니다. 맛디아를 뽑아 사도의 수에 가입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성령강림 이후의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성령님의 강림으로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이제 성령님의 강림 그 이후의 과제는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령강림 이후의 과제도 사람에 대한, 하나님께 대한 과제로 나누어 봅니다. 성령강림 이후의 과제를 다시 묵상하고 성령강림 이후의 과제를 잘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사람들을 향한 아름다운 삶입니다.
성령강림은 다른 사람을 향한 우리의 삶이 변화되게 합니다. 삶의 변화 첫째는 성령님의 은혜로 사람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게 합니다. 성경은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라고 합니다. 이전에 제자들은 서로 질투하였습니다. 서로 더 높아지려고 하였습니다. 불과 얼마 전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에 서로 자리다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서로 높아지라고, 내가 낮아지겠다고, 우리 모두 함께 살자고, “우리가 남이가”하면서 하나 됨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변화는 성도들은 이 삶을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1-2에는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의 인간관계인 권면, 위로, 교제, 긍휼, 자비를 베푸는 일을 할 때의 자세를 이렇게 말합니다. “같은 마음을 품어라”, “하나가 되라”.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함께 있고, 마음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가 되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변화된 삶입니다.
베토벤은 사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대화를 나누기 힘들어졌습니다. 이 일 때문에 그는 우울증이 생기고, 사람을 기피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친구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과 충격 속에서 방문하였습니다. 말로 위로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는 방에 있는 피아노를 발견하였습니다. 30분간 그는 감동적인 연주를 하였습니다. 그의 연주는 어떤 사람의 방문보다 더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동정(compassion)이란 말은 함께(com) 고통당하는 것(passion)을 의미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과 같이 되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위로입니다. 로마서 12:15에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합니다. 이것이 최고의 교제이며 최고의 일치입니다.
시애틀 장애인경기 때의 일입니다. 아홉 명의 선수가 100미터 달리기를 합니다. 출발선에서 한 소년이 발이 걸려 넘어져 울기 시작했습니다. 8명의 선수가 뛰려다 멈추고 서로 팔짱을 끼고 함께 걷기 시작했습니다. 경기장의 관중들은 모두 기립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습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감동이었습니다. 정상인 같았으면 서로 먼저 가려고 뛰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의지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인생이란 결코 혼자서가 아니라 서로 협력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라는 말을 잘 보세요. 빈발효과(Frequency Effect)라는 것이 있습니다. 빈발하게 발생되는 정보는 앞의 정보를 지운다는 것입니다. 즉 약속을 지키지 못해 불신감을 주었다면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빈번하게 제공하여 안 좋았던 앞의 정보를 지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날마다” 모였습니다. 빈번하게 모였습니다. 매일 모였습니다. 이런 빈번한 모임은 베드로의 배신, 제자들의 비겁 등을 다 지웠습니다. 날마다 모임으로 과거의 옳지 않았던 기억들을 다 지웠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가 되고 뭉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둘째는 성령님의 은혜는 물질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게 합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라고 합니다. 세상의 다툼을 보세요. 거의 물질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 다툼입니다. 물질은 형제도 서로 싸우게 하고, 모자간에도 소송하게 하고, 친구 간에도 원수가 되게 하는 요물입니다.
잠언 17:1에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한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경고합니다. 복음서의 말씀 가운데 6분의 1은 돈과 그 위험에 대한 경고라는 사실에서 탐욕의 마력이 드러납니다. 물질 추구는 상대방과 거리감을 야기하며 질투와 경쟁, 이기심을 발전시킵니다.
영성가 리처드 포스터는 “물질이란 어떤 면에서 화폐화된 인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물질에 대한 태도는 인격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성령강림 후의 제자들의 물질에 대한 태도는 세상을 초월한 무한 인격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자본주의의 원리는 ‘네가 일함으로 나는 논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놀고먹는 사람’과 ‘먹기 위해 일하는 사람’과 ‘일해도 먹기 어려운 사람’의 세 부류로 나뉜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을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가장 좋은 나라이지만 가장 차별이 심하고, 가장 불공평하고, 가장 상대적 빈곤자가 많은 곳입니다. 미국의 100대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의 연봉이 70년도에는 일반인의 39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999년에 이르러 1,046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자본주의가 허점이 많습니까?
2세기의 작가인 루키아노스는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필요를 도와주는 열정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종교의 창시자 예수는 그들이 서로 형제라는 사실을 그들의 머리에 각인시켜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교회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 삶입니다.
그들의 삶은 사람에게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아름다운 삶이었습니다. 첫째는 성령님의 은혜는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게 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전에 모이는 것은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모이면 은혜 받습니다. 지난 번 우리교회의 특별새벽기도회도 보세요. 모이니까 은혜는 절로 내려옵니다. 모이지 않으면 은혜가 떠나갑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고 은혜 받겠다고 생각합니까? 그렇게는 안 됩니다.
성령강림은 성경에 두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예루살렘에서 오순절에 강림한 사건입니다. 다른 한번은 가이사랴에서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학자들은 ‘가이샤라의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두 번의 성령님의 강림은 다 모여 있을 때에 오신 사건입니다. 모임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무엘상 7장에는 사무엘이 온 백성을 미스바로 모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모여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자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승리케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0:25에는 요즘 우리의 모습을 미리 보듯 이렇게 말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잘 모입시다. 모이자고 하면 그냥 모이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아무리 강하게 말해도 안 모이는 교회는 죽어가는 교회입니다. 교회 오는 게 즐겁고, 모이는 것이 덕 되고, 함께 하면 은혜 받고, 모이면 배우는 게 많고, 그냥 좋아야 합니다.
둘째는 성령님의 은혜는 하나님을 찬미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라고 성경은 적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18을 보세요.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 다음에 권하는 말씀을 잘 들어보세요. 19절입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입니다. 성령 충만은 찬미로 이어집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을 찬미가 넘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찬양이 끊이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하는 것도 좋지만 찬양은 소리 내어 하는 것입니다.
찬송소리 큰 교회가 은혜롭고 재미있는 교회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송 소리가 적을 수 있습니다. 찬송도 소리 내지 않고 묵상할 수 있습니다. 찬송소리가 없어도 신앙은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찬송소리가 적으면 신앙은 있지만 감격이 없습니다. 우리의 찬송소리가 우렁차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간 어느 신문 해외칼럼에 ‘노동의 종말’의 저자 제러미 리프킨의 칼럼이 실렸습니다. 새 교황에 대한 관심을 적었습니다. 왜 하필 교황이 미국인이 아닌 독일인인가 하는 글입니다. 미국이 유럽연합보다 더 기독교인이 많습니다. 신을 두려워하는 미국, 신이 사라진 유럽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런데 미국보다 유럽이 더 기독교 가르침에 충실하다는 것입니다. 유럽인은 용서와 회개를 명문화하였습니다. 유럽연합 25개국은 이미 사형제도가 없습니다. 미국은 38개주가 아직도 사형제도가 남아 있습니다. 지난 29년간 800명 이상이 사형을 당했습니다. 미국은 전쟁 국가입니다. 미국의 국방 예산은 국방예산 상위 10개국을 합친 것보다 많습니다. 전 세계 국방비 지출의 40%를 미국이 차지합니다. 유럽은 평화 유지를 위하여 지난 50년간 전 세계 분쟁지역의 평화유지군의 80%가 유럽연합이 담당했습니다. 재건비의 70%을 유럽이 담당했습니다. 교회 참석률이 선진국에서 미국이 가장 높습니다. 그러나 권총이 2억 5000만정이 유통되고 있습니다. 아동 자살률이 세계 최고입니다. 그가 결론적으로 말하는 것은 교회 간다고 성경말씀을 실천한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실천적 신앙이 참 신앙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삶은 머리 속에 있는 신앙이 아니라 실천하는 신앙의 삶이었습니다.
결 론
성경은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라고 합니다. 그들의 힘 때문에 두려워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그리스도적 삶 때문에 두렵게 한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참 무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1871년 초에 기독교를 믿지 않았던 신문기자 헨리 스탠리가 리빙스턴을 찾아낼 목적으로 아프리카 밀림으로 갔습니다. 그는 리빙스턴을 만나 10달 동안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함께 지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당시에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무신론자에 버금가는 편견 가지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났을 무렵 나는 그 노인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생활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가 얼마나 자기 일을 열심히 감당하는지 지켜보던 나는 결국 그 때문 회심하게 되었다. 비록 그는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중에 스탠리는 또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를 회심시킨 것은 리빙스턴의 설교가 아닌 그의 삶이었다.”
존 칼빈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첫째 의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이게 하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성령강림으로 뭉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보이게 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친밀한 자세와 하나님께 대한 열정적 마음이 세상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게 했습니다. 세상이 떨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힘 있는 공동체 생활은 모든 사람에게 모범이 됩니다.
처음 성도들의 모습과 같은 우리의 모습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을 떨게 하는 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