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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보통학교의 항일운동사
34회 졸업생 이 기 화(고창지역학 연구소장)
우리 민족의 학생 운동사는 일제강점기의 36년 동안 일제가 식민지배 확립을 위해 한국의 主体的인 능력과 근대화의 진전을 정치적으로 봉쇄해버린데 대한 반발로 우리 학생들은 항일독립으로 무장되어 갔다. 항일독립은 우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조국의 미래를 열망하는 내일에의 주인공으로서 투철한 독립의식과 역사 앞에 당당한 행동이었다. 여기에 우리 고창 지역의 학생 운동사를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자라나는 2세들 앞에 귀감을 세우고자 한다.
1. 3·1 독립만세운동
고창 학생 항일운동사의 효시는 1917년 일본 도쿄에 있는 「메이지 대학」에 유학한 근촌 백관수(성내면 생근리 태생) 선생의 애국 충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고창 출신 유학생들은 김성수(와세다 대학), 백관수(명치대), 김수학(경도제국대학), 김연수(경도제대), 백남규(도쿄 물리대), 백남운(도쿄 상대) 등이었다. 이들은 당시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선언을 고창의 청년 지도자들에게 연결해줌으로써 비록 산간벽지나 다름없었지만 웬만한 지역보다 앞서 갔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고창지역은 3·1 독립만세 운동에도 민감한 지역이 되었다. 그 당시 고창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 운동에 앞장선 이면에는 숨은 후원자가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그 한 분은 평양에서 민족운동에 가담했던 고창보통학교 김병일(金炳一, 평양사범학교 출신, 23세)교사와 한약방을 경영하는 李弘玉의 아들 이성협(경성고보 3학년 유학생, 26세)이 있었다. 때마침 서울 시내에서 3·1운동 만세학생 주동자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의 체포령을 피해 고창에서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고창지역독립만세 운동의 주역의 일원으로 고창보통학교학생 만세 운동의 동원 책임을 맡은 열혈 청년이 되었다. 이 두 분은 김승옥씨가 주도하는 고창의 기미년 독립만세 운동에 주역의 일원으로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 구금되어 각각 50대씩의 태형(笞刑)을 맞고 가까스로 풀려났다. 고창의 3·1 만세 운동은 일본의 독살설로 급서하게 된 고종황제의 인산일(3월 3일)에 고창 청년회의 은규선, 김승옥과 지도자의 밀명으로 파견된 박동차씨가 파고다 공원 현장에서 입수한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에 실린 조선독립가, 선전문 등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것을 고창면사무소에서 등사판으로 밤마다 복사한 자료를 가지고, 고창 장날 3월 19일 10시부터 시장에서 학생들과 청년회원들이 시위운동을 거행하기로 하였으나 새벽에 비밀이 누설되어 경찰에게 등사물을 압수당했다. 다행히도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양심 있는 한국인이어서 통사정으로 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적발한 경찰관의 변심이 우려되어 장날이 아닌 3월 21일자로 변경하여 거사키로 하였다. 그 날 오전 11시에 고창 보통학생 100여명이 남산에 자연생태교육을 간 것으로 위장하고 모양성의 북치광장에 모였다. 이것을 기화로 뒤따라온 고창 청년회 임원들과 같이 시내를 굽어볼 수 있는 북치 주변에서 손에손에 태극기를 들고 있다가, 김승옥씨의 독립선언문 낭독이 끝나자 군중들은 대한 독립 만세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그리고 오동균과 김창규 행동대원이 앞장서서 경찰서를 피해 동부리에 있는 시가지와 골목길을 숨어 다니며 선전문을 뿌리고, 오동균씨가 선창하는 구호를 제창하면서 사람들은 시내로 파고들었다. 이에 깜짝 놀란 경찰들이 뒤늦게 쫓아와서 군중들을 체포하였다. 고창교를 기점으로 양쪽 천변에 길게 늘어서서 힘차게 만세 시위를 계속하자, 당시 니시야마 사진사가 나와서 시위대들의 사이를 누비며 사진을 찍다가 군중들에게 밟혀 달아나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의 강력한 탄압에 눌려 강제 해산을 했다. 현장에서 앞장섰던 청년회원 김명만(金明萬 19세)이 맨 먼저 붙잡히고 이어 주동자로 김승옥(金升玉 31세), 오동균(吳東均 24세), 김창규(金昌奎 26세), 곽기선(郭琪宣 17세), 김병일(金炳一 23세), 김응권(金應權 33세), 박철근(朴喆根 25세), 박영근(朴永根 25세), 홍종규(洪鐘奎 18세), 신영택(申永澤 17세), 이성협(李成浹 26세) 유화종(柳化鐘 17세), 윤병훈(尹炳勳 20세) 등이 체포 구금당하였다. 구금된 주동자 중에서 김승옥 대표(1년 6개월 언도)와 행동대원 오동균(10월 언도), 김창규(6월 언도), 김창규(6월 언도) 등은 실형되었고 그 이외에는 수 십대씩의 태형(笞刑)을 당하고 방면되었다. 고창보통학교의 학생 대표는 곽기선, 홍종규, 신영택, 유화종 등이었다.
2. 6·10 만세운동
6·10 만세운동의 전개는 그 투쟁실적의 주체가 전국의 각급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그 지원책은 민족 전체의 정신적 참여로 이루어진 것으로 말할 수 있다. 3·1 독립만세 이후 학생들의 사회참여 방법에 있어서 질적인 변화를 거듭하였다는 것은 당시 전반적인 사회사조와의 관계 진전을 통하여 가능하였다. 3·1 독립항쟁이 비록 실패하였으나 뜻을 가진 학생은 얼마 뒤에 청년운동, 계몽운동, 노동운동 등 사회활동과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민족 전체의 의사를 학생의 자생력으로 집약하여 대변할 만큼 학생 주도의 민족 항쟁으로 승화되었다. 1926년 6월 10일 당시 순종황제의 인산일(因山日)에 고창 지역 봉도식(奉悼式)은 남산(南山, 모양성 - 북치 광장)에서 거행되었는데, 봉도식을 마친 고창고보생과 고창보통학교 생도 2백여 명은 북치 광장과 서북치 광장으로 나뉘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때 고창고보의 3 · 4학년은 진학 준비 관계로 불참하였고, 1· 2학년생 백 여 명은 2학년 학생회장인 강석영(康錫榮)의 리더쉽과 이에 연계된 고창보통학교 학생회장 조관승(曺觀承, 고창읍 월암리 거주, 6학년, 23세), 부회장 엄동섭(嚴東燮, 고창읍 읍내리, 5학년, 18세), 김소자(金小者, 고창읍 읍내리, 17세) 등과 같이 봉도식을 마친 후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일본 경찰이 모양성 입구를 봉쇄하고 학생들을 검거하였으나, 지역 유지들의 선처권유를 받아드려서, 고보생 총 지휘를 맡은 강석영과 보통학교 학생 대표 조관승, 엄동섭, 김소자 등만 구속되어 엄중한 문초를 받았다. 이에 시마모도(島本) 보통학교 교장은 6월 16일 날 전라북도 학무국에 소환되어서 엄중한 경고 조치를 받은 후 6월 18일 날 이들 학생 대표들을 모두 퇴학시켰다.
3. 일본인 악덕 교사 배척과 맹휴(盟休)
고창보통학교 학부형들은 1924년 2월 11일 날 고창청년회관에 모여서 2학년 담임교사 구와바라(桑原篤信)가 성송면 암치학교에서 부임해온지 1개월도 안되어 온갖 부당행위에 대해서 의논을 하였다. 욕하기, 체벌행위, 술집에서 공술 마시기 등 부당행위와 행동이 많을뿐더러, 2월 1일 같은 매우 추운 날씨인데도 2 · 3학년 학생들을 방과 후에 운동장에 집합시켜 운동을 억지로 시켰다. 이에 견디지 못한 학생들은 잠시 언 몸을 녹이기 위해 숙직실 아궁이나 교실에 들어가서 난로에다가 불을 피우고 불을 쬐고 있었다. 이것을 구와바라 교사는 와서 보고 교칙 위반이라면서 학생들을 마구 구타하였다. 이에 놀란 학생들은 겁을 먹고 허둥지둥 피해 달아나다 한 학생이 신발을 벗어놓은 체 달아났었는데, 구와바라 교사가 그 학생의 신발을 난로 속에 불태워 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고보생들은 포악한 구와바라 교사의 수업을 거부하는 동맹 휴학을 일으켰다. 여기에 동조하여 2학년의 다른 반(仁組·진구미, 용조<勇組· 유구미)들이 나서는 등 전교생의 맹휴가 전개된 것이다. 이에 학부형총회까지 나서서 구와바라 교사의 축출 운동에 가담하자, 마침내 구와바라 교사는 3월 1일자로 흥덕보통학교로 전근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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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창 청년 독립운동사를 접하니 그 암흑 속에서도 찬란히 빛을 발하는 젊음의 기개가 돋보이고 고창의 빛나는 독립운동 역사가 보입니다.
그러나 말년 변절 친일역사의 주인공이 된 김성수, 김연수 등 면면을 보니 부끄럽게 세상을 살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창 들머리에 있는 백관수선생 동상과 함께 있는 김성수님 동상이 고창의 상징인물로 그자리에 그대로 있어야 할 것인가를 좀 깊이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