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디 유령
송승언
최근 발매된 요시마츠 고시로의 대표 작품 선집 〈젠타이〉를 들었다. 요시마츠는 일본의 아웃사이더 음악가로, 오랜 기간 작업하며 방대한 분량의 작품을 남겼다. 본명으로, 때로는 가명으로, 또는 친구들의 작업을 위한 작·편곡자로. 〈젠타이〉는 그중 1980년부터 85년까지 발표된 약 40편의 음반 중 아홉 편을 가려, 삼 단 볼륨 구성으로 여섯 장의 시디에 담고 있다.
나는 그중 첫 번째 볼륨의 실물 음반을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첫 볼륨은 〈스피어리컬 보야지〉(Spherical Voyage, 1982), 〈스트로베리 시크릿〉(Strawberry Secret), 〈세피아 르네상스〉(Sepia Renaissance, 1983) 세 음반을 다시 두 장의 시디에 모은 것으로, 얼마간은 실험적인 록에 가까운 것부터 목가적인 성향이 짙은 전자 음악까지 다양하게 오간다. 장르 분류로만 따지면 세 모두 다를 텐데도 불구하고 소리의 결과 감수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터라, 듣는 내내 자신이 딛고 있는 땅-근원을 가슴속 깊은 곳에 품고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하늘-실험으로만 예감할 수 있는 미지를 향해 열려 있는 청년 요시마츠와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세피아 르네상스〉에 응축되어 있는 목가적 감수성이 작금의 내 지향점과 공명하는 데가 적잖다고 느끼기도 했다.
몇 주간의 기다림 끝에 영국에서부터 〈젠타이〉가 도착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시디를 시디플레이어에 넣었다. 이미 들어 알고 있으니, 못 들어본 음악을 접할 때의 기대감 같은 것은 전혀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으니까. 오늘날 실물 음반을 듣는 일은 데이터로 앞서 알고 있는 대상이 사물로 구현되었음을 눈으로 확인하는 일에서 오는 기쁨에 더 가깝다. 즉 요즈음 엘피나 시디, 테이프 등으로 음악 듣기에는 어느 정도 물신적인 속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이 ‘사물에 깃들어 있다’라고 생각하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것을 ‘내가 소유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점에서도 그렇다.
어쨌든 이제 음악이 들릴 것이다. 들려야 하는데. 안 들린다. 왜?
시디플레이어의 문제일 리는 없다. 구입한 지 오래되지 않은 제품이니까. 혹시나 싶어 다른 음반들을 재생시켜 봤는데 잘 나왔다. 〈젠타이〉만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피시에 부착된 시디 재생 장치에 시디를 넣어봤다. 피시는 그 시디를 내용물이 없는 시디라고 인식했다.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음반사에 이메일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젠타이〉를 구입했는데요. 제 시디플레이어에서 재생이 되지 않습니다. 몇 주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슬프네요. 혹시나 싶어 제가 가진 다른 음반들을 재생시켜 봤지만 모두 이상 없이 작동합니다. 제 피시에 넣어보니 빈 디스크라고 나옵니다. 저는 살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 겪어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요?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답장은 꽤 빠르게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귀하가 겪은 일에 유감을 표합니다. 내일 새로운 음반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저희로서도 당혹스럽습니다. 저희의 모든 공정은 기계로 진행되고 있으며, 각 단계마다 하나라도 통과되지 않으면 진행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내용 확인을 위해 시디의 뒷면을 찍은 사진을 보내주시겠습니까?”
나는 재차 답장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여러 장의 사진을 보냅니다. 앞선 두 장의 사진은 각기 다른 음반을 시디플레이어에 넣고 재생시킨 사진입니다. 보시는 대로 잘 재생됩니다. 세 번째 사진은 〈젠타이〉를 넣고 재생시킨 사진입니다. 보시는 대로 시디플레이어 상태창에 ‘시디 없음’이라는 문구가 떠 있습니다. 네 번째 사진은 요청하신 대로 시디 뒷면을 찍은 사진입니다.”
한 주가 조금 더 지난 뒤에 새로운 〈젠타이〉가 도착했다. 시디를 시디플레이어에 넣고 재생했다. 재생되지 않았다. 똑같은 문제가 두 번 발생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뭔가 다른 문제가 있었다. 내가 알 수 없는 문제가.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채 피시에 부착된 시디 재생 장치에 시디를 넣어봤다. 이번에는 시디 재생 장치가 고장났다. 지금까지 멀쩡했던 시디 재생 장치가 갑자기 고장이라니. 〈젠타이〉가 아닌 다른 시디를 넣어봐도 인식하지 못했다. 일단은 운이 나쁘게도 때마침 재생 장치에 부착된 렌즈가 망가졌으리라고 추측할 수밖에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건 뭔가 말이 되지 않았다.
나는 시디를 꺼내어 그것의 한가운데에 난 홈에 손가락을 끼우고 표면과 배면을 살펴봤다. 겉보기로는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 없는 시디. 여러 빛깔로 아롱진 뒷면에서 흠집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시디. 그러나 시디플레이어의 렌즈-눈은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없고, 자신이 들어간 다른 재생 장치-집은 망가뜨리고 나온 시디. 이것이 망령 들린 시디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나는 여전히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른다. 적지 않은 시간을 쏟아온 음악 감상이라는 취미를 이런 방식으로 실패한 경험은 처음이다. 이 시디들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내게는 없다. 이 시디들이 내가 모르는 특별한 기기로 재생하면 음악을 들려줄 것이라는 확신 또한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 이 시디들은 더 이상 ‘분명히’ 음악이 담긴 것들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무엇’이 담겨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는 물건이다. 그렇다고 이것들을 버릴 수도 없다.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한 것들이고, 기쁨이 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들이다. 적어도 재생하기 직전까지는 그랬다.
나는 재생할 수 없는, 아니, 재생되기를 거부하고 있는 그것들을 자세히 본다. 시디 표면과 케이스에 인쇄된 볼품 없는 해상도의 이미지. 빛바랜 듯한 세피아색 종이에는 원형 반사경에 비친 두 사람-아마도 남자들을 찍은 사진이 인쇄되어 있다.
원형 반사경이 서 있는 곳은 어디일까. 반사경 너머로 철조망 얹은 울타리가 보인다. 주변에는 나무들. 잎의 모양으로 보아 아마도 활엽수다. 사진만으로 종을 특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들과 함께 반사경에 비친 풍경 또한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눈 내린 산 같다. 그렇다면 시간적으로 완전한 겨울은 아닐 수도 있다. 아직 활엽수의 잎이 다 떨어지지 않았지만, 높은 곳에는 첫눈이 내리고 쌓인 초겨울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 사진을 촬영한 이는 반사경에 비친 이들과 다른 곳, 약간 측면에서 전체를 담아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게 해뒀다. 흔히 반사경을 촬영하는 이들이 자화상을 담아낸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이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숨기고 싶어 하는 태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음반 디자인은 DD.레코즈에서 1980년대에 발매했던 요시마츠의 카세트테이프들과 결을 같이한다. 조악하고 볼품없으며, 그렇기에 개인의 취향에 따라 아름답게 느껴질 수도 있고, 어쩌면 조금 음산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것들. 그리고, 열화된 이미지를 사용한 원본을 충실히 따르고자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이 시대의 물건’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그 복각이라는 방법론.
나는 재생할 수 없는 그것들을 시디 진열장에 두고서 시디와 함께 구입한 디지털 음반을 피시로 재생시킨다. 운무처럼 자욱한 노이즈가 스피커를 통해 내 방으로 퍼져 나간다. 주로 원본이 카세트테이프로만 남아 있는 음원을 디지털 파일로 옮겼을 때 들리는 매체의 잔상이다. 원본은 그 수가 아주 적어, 수집가들 사이에서 고가에 거래된다고 한다. 대다수의 청자들은 원본을 경험할 수 없다. 어쩌면 원본을 가진 사람조차도(그것은 최대한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야 할 유물이기에). 나 같은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것은 원음 그 자체가 아닌, 해묵은 원음이 복제되는 과정에서 새로 탄생했을 그 매체의 잡음들-소리의 그림자를 거느린 다른 음악이다. 그것은 포트랙 녹음기를 통해 카세트테이프로 녹음된 열화된 것의 열화이며, 소리 유령이다. 그 소리 유령이 지금 내 시디 안에 잠들어 있다. 들리는 것으로 드러나기를 거부하면서.